유라시아 견문 3 -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라시아 견문 3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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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비아의 감각으로, 유라시아의 시각으로 서구사를 다시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변방사를 보편사로 추켰던 ‘가짜 사관 Fake History‘을 거두고, 서양사와 유라비아사의 지평으로 서구사를 재조망해야 할 것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고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적폐 청산의 일환이다.(p38)

「유라시아 견문 3」은 포르투갈의 리스본부터 중국 심양까지 아우르는 「유라시아 견문」시리즈의 마지막이다. 저자는 유라시아 대륙을 다룬 이번 시리즈 중 아시아에서는 새로운 가능성 발견, 유럽에 대해서는 지난 시대에 반성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길을 주문한다. 그래서, 주로 유럽을 배경으로 한 이 책에서는 새로운 역사 해석과 새로운 사상이 유난히 강조된다.

교황은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엘리트 프로젝트라고 여겼다. 한쪽은 ‘깨어 있는 시민‘을 양성하고, 다른 쪽은 ‘각성된 노동계급‘을 배양코자 한다. 어느 쪽도 민초들의 삶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오래된 지혜를 신뢰하지 않는다. 유물론에 바탕하고 있음도 공통적이다. 그래서 인간을 물질적으로만 이해한다.(p67)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진단에 확증을 갖게 된 것이 EU 활동을 통해서 입니다. 만약 유럽의회가 자유민주주의가 도달한 현시점 최고의 기구라고 한다면, 자유민주주의는 바람직한 이념도 아니고 아름다운 체제도 아닙니다. 불행히도, 그리고 매우 불쾌하게도 공산주의와 너무너무 닮아 있습니다.(p291)

저자는 교황 프란치시코와 크로아티아의 스레츠코 호르바트의 입을 빌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에둘러 비판한다. 서로 대립하는 두 사상의 근본에는 물질주의가 자리잡기에 현대의 문제를 타파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있을까. 저자는 독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당의 보수주의 속에서 일단의 가능성을 본다.

(독일의 자부심) 근저에는 기독교 민주주의가 있다.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의 독일을 일군 정당,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은 기독교민주연합이다. 기민당은 그저 보수정당이 아니다. 20세기의 잣대, 좌/우로 단정 지을 수가 없다.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결합, 고전 문명과 현대 정치의 융합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저자가 말하는 바는 한 문명 내에서의 개혁이 아니다. 제약된 공간에서 시간의 융합이 아닌 ‘유라시아‘와 ‘과거 - 현재 - 미래‘의 시공간의 융합을 통해서만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 태어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미 유라시아는 이런 공동작업의 역사가 있다.

유럽의 계몽주의 또한 자가발전, 내재적으로 발전했던 것이 아니다. 동/서 문물 교류, 융복합과 통섭의 소산이었다. 마치 뉴턴이 이슬람 문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근대 과학의 법칙을 세운 것처럼, 칸트와 헤겔은 중화문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근대 철학의 원칙을 이룬 것이다. 유라비아와 유라시아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교학상장의 빛나는 결정체였다.(p102)

그러나, 저자가 말한 융합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양 극단에서 배척받는 제3의 길은 과거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길을 가야하는가. 가야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음은 저자를 통해 던져졌으니,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 찾아야할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생소하기는 하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알지못했던 신세계를 믿고 싶다. 그렇지만, ‘확신‘ 전에 ‘확인‘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공부하려는 노력이 따라야할 것이고, 이는 온전히 각자의 몫이 될 것이다...

‘유고 공습‘의 본질이 무엇이었던가. 애초 질문에 답이 담겨 있었다. 세르비아는 방편이었을 뿐이다. 밀로셰비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목적은 ‘유고‘에 있었다. 서구식 자본주의도 아니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실험을 추진했던 유고를 지워버리려고 했다.(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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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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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적 상태, 곧 세상에 대한 흐릿한 시각을 말할 뿐인 거시적 상태는, 에너지는 보존하면서 이 에너지가 결국에는 시간을 생성하는 하나의 혼합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p144)... 하나의 거시적 상태가 시간의 어떤 특성들을 지닌 특별한 변수를 선택하는 것이다.(p145)

거시적 상태 ☞ 에너지 ☞ 시간

카를로 로벨리는「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시간구분(과거, 현재, 미래)이 본질적인 차이가 없고 단지 에너지의 흐름(엔트로피)이 시간을 결정짓는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엔트로피의 증감에 따라 시간은 정방향으로도, 역방향으로도 흐를 수 있게 된다. 물처럼.

시간의 방향성은 실제적이지만 관점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와 관련돼‘있고, 우리의 열적 시간과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이 열적 시간을 간단히 ‘시간‘이라고 부르는데, 이 변수 안에서 사물들이 순서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p203)... 우리는 서로 다른 고유의 시간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며, 시간의 속도 차이도 식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아닌, 우리가 경험한 범세계적이고 순서가 있는 시간, 이 단일한 시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p203)

물리학적인 시간은 아마도 그렇게 변화무쌍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식과 결합된 시간은 인과관계라는 접착제에 의해 응고되어 기억 속에 저장되고, 우리는 이 기억에서 시간의 의미를 찾는다. 마치, 유약을 바르고 열에 의해 구워진 도자기는 깨진 후에도 흙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개인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 시간은 명확한 방향성을 부여받고 엔트로피의 법칙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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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8-13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트로피 때문에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 때문에 인간이 시간을 느낀다는 것으로 전 이해했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ㅠ
결국 인간은 아직 시간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어떠셨어요?^^

겨울호랑이 2020-08-14 07:35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만, 책을 읽으면서 ‘시간‘의 좌표에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좌표에 인간이 시간을 설정한 것은 아닌가 여겨졌습니다. 추가적으로 ‘이벤트 호라이즌 event horizon‘의 의미를 더 잘 느낀 경험이었습니다. 시간의 의미에 대해서는 3차원 세계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수단으로 시간은 객관적으로는 허구일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만... 부족한 제 생각일 따름입니다^^:)

초딩 2020-08-13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떨림과 울림 읽고 있는데 양자역학과 인트로피의 이야기네요~ 찜합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0-08-13 20:01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초딩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초딩 2020-08-13 22:42   좋아요 1 | URL
모든 순간의 물리학의 카를로 로벨리 였군요~ 표지가 유사했네요~ 방금 교보 문닫기 3분전에 직원분에게 물어서 샀어요 ㅎㅎㅎ

겨울호랑이 2020-08-14 07:31   좋아요 1 | URL
^^:) 축하드립니다. 저는 초딩님의 책사랑은 못 따를 듯 합니다. 기분좋게 하루 마무리하셨겠네요. 오늘도 활기찬 하루 여시기 바랍니다.

초딩 2020-08-14 09:39   좋아요 1 | URL
:-) 박진감 넘쳤어요 ㅎㅎ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여
 
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유라시아 견문 1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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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중국으로, 서구에서 동방으로, 북에서 남으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가 않다. 물론 권력이 이동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머지않아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아시아가 구미를 능가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다만 중국이 미국을 흉내 내고, 동방이 서방을 복제하고, 남이 북을 답습하면 진정한 변화라고 하기가 힘들다.(p106)

「유라시아 견문 1」에서 저자는 태국 치앙라이에서 말레이시아의 할랄 스트리트에 이르는 길을 여행하면서 변화하는 세계를 체감하고 해석한다. 이를 통해 저자가 바라본 변화의 핵심은 중국에 의한 새로운 세계 권력 구도 재편이다.

지난 200년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과 미국은 국가들과 세력들간의 대립을 부추겨 어부지리를 얻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았다... 한반도의 분단 또한 그 일환이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확립하고 재생산하는 핵심 기제였다. 이러한 패권 전략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것이 소위 ‘지정학 Geo-Politics‘다. 그리고 이 지정학은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유명한 비유처럼, 유라시아를 분할하고 분단하는 것을 핵심 교리로 삼는다.(p234)

저자는 책에서 중국 주도의 새질서에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중국은 이전의 패권국이 아니라, 과거 9세기 ‘성당‘시대를 재현할 실력과 신유학 사상을 갖춘 대국이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중국과 인도가 손잡고 유라시아를 선도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책임대국‘을 표방하는 중국은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20세기형 ‘강대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무력에 의존하여 패도를 행사하는 패권국이 아니라, ‘왕도의 근대화‘를 도모한다. 20세기의 대장정이 21세기의 일대일로와 접속하는 연결고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p407)

작금의 길항은 미 - 중간의 패권 경쟁이 아니다. 패도를 부리는 세력과 왕도를 소망하는 세력 간의 일합이 있을 뿐이다. 반동파와 반전파의 길항이다. 구체제와 신상태의 대결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충돌이다.(p128)

나는 친디아(China + India)의 시너지 효과에 낙관적인 편이다. 모자란 것은 보태고, 남는 것은 나눌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중국은 자본이 넘쳐나지만 노동력이 줄고 있다. 인도는 자본은 부족한데 인력은 넉넉하다. 상호보완할 수 있다.(p90)

「유라시아 견문 1」은 우리에게 생소한 유라시아의 구석구석을 소개한다. 책에 소개된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생소하여, 그동안 이들 지역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성과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중국이 21세기를 이끌어갈 책임있는 대국이라고 확신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저하게 된다. 그들 문화에 뿌리깊은 ‘중화주의‘가 영화, 노래 등에 표현되는 것을 보면, 이들 역시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힘이 예전같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중국의 부상이 위기를 맞은 21세기 문명에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유라시아 견문」에서는 이를 기정사실화하지만, 우리의 고민은 다른 것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미- 중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 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유라시아 - 태평양‘ 사이의 균형자가 되어 국익을 극대화하는가에 집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위치에 섰을 때 중국문명의 잘못된 선택에도 우리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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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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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지중해 동쪽 연안에 딱 붙어 있는 십자군 국가는 북쪽, 동쪽, 남쪽 삼면이 이슬람 세계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2백년을 존속했다.... 첫 번째 이유는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의 존재다. 그들은 적은 병력이었지만 모두 정예병으로 구성되었고, 무엇보다 성지에 뼈를 묻기로 서약한 상설 전력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가 존속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소는 지금까지 말한 성채의 활용이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3


[그림] Risultati immagini per kingdom of jerusalem map(출처 : https://www.pinterest.es/pin/627126316835249902/)


 시오노 나나미 (鹽野七生, 1937 ~ )의 <십자군 이야기 2>에서는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과 주변 공국(公國)들이 살라딘(Selahaddin Eyyubi, 1138 ~ 1193)에 의해 붕되되는 시기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성지를 손에 넣은 이후 예루살렘에 대한 유럽인들의 열정이 사그라들면서, 이슬람과의 전쟁은 현지인의 몫이 된다. 이에 반해,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력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투르크 세력은 누르 앗딘(Nur al-Din, 1118 ~ 1174)과 뒤를 이은 살라딘에 의해 통합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군은 곧 소멸할 듯이 보였으나, 이들은 200백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전쟁을 이어간다. 적은 병력으로 고립된 십자군이 이와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많은 연구자들과 저자는 전투집단인 '기사단'과 '성채'의 적절한 활용이 십자군의 전투력을 극대화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렇지만, 저자는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래서 십자군이라고 하면 제1차에서 제8차까지의 원정 외에도 '종교 기사단'과 '성채'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이 경제력과 해군력을 중요하게 본 연구자는 거의 없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3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전쟁을 종교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 더 많은 욕망이 전쟁의 언저리에 자리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종교적 열정 이외 다른 욕망이 충족되자 전쟁에서 손을 뗀 '기사들'보다는 결과적으로 십자군의 방어에 기여한 제노바, 아말피,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해양력과 경제력을 더 중요하게 보고 이들을 십자군 원정의 주체로 생각한다. 

 

 나는 서구인이 저술한 십자군의 역사는 어떤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순은 그리스도교 십자군 원정의 진정한 원인을 십자가에 서약한 신앙심에서만 찾고자 한 탓에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5 


 십자가에 서약한 바를 이룬 것에 만족하며 귀국한 '십자군 전사'가 단연 많았다는 사실은, '신에 대한 서약이 이루어진 후의 성지'에 만성적인 병력 부족을 초래했다. 그 결과 에데사 백작령을 뺴앗기고 안티오키아 공작령의 방어를 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예루살렘조차 빼앗기게 된 것이다. 역사라가라면 이 점을 지적해야 할 테지만, 이걸 지적하면 그들이 지녔던 세속적인 영토욕이나 부의 축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쨋든 신에 대한 서약보다 사욕이 더 지속성이 강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아무리 그것이 인간성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5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전쟁을 '신의 전쟁'이 아닌 '인간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대의명분 대신 결과로 전쟁의 성격을 평가한다. 이렇게 본다면 압도적인 해운력(해군력)을 바탕으로 바다쪽에서의 포위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지원한 이탈리아 상인들의 행동이 더 '십자군'에 맞는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림] Siege and sack of Constantinople (1204) (출처 : http://viticodevagamundo.blogspot.com/2012/02/siege-and-sack-of-constantinople-1204.html)


  최근의 연구자들은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가 지중해 동쪽 해역의 제해권을 견지한 것이 십자군 국가의 존속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살라딘이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합한 후에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바다에 이집트 해군이 한 척도 얼씬거리지 못했을 정도이니, 베네치아와 제노바, 피사의 해군이 제해권을 견지한 공헌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교역을 통한 경제활동으로 공헌한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4


  저자의 말대로 분명 이탈리아 해양도시의 해군이 세운 공(功)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결과로 이들을 십자군의 일원 또는 주체로 봐야할까.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움직인 결과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탈리아 상인들은 십자군 전쟁 이전에도 이미 이슬람 세력과 교류하면서 공존(共存)해왔다. 그것은 이슬람 상인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이들이 정치적 선택을 했다면 그것은 경제적 이익에 맞아서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미 소아시아 지역에서 십자군 왕국을 포위하고 있는 이슬람 편에서는 굳이 보급로를 바다로 할 필요가 없다. 낙타를 타고 운반하더라도 보급은 가능하다.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의 도움이 필요없었겠지만, 포위된 십자군 입장에서는 동지중해에서의 보급이 절실하지 않았을까. 절실한 만큼 당연히 더 많은 운임과 수수료를 제시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탈리아 상인들이 십자군을 돕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누구보다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가 잘 알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경제능력은 십자군 뿐 아니라 이슬람 세력 증강에도 큰 힘이 되었다면, 이탈이아 상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 사람들은 십자군의 지배하에 들어온 거의 모든 중근동 항구도시에 자신들의 거류지를 갖고 있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공동체는 제각각이었지만, 이 거류지는 십자군 국가의 '경제특구'로서도 기능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선으로 운반해온 무기와 무구(武具)는 항구에 부려진 뒤 근처에 있는 거류지로 옮겨져 창고에 수납된다. 거류지에는 그리스도 교도 기사들만이 아니라 아랍인이나 투르크인 상인들도 그 상품을 사기 위해 모여들었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128


  이미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이야기 1>에서 당대인들이 누가 지배층이 되든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상인들 역시 십자군 전쟁을 돈벌이 수단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 또한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탈리아 상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그의 관점을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이탈리아 상인들의 역할이 강조된다면, 거기에 상응해서 그들과 거래한 이슬람 상인들 역시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요약하자면, 시오노 나나미가 제시한 십자군의 성공적인 방어 요인 중 하나인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역할은 중립적이거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방이든 서방이든 당시 사람들의 바람은 몸의 안전을 보장하고 세금을 적게 걷는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만 보장해준다면 지배자가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113


 그렇지만, 저자의 관점에 대해 비판을 이어가기는 어려운데,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태세전환 때문이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공통되는데, 특유의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는 자신에게는 무한한 상상의 자유를, 자신을 제외한 전문가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가능케 한다. 그같은 역사소설과 역사서의 경계를 적극 활용하는 저자의 모습은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러한 모습을 여러 책에서 확인하면서 초기 그의 작품에 빠져들었을 때와는 달리, 점차 저자를 멀리하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마저 소개하도록 하자.


 그러나 나는 역사 전문가가 아니다. 또한 이슬람교도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도 아니다. 그래서 애초의 동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신이 바라시는' 것의 존속에 공헌한 이탈리아 경제인에게 페이지를 할애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5


  그렇지만, <십자군 이야기 2>는 역사서가 아닌 역사 소설로 접근한다면 재밌게 잀을 수 있는 책이다. 이런 흥미로운 부분은 독자들 각자의 몫으로 넘기기로 하고, 싫은 소리 가득한 리뷰를 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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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 드소토 선생님 비룡소의 그림동화 9
윌리엄 스타이그 / 비룡소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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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 치과 의사 드소토 선생님. 작은 몸으로 입 안에 들어가 꼼꼼하게 치료해주는 선생님은 아프지 않게 치료해 주기에 항상 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하는 인기 많은 선생님입니다. 항상 환자들에게 친절한 선생님이지만, 자신을 잡아먹는 큰 동물 손님은 들이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던 어느날, 턱에 붕대를 감고 온 여우가 찾아오면서 드소토 선생님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아픈 환자를 돌봐야 하는 사명감과 자신의 안전 사이에서 드소토 선생님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치과 의사 드소토 선생님」은 초등학교 2학년 1학기 교과서에 실린 동화이면서, 이전부터 딸아이가 좋아하던 동화이기도 합니다. 치과의사 선생님이 무서운 아이들에게 아프지 않게 치료하는 선생님은 정말 최고일 것 같습니다.

요 며칠 간 저녁마다 몇 번씩 교과서와 동화책을 번갈아 읽더니, 오늘은 숙제를 해야한다면서 교과서 뒷 편의 스티커를 찾아 엄마와 아빠의 옷에 붙여 줍니다. 덕분에, 온가족이 모여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역할놀이를 하면서 드소토 선생님에게 닥친 상황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과 자신의 안전이 상충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내일 저녁에는 이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습니다. 특히, 폭우로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요즘 수고하시는 소방대원, 경찰관 등 우리의 안전을 위해 애써주시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의 마지막은 책 중에서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으로 마칠까 합니다.

˝난 일을 한 번 시작했다 하면 끝을 내는 성격이오.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하셨고.˝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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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0-08-12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군요~~
겨울호랑이님께서 한번씩 올려주시는
동화책은 예전에 딸아이와 함께 읽었던게 많아요^^
책으로 추억을 소환해 주시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0-08-12 06:4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어린이 동화책에도 고전이 있어 꾸준히 읽히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께 좋은 기억을 드릴 수 있어 좋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유부만두 2020-08-12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소토 선생님이 교과서에도 실려있군요! 반갑네요.
우리 아이도 좋아한 (저도 그렇고요) 책이었어요. 책에 실린 등장동물들 스티커가 탐나요. ^^

겨울호랑이 2020-08-12 08:10   좋아요 0 | URL
네, 예전에는 주로 전래동화 등이 교과서에 수록되었는데, 요즘은 최근에 나오는 동화들도 실리는 것 같아요. 마치 추석, 설날 등 명절시기에 TV에서 성룡 영화만 수십 년 동안 방영되다가 요즘에는 1~2년 전 작품도 상영하는 것처럼요. 또, 교과서도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놀이에 이용할 수 있도록 활용한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씀하신 스티커는 여러 번 떼었다 붙였다 가능해서 참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유부만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