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죠. 기막힌 사람입니다."릭이 이렇게 말하더니 내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게다가 영국인이지. 대필 작가는 영국인이어야 해. 그래야 그의구닥다리 유머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훌륭한 책은 모두 다르지만 형편없는 책은 완전히 똑같다. 이런일을 하면서 나쁜 책을 수도 없이 읽은 후에 내린 결론이다. 너무나 형편없어서 출간될 수도 없는 책들. 그런 점에서 볼 때 책으로출간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임에 분명하다.
"마이클의 죽음이 상황을 악화시키기는 했죠. 하지만 그게 이유는 아니에요. 그보다 권력을 잃은 게 진짜 못 말리는 문제죠. 권력을 잃고, 가만히 들어앉아 한 해 한 해 모든 걸 내주어야 하는 것 말이에요. 그동안 신문, 방송들은 그가 하거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계속 입방아를 찧어대죠. 알잖아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기분. 그는 갇힌 거예요. 우리 둘 다."그녀가 바다를 향해 무기력감을 드러냈다.집으로 돌아갈 때 그녀는 내 팔짱을 끼었다. 그러곤 이렇게 속삭였다."이봐요. 도대체 당신이 어떤 일에 끼어든 건지 알고는 있나요?"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성공한 사람들이 삶을 반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의 시선은 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그래야 성공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느꼈고, 무엇을 입었고,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기억하는 건 그들의 본성과 거리가 멀다. 결혼식 날 교회 마당의 깔끔하게 깎인 잔디 냄새나 첫 아이가 그들의 손가락을 어찌나단단히 잡고 있었는지에 대해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유령이 필요한 건 그 때문이다. 우스운 얘기지만 우린 그들을 피와 땀이 흐르는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은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 유쾌한 우주와 같다. 하지만 하나의 단어를 적는 순간 그건 지상의 소유물이 되며,한 문장을 완성하게 되면 지금까지 쓰인 모든 책들과 똑같이 완성품으로 봐야 한다. 최고가 아니라고 해서 최선을 포기할 수는 없다. 천재성이 부족하다 해도 기교는 남는다. 최소한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책으로 만들 수는 있다는 뜻이다.
만나면 좋은데 다녀오면 한동안 완전 기절이에요.
이런 마음이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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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에 다시 읽는 정세랑 소설.경주 국립 박물관 안의 멋진 도서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