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정치적 폭발의 요소들은 그 얼마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1870년에서 1871년 사이 독일로 인한 국가적 자존심의 곪아터진 상처, 그로 인해 프랑스 군대가 겪은 치욕, 공화파와 왕정파 사이의 오랜 적대감, 그리고 공화국과 교회 간의 그 못지 않은 적대감, 계속되는 경제적 불만, 특히 농업 분야의 부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길한 것은 맹렬한 반유대주의의 부상이었다. 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405


 메리 매콜리프 (Mary Mcauliffe)는 1871년부터 1929년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얽히는 과정을 3권의 책에서 담아냈다.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Deutsch-Franzosischer Krieg, 1870 ~ 1871)의 패전과 파리 코뮌(La Commune de Paris, 1871)의 상처를 안은 프랑스는 5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전쟁 부채와 알사스-로렌 지방을 넘겨주면서 큰 위기에 봉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는 국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인다.


 정부의 공공사업들이 경제에 미친 부양 효과는 실제적이기는 했지만 일시적인 것으로 1882년 초까지밖에 가지 않았다. 연초가 되자 고공 행진을 하던 상업은행 위니옹 제네랄의 도산과 함께 경제가 극적으로 주저앉았다.(p192)... 주가 폭락의 여파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특히 노동자 계층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현 사태와 뒤따르는 재정적 재난에 대해 정부를 비난했는데, 그 불만에는 좀 더 깊고 악의적인 감정도 섞여 있었으니, 사태의 책임을 유대인 은행가들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 사실 로트실트가(로스차일드가)와 다른 은행들은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자금을 빌려준 터였지만, 프랑스 전역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193 


 프랑스는 공공사업을 통한 재정부양책을 사용하면서 전후 위기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어느 사회나 이러한 경제부양정책으로부터 소외받은 이들과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이들은 있기 마련. 프랑스 내에 경제불평등 문제와 반(反)유대주의는 드레퓌스 사건( L'affaire Dreyfus, 1894 ~ 1906)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 바닥에 남아 있었다. 극심한 경제불평등은 문화를 가난한 이들로부터 분리했고, 결국 이 시기의 예술은 '가진 자'들의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고, 반유대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프랑스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벨 에포크 시기의 그림자는 짙었다. 


 졸라가 본 대로, 파리는 이전 해의 재앙들로부터 급속히 회복되고는 있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시의회에 들어간 클레망소도 그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몽마르트르의 빈민들을 위해 그의 일은 파리의 광범한 하층계급을 부단한 의제로부터 부각시켰다. 그가 특히 경각심을 느낀 것은 파리 극빈 지역 아동들이 처한 난국이었다. 그런 아동들, 특히 사생아들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 보호도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하에 번창하는 파리 사람들은 불운한 자들을 위해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다. 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74


 이 시기 프랑스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고,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지로 영광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현실은 과거와 달랐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뿐 아니라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1898)에서 보듯 해외식민지 확보 경쟁에서는 영국에게 뒤쳐졌던 것이 프랑스가 처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지도층은 당시 일어난 민족주의 감정을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등을 통해 고취하길 원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에펠 탑등을 만들어지며 파리의 모습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와 함께, 경제적 부흥 노력과 국제 행사 개최를 계기로 유럽 여러지역의 예술가들이 프랑스로 몰려들면서, 프랑스 예술계는 본격적인 부흥을 시작하는데,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1900 ~ 1918>는 이 시기를 잘 묘사한다. 


 1900년 10월 중순, 파블로 피카소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의 붐비는 새 철도역인 오르세역에 도착했다. 며칠 후 만 열아홉 살이 되는 그는 의기충천해 있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그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파리에 입장하는 얼마나 근사한 방식인가! (p15)... 이사도라에게 힘을 주는 것은 춤의 근본원리를 발견하겠다는 목표였다. 그녀는 진리가 기술보다 먼저임을 강조했다. "삶이 뿌리이고 예술은 꽃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는 10년 후 모스크바에서 나타나게 될 메소드 연기와도 다소 비슷한 것으로, 그녀는 고전발레의 인위성을 거부하고 정서적 관념들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동작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녀는 무용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발견을 하려는 참이었다._ 메리 매콜리프,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1900 ~ 1918>, p86

 

 20세기 초에는 예술 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유럽은 끝없는 발전을 이루는 듯 보였다. 독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 1955)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1905)하고, 마리 퀴리(Maria Skłodowska-Curie, 1867 ~ 1934)와 피에르 퀴리가 라듐을 발견(1898)하던 시기, 인간 이성(理性)에 대한 낙관을 가지고 벨 에포크(Belle Epoque)시대의 즐거움을 프랑스는 누렸다. 그렇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 빛나는 황금시대는 막을 내린다. 3부작의 마지막 <파리는 언제나 축제, 1918 ~ 1929>에서는 전후(戰後) 프랑스가 떠오른 신흥 대국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면서 상처를 복구했는가가 그려진다. 프랑스 프랑화(貨)의 약세, 미국 금주법 시대(禁酒法時代, Prohibition era, 1919 ~ 1933) 등을 통해 많은 미국 예술가들이 프랑스에 건너오면서 프랑스는 새로운 부흥을 꿈꾼다는 이야기로 책은 마무리된다.  마지막은 마치 동화책의 결말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안다. 1929년 불어닥친 대공황이 유럽을 다시 한 번 잿더미로 초대했다는 사실과 유럽 사회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가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을 어떻게 끝냈는지를.


 1920년대 파리는 모든 방면에서 혁신의 온상이었다. 그 시절 이 빛의 도시는 문학, 미술, 건축, 음악, 패션 등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문화적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창조성과 함께 관용의 태도가 널리 번졌고, 적어도 어던 집단에서는 그러했다.(p111)... 프랑스라는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극복했고, 비록 값비싼 - 특히 인명에서는 - 대가를 치른 승리였으나 1929년에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번영을 즐기며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_ 메리 매콜리프, <파리는 언제나 축제, 1918 ~ 1929>, p421


 이처럼 메리 매콜리프의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벨 에포크 시대를 여러 인물들의 교차 편집을 통해 잘 묘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가들의 삶과 함께 그들과 분리할 수 없는 시대상을 볼 수 있다. 비록, 작품, 작가를 깊이있게 묘사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은 이 시리즈가 가진 장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는 결코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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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2-15 2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프랑스의 역사를 다룬 박물관을 관람한 기분이에요. 벨 에포크 시대에 대해서는 막연히 낭만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마냥 좋은 시절은 아니었군요…

겨울호랑이 2020-12-15 20:54   좋아요 1 | URL
파이버님의 말씀처럼 많은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크게 발전한 시기, 산업화의 혜택으로 문화가 부흥한 시기로 인식된 벨 에포크 시대가 누군가에겐 깊은 고난의 행군시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어쩌면 소수가 행복한 시기보다 다수가 평온한 시기가 더 좋은 시절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파이버님 감사합니다.^^:)

prothoevero 2020-12-16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은 책에 추가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12-16 13:56   좋아요 0 | URL
즐거운 독서 되세요, prothoevero님 감사합니다.^^:)

2020-12-22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3 0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2-25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불전쟁에서 참담한 패전...
그리고 이은 파리 코뮌의 실패

그런 시절을 뒤로 하고 벨에포크
시절이 왔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20-12-25 19:17   좋아요 0 | URL
예나 지금이나 어려움은 힘 없는 이들에게서 행복과 경제력을 빼앗아 가진 자에게 나누어주는 불평등의 기폭제가 되는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벨에포크 시대는 말 그대로 그들만의 빛나는 시대였겠지요... 다만, 그런 불안정한 시대는 사상누각에 불과함을 역사는 잘 보여주지 않나 여겨집니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깊이읽기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6
찰스 디킨스 지음, 마이클 패트릭 히언 엮음, 윤혜준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어둠의 시간이 가장 길고, 빛의 시간이 가장 짧은 시기인 동지(冬至) 즈음에 있는 크리스마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추운 겨울에 사람들이 따뜻함을 이 시기에 찾고자 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코로나 19 3차 대유행의 위기상황 속에서 더 간절하게 좋은 절기로서 크리스마스를 바라게 된다...

"저는 크리스마스 철은, 늘 좋은 절기라고 생각했어요. 분명히, 친절, 용서, 나눔, 즐거움의 절기이고, 1년 긴 시간 중에서 남녀 모두 꽉꽉 닫힌 마음들을 자유롭게 열어놓겠다고 합의하는 때이고,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랑 똑같이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여행 동반자로 생각하지, 무슨 별개의 여행을 따로 하는 별종들로 생각하지 않는 절기니까요. 그래서 삼촌, 비록 크리스마스 때문에 제 주머니에 금화나 은화 몇 푼 굴러들어온 적은 전혀 없었지만, 저는 그게 확실히 제게 유익했고 앞으로도 꼭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_ 찰스디킨스, <주석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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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14 0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덤을 향해가는 여행동반자! 참 끌리는 문장입니다!ㅎ 따뜻한 하루되십시요!

겨울호랑이 2020-12-14 07:58   좋아요 2 | URL
디킨스의 소설안에서 차갑고 냉정한 사회 속에서 따뜻함을 전해주는 매력을 느낍니다. 막시무스님께서도 따뜻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

prothoevero 2020-12-14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 🎄

겨울호랑이 2020-12-14 08:54   좋아요 1 | URL
prothoevero님께서도 행복한 하루, 즐거운 크리스마스 맞이하세요! 감사합니다 ^^:)

2020-12-14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4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남자 2020-12-15 0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어플 책 도대체 어디서 읽을수 있나요 ㅠ

겨울호랑이 2020-12-15 07:17   좋아요 1 | URL
아, 북플에는 책을 읽는 기능이 없고, ‘알라딘 e-book‘이라는 다른 어플에서 전자책 읽기가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cott 2020-12-24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연이와 귀여미 잘지내고 있죠.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연이 방에 트리 한그루 놓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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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rry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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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모두 행복한 메리크리스마스 ^.~

겨울호랑이 2020-12-24 13:09   좋아요 2 | URL
scott님 너무도 멋진 트리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scott님께서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하니의 책다방 2020-12-24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평안한 연말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0-12-24 15:18   좋아요 0 | URL
하니의 책다방님께서도 행복한 성탄절, 의미있는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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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이 만든 공간>의 저자 유현준은 책에서 '빈 공간'을 말한다. '빈 공간'을 인정한 동양(東洋)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서양(西洋). 거의 같은 시기 발전해 온 문화권들은 어떻게 다른 사상을 발전시켜 왔을까. 저자는 이에 대한 질문으로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두 문화권의 기후와 농작물 재배방식의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적은 강수량 지대인 서양에서는 개인주의적인 밀 재배 문화가 발전해온 반면, 많은 강수량 지대인 동양에서는 보다 공동체주의적인 벼 농사 문화가 발전해왔으며, 그 결과 사회 성격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래로 '빈 공간'에 대한 문화권의 태도가 갈리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서양의 문화는 단절적인 선(線)의 문화다. 저자는 이를 위해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 1937 ~ )의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서 논지를 끌어오는데, 우리는 막스 야머(Max Jammer, 1915 ~ 2010)의 <공간 개념  Concepts of Space>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막스 야머의 논지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허공'은 '채우기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 때문에, 무(無)에서 유(有)가 낳는다는 노자(老子, ? ~ ?)사상과는 달리 이들(무와 유)은 서로 대립하는 존재다. 이러한 인식에서 신(神)과 인간(人間), 인간(人間)과 자연(自然)이 선(線)으로 구획되는 공간이 나왔다는 저자 유현준의 주장에 한층 공감할 수 있다.


 레우키포스(Leucippus, BC 470 ? ~ ?)와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BC 460 ~ ?)는 허공 (虛空)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실재의 원자론적 구조를 가정할 때 나오는 논리적 결론이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서 비어 있는 것은 점유되지 앟은 공간을 뜻한다. 우주는 채워진 것(원자 atom)과 빈 것(허공)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간은 물질에게 상보적이며 물질에 의해 둘러싸인다. 물질과 공간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비어있는 것(Kenon)"이라는 용어는 분명히 점유되지 않은 공간만을 뜻한다._막스 야머, <공간개념>, p47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에 따르면, 제1신은 하늘의 경계이다. 그렇다면 신은 하늘의 경계와 다른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 경계이다. 그런데 신이 하늘의 경계와 다르다면, 하늘 밖에 다른 것이 있을 것이며, 그것의 경계는 하늘의 경계일 것이다._막스 야머, <공간개념>, p76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 저자는 이러한 인식 차이가 19세기 이후 일본, 중국 문화가 서양에 널리 알려지면서 점차 좁혀지고, 최근에는 공간의 이종교배가 이루어지면서 하나로 융합되는 모습을 소개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책을 통해 거장들이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들을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이 <공간이 만든 공간>이 교양 인문서적으로 갖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반면,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 느껴지는 아쉬움도 분명 있다. 책에서는 서양에 미친 동양의 영향이 언급되지만, 동양에 미친 서양의 영향은 거의 소개되지 않는다. 서양의 유명한 건축가들에게 동양사상이 영향을 미쳤다면, 서양의 생활 양식은 '도시화'를 통해 대중들의 삶 전반을 바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 융합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듯하여 부분은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물론,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해 전작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디서 살 것인가>를 통해 충분히 다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짧게나마 소개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한 편으로, 동양을 받아들인 서양 문화와 서양을 받아들인 동양 문화를 보면서 일종의 '자리바꿈'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최근 미국 대선의 정치 지형도를 생각하게 된다. 저학력 백인들과 미국 남부 농촌지역의 폭넓은 지지를 미국 공화당이 받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지지를 받던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 ~ 1865)이 공화당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든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한 이러한 급격한 정치 지형의 변화처럼 동서양의 사상 교체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물론, 남로당 출신 공산주의자가 반공(反共)을 국시로 하는 정권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노동자당'으로 불리는 민주당은 서민층의 지지율이 급감한지 오래다. 특히 '백인'을 자처하는 지지다들의 이탈이 심각하다. 이런 경향은 2020 대선에서도 여실히 확인됐다. 초기 대선 출구조사에서, 트럼프는 저학력 백인 유권자로부터 무려 64%(바이든은은 34%)의 표를 득표했다. 특히 복음주의 기독교인(81%)과 농촌 주민(65%)의 지지가 두터웠다. 정각 2000년에 이르러서야 보수 세력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가장 빈곤한 선거구는 오늘날 공화당 표밭으로 바뀌었다. 반면 가장 부유한 50대 선거구 중 무려 44곳이 민주당에게 표를 던졌다._<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트럼프 없는 트럼피즘의 득세, p6

 <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으면서 들었던 두서없는 생각을 담은 페이퍼는 이것으로 정리하자. 그 전에, 데모크리토스가 언급된 김에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가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1 ~ BC 270)와 데모크리토스 철학에 대해 정리한 논문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페이퍼를 마무짓는다.


 에피쿠로스에게 원자론은 그 모든 모순을 품으면서 자기의식의 자연과학으로서 철저하게 수행되었고 완성되었다. 추상적 개별성의 형식 아래서 이 자기의식은 절대적 원칙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을 그 최종 결론으로 밀고갔는데, 그 최종 결론은 바로 원자론의 해체이며,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의식적 반대다. 반대로 데모크리토스에게 원자는 단지 경험적인 자연 탐구 일반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원자는 순수하고 추상적인 범주, 경험의 역동적인 원리가 되지 못하고 그것의 결과인 하나의 가설로 남았을 뿐이다._ 칼 마르크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르소 자연철학의 차이>,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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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 2020-12-13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공간에 관심이 많은데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0-12-13 17: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쿼크님 좋은 하루 되세요!^^:)

2020-12-14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4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01-09 2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공간이 만든 공간
읽을지 말지 망설였는데
일단 장바구니속으로 ~@@

겨울호랑이 2021-01-10 07:59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공간이 만든 공간>은 공간에 대한 동/서양 사상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책이라 여겨지네요.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라요~^^:)
 

 J.P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 ~ 1913), 존 D.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Sr., 1839 ~ 1937),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 ~ 1919),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 ~ 1931) 부터 톨스토이(Leo Tolstoy, 1828 ~ 1910), 이사도라 던컨(Angela Isadora Duncan, 1877 ~ 1927)까지.  히로세 다카시(廣瀨隆)의 <제1권력>에는 20세기의 주요인물들 거의 모두가 언급된다. 혈연과 혼인, 연합 등으로 얽힌 그들의 관계도가 <제1권력> <제1권력 2>의 주요 내용이다보니, 인명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책은 마무리된다. 그러다보니 독자들이 책을 다 읽은 후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모두 한 패'라는 결론에 빠질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그렇지만, <제1권력>는 '신기한 TV 서프라이즈'  수준의 음모론책이라고 한다면 성급한 결론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시사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자본론 Das Kapital>의 영향력과 자본의 유전자(Meme)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것을 풀어보려 한다. 


 <제1권력>에서  J.P 모건과 존 D.록펠러는 사업 제휴를 통해 미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헐리우드로 대표되는 문화로 대중들을 세뇌시키며, 세뇌된 민중을 활용해 민주주의의 약점을 파고들어 정계를 장악한다. 어떻게 대자본들간의 치열한 경쟁 대신 제휴/연합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바로 직전 세대인 칼 마르크스의 충언(忠言)(?) 덕분이 아니었을까.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거대자본들간의 끊임없는 탐욕과 무한경쟁이라고 진단한 마르크스의 진단을 노동자들보다 자본가들이 더 빨리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로 인해 소자본들을 병합하여 탄생한 거대자본들은 이윤극대화를 위해 독점(獨占)시장으로 나가는 방안 대신 과점(寡占)시장에서 경쟁을 그치고, 대신 다른 분야로 그들의 발길을 돌려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마르크스의 공헌 덕분이라 생각된다. 아니, 어쩌면 모건과 록펠러와 같은 대자본가들이야말로 경제지배력을 통해 문화, 예술, 정치 등 형이상학적인 영역을 지배하려 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한다' 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어받은 마르크스 주의자일런지도 모르겠다...


 또한, <제1권력>에 소개된 수많은 인물, 가문들이 있지만 이들은 자본의 일시적인 소유자지만, 그들이 자본의 지배자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의 말처럼 유전자가 개체를 선택하듯 자본은 그들 스스로를 소유하는 것이 아닐까. <제1권력 2>에서 언급된 베어링(Baring)가문의 경우 1995년 파생상품거래로 파산한 것을 볼 때, 그들 역시 자본(資本)이라는 유전자가 선택한 하나의 개체(個體)에 불과함을 느낀다. 집중(集中)하고 대규모로 응축되는 블랙홀(Black hole)과 같은 자본의 속성에 유명한 로스차일드(Rothschild)도, 일찍이 진나라 재상이었던 여불위(呂不韋, ? ~ BC 235)도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제1권력>을 통해 자본의 속성과 마르크스의 영향력, 기득권의 합종(合從)이 세계적인 것임을 가계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토마 피게티(Thomas Piketty)가 <21세기 자본>에서 글로벌 자본세를 주장한 배경 중 하나는 본 것이라 하겠다. 그럼 다음에는 마르크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 단계 성장한 자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안을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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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2 1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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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2 1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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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4 0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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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4 14: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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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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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 14: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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