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청춘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레몽도 흘러간 시간에 대해서 어렴풋한, 그러나 늘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늘 쉴 새 없이 흐르고, 한 번 지나가면 죽어버리는 시간의 심연을 주시하며, 뭔가 그 흐름 안에 표지가 될 만한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전부터 그는 인생을 마치 무슨 경리장부라도 되는 양 정리하고, 그 안에서 역할을 맡았던 모든 존재들을 각기 제자리에 끼워 넣고 정리하는 것을 즐겼다. 각각의 얼굴을 보면서 그 제조 연도를 떠올릴 수 있으니까. - P14
레몽이 다시는 오지 않는다! 불안은 곧 깊은 고뇌로 바뀌었다. ‘물론 기다릴 수 있어. 그렇지만 그는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그 나이 또래 애들은 따분한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 법이니까. 좋아, 이제 단념하자. 모든 게 다 끝났어‘ 이 명백한 예상은, 그러나 얼마나 가혹한가! 레몽은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을것이다. 마리아 크로스는 인생의 마지막 남은 우물을 그만 메워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모래사막뿐이다. - P151
마리아는 여섯 시 전차에서 만났던 사랑스러운 소년을 기억속에서 불러내려고 애썼지만, 이제 그 얼굴은 쉽사리 떠오르지않았다. 지금 기억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어리석을 만큼 소심하고 성욕이 들끓는, 설익은 불한당의 화난 모습뿐이었다. 물론 이 추한 모습 또한, 사랑의 환상에 의해 미화되었던 레몽만큼이나 실제와 달랐지만, 자기가 변형시키고 신성시한 소년의 이미지 앞에서 마리아는 불현듯 혐오감을 느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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