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정치적 폭발의 요소들은 그 얼마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1870년에서 1871년 사이 독일로 인한 국가적 자존심의 곪아터진 상처, 그로 인해 프랑스 군대가 겪은 치욕, 공화파와 왕정파 사이의 오랜 적대감, 그리고 공화국과 교회 간의 그 못지 않은 적대감, 계속되는 경제적 불만, 특히 농업 분야의 부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길한 것은 맹렬한 반유대주의의 부상이었다. 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405
메리 매콜리프 (Mary Mcauliffe)는 1871년부터 1929년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얽히는 과정을 3권의 책에서 담아냈다.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Deutsch-Franzosischer Krieg, 1870 ~ 1871)의 패전과 파리 코뮌(La Commune de Paris, 1871)의 상처를 안은 프랑스는 5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전쟁 부채와 알사스-로렌 지방을 넘겨주면서 큰 위기에 봉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는 국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인다.
정부의 공공사업들이 경제에 미친 부양 효과는 실제적이기는 했지만 일시적인 것으로 1882년 초까지밖에 가지 않았다. 연초가 되자 고공 행진을 하던 상업은행 위니옹 제네랄의 도산과 함께 경제가 극적으로 주저앉았다.(p192)... 주가 폭락의 여파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특히 노동자 계층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현 사태와 뒤따르는 재정적 재난에 대해 정부를 비난했는데, 그 불만에는 좀 더 깊고 악의적인 감정도 섞여 있었으니, 사태의 책임을 유대인 은행가들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 사실 로트실트가(로스차일드가)와 다른 은행들은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자금을 빌려준 터였지만, 프랑스 전역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193
프랑스는 공공사업을 통한 재정부양책을 사용하면서 전후 위기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어느 사회나 이러한 경제부양정책으로부터 소외받은 이들과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이들은 있기 마련. 프랑스 내에 경제불평등 문제와 반(反)유대주의는 드레퓌스 사건( L'affaire Dreyfus, 1894 ~ 1906)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 바닥에 남아 있었다. 극심한 경제불평등은 문화를 가난한 이들로부터 분리했고, 결국 이 시기의 예술은 '가진 자'들의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고, 반유대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프랑스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벨 에포크 시기의 그림자는 짙었다.
졸라가 본 대로, 파리는 이전 해의 재앙들로부터 급속히 회복되고는 있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시의회에 들어간 클레망소도 그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몽마르트르의 빈민들을 위해 그의 일은 파리의 광범한 하층계급을 부단한 의제로부터 부각시켰다. 그가 특히 경각심을 느낀 것은 파리 극빈 지역 아동들이 처한 난국이었다. 그런 아동들, 특히 사생아들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 보호도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하에 번창하는 파리 사람들은 불운한 자들을 위해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다. 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74
이 시기 프랑스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고,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지로 영광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현실은 과거와 달랐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뿐 아니라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1898)에서 보듯 해외식민지 확보 경쟁에서는 영국에게 뒤쳐졌던 것이 프랑스가 처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지도층은 당시 일어난 민족주의 감정을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등을 통해 고취하길 원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에펠 탑등을 만들어지며 파리의 모습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와 함께, 경제적 부흥 노력과 국제 행사 개최를 계기로 유럽 여러지역의 예술가들이 프랑스로 몰려들면서, 프랑스 예술계는 본격적인 부흥을 시작하는데,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1900 ~ 1918>는 이 시기를 잘 묘사한다.
1900년 10월 중순, 파블로 피카소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의 붐비는 새 철도역인 오르세역에 도착했다. 며칠 후 만 열아홉 살이 되는 그는 의기충천해 있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그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파리에 입장하는 얼마나 근사한 방식인가! (p15)... 이사도라에게 힘을 주는 것은 춤의 근본원리를 발견하겠다는 목표였다. 그녀는 진리가 기술보다 먼저임을 강조했다. "삶이 뿌리이고 예술은 꽃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는 10년 후 모스크바에서 나타나게 될 메소드 연기와도 다소 비슷한 것으로, 그녀는 고전발레의 인위성을 거부하고 정서적 관념들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동작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녀는 무용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발견을 하려는 참이었다._ 메리 매콜리프,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1900 ~ 1918>, p86
20세기 초에는 예술 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유럽은 끝없는 발전을 이루는 듯 보였다. 독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 1955)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1905)하고, 마리 퀴리(Maria Skłodowska-Curie, 1867 ~ 1934)와 피에르 퀴리가 라듐을 발견(1898)하던 시기, 인간 이성(理性)에 대한 낙관을 가지고 벨 에포크(Belle Epoque)시대의 즐거움을 프랑스는 누렸다. 그렇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 빛나는 황금시대는 막을 내린다. 3부작의 마지막 <파리는 언제나 축제, 1918 ~ 1929>에서는 전후(戰後) 프랑스가 떠오른 신흥 대국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면서 상처를 복구했는가가 그려진다. 프랑스 프랑화(貨)의 약세, 미국 금주법 시대(禁酒法時代, Prohibition era, 1919 ~ 1933) 등을 통해 많은 미국 예술가들이 프랑스에 건너오면서 프랑스는 새로운 부흥을 꿈꾼다는 이야기로 책은 마무리된다. 마지막은 마치 동화책의 결말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안다. 1929년 불어닥친 대공황이 유럽을 다시 한 번 잿더미로 초대했다는 사실과 유럽 사회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가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을 어떻게 끝냈는지를.
1920년대 파리는 모든 방면에서 혁신의 온상이었다. 그 시절 이 빛의 도시는 문학, 미술, 건축, 음악, 패션 등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문화적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창조성과 함께 관용의 태도가 널리 번졌고, 적어도 어던 집단에서는 그러했다.(p111)... 프랑스라는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극복했고, 비록 값비싼 - 특히 인명에서는 - 대가를 치른 승리였으나 1929년에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번영을 즐기며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_ 메리 매콜리프, <파리는 언제나 축제, 1918 ~ 1929>, p421
이처럼 메리 매콜리프의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벨 에포크 시대를 여러 인물들의 교차 편집을 통해 잘 묘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가들의 삶과 함께 그들과 분리할 수 없는 시대상을 볼 수 있다. 비록, 작품, 작가를 깊이있게 묘사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은 이 시리즈가 가진 장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는 결코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