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세계체제 2 - 중상주의와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 1600-1750년, 제2판 근대세계체제 2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유재건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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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개진한 두 번째 새롭고 중요한 주제는 헤게모니(hegemony)라는 것이다... 내 논지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다. 중세의 장기적 흐름과 근대초의 장기적 흐름 사이에 모종의 기본적인 유사성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 둘 모두를 팽창하는 A국면과 수축하는 B국면을 가진 장기적 흐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둘을 주의 깊게 비교하면, 둘 사이에 어떤 중요한 질적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 흐름의 기본적 유형은 적어도 인구와 경제활동 그리고 물가의 세가지 중첩되는 팽창과 수축을 포함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서문.


 헤게모니란 드문 상황으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를 통틀어서 헤게모니 국가는 홀란트, 영국, 미국 뿐이며 더욱이 이들 나라가 그 위치를 유지했던 기간도 비교적 짧았다. 특히 홀란트는 그 시대의 군사적 거인이 아니었던 만큼 헤게모니 국가라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다. 헤게모니는 핵심부 지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핵심부 국가의 생산효율이 아주 높아져서 그 나라의 생산물이 대체로 다른 핵심부 국가들에서까지 경쟁력이 있는 상황, 그래서 그 핵심부 국가가 최대한 자유로운 세계시장에서 가장 큰 이익을 누릴 상황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63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2 The Modern World-system>의 시대적 배경은 17세기와 18세기 중반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1권에서 자본주의적 농업의 시작으로 이윤이 축적되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팽창(특히 아메리카 지역)이 이루어졌다면, 이어지는 17세기에서는 이러한 팽창이 본격화된다. 이 시기가 이전과 구분되는 점은 헤게모니(패권 覇權)이다. 이전 시대의 패권국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합스부르크 제국(Habsburgerreich)의 일부로 전성기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러시아, 이탈리아 일부 지역 등을 제외한 거의 전역을 장악했기에, 경제적 패권을 장악한 세력은 등장하지 못했지만, 2권이 배경이 된 시기에 이르면서 양상이 달라지게 되었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귀족계급을 크게 약화시켰으므로 1250년에서 1450년 또는 1500년까지 농민들은 꾸준히 자기들의 경제 잉여의 몫을 늘려가고 있었다. 이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유럽 전역에 걸쳐 공통된 현상이었다. 상층계급에게 진짜 위기이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는 "연소"의 선행조건 따위가 아니라 하층민들의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소득의 상대적 평등화 추세였다. 이제 격렬한 사회적 변화말고는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잇는 길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 길이란 바로 잉여 수탈의 새로운 형태인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봉건전 양식을 자본주의적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영주 반동의 실체였던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54


 근대세계에서 자본주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첫 번째 국가는 네던란드였다. 카를 5세( Karl V, 1500~1558)의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신교도들이 저지대 연합국으로 몰려들면서 높아진 인구밀도는 이 나라의 생산양식을 자본주의적으로 빠르게 변모시켰다. 농지 확보를 위한 풍차의 개발, 청어잡이를 위한 조선업의 발달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농어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와 함께 상업, 조선업, 금융업의 발달이 동반되면서 네덜란드는 17세기 핵심부에서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높은 생산효율은 먼저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형태의 식량 생산 형태인 채집경제에서 이루어졌으니 즉 물고기의 채집, 특히 "네덜란드의 금광"이라고도 불렸던 절임용 청어잡이 어업(그것만은 아니지만)으로 이룩되었다(p64)... 네덜란드인들의 농업은 지질학적으로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약점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 강점으로 바뀌었다. 먼저 토지를 만들기(간척하기) 위해서 물을 퍼올려야 했는데 이 바람에 풍차가 발명되고 공학이 발전했으며 그래서 홀란트는 여러모로 "목제기계 시대의 중심"이 되었다... 척박한 자연조건이 낳은 두번째 결과는 한층 더 중요했다. 즉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인들은 집약적 농업으로 나아갈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최초로는 그 이전의 불황과 곡물 가격 저하가 새로운 집약적 농업의 창안에 이르게 된 1300년 무렵에, 그뒤에는 집약적 농업이 더 크게 팽창한 1620년에서 1750년 사이에 일어났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66


 네덜란드의 상업적 우위의 이유는 이미 획득한 농-공업의 높은 생산효율과 관련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높은 효율은 주로 배삯, 보험비용, 일반적인 경상비를 통해서 상업상의 효율로도 옮겨갔다. 네덜란드의 배삯은 왜 그렇게 쌌을까? 가장 큰 요인은 선박 건조비가 적게 들었다는 점이었다. 페리는 비용절감의 이점을 여섯 가지로 꼽았다. 즉 네덜란드 선박 목공의 기술, 재료 사용의 경제성, 노동절감형 기계, 대규모 표준 규격 생산, 대규모 재료 구입, 네덜란드 배를 통한 건설자재의 값싼 수송이 그것이다(p88)... "[네덜란드] 무역의 기초가 해운이었다"면 가장 큰 이익은 거대한 암스테르담 화물집산지에서의 판매 및 거래에서 왔으며 그 성공은 네덜란드 상업조직의 형태가 뛰어난 덕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89


 네덜란드가 융성한 17세기는 기본적으로 유럽경제의 수축기였다. 30년 전쟁(1618~1648)에서 보여지듯 유럽 전역이 신구교의 대립으로 최초의 국제전이 독일 지방에서 일어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국력이 내리막길에 들어섰기에 신흥강국  네덜란드의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았다. 유럽 전체의 인구는 감소하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밀도와 앞선 산업생산력을 갖춘 네덜란드 북아메리카 지역과 인도네시아, 대만을 주변부로 하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뒤를 이은 제국을 건설하게 된 것은 당시 유럽의 정세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지만, 17세기 중반 이후 30년 전쟁이 종결되며 종교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영토형 절대주의 국가'가 등장한 시기에 핵심부에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와 국토를 갖춘 네덜란드의 패권은 위협받게 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1650년 이후 반세기는 인구가 감소하거나 보합세를 유지하여 전체적으로는 정체상태였던 시대였지만, 17세기 말에 인구는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는 30년전쟁의 참화, 일부 지역에서 지역적인 식량 부족으로 이어진 생태적 압박(그 결과 전염병의 유행) 그리고 세계경제 전체에서 과잉생산에 의한 곡물 가격의 세계적인 하락이 한데 어우러졌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설명하는 데에 가장 정확한 것은 지역적인 편차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17세기 초에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플랑드르에서 북부 이탈리아에 이르는) 유럽의 구(舊) 등뼈 지역과 유럽 세계경제의 새로운 핵심부 지역(네덜란드 연합주 서부, 잉글랜드 남동부, 프랑스 북동부와 서부)에 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116    


17세기가 지나면서 농-공업 부문이 우위를 잃자 그 부문 쪽에서 관세를 요구한 적도 있었고(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영국 및 프랑스와 경쟁하면서 연합주 의회가 보복관세를 설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은 보호주의 아닌 문제들에서 뚜렷했다. 국가의 역할은 사기업(私企業)의 성공조건을 만들어냈다(p96)... 네덜란드 국가는 자기 나라 기업가의 이익을 옹호했지만 그렇게 하는 데에 이데올로기적 일관성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네덜란드 헤게모니의 이데올로기는 해양자유론(mare liberum)이라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휴전협정이 맺어진 1609년에 출간된 책에서 그로티우스가 줄기차게 주장한 것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97


 앤더슨에 의하면, "절대주의란 본질적으로...... 재정비되고 재충전된 봉건적 지배기구였다. 그것은 널리 퍼진 지대금납화로 농민 대중이 획득한 이익들을 무효화시키려고 농민 대중을 그들의 전통적인 사회적 지위에 되돌려 묶어두려는 것이었다."... 핵심적 요소는 국가가 얼마나 강했느냐이지 정부형태가 얼마나 절대적이었느냐가 아니다. 17세기에 가장 강한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지배한 국가들이었다. 이 점에서 연합주(네덜란드)가 첫째였고, 영국이 그 다음이었고, 프랑스는 고작 세번째였다. 영국 혁명은 영국의 국가를 강화시켰다. 이에 반해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루이 14세의 주장은 국가의 상대적 약체성의 표지였다. 17세기의 수축은 체제의 위기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그것은 체제의 공고화 기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57


 그 결과 17세기 이후 네덜란드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네덜란드 제국은 이전 제국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 두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첫째, 주변부를 금은의 산지가 아닌 사탕수수 재배 등 농산물의 산지로 활용했다는 점과 둘째, 은행과 회사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해외산물과 금은 등의 수입에 치중했기에 그들의 위치가 핵심부에 서지 못하고 주변부와 핵심부를 중개하는 역할에 그쳤던 반면, 네덜란드의 정책은 스스로를 핵심부에 위치시키고 나아가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단지 1621년 서인도회사가 세워진 후 네덜란드인들이 다음 사반세기 동안 대서양으로의 팽창을 꾀했던 것이었다... 세계경제에서 네덜란드의 헤게모니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짧은 기간에 과연 무엇이 이룩되었을까? 첫째로 네덜란드인들은 남북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를 몰아내면서 "해군 방패막"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스코틀랜드인을 포함한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정착 식민지를 건설했다. 둘째로 남북 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한 것은 브라질이었는데 네덜란드인들이 브라질에서 쫓겨나자 바베이도스 점으로 그 재배가 옮아갔고 이 섬은 영국령 카리브 해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플랜테이션 식민지가 되었다. 셋째로 네덜란드인들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인력을 대기 위해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노예무역에 손을 댔다. 플랜테이션을 잃을 후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노예무역에 손을 댔다. 플랜테이션을 잃은 후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노예무역 상인으로 이 지역에 남으려고 했지만 1675년이 되면 네덜란드의 우위가 끝나고 새로 설립된 영국 왕립 아프리카 회사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83


 유럽의 구 등뼈 지역은 일찍부터 은행조직들을 발전시켜왔다. 17세기에는 홀란트가 선례에 따랐는데, 이는 홀란트 헤게모니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7세기 말에 프랑스보다 영국이 이러한 경로에 이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두 가지 생각을 나란히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유럽 세계경제 내에서 세 가지 화폐용 금속의 사회적 용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즉 금은 국제결제와 국가적 사업 그리고 퇴장용으로 쓰이고, 은은 대규모 국내 상업용으로 쓰이며, 동은 가계 및 소규모 상업용으로 쓰인다... 두번째 생각은 동화의 역할, 아니 오히려 "세기의 악몽"이라고까지 하는 동화의 급증과 관련이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172


 네덜란드가 선취한 자본주의 제국의 길은 그 뒤를 이은 영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영국 이전의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이기고 네덜란드의 헤게모니를 계승할 가능성은 여러모로 희박해 보였다. 그렇지만,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거치며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과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 지역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모여들면서 네덜란드에 집중된 자본(資本)은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결합과 직물산업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결합, 비(非)가톨릭지역이라는 종교적 이점 등으로 인해 신흥강국 영국으로 투자처를 옮기게 되고, 헤게모니 역시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영국을 프랑스보다 더 더 강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야한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그것이 1689-1714년 시기의 전쟁들에서 프랑스를 저지할 수 있었던 영국의 군사적 능력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전쟁들에서 이길 수 있엇던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 간에 맺어진 동맹의 결과였는데, 이 동맹은 네덜란드의 군사적 원조 때문이 아니라 네덜란드인이 투자를 통해서 영국 국가에 제공한 재정적 뒷받침 때문에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인과 맺은 관계는 영국의 신용을 높혔고, 이로 인해서 잉글랜드 은행의 창설이 가능했으며 나아가 잉글랜드 은행이 남해 거품 사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튜어트 왕조 초기에 시작되었고 1689-1715년 시기의 첨예한 토리-휘그 투쟁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된 영국 통치계급 내의 분열이 마침내 월폴 일당국가에서 해결될 수 있었다. 영국이 강력해지고 나아가 영국 기업가가 경제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은 영국이 프랑스보다 더 민주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영국이 더 민주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434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 2>는 네덜란드의 자본의 이동과 금융제도의 영국이식을 영국이 프랑스를 물리치고 다음 세기의 패권을 장악한 핵심 요인으로 파악한다. 일례로 1907년 네덜란드와 영국의 합작기업인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이 오늘날에도 석유 메이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보듯  네덜란드-영국의 결합은 매우 긴밀했다. 이 결합이 이후 영국-미국의 결합의 전신으로 발전되었다고 파악한다면, 결국 오늘날 헤게모니 체제의 근간이 이미 17세기로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사이 중심산업과 헤게모니 국가는 바뀌어도, 체제의 근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근대세계체제 2>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사실상 자본주의의 성격을 확정시켰음을 알게 된다. 뒤이은 <근대세계체제 3>에서는 팽창기의 영국 헤게모니를 확인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1600-1750년의 시기는 우선 네덜란드의 헤게모니를 파괴하고 다음으로 그 최고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노력으로 특징지어졌다. 이 장기적인 상대적(즉 잘 알려진 장기 16세기의 경제적 확장에 비하여 상대적) 불황기에, 주변부 지역들에서는 직접생산자들에 대한 착취가 크게 심화되었고 토착 착취층의 이익은 줄어들었다(즉 핵심부 국가들의 같은 착취층이 얻은 이익에 비하여 줄어들었다). 반주변부 국가들은 훨씬 더 복잡한 모습을 보였다. 핵심부 국가들은 반주변부 국가들을 주변부와의 중개지로, 즉 잉여가치의 전달장치로 삼으려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 성공했지만, 핵심부간의 대규모 경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부 지역들은 자신의 상대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스웨덴의 경우였고 뒤에는 브란데부르크-프로이센의 경우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366


 네덜란드 은행들은 여전히 다른 은행들이 자신들의 금은을 맡길 수 있는 확실한 보관장소였고, 화폐주조율도 18세기 동안 계속해서 상승했다. 1763년 이후에야 세계 금융 중심지로서의 암스테르담에 대한 유럽의 신뢰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8세기로의 전환기에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의 자금을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곳으로 옮기고 있었고, 그곳이 바로 영국이었다. 그것은 "노골적인 상거래"였는데, 그 속에서 네덜란드인 투자자들은 높은 수익을 얻은 대신 영국 국가가 자신의 대부비용을 줄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427


 앤 여왕의 치세기였던 1689-1714년의 전쟁기에, 영국인들은 장기 공공대부 제도를 창설하고 그리하여 공채제도를 설립하는 획기적 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국가를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안정된 재정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1694년에는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었다. 그에 더하여 이 시기에 재편된 동인도회사가 세워졌고 남해회사가 새로 설립되었다. 이들 세 회사는 모두 국가에 대한 장기 대부를 해준 대가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세 회사의 대부금은 "유동공채를 정리국채로 전환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 , p423

이 책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근대 세계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형태를 띠며 이 세계경제는 장기 16세기 유럽에 그 기원을 둔 것으로 여기에는 봉건 유럽의 특정한 재분배적 혹은 공납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질적으로 다른 사회체제로의 전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 지리적으로 지구 전체를 뒤덮게 팽창하며 (2) 팽창과 수축의 주기적 유형을 나타내고, 경제적 역할을 맡는 지역이 지리적으로 이동한다는 것 그리고 (3) 기술의 진보, 공업화, 프롤레타리아트화, 체제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구조화 등 지금도 진행 중인 장기적인 이행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 P21

토폴스키에 따르면 17세기의 수축은 체제 전반에서 "불균형의 증대"에 있었다. 불균형의 증대란 수축에 대립된 어떤 것이 아니다. 수축의 시대에 불균형은 사실상 자본주의의 주요 메커니즘의 하나이자 자본의 집중과 축적의 증대를 가져오는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빌라르의 다음 설명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 "전반적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각기 다른 나라들은 각기 다르게 대응하게 되며 거기서 불균등 발전이 생기고 결국 그것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 P36

1600년에서 1750년 사이의 기간이 이 세계경제의 한 가지 결정적인 과정을 지속시키고 심화시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브로델과 스푸너의 조사가 보여주듯이 유럽의 기본적인 3대 물가권역 사이에 불가의 격차는 차츰 사라져갔다... 상인 자본주의는 물가 평준화의 진전과 교류 채널의 창출에 기여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서 조건이 더 나은 곳을 찾아다니도록 관심을 돌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진행된 하나의 자본주의적 과정이 공업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으며 물가의 평준화는 이 과정의 본질적인 일부였던 것이다. - P49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의 계급투쟁들은 복잡해서 다양한 겉모습을 띠고 비틀어져 나타난다. 한 헤게모니 국가가 지배적 위치에 서기까지의 시대는 국가 내부가 주목받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시장에서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국내의 정치적 제약을 쓸어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시대는 국가간 형태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시장에서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국가간 정치적 제약을 쓸어버려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 P112

하강의 시기는 훨씬 더 복잡하다. 우선, 그 시기는 훨씬 더 뚜렷하게 불균등하다. 후퇴, 정체, 위축, 불경기의 시기이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불경기인 것은 아니다. 세계경제를 전체로 볼 때 총생산은 총가치로 보나 일인당 생산량으로 보나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지역에서 생산량으로 보나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지역에서 생산량 혹은 생산성 혹은 그 양자가 증가한 것이 다른 지역의 하락으로 상쇄된 결과이다. 피고용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할 수도 있으나 실업률도 같이 증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점은 하강이 활동의 둔화이지 정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이윤 추구를 가로막는 일련의 걸림돌이 되어서 말하자면 염소 무리에서 자본가라는 양을 솎아낸다. 강한 것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곧잘 번영한다. - P196

경제의 경기후퇴, 토지와 노동력에 대한 압력의 증가, 토지와 노동의 집중과 상품화의 심화 등은 모두 실제로 동유럽에서처럼 남유럽에서도 나란히 진행되었다. 이제 "17세기의 불황"이 오랫동안 주된 논쟁거리였던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로 눈을 돌려보자. 세계경제의 이 주변부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제도인 아시엔다(hacienda)의 등장을 먼저 살펴보자(p221)... 16세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주요 수출품인 은은 1590년에서 1630년까지의 시기에는 고원현상을 보였고 그뒤 수치는 갑자기 뚝 떨어졌다(p224)... 이른바 자급자족적인 대규모 아시엔다는 바로 시장의 힘에 민감하게 적용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었다. 그것은 이윤율의 변동에 따라서 생산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었고 자원 이용의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있어서 장기간에 걸쳐 농업생산과 세계경제의 연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시엔다는 새로운 직물 생산의 거점이었다. - P234

토지집중화 경향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데에 중심적이었던 것은 장기적으로 지속된 낮은 곡물 가격이었다. 1600-1750년의 시기 전체 동안에 곡물 경기가 좋았던 해는 거의 없었다. 낮은 곡물 가격이라는 불행은 영국의 경우에는 그것이 농업혁신으로 이어졌기에 사실상 행운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영국이 유럽의 주된 곡물 수출국이 된 것이 바로 곡물 가격이 가장 낮았을 때인 18세기 초반이었다는 점이다. 그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설명은 1688년에 영국 정부가 곡물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제정한 곡물보조금법이 농업 확장에 "대체로 유리한" 조건을 창출해다는 것이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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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3-28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세계체제 이론도 결국 세계 ‘분업’ 이론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2-03-29 06:42   좋아요 2 | URL
저 역시 동감합니다. 다만 핵심부의 의지에 따라 주변부에 분업의 내용과 역할이 강제된다는 점이 자발적인 분업과 다른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29 21:06   좋아요 1 | URL
저도 사회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분업’ 중인데요, 그런데 자발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03-29 21:10   좋아요 1 | URL
^^:) 사실 직장에서 하는 업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만... 직장 그만둔다고 해서 정치적, 경제적 억압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기에, (울며 겨자먹기식이긴 합니다만) 자발적인 분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ㅜㅜ
 

이홍규(李弘規)가 왕에게 말하였다. "진왕은 하(河, 황하)를 끼고 피나는 싸움을 하며, 바람으로 빗질하고 비로 목욕하고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있는데, 왕께서는 오로지 군대에 공급할 물자를 가지고 위급하지 않은 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또 때는 바야흐로 어려워서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왕께서는 오랫동안 부제(府第)를 비우고 멀리 나가서 놀기를 좇다가 만의 하나라도 간사한 사람이 있어 변고를 일으켜서 관문을 닫고 서로 거리를 두면 장차 이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단을 엮어서 산을 만들고 그 위에다 궁전 누관(樓觀)을 만들고 혹시 비바람에 무너지게 되면 다시 새로운 것으로써 그것을 바꾸었다. 때로는 비단으로 만든 산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면서 열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산 앞에서 해자를 파서 금중(禁中)과 통하게 하여 혹은 배를 타고 밤중에 돌아오면서 궁녀들로 하여금 밀초 1천여 개를 들고 앞에 가는 배에 있게 하고 뒤의 배에 서서 그곳을 비치게 하니 수면(水面)이 마치 낮과 같았다. 혹은 금중(禁中)에서 술을 마시어 취하면 북을 치고 악기를 불며 비등하여 새벽까지 이르렀다. 이것을 가지고 일상으로 삼았다.

오의 서온(徐溫)이 오왕에게 권고하여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예의와 음악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또 당이 남교에서 제사를 지낼 적마다 그 경비는 거만(巨萬)이었는데, 지금은 아직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서온이 말하였다. "어찌 제왕이 된 사람이 있는데 하늘을 섬기지 아니하겠는가? 내가 듣건대 하늘 섬기는 것은 진실한 것을 귀히 여긴다고 하니 많은 비용을 써서 무엇 하겠는가? 당에서는 매번 교서(郊祀)를 지낼 때마다 남문(南門)을 열고 그 돌쩌귀에 기름을 치는데, 기름 100곡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바로 말세에 대단히 사치하였던 폐단인데, 또한 어찌 충분히 본받을 만하겠는가?"

이사소가 노주(潞州, 산서성 장치시)에서 도착하여 역시 말하였다. "지금 강한 적이 앞에 있으니 우리에게는 전진은 있으되 후퇴할 수는 없고, 가볍게 움직여서 인심을 동요시킬 수 없습니다."
진왕이 말하였다. "제왕(帝王)이 일어나는 것은 스스로 천명(天命)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거란이 나를 어찌 하겠는가? 내가 수만의 무리를 데리고 산동(山東, 태행산 동쪽)을 평정하였고, 지금 이 작은 야만인을 만났는데 이들을 피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사해(四海)에 다가갈 수 있겠는가?"

마침 폭설이 열흘 동안 내려서 평지에 수 척(尺)이 쌓였고 거란의 사람들과 군마가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사람들이 길에 서로 줄을 이었다. 거란주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노문진(盧文進)에게 말하였다.
"하늘이 아직 나로 하여금 이곳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구나!" 마침내 북쪽으로 돌아갔다.
진왕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뒤밟아 그들이 가다가 머무는 대로 따르다가 그들이 들판에 유숙하던 곳을 보니, 땅바닥에 볏짚을 깔고 있는데 빙 둘러있는 것이 바야흐로 네모반듯하여 모두가 잘라서 엮은 것 같았으며, 비록 떠나면서도 한 나뭇가지라도 어지럽힌 것이 없었으니, 탄식하며 말하였다. "야만인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마침내 이와 같을 수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구나!"

대봉왕(大封王) 궁예(躬乂)는 성격이 잔인하였는데, 해군(海軍)통수인 왕건(王建)이 그를 죽이고 자립하여 다시 고려왕(高麗王)이라 칭하고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이라 하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왕건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너그럽고 온후하여 그 나라의 사람들이 이를 편안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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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s president-elect starts with an unpopular personal project

Yoon Suk-yeol wants to move the presidential office. Citizens would rather he focus on the economy


 한국 대통령 당선자, 인기없는 개인 프로젝트 시작. 윤석열은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고 싶어하지만, 국민들은 대통령이 경제에 집중하길 원한다


 The Economist의 이번주(2022.3.16)에는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과 관련한 기사를 위와 같은 제목으로 내보냈다. 기사의 상세내용은 원주민인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이니 별도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사의 마지막에 담긴 The Economist의 관점은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세계적인, 그리고 객관적인 시선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여겨져 옮겨본다.  


With his popularity already at a historic low for an incoming president, Mr Yoon may find that his attempt to bring the people closer actually drives them farther away.

 윤 대통령 당선자는 차기 대통령 지지도가  이미 기록적으로 낮은  현상황에서, 국민들과 가까워지려는 그의 노력이 실제로는 그들을 더 멀리 쫒아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사안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 보도와 함께 냉정한 평가는 언론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가 현재 우리의 언론에는 없기에, 우리는 우리나라의 문제를 바라볼 때마저 외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에 서 있음도 함께 깨닫게 된다. 179년 전통의 <The Economist>와 한국 중앙일보에서 발간하는 <이코노미스트>. 각각의 발음은 큰 차이없지만, <이코노미스트>가 표제에서 던진 '윤석열 시대 개막, 살림살이 좀 나아질까'에 대한 답(答)을 <The Economist>의 소기사 제목에서 발견하면서 현재 시점에서 결코 넘을 수 없는 언론권위의 차이를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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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3-27 22: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귤이 회하를 건너면 낑깡이 된다는
말을 J일보에서 만드는 이름만 비
슷한 잡지에서 그대로 보여주네요.

이름이 아깝네요.

겨울호랑이 2022-03-27 22:28   좋아요 6 | URL
<이코노미스트>를 <The Economist>의 번역본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이외로 꽤 많더군요... 차라리 기사를 그대로 번역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얄라알라 2022-03-28 11: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둥지를 틀지 않은 다른 많은 분들도 겨울 호랑이님 글 구독할 채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28 11:27   좋아요 2 | URL
에고 제겐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제 이웃분들께서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글에 비해 넘치는 걸요... 얄라얄라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갱지 2022-03-28 14: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그나마 국민들 마음을(영어로라도) 알아주는 데가 있어 좀 위로가 되는 듯은 한데, 낯은 뜨겁네요.

겨울호랑이 2022-03-28 14:56   좋아요 2 | URL
네... 더 큰 문제는 아직 임기 시작도 전이라는 점이겠지요...

초란공 2022-03-28 18: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두 잡지가 같은 것이 아니었군요^^;; 다음 정부 수장이 다시 청와대로 오려면 또 다 뜯어 고치고 이동하고 이중으로 문제가 보입니다. 단순히 ‘재배치‘라고 말하는 인간이 있다는게 놀랍기도 하고요. 하지만 당장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하면 이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몸풀기 수준인가 싶기도 하구요... 상당히 두렵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28 18:50   좋아요 3 | URL
사안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고, 언론사(또는 사주)의 배경에 따라 어느 부분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 언론의 논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 상황과 중대성, 긴급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어느 것도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 ‘용산 이전‘ 문제는 답답하게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에 힘을 소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정말 소중한 우리의 가치가 무속과 돈문제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5년이라는 시간동안 보존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도 함께 가져봅니다...^^:)

초란공 2022-03-28 19:04   좋아요 3 | URL
대통령 후보 경선할 때였던가요... 당사자의 입에서 자신있게 ‘밀턴 프리드만‘이란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식겁하기 시작했던 것 같네요. 여기에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당대표까지... 종합세트지요. 그래도 희망을...!!

겨울호랑이 2022-03-28 19:12   좋아요 3 | URL
그렇지요... 단순히 밀턴 프리드먼의 사상을 이해하고 우리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기를 고민하기 보다 자신이 뱉어놓은 말을 덮기 위한 인용구로 유명학자의 사상 일부를 가져다 쓴 것에 대해 저 또한 걱정하게 됩니다... 사실, 당선자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지 모호했을 때 걱정하고 우려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그저 로또에 당첨된 졸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네요...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점진적·단계적 통일과정의 진전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너무 급속하고 전면적인 통일을 추구해도 평화에 위협이 되지만, 통일을 제쳐두고 평화만을 이야기한다고 평화가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지담론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평화담론과 결합할 필요성은 많은 이들이 인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재정조달을 위해 상당한 수준의 국방비 감축이 필요하리라는 계산에 멈추어서는 불충분하다.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이를 빌미로 수구세력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복지확대를 위한 정치적 동력이 생기기 어렵다는 사실에까지 미쳐야 하는 것이다.

남북이 함께하는 2013년체제라면 당연히 6·15공동선언과 더불어 9·19공동성명도 복원된 상태를 뜻할 것인바, 이는 경제적 상호의존과 교류·협력이 꾸준히 증대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역협력을 한층 긴밀하고 원활하게 만들 것이다.

눈앞의 과제로는 원전의 안전성 문제가 있다. 이는 기술적인 능력뿐 아니라 관계기관의 신뢰성과 책임성 그리고 정보의 투명한 공개 등 민주주의 및 공정·공평 원칙과 직결된 문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평화의제와의 연결이 각별한데, 북과의 대결 추구가 어느 모로 보나 위험천만이지만 좁은 땅에 그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지어놓고 군사력이 좀 앞섰다고 일전불사를 외쳐대는 이들의 무모함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런 것이 제대로 문제삼아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정부가 ‘배 째라’고 버티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이 땅의 자칭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진정으로 합리적이고 원칙있는 보수주의자가 드문 것이 또 하나의 이유지만, 국민들이 아무튼 북측 체제가 나쁜 체제고 북측 당국이 우리 정부보다 훨씬 나쁜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인식 자체가 타당하다고 해도 남녘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이 북측의 소행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이런 엉터리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에게 향상은 없다.

분단체제는 남북이 서로 적대적이고 단절된 사회이면서도 동일한 ‘체제’라고 말할 만큼 쌍방 기득권세력이 공생관계에 있고 양쪽이 나쁜 점을 서로 닮아가며 재생산되는 구조다. 동시에 엄밀한 의미의 사회체제는 아니고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국지적 현실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애당초 남북분단을 주도한 현존 세계체제의 패권국을 포함해 수많은 외세가 개입해서 굴러가는 다소 느슨한 의미의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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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렇게 나라가 온통 난장판인데도 우선 내 먹을 것 있고 내 집값이나 좀 올라주면 나머지는 알 바 없다거나, 이 나라에 대해 그렇게 말이 많을 거면 이북에 가서 살지 그러느냐고 하면서 지내다보면, 각자의 마음마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황폐한 심전(心田)에서 독재정치와 불공정사회가 자라나고, 자칫하면 짐승 대신에 인간이 대량 살처분되는 전쟁이 터지거나 대규모 재해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87년체제의 기본적 한계는 무엇이었을까요? 여러가지 해석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민주화의 성취가 어디까지나 한반도 남녘에 국한된 성취였고 따라서 1953년 휴전 이후 굳어진 분단체제를 흔들기는 했을지언정 ‘53년체제’의 틀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존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것을 구성하는 국민국가들의 배타적이고 이론상 대등한 ‘주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국가가 패권국가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정부상태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중기적으로도 북의 급변사태를 방지하려는 중국의 의지와 능력에 큰 변동이 없을 터인데다, 지금은 내부적으로 비교적 질서정연한 승계작업이 진행되는 모양새이고, 중국뿐 아니라 미국, 러시아, 일본이 모두 행여나 순탄한 진행이 안될까봐 일제히 ‘안정 최우선’을 부르짖고 나오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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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히 주거양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의 아파트는 "사는 living 곳이 아니라 사는 buying 것"(아파트 한국사회)이며,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로 사람들을 철저하게 서열화하는 무서운 괴물이다. 가파르게 고공행진 중인 아파트값은 또 어떻고. 집 한 간 얻느라 평생 빚더미 위에 사는 하우스푸어가 부지기수다. 결혼 적령기의 청춘들은 높은 집값 탓에 결혼을 포기할 정도고, 아파트가 주거문화를 획일적으로 만드는 한편 전통적 삶의 터전을 잃게 만들었고 도시 미관을 건조하게 했다는 비판은 오히려 순진하게 들릴 정도다. 국민 대부분이 아파트 때문에 이렇게 극심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정말 우리에게 단란하고 행복한 둥지를 제공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권위주의 국가는 인구성장을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이 경제발전에 헌신하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을 대단위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 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과 구조 때문에 한국의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아파트공화국>

단지로 들어오는 도로와 단지 내부를 잇는 도로, 주차장, 관리사무소, 조경시설, 수해방지시설, 안내표지판과 보안등, 통신시설과 가스공급시설 뿐만 아니라 비상급수시설과 난방설비, 전기설비와 소방설비, 공동 수신설비, 급배수설비 등(이상 부대시설)과 어린이놀이터, 근린생활시설, 유치원, 주민운동시설, 경로당, 주민공동시설, 보육시설과 문고 등(이상 복리시설)에 대한 설치기준이 법률로 정해져 있고, 모두 입주자 부담이다. 법률이라는 절대적 공권력은 입주자의 부담으로 기반시설을 확보할 것을 강제한다. _ <아파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

단지 만들기 전략은 지역 불균형을 초래한다. 단지 만들기린 결국 공공인프라 부족을 집단적인 사설 오이시스로 만회하는 시회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어느 오아시스가 넓고 안전한가, 어느 곳의 물이 풍부하고 그들이 많이 드리워져 있는가에 따라 좋고 나쁨이 가려지는 무리지음과 서열의 정치학이 작동한다. _ <
아파트 :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

"내 집을 팔아치우지 않고 계속 갖고 있다면 집값이 오른다고 해서 내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 명목상 재산이야 늘어나겠지만 영원히 현금화할 수 없는 재산일 뿐이다. 반면에 경제적 부담은 늘어난다. 우선 재산세가 늘어난다. 공시가격 기준으로 3억 원 하던 집이 4억 원으로 올랐다면 재산세는 24만원에서 42만 원으로 들어난다. 5억 원 하던 집이 6억 원으로 올랐다면 57만 원에서 81만 원으로 들어난다. 현금화할 수 없는 재산이 늘어나서 흐뭇한 기분 값으로 1년에 몇십만 원씩 더 내야 하는 것이다." _<아파트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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