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규(李弘規)가 왕에게 말하였다. "진왕은 하(河, 황하)를 끼고 피나는 싸움을 하며, 바람으로 빗질하고 비로 목욕하고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있는데, 왕께서는 오로지 군대에 공급할 물자를 가지고 위급하지 않은 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또 때는 바야흐로 어려워서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왕께서는 오랫동안 부제(府第)를 비우고 멀리 나가서 놀기를 좇다가 만의 하나라도 간사한 사람이 있어 변고를 일으켜서 관문을 닫고 서로 거리를 두면 장차 이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단을 엮어서 산을 만들고 그 위에다 궁전 누관(樓觀)을 만들고 혹시 비바람에 무너지게 되면 다시 새로운 것으로써 그것을 바꾸었다. 때로는 비단으로 만든 산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면서 열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산 앞에서 해자를 파서 금중(禁中)과 통하게 하여 혹은 배를 타고 밤중에 돌아오면서 궁녀들로 하여금 밀초 1천여 개를 들고 앞에 가는 배에 있게 하고 뒤의 배에 서서 그곳을 비치게 하니 수면(水面)이 마치 낮과 같았다. 혹은 금중(禁中)에서 술을 마시어 취하면 북을 치고 악기를 불며 비등하여 새벽까지 이르렀다. 이것을 가지고 일상으로 삼았다.
오의 서온(徐溫)이 오왕에게 권고하여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예의와 음악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또 당이 남교에서 제사를 지낼 적마다 그 경비는 거만(巨萬)이었는데, 지금은 아직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서온이 말하였다. "어찌 제왕이 된 사람이 있는데 하늘을 섬기지 아니하겠는가? 내가 듣건대 하늘 섬기는 것은 진실한 것을 귀히 여긴다고 하니 많은 비용을 써서 무엇 하겠는가? 당에서는 매번 교서(郊祀)를 지낼 때마다 남문(南門)을 열고 그 돌쩌귀에 기름을 치는데, 기름 100곡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바로 말세에 대단히 사치하였던 폐단인데, 또한 어찌 충분히 본받을 만하겠는가?"
이사소가 노주(潞州, 산서성 장치시)에서 도착하여 역시 말하였다. "지금 강한 적이 앞에 있으니 우리에게는 전진은 있으되 후퇴할 수는 없고, 가볍게 움직여서 인심을 동요시킬 수 없습니다." 진왕이 말하였다. "제왕(帝王)이 일어나는 것은 스스로 천명(天命)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거란이 나를 어찌 하겠는가? 내가 수만의 무리를 데리고 산동(山東, 태행산 동쪽)을 평정하였고, 지금 이 작은 야만인을 만났는데 이들을 피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사해(四海)에 다가갈 수 있겠는가?"
마침 폭설이 열흘 동안 내려서 평지에 수 척(尺)이 쌓였고 거란의 사람들과 군마가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사람들이 길에 서로 줄을 이었다. 거란주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노문진(盧文進)에게 말하였다. "하늘이 아직 나로 하여금 이곳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구나!" 마침내 북쪽으로 돌아갔다. 진왕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뒤밟아 그들이 가다가 머무는 대로 따르다가 그들이 들판에 유숙하던 곳을 보니, 땅바닥에 볏짚을 깔고 있는데 빙 둘러있는 것이 바야흐로 네모반듯하여 모두가 잘라서 엮은 것 같았으며, 비록 떠나면서도 한 나뭇가지라도 어지럽힌 것이 없었으니, 탄식하며 말하였다. "야만인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마침내 이와 같을 수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구나!"
대봉왕(大封王) 궁예(躬乂)는 성격이 잔인하였는데, 해군(海軍)통수인 왕건(王建)이 그를 죽이고 자립하여 다시 고려왕(高麗王)이라 칭하고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이라 하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왕건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너그럽고 온후하여 그 나라의 사람들이 이를 편안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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