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표현.이해 고전의세계 리커버
빌헬름 딜타이 지음, 이한우 옮김 / 책세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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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세계의 연관(聯關, Zusammenhang)은 주관(主觀, Subjekt)에서 시작되며, 개개의 논리적인 과정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는 정신적 세계의 의의연관(意義聯關, Bedeutungs-zusammenhang)에 대한 규정에까지 이르는 정신의 운동이다. 그래서 이 정신적 세계는 파악하는 주관의 산물인데, 한편으로 정신의 운동은 그 세계 안에 있는 객관적 지식의 획득을 지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주관에서 정신적 세계의 구성이 어떻게 정신적 현실〔혹은 실재〕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해주는가’라는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25/210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 ~ 1911)의 <체험, 표현, 이해>는 빌헬름 딜타이의 《전집》 제7권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 구축》 가운데 <제3부-제1장 체험·표현·이해>를 옮긴 것으로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의 책이지만, 딜타이가 생각하는 해석학의 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순수이성비판>에서의 논의를 외부세계의 물자체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딜타이의 관심은 외부가 아닌 인간 내부를 지향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에서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가 체험 Erlebni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일성이다. 왜냐하면 그 흐름은 하나의 통일적인 의의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아가 생애에 대한 공동의 의의를 통해 서로 연결되는 삶의 부분들의 모든 포괄적인 통일성을 ‘체험‘이라고 부른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31/210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체험‘을 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와 긴밀한 관련을 갖는 체험은 유한함과 특수성을 함께 갖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술어‘가 나타나는데, 개인의 특수화된 술어는 정신적 세계의 운동을 통해 보편성과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삶의 표출 - 표현이다.

체험에서는 체험연관의 일반적 술어들이 특정한 개인에게서 생겨난다. 그 술어들이, 이해하려는 삶의 객관화와 정신과학적인 진술의 모든 주관들에 적용됨으로써, 그 술어들의 타당성 범위는 정신적 삶이 영위되는 곳이라면 어디서건 작용연관, 힘, 가치 등이 드러날 때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이런 일반적인 술어들은 정신 세계의 범주들이 지니는 존엄성을 갖게 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28/210

<체험, 표현, 이해>에서 딜타이는 삶의 표출을 세 종류로 나눈다. 첫 번째 종류는 개념, 판단, 추리, 두 번째 종류는 행위, 세 번째 종류는 체험표현으로, 이러한 다양한 다양한 표출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주관적인 개별 체험으로부터 객관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한 인간은 문학과 진리 속에서 자신의 실존과 보편적/역사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는 문학 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시대를 꿰뚫어본다. 그는 그 시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담담하게 자부심을 갖고 바라본다. 그래서 삶을 회고하는 고령의 작가에게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은 이중적 의미로 해석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40/210

정신과학에서 결정적인 개념! 정신과학이 도달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전체, 연관과 연결시킨다. 언제나 그 안에는 자명한 것과 같은 상태들의 존립이 포함된다. 그러나 역사학은 변화들을 이해하고 표현하려 하기 때문에 에너지, 운동 방향, 역사적 힘의 전환 등을 표현해주는 개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역사학의 개념들은 이런 성격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대상의 본성을 잘 표현하게 된다. 삶과 역사의 이 모든 범주들은, 체험 가능한 것에 대한 진술에서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신과학적인 영역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진술의 형식들이다. 이것들은 체험 자체에서 나온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48/210

딜타이는 <체험, 표현, 이해>에서 이해는 실천적인 삶 속에서 서로간의 대립적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과학의 대상이 외부에 있는 자연과학의 물(物)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과학에서 대상은 원인-결과의 법칙에 따른 참-거짓의 판단 대신 진실한가와 그렇지 않은가의 판별대상이 된다. 딜타이는 본문을 통해, 엄격한 판별의 기준을 통해 우리는 문학작품으로부터 인류역사의 법칙을 도출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체험, 표현, 이해>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집 중 극히 일부 파트만을 옮겨왔기에, 깊이 있는 내용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다만, 자연과학에서 출발한 <순수이성비판>과는 다른 출발점에서 정신과학을 바라봐야한다는 딜타이의 관점과 현실안에서 실존, 그리고 실존으로부터 출발한 정신과학의 체험-표현-이해의 순환 구조 속에서 주관성이 객관성을 획득한다는 큰 흐름을 이해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이해는 항상 자신의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개체를 갖고 있다. 그리고 더 고차적인 형태들에서 이해는 이제 하나의 작품이나 삶에 함꼐 주어진 것의 귀납적인 총괄에서부터 하나의 작품이나 인격체 또는 삶의 관계에 있는 연관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제 우리 자신의 체험과 이해에 대한 분석에서 정신적 세계에서의 개체는 자기 가치, 즉 우리가 확실하게 확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 가치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63/210

이제 우리가 이해의 작용에서 두 가지, 즉 정신적 삶과 그 상황을 개별화의 외적인 원리로서의 환경을 통해 변화시키는 것과, 구조의 계기들의 상이한 강조를 통해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작동시킬 수 있다면, 인간의 이해, 즉 문학 작품들에 대한 이해는 삶의 거대한 비밀에 이르는 통로가 될 것이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66/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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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10-28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게 완역이 아니라 챕터 일부만 번역한 것이지만 딜타이 사상을 맛보기에는 괜찮았던 거 같아요. 주더들이 깔끔한 번역을 빨리 번역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겨울호랑이 2022-10-28 18:22   좋아요 1 | URL
네, yanoo님 말씀처럼 딜타이 사상의 큰 흐름을 잡기에 좋은 요약서라 생각합니다. 하이데거를 보다 깊이 읽기 위해서라도 딜타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독서였습니다. yamoo님, 즐거운 금요일 저녁 보내세요!
 

스트레스 테스트는 미국 금융의 전망에 대한 해석을 민간인이나 시장이 아닌 정부가 선택한 감독관들이 강제로 실시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또한 스트레스 테스트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사업의 영역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 승인이 필요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스트레스 테스트는 종합적이고 선행적인 감독이라는 새로운 제도일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기관과 거대 은행들 사이의 복잡하게 뒤엉킨 모형을 제시한 것이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과 일반 중산층 사이의 빈부격차가 터무니없을 만큼 벌어지기 시작했다. 거대 은행들은 구제자금을 지원받았다. 일부 가장 악랄하고 파렴치한 경영자들은 법정에 서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 자체가 파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곧 일선에서 물러나 편안하고 안락한 은퇴생활을 즐겼다.

골드만삭스가 주주들에게 벌어다준 배당금은 134억 달러였지만 경영진이 받아간 급여와 수당은 162억 달러에 달했다. 놀랍게도 2009년 160억 달러의 손실을 보고 정부 지원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던 씨티그룹조차 50억 달러를 수당으로 지급했다. 은행가들은 과거를 그렇게 흘려보내는 것이 행복했겠지만 일반 국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종합해보면 도드-프랭크 법안은 금융 분야와 관련된 398개의 새로운 규정들을 만들어 지키도록 규제감독 기관들에게 요구한 셈이다. 각각의 규정들은 관련 이익단체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는 로비활동의 목표가 되었다. 이 단체들은 이제 의회 바깥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은행 위기는 계속해서 발생했고 그때마다 은행은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 전략을 통해 정부와 국민을 설득했다. 결국 정부와 납세자들은 은행의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 선전에 넘어가 한낮 자금줄 신세로 전락했다.

사실 한 국가의 채무 재조정은 바라고 안 바라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어려운 문제다. 혼란스럽고 그러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이런 과정을 어떻게든 늦추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건 신용을 유지하는 것이다. 채무 재조정 가능성을 입 밖에 내는 일만으로도 공황상태를 불러일으키고 단기자금조달 중단과 즉각적인 국가부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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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 계회도나 동관 계회도의 제작이 관료 사회 전반에 만연하였던 현상이었다면, 사가기록화의 제작은 하나의 관행이 될 만큼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관직, 번성한 자손의 존재, 서화의 효용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 제작 경험, 제작 비용을 충당할 경제력 등 그림 제작에 이를 만한 환경과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중기록화나 관청기록화와는 달리 사가기록화를 제작하고 후원했던 사람들은 일정한 경향성을 보인다. 사가기록화의 제작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경상도 즉, 영남 지방에 기반을 둔 사족들이며 다른 하나는 한양을 중심으로 명문가를 형성한 경화사족들이다.

다시 말해 사가기록화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장수·높은 관직·가문의 번성 등 크게 세 가지로 함축되는데, 이는 사가기록화를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양반 관료들은 조선 사회가 자신들에게 요구했던 유교적 가치를 사가기록화라는 매체를 통해 나타내려 했다. 유교 사회에서는 어느 장소에서나 관작·나이·덕망[三達尊]이 존중되었으며
10 사람들은 ‘큰 덕德을 지니면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으며 명성을 얻고 수명을 누린다’는 『중용』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겼다

양반층을 중심으로 한 관료 지배 체제에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직이었으며, 관직 진출을 위해서는 과거 급제가 절대적인 순서였다. 고위 관료가 되어 가문의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조상을 영광되게 하는 효의 실천은 양반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사가기록화는 유교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한 본인과 조상의 자취를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후손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제작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시대 양반 관료들이 평생 이루려고 노력했던 세속적 욕망이 투영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제작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지역성이다. 제작을 이끌어간 두 축은 크게 영남 지방의 사족과 한양을 중심으로 명문을 이룬 경화사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16세기 이래 사가기록화를 제작하고 보존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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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행정부로서는 자신들이 마주할 양극화된 적대적 감정의 골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임 후 얼마 되지도 않아 공화당 의원 대부분이 사실상 오바마 행정부의 정당성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오바마가 미국 본토에서 태어난 미국 국민이 맞는지에 대한 "출생"의 음모와 관련된 불신이 깔려 있었다.

2009년 경기부양책을 실시한 국가들 중에서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재정 조치 규모는 유럽을 능가했다. 그리고 그만큼 성과를 거두었다. "새롭게 등장한"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순진한" 케인스학파의 "공공 투자를 통한 경기부양책"을 반대하는 복잡한 경제 관련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뢰할 만한 통계와 계량경제학 분야의 연구들에 따르면 오바마 행정부의 경기부양책은 미국 경제에 실질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010년과 2012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휘청거리는 경제와 되살아난 공화당의 역습이라는 어려움을 안고 싸워야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시대 이후 만들어졌던 것과 같은 일평생 변치 않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한 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2009년 하원과 상원 모두에서 다수당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무렵 왜 오바마 행정부는 더 많은 예산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금융안정화에서 총력전이 가장 좋은 전술이라면서 왜 재정정책에서는 시원스럽게 예산을 쏟아붓지 않았던 것일까?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공공 부문 부채는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세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정치적으로 큰 압박이 될 것이며 자본시장의 반응도 신경이 쓰인다. 또한 전통적인 재정보수주의의 이론에 따르면 즉각적이고 심각한 시장의 반동 역시 예상되었다.

민간 부문이 부채 감소의 효과를 경험하고 있을 때, 그리고 저축률이 2009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오르고 있을 때 국가경제에서 전체적인 재정균형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건 정부가 나서서 재정 적자를 줄여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불경기가 있어야 사람들은 저축의 중요성도 깨닫는다. "금융의 기능적 능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1940년대 이후 계속해서 주장해온 것처럼 국가나 정부는 최종차입자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런 과정에서 국가나 정부는 수요를 유지하고 안전한 장기 채권을 금융시장에 공급해야 한다.

오바마 행정부의 모든 중기 우선순위 정책은 정부의 군살을 빼고 지출을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안은 건강보험 개혁이었다. 건강보험 개혁이 유럽식 사회주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공화당에 의해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고는 해도 이미 국가 지원의 비효율성이 극에 달하면서 영리 중심의 민간 건강보험 산업의 규모가 GDP 대비 17퍼센트까지 성장했고 이는 금융 관련 산업 규모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따라서 새로운 오바마케어, 혹은 환자보호 및 부담적정 보험법(Pati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의 최우선 목표는 관련 비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2009년이 되자 이제는 더 이상 투자은행이 문제가 아니었다. 투자은행들은 다시 정상 궤도로 올라섰고 문제는 위기에 빠진 일반 시중은행들이었다. 씨티그룹은 그중에서도 상태가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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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선구자들은 시속 3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초고속 열차만 개발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엄청난 규모의 건설계획을 통해 확장되고 있는 규모의 경제는 중국을 고가도로와 철로 건설의 기술 선도자로 만들고 있었다.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2008년 하계올림픽의 뒤를 이어 중국의 경기부양책의 규모와 그 진행 속도는 공산국가 특유의 뛰어난 기동성을 다시 한번 입증해주었다. 여러 서방 국가들의 지지부진한 모습과 비교하면 중국의 그런 모습에 부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버락 오바마는 후보 시절에도,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중국의 놀랄 만한 사회기반시설 건설 속도와 규모를 자주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모습들도 겉모습 아래 감춰져 있는 긴장감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사실 중국의 경기부양책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여러 전문가들의 말처럼 서구사회의 위기를 통해 힘을 얻은 중국의 경제는 정확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분명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엄청난 규모의 정책들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문제는 이를 위한 예산이 어떻게 조달되었나 하는 것이다. 예산 조달은 모든 "경기부양책"의 핵심이다. 만일 세금을 올려 필요한 재원을 조달했다면 일반 국민들의 구매력은 전혀 올라가지 않는다. 채권 발행을 했다면 민간 부문의 저축을 흡수했다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반 국민들이 다른 투자를 멀리할 우려가 있다. 만일 경기부양의 목적이 침체된 경제를 빠르게 다시 살려내는 것이라면 신용창조야말로 경기부양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중국 당국의 경기부양책이 특별히 효과가 있었던 건 엄청난 규모의 정부 지출과 대규모 통화완화 정책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2008년의 위기를 통해 깨달은 또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중국이 수출의존형 국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서구 국가들과 서로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사실이다. 중국은 많은 부분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지만 결코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2000년대 이후 미국의 목표는 중국을 "책임감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질문은 바뀌었다. 일련의 위기 상황에서 중국이 알고 싶었던 것은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2000년대 초반 이후 한국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려 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통화와 자본의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한국 금융업의 상당 부분을 해외 투자자들이 소유했으며 한국의 은행들은 도매금융 자금조달 방식이라는 새롭지만 불안정한 방식으로 전 세계 달러시장에서 단기로 자금을 빌려와 한국 내에서 고금리로 장기간 투자를 했다.

2008년 가을 한국이 보여준 위기 탈출 동원력은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철강업체 포스코나 현대자동차, 그리고 삼성전자 같은 주요 수출제조업체들은 수천만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어 원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려고 했다. 한국 정부의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자발적으로 은행 채권을 매입해 자금조달 문제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현대건설 회장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이명박은 수입할 수밖에 없는 석유 사용을 줄이고 개인들의 달러 저축을 원화 방어에 활용하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나섰다. 환전소 앞에 길게 늘어선 국민들의 호응은 애국심의 발로인 동시에 현재 처한 상황의 급박성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한편 한국은행은 외환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원화의 붕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이런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도움은 역시 밖으로부터 왔다. 10월 30일 한국은행은 미연준과 30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다고 발표한다. 이를 통해 한국은행은 필요한 만큼의 달러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다극화된 세계 경제의 복잡한 현실을 반영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새로운 조직의 완전한 일원이 되었다.

브라운 수상으로서는 당혹스러운 결과였지만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 재무부 장관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목소리로 반대의견을 냈다. 독일과 프랑스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뿐더러 좀 더 중요한 국제적 현안들을 뒤로 미루기 위해 이용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의 시장에서의 행위들이 이제 세계 경제로 시선이 옮아감에 따라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다." 미국은 다른 국가들의 무역수지 흑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지 위기에 빠진 자국 은행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싶었던 것이다.

금융위기로 국제금융에 대한 달러화의 영향력이 약해지기는커녕 실제로는 더 강해졌던 것이다. 통화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서의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한 수요 덕분에 달러화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연준은 통화스와프 협정을 통해 모든 글로벌 은행시스템의 유동성 공급을 뒷받침했다.

2008년과 2010년 사이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된 지출 내역은 총 1조 8700억 달러 혹은 구매력지수 환산으로 2조 4000억 달러에 달한다. 그것도 재량 지출과 긴급 조세 감면 조치만 계산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5조 달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지출이 어떻게 분배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계산하든 금융위기에 대해 가장 극적으로 대응한 곳은 역시 아시아와 신흥시장국가들이었다. 러시아와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브라질, 아르헨티나는 이제는 정말로 실질적인 재정정책 대응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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