洋)The Economist 2022年 10月 28日號
日販IPS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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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conomist 지의 10.29 참사 관련 기사 내용을 옮겨본다.

기사는 지난 10.29일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를 보도하면서, 왜 아시아에서 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사고가 일어나는가, 지난 4.16 참사를 통해 많은 희생자를 낸 한국에서 또다시 참사가 일어났지만, 여전히 제기되는 의문에 제대로 답하고 있지 못한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익명의 관계자 전언만 옮기고, 오탈자까지 복사해서 붙이며, 자극적인 사진과 기사를 통해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한국 언론의 현실을 외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부와 한국 언론은 당신들이 만들어 놓은 무한 경쟁의 틀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높아진 생존 능력으로 수준 미달의 저널리즘을 보여주는 한국 언론 대신 외국 언론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제대로 인지하기 바란다... 아래는 기사 번역문이다. 전문 번역가가 아닌 관계로 일부 오역이 있을 수 있는 점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바라며, 부족한 부분은 첨부한 원문으로 대신하시길...

[출처] https://www.economist.com/asia/2022/11/03/when-a-disaster-shakes-a-country-political-leaders-face-peril

When a disaster shakes a country, political leaders face peril
The tragedies in Itaewon, Malang and Morbi will test governments

재난이 나라를 뒤흔들 때, 정치 지도자들은 위험에 직면한다.
이태원, 말랑, 모르비의 비극은 정부를 시험할 것이다.

Two days after the tragedy, the streets of Itaewon were silent, save only for the whirring clicks of news cameras. In their frame was the alleyway in which a crush of bodies left more than 150 people dead. At the subway-station entrance white chrysanthemums had been left in memory of the victims.

참사 이틀 후, 이태원의 거리는 뉴스 카메라의 윙윙거리는 클릭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프레임 안에는 15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골목이 있었다. 지하철역 입구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하얀 국화들이 놓여 있었다.

South Korea remains in shock over the events of October 29th, when some 130,000 people flocked to a nightlife district of Seoul, the capital. Many more came than the authorities expected. As the night progressed and the numbers swelled, those crammed into steep, narrow streets were trapped. A weight of humanity caused some in the crowd to fall, triggering a domino effect. Others, unaware of what was happening, continued to pack in. No stewards were around to prevent the tragedy.

한국은 수도 서울의 유흥가에 13만여 명이 모여든 10월 29일의 사건으로 충격에 빠진 상태다. 당국의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왔다. 밤이 깊어지면서 사람들의 숫자는 불어났고, 가파르고 좁은 거리에 들어찬 사람들은 갇혔다. 사람들의 무게로 일부 군중이 쓰러지면서 도미노 현상이 촉발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지 못한 다른 이들은 계속 몰려들었다. 비극을 막을 관리자는 주변에 없었다.

Few countries have not suffered similar - avoidable - tragedies. Yet Asia appears to have more than its fair share. One explanation is self-evident: the region has more than its fair share of the world‘s people, so human disasters are more frequent. The day after the Itaewon calamity, a river bridge in Morbi in Gujarat, the home state of India‘s prime minister, Narendra Modi, collapsed, killing at least 135, most of them women, children and the elderly. In early October a human crush at a stadium in Malang in Indonesia led to 131 deaths.

비슷한 - 피할 수 없는 - 비극을 겪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러나 아시아는 공정한 몫 이상을 가지고 있는 둣하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시아는 세계 사람들의 공정한 몫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명 참사가 더 빈번하다. 이태원 참사 다음 날, 인도 총리 나렌드라 모디의 고향인 구자라트의 모르비에 있는 강 다리가 붕괴되어 적어도 135명이 사망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10월 초 인도네시아 말랑의 한 경기장에서는 사람들의 충돌로 131명이 사망했다.

In Morbi the colonial bridge had just been reopened with a view to attracting tourist crowds. In Malang police precipitated panic when they fired tear gas at fans invading the pitch - a response long banned by football‘s global governing body. So another part of the explanation for so many Asian disasters flows from the pace of the region‘s march to modernity. Poor infrastructure, safety protocols or policing practices fail to keep up with fast-growing economies and populations which are both more mobile and ready for more varied experiences.

(인도네시아의) 모르비에서는 식민지시대의 다리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최근 재개장했다. 말랑에서 경찰은 경기장에 침범하는 팬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공황상태를 촉발시켰다 - 이러한 대응은 오랜 기간 국제축구협회에서 금지되어왔다
. 많은 아시아 재난에 대한 또다른 설명은 이들 지역의 근대화 속도다. 열악한 인프라, 안전 규칙 또는 치안 관행은 보다 유동적이고 다양한 경험이 준비된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와 인구를 따라잡는데 실패했다.

It is in that gap that political peril lies. Nowhere was this clearer than with South Korea‘s last big catastrophe. In 2014 a ferry, the Sewol, capsized on its way to the holiday island of Jeju. Some 300 people died, most of them schoolchildren. The vessel was overloaded. Corrupt regulators had turned a blind eye to unseaworthy modifications. The crew abandoned ship before the passengers. The then president, Park Geun-hye, failed to appear in public for hours. It turned out she even urged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to track critics of the official response. Public outrage led to protests and opened the door to ever greater anger against her. She never recovered politically.

바로 그 사이에 정치적 위험이 자리한다. 한국의 마지막 큰 참사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2014년 휴양지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됐다. 약 300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 중 대부분은 초등학생이었다. 그 배는 과적되었다. 부패한 규제 기관들은 항해에 적합하지 않은 수정안을 외면했다. 선원들은 승객들에 앞서 배를 버렸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몇 시간 동안 대중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국가정보원에 공식 대응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추적하라고 촉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중의 분노는 시위로 이어졌고 그녀를 반대하는 더 큰 분노의 문을 열었다. 이후 그녀는 정치적으로 회복할 수 없었다.

Few leaders are as detached from their electorate as was Ms Park. Others responding to a calamity acknowledge its scale but seek to find fault elsewhere. Mr Modi visited a local hospital in Morbi and chaired a meeting there to review the disaster. At the same time, the state government, also run by his party, was quick to shift the blame onto the town government and private contractors. Gujaratis will have the chance to express their views in an election next month.

박대통령만큼 유권자들과 유리된 지도자는 거의 없다. 재난에 대처하는 다른 지도자들은 재난의 규모를 인정하는 대신 다른 지점에서 결점을 찾으려 한다. 모디 총리는 모르비 지방 병원을 방문했고 재난 검토 회의를 주재했다. 이와 함께, 집권당이 주도하는 주 정부는 빠르게 시 정부와 민간 건설업자들에게 참사 책임을 전가했다. 구자라티 주민들은 (이러한 처리에 대해) 다음 달 자신들의 견해를 투표로 보여줄 것이다.

Pressure for accountability mounts in ways that can pose risks for leaders. Many questions surround the Malang disaster in Indonesia: what were the police thinking by using tear-gas? Why were only four paramedics on duty? The Indonesian president, Joko Widodo, has forged close ties with the national police, who have helped him politically. At first he seemed to favour an internal police inquiry. That led many Indonesians to think that, absent such ties, he would have acted differently to ensure accountability, says Aaron Connelly of the London-based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The president did then change course, approving a more independent inquiry. But it was not enough to prevent a sharp slide in his ratings.

책임에 대한 압력은 지도자들에게 위험을 초래할 정도로 가중된다. 인도네시아의 말랑 참사를 둘러싸고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 경찰이 최루탄을 사용한 의도는 무엇인가? 단지 4명의 구급대원만 근무중인 이유는 무엇인가? 인도네시아 대통령 조코 위는 자신을 정치적으로 돕고있는 국가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처음에 그는 경찰 내부 조사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애런 코넬리는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책임을 보장하기 위해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 후 대통령은 보다 독립적인 조사를 승인하면서 노선을 변경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그의 지지률이 급격하게 하락하는 것을 막기에 충분치 못했다.

Back in Seoul, and reflecting the national mood, the South Korean president, Yoon Suk-yeol, said that ˝my heart is heavy and I struggle to cope with my grief.˝ He has promised a memorial to Itaewon‘s victims, as well as an inquiry. Yet more questions are raised about the tragedy than are yet being answered. Above all, how could a police force that dispatches dozens of officers to even the smallest protests be so unprepared?

다시 서울 이야기로 돌아오면, 한국 대통령 윤석열은 국민 정서를 반영하여 ˝마음이 무겁고 슬픔에 대처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태원 희생자들을 위한 조사 뿐만 아니라 추모를 약속했다. 그러나 참사에 대해 아직 대답되지 않은 것보다 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소규모의 시위에도 수십 명의 인원을 파견하는 경찰력이 그처럼 준비가 안 될 수 있을까?

As for Mr Yoon himself, he has needlessly squandered political capital and goodwill during the few months he has been in office. That makes his job harder now. Still, a leader who applies balm to a country‘s wounds, and who provides reassurance that lessons will be learned, can unite a country. How Mr Yoon acts now will shape the rest of his presidency.

윤 대통령 본인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재임한 몇 달의 허니문 기간 동안 불필요하게 정치적 자산과 그에 대한 호의를 낭비했다. 이같은 사실이 지금 그의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그래도 리더가 국가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교훈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준다면, 국론을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윤 대통령의 행보가 그의 남은 임기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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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1-06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현상유지만 해주
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뭘 더 하려고 하다가, 김O태
사태 꼴이 나는 건 더 이상
못봐주겠네요.

겨울호랑이 2022-11-06 21:15   좋아요 2 | URL
레삭매냐님 말씀에 매우 동감합니다. 문제는 가야할 방향과 정확하게 반대방향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전력질주를 하니 참 답답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은 프로그래머가 아니더라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다. 의사소통을 하고, 정보를 검색하고, 문화 생활을 하거나 창작 활동을 하는 데 굳이 코딩 능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그저 개발자들이 이미 목적에 맞게 코딩한 결과물인 프로그램이나 애플리케이션을 다룰 수 있으면 된다.

우리가 살아가고 감각하는 생물학적 세계는 바로 모니터나 스마트폰 액정에 띄워진 화면처럼 생물들이 지닌 갖가지 프로그램이 실행된 출력값의 세계, 즉 ‘표현형phenotype’의 세계다. 표현형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생명체의 모든 것이다. 표현형의 세계를 살아가는 생명체는 자신이 구동하는 프로그램의 코드를 이해하지 않고도 프로그램을 작동시킨다.

유전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전자형을 결정하는 유전체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유전체에 들어 있는 생명 프로그램의 눈부신 활약, 즉 ‘표현형’의 세계에 떠오른 생명 현상에 대한 온전하고 통합적인 설명을 해내는 것이다.

‘새로운 종은 어떻게 출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다윈의 대답을 요약하면 "자연에는 변이가 존재하고, 그 변이들 사이에 제한된 자원을 두고 경쟁이 일어나며, 환경에 더 잘 적응한 변이가 자연선택되고, 그러한 변이들이 누적된 결과 종의 점진적인 진화가 일어난다."라는 것이다. 이 대답에서 잘 드러나듯, 변이는 멘델의 유전학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에서도 필수불가결한 핵심 요소이다.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므로 전기적으로 서로 밀어낸다. 이들을 핵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전기력을 이겨낼 추가적인 힘이 필요한데, 이 힘이 핵력이다. 중성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라 전기력을 느끼지 못하므로, 핵력을 보강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지구상 모든 에너지의 근원은 별이다. 별이 내는 빛, 별이 만들어낸 무거운 원자들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전부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이거다. 별은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어내는가? 태양이라는 별의 부피는 지구의 120만 배에 달한다. 이렇게 거대한 태양의 에너지원은 원자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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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과 스탠더드앤드푸어스의 결론은 같았다. 유럽은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유럽은 국채시장과 은행 자본재구성과 관련된 기본적인 불안정성을 정면에서 다루지 않았고 2010년과 마찬가지로 다시 유럽 문제에 IMF를 끌어들였다. 그리스의 채무불이행 사태를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채무 재조정을 시작했다. 꼭 필요한 일이긴 했으나 그리스 채권자들에 대한 헤어컷 적용은 채권시장에 대한 압박의 수위만 높여주었을 따름이다.

재무부 장관들과 중앙은행 총재들의 회담에 대한 IMF 보고서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세계 경제에 대한 "중대한 위험"은 세계적으로 심화된 "절약의 역설"이라는 것이었다. 전 세계의 가계와 기업과 정부가 한꺼번에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고 나섰고 그 때문에 경기침체의 위험이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보고서의 내용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진다. "이러한 위험은 취약한 금융시스템, 높은 공공 부문 적자와 채무, 그리고 이미 낮아진 금리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고 이로 인해 특히 유로존 지역에서는 낙관주의나 비관주의가 낳은 결과물들이 계속해서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돌이켜보면 마리오 드라기가 "어떤 노력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가 유로존 위기의 전환점이었다. 그의 발언 이후 시장은 급속도로 안정되었고 취약한 국가들이 발행한 국채 대부분은 시장금리가 정상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유로존 붕괴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깊은 호소력을 지닌 설명이었다

연준은 우선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기관 채권을 매달 400억 달러어치씩 매입하기로 약속했다.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연준이 "노동시장 전망에 실질적인 개선"을 확인할 때까지 매입을 계속한다는 점이었다. 또한 거기에 덧붙여 FOMC는 실업률이 6.5퍼센트 이하로 내려가고 연준의 물가상승률 전망이 2.5퍼센트 미만이 될 때까지 연방기금금리를 0퍼센트에 가깝게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2년 12월 12일 FOMC는 다시 매달 채권 매입 규모를 400억 달러에서 850억 달러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제3차 양적완화 조치는 이렇게 상황에 따라 변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무한 양적완화"라는 유명한 별칭이 붙기도 했다.

유로존 위기는 유럽 정부들이 막대한 규모의 정치적 자본을 투입함으로써 멈출 수 있었다. 즉, 그리스 채무 재조정, 재정 협약, 유럽 은행연합, ESM, 그리고 유럽중앙은행의 OMT 같은 새로운 조치들이 큰 역할을 했다. 유로존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측한 사람들은 유럽 정부들이 할 수 있는 이런 투자 규모를 잘못 판단한 셈이다. 그리고 마리오 드라기가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미국은 새로운 형태의 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다시 한번 주장한다. 그리고 유럽은 1947년 이후 미국의 지도 아래 시작했던 유럽의 미국화를 다시 한번 추진한다.

국제 경제 정책에 관한 한, 2012년 11월의 오바마의 승리와 벤 버냉키의 제3차 양적완화, 마리오 드라기의 연설이 하나로 합쳐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종결지었다고 볼 수 있다. 중도 진보진영의 위기관리 능력이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21세기와 다양성, 개방성, 전문가 위주의 실용주의가 이제 함께 나아갔다.

유럽에서는 결국 유로존이 살아남았고 마리오 드라기의 선택이 옳았다. 위기를 바탕으로 유럽통합의 과정은 더 중요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역시 거기에는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대가가 필요했다.

독일 재무부 장관 볼프강 쇼이블레는 아예 총선을 치르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늘 그렇듯 직설적으로 제안했다.8 그리스의 민주주의 절차를 잠시 연기함으로써 유권자들이 뭐라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전에 핵심 조치들을 취하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제안은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어떤 징조가 되었던 것이 래리 서머스가 2013년 11월 IMF에서 했던 연설이다.8 연설의 주제는 경기회복과 엄청나게 실망스러운 회복 속도였다.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아마도 유럽을 불황에서 구해내고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며 자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2010년 이후 유럽의 경제사정은 오히려 더 나빠졌으며 미국은 역사상 가장 느린 회복세를 보였다.

돌이켜보면 2008년 이전에는 통화정책이 "지나치게 완화적"이라는 데 사람들이 다 동의했다. "엄청난 규모의 대출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경험했던 것처럼 돈이 실제보다 더 많다고 믿었다. 너무 많은 돈을 빌리고 또 너무 쉽게 썼으며 그만큼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다면 미국 경제는 엄청난 호황이 이어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부동산 시장이 위험할 정도로 과열되었지만 2008년 무렵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수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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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아이테토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6
플라톤 지음, 정준영 옮김 / 이제이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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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d 그렇지만 말이야, 그것들과 관련해서 다른 것들은 제법 이해하고 있네만, 사소한 어떤 것에 대해서는 난관에 봉착해 있네. 자네를 비롯해 여기 있는 이들과 더불어 검토해 봐야 할 게 바로 그것이네. 그럼 내게 말해 보게. 배운다는 건 배우게 되는 것들에 관해 더 지혜롭게 되는 것 아닌가?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78


 이렇게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의 사소한 어떤 것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테아이테토스 Theaetetus>는 시작된다. <테아이테토스>가 던지는 질문은 "앎(지식)이란 무엇인가"이다. 젊은 테아이테토스와 문답을 통해 진행되는 논의에서 처음 '앎=지각'이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외부 자극을 일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로부터 앎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최초의 논의다. 그렇지만, 이러한 명제는 곧바로 반박된다.


152c 뜨거운 것들이나 그런 모든 것들에서 나타남과 지각은 동일하네. 그것들은 각자가 지각하는 그대로 각자에게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일세. 그러므로 지각은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것이며, 앎인 한에서 틀리지 않는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92


 누군가에게 '큰 것'이 다른 이에게는 '작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을 때, 우리는 '큼'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무엇을 안다'에서 그 무엇이 상대적인 양태로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제기되며, 이 과정에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90/485 ~ BC 415/410)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가 함께 비판된다. 참된 앎이 지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오는가?


157a 그 자체가 그것 자체로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들은 서로 간의 교섭 속에서 생겨나 움직임을 통해 온갖 것들로 된다고 말일세.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작용을 가하는 쪽에 대해서도 작용을 받는 쪽에 대해서도 그것들을 따로따로 취해서 어떤 것으로 있다고 단정적으로 사유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01


 182b 그 어떤 지각에 관해서든, 이를테면 봄에 관해서나 들음에 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대체 봄이나 들음 자체 속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보지 않음이라고 하기보다 봄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며, 어떤 것을 지각 아님이라고 하기보다 다른 어떤 지각이라고 불러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나와 테아이테토스는 지각은 앎이라고 말했습니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56


 이제 참된 앎은 추론에서 온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모든 추론이 '앎'인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테아이테토스에 의하면 오로지 참된 판단만이 우리가 대상을 제대로 알게끔 하는 것이며, 거짓된 판단은 '무지(無知)'에 다름아니다. 마치 새장 안에 새를 넣어 우리가 소유하듯이, 우리가 상기를 통해 영혼이 알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참된 판단에 의한 추론이다. 또한, 단순히 '이름'만 가질 수 있는 요소들과는 달리 '이름'과 함께 '서술'될 수 있는 복합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서술'만이 참된 앎을 표시할 수 있는 것이며, 서술 될 수 없는 것은 앎(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식될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요소에 의해 서술 될 수 있는 특징이 있고,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된 것들은 참된 앎인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면서 <테아이테토스>는 아포리아(Aporia)로 막을 내린다. 이 아포리아는 무엇인가?


186c 몸을 통해 영혼에 이르는 모든 경험들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태어나자마자 자연적으로 지각하게 되어 있지만, 그런 경험들을 있음과 이로움의 측면에서 헤아린 결과는 그런 것이 누구에게 생기게 되더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애를 쓰고 교육을 받아야 가까스로 생기게 되지 않겠나? 앎은 경험들 속에 있지 않고, 그런 경험들과 관련된 추론 속에 있는 것일세. 추론 속에서는 있음과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나, 경험 속에는 그게 불가능한 것 같으니까.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65


199e 맞아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우리가 새들을 '앎'으로만 놓았을 때 아마 그건 제대로 한 게 아닐 겁니다. '모름'들도 영혼 속에서 함께 여기저기 날아다닌다고 놓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사냥하는 자는 어떤 때는 '앎'을 붙잡고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어떤 때는 모름을 붙잡기도 하는데, 거짓된 판단은 '모름'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이고 참된 판단을 '앎'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어야 했습니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95


 202c 복합체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이면서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 없이 참된 판단을 취할 때면,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된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나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세. 설명을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과 관련해서 앎이 없는 자이니까. 반면에 설명을 추가로 얻은 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앎에서 완벽하게 되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00


 그것은 지각으로부터의 개별적 인식이 추론에 의한 보편적 인식과 합치되는가를 검증했을 때 비로소 참된 앎의 과정이 완결된다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참된 앎이란, 이데아(idea)와 같은 형상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리적인 세계(가상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참된 앎이 아닌 것이 아니지 않은가?


 209c 내가 생각하기로, 테아이테토스의 이런 들창코의 상태가, 내가 목격한 다른 들창코의 상태와 차이가 나는 어떤 것을 새겨 주고서 기억상을 남겨 주기 전까지는, 테아이테토스가 내 안에서 판단의 대상으로 되지는 못할 것 같네. 그리고 자네의 모습을 이루는 다른 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7


 209d 이보게, 설명을 추가로 포착한다는 게 차이성을 판단하라는 게 아니라 인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라면, 앎에 관한 설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런 설명은 그것 참 즐거운 것이기도 할 걸세. 그러니 앎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차이성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라는 답변이 제시될 것 같네. 우리가 앎을 찾을 때, 차이성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런 것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을 앎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일세.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된 판단도, 참된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8


 결국,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논의는 참된 앎이 지각과 추론과 서술을 통해서 형상과 질료의 차이성을 밝히는 것이라는 결론과 이 결론 안의 순환구도 속에서 논의가 마무리된다.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미진한 결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앎'이 가리키는 바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는 <파르메니데스>와 연결되며 서양 철학사에 인식론과 존재론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이들 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테아이테토스>를 정리한 이번 리뷰와 함께 이에 대한 답은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이,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답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 1976)의 답으로 정리한 페이퍼로 짝을 맞추려 한다.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에게는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 ~ BC 19)와 같은 스승이 있었다면, 러셀과 하이데거는 인식론과 존재론이라는 지옥을 안내할 스승이 되줄것인가. 개인적으로는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가 더 좋겠지만, 세상일은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니 불만은 없다...

177e 이름을 말하지 말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을 바라보게 해야 하니까요. 그 이름으로 무슨 대상을 가리키든 간에, 나라는 확실히 그 대상을 겨냥해서 입법을 하며, 모든 법을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것들로 제정합니다. 나라가 그 법을 자신에게 가능한 한 이로운 것들이라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나라가 다른 어떤 것을 주시하고서 입법을 할까요? 우리는 입법을 할 때, 나중의 시간에 법이 이로운 것들로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정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장차‘라고 하면 제대로 말하는 것이 될 겁니다. - P146

189a 어떤 것을 만지는 자는 하나의 어떤 것을 만지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인 한에서는 있는 것을 만지는 것이지? 하나의 어떤 것을 판단하는 자는 있는 어떤 것을 판단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있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자는 어느 하나도 아닌 것을 판단하는 것이네. 어느 하나도 아닌 것을 판단하는 자는 아예 판단조차 하지 않는 것이네. 그러므로 있지 않은 것은 판단할 수는 없네. 있는 것들과 관련해서든 있지 않은 것 자체를 그것 자체로 해서든 말일세. 따라서 거짓된 판단을 하는 것은, 있지 않은 것들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짓된 판단이란 없네. - P171

205c 일차적인 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합성되는데, 그런 일차적인 것들에 대해선 설명이 없으며, 그 까닭은 일차적인 것들 각각 그 자체가 그것 자체로 비복합적인 것이고, 또 그것과 관련해서 ‘있다‘라는 말이나 ‘이것‘이라는 말을 적용해 말하는 것조차, 그것과 이질적인 다른 것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옳을 수 없으며, 그래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일차적인 것들 각각은 설명이 없는 것으로, 그리고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된다고 한 것 말일세.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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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디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어찌 《파르메니데스》를 무시했겠습니까? 실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우리가 《파르메니데스》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탐구를 한 적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 견해를 항상 고수했다고 전해집니다. 한번 올바르게 형성되면 불변할 게 확실한 개념들을 소크라테스를 통해 알게 되자, 그는 그러한 개념들을 감각적인 것에 연관시켜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즉 개념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다른 존재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숭고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엄청난 영향입니다. 존재란 없고, 영원한 생성은 영원한 비존재 안에 있습니다.

이데아를 인정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야기합니다. 그 반대는 철학에 더욱 곤란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아직 젊을 때 흔히 무용하다고 여겨지고 요설로 일컬어지는 변증술을 익힐 것을 권합니다.

이 변증술적 방법은 훈련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데아론이 회의주의로 와해되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참된 생각을 우연히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물론 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참입니다. 정견을 이성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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