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청 계회도나 동관 계회도의 제작이 관료 사회 전반에 만연하였던 현상이었다면, 사가기록화의 제작은 하나의 관행이 될 만큼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관직, 번성한 자손의 존재, 서화의 효용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 제작 경험, 제작 비용을 충당할 경제력 등 그림 제작에 이를 만한 환경과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중기록화나 관청기록화와는 달리 사가기록화를 제작하고 후원했던 사람들은 일정한 경향성을 보인다. 사가기록화의 제작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경상도 즉, 영남 지방에 기반을 둔 사족들이며 다른 하나는 한양을 중심으로 명문가를 형성한 경화사족들이다.
다시 말해 사가기록화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장수·높은 관직·가문의 번성 등 크게 세 가지로 함축되는데, 이는 사가기록화를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양반 관료들은 조선 사회가 자신들에게 요구했던 유교적 가치를 사가기록화라는 매체를 통해 나타내려 했다. 유교 사회에서는 어느 장소에서나 관작·나이·덕망[三達尊]이 존중되었으며 10 사람들은 ‘큰 덕德을 지니면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으며 명성을 얻고 수명을 누린다’는 『중용』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겼다
양반층을 중심으로 한 관료 지배 체제에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직이었으며, 관직 진출을 위해서는 과거 급제가 절대적인 순서였다. 고위 관료가 되어 가문의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조상을 영광되게 하는 효의 실천은 양반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사가기록화는 유교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한 본인과 조상의 자취를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후손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제작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시대 양반 관료들이 평생 이루려고 노력했던 세속적 욕망이 투영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제작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지역성이다. 제작을 이끌어간 두 축은 크게 영남 지방의 사족과 한양을 중심으로 명문을 이룬 경화사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16세기 이래 사가기록화를 제작하고 보존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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