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젠더 허물기 우리 시대의 고전 22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헤겔 철학의 전통은 욕망을 인정과 연결하면서, 욕망은 언제나 인정을 향한 욕망이고 우리 모두가 사회적으로 존속 가능한 존재로 구성되는 것은 오로지 인정받는 경험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은 매력적이며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놓치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으로 인정을 받는 관점은 사회적으로 표명된 것이고, 변화할 수도 있다. 또 어떤 때는 한 개인에게 '인간됨 humanness'을 부여한 바로 그 관점이 다른 개인에게서는 똑같은 지위를 얻을 가능성을 박탈하기도 한다. 인간과 덜된 인간 less-than-human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1


  <젠더 허물기 Undoing Gender>에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의 '욕망'과 뒤를 이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욕망 - 인정' 도식으로부터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젠더란 무엇인가' 부터 시작해보자.

 

 이미 전작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에서 이야기 되었듯, 버틀러에게 '젠더는 수행적'이다. 반복적이며 의례적인 행위를 뜻하는 수행성이 젠더의 특징이라면, 젠더의 원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고, 젠더 안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야 할 것이다.  얽힌 관계 속에서 우리는 '원인-결과' 또는 '최초의 관념'을 구분해서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치 스피노자의 용어처럼 '자신이 원인이 되는 존재 causa sui'처럼 우리는 '젠더'를 인식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causa sui'는 신(神)의 속성이다. 


 젠더가 수행적이라면 그것은 젠더의 실제 자체가 그 수행의 결과로 생산되었다는 말이다. 무엇이 실제적인지 아닌지, 무엇이 인식 가능한지 인식 불가능한지를 지배하는 규범이 있지만, 수행성이 인용 행위를 시작하는 순간 그 규범은 의문시되고 반복된다. 우리는 분명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인용하는 것이지만, 이런 규범은 인용을 통해 상당히 탈영토화될 수 있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43


 만약, '젠더'가 규범이라면 규범으로서 '젠더'는 중세 '신' 중심의 문화가 중세인을 만들었듯 권위를 갖고 사람들을 만들고, 스스로도 변화될 것이다. A -> A' -> A'' -> A'''... 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드백(feedback) 속에서 점점 사람들에게 '젠더'는 어떤 인식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없었던 어떤 인식의 '경계'이 만들어진다.


 규범성이 이중성을 가진다는 점에 대해 숙고해보자. 규범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인도하는 목적과 열망을, 우리가 서로에게 행하거나 말하게 되어 있는 수칙을, 또 우리가 지향하게 되어 있고 우리 행동에 방향성을 주는 일상적 전제를 지칭한다. 다른 한편 규범성은 규범화 과정을, 특정한 규범과 사상과 이상이 체현된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상적 '남자'와 '여자'라는 강제적 기준을 제공하는 방식을 지칭하기도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25


 젠더가 어떤 규범이라면, 그것은 개인들이 다가가고자 하는 어떤 모델 같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젠더는 주체가 인식될 수 있는 장을 생산하는 사회 권력의 형식이고 젠더 이분법이 제도화되는 장치이다. 젠더에 지배되는 실천들과 무관해 보이는 규범으로서 젠더의 이상성 ideality은, 바로 그런 실천들이 다시 제도화한 결과물이다. 이 말은 실천과 그 아래서 실천이 작동 중인 이상화의 관계는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이상화 자체도 어쩌면 잠정적인 것으로 탈이상화나 권위 박탈을 겪으면서 문제와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83


  규범은 바로 그 규범의 결과로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조건 설정을 통해 현실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규범에 가능한 최대치의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규범은 그것이 적용된 장 외부에 있지 않다. 마슈레에 따르면 규범은 그 적용의 장 생산에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적용의 장을 생산하면서 스스로를 생산하기도 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89


 인식들은 '경계'를 만든다.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짓는 경계가 생겼다는 것은 기존의 이분법적 구조에 포함되지 못한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버틀러는 <젠더 허물기>에서 남녀의 이분법 구조 안에서 '누가 누구를 억압하는 구조' 이전에 '억압의 대상으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경계 바깥의 존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며, '여성'의 문제가 아닌 '성소수자'의 문제가 본격화된다.


 이런 경계들은 불편해져서 때로 서로 마찰을 빚는 접촉면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경계들은 오래 머물 수 있는 딱히 어떤 장소도 아니고, 누군가 차지하기로 택할 만한 주체의 위치도 아니다. 이곳은 무심코 자신이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비-장소 nonplace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75


 만일 욕망이 바라는 게 인정을 받는 것이라면, 젠더도 욕망으로 인해 작동되는 한 인정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인정 도식이 인정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허물거나 undo' 아니면 인정을 거두어서 그 사람을 '허무는' 도식이라면, 인정은 인간을 차별적으로 생산하는 권력의 장이 된다. 이는 욕망이 사회적 규범에 개입되어 있는 만큼 권력의 문제와 결부되고, 또 누가 인정받을 만한 인간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의 자격을 정하는 문제와도 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2


 억압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특정 부류의 주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주인 주체에 대해 가시적 타자, 억압된 타자로서, 어떤 가능하거나 잠재적인 주체로서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억압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인식부터 가능해야 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54


 버틀러에게 허물어져야 할 '젠더'가 이분법적 구조라면, 이를 대신해서 새롭게 '젠더'를 존재 be시키기 위한 행위 doing 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평적 관점을 갖는 '문화 번역 cultural translation'의 행위다. 기존의 관념의 틀에서 경계 너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면, 비평적 활동을 통해 '경계'를 살피고, '문화 번역'을 통해 경계 양 편을 모두 '수행적'으로 변화시키며 결국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버틀러가 제기한 '(기존)젠더 허물기'의 해법이다. 동시에 새로운 인식의 탄생이기도 하다.


 내가 행위 doing 없이는 존재 be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 행위의 조건은 부분적으로 내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나의 행위가 내게 행해진 행위에 달려 있다면, 아니 그보다도 규범이 내게 작동한 방식에 달려 있다면 내가 '나'로서 지속될 가능성은 내게 행해진 것과 밀접히 관련될 수 있는 나의 존재 my being에 달려있다... 지금의 '나'는 규범에 의해 구성되는 동시에 규범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 규범에 비판적이어서 규범에 변화를 주는 관계로 살려고 애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3


 우리가 문화 번역 cultural translation의 과정을 따른다면, 존재론의 기본 범주, 즉 인간이 되는 것, 어떤 젠더가 되는 것, 성적으로 인식 가능해지는 것의 기본 범주를 재표명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화 번역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범주를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는 다시 말해 가능한 에피스테메 episteme의 경계선, 즉 알 수 없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의 경계를 마주할 때 이 범주들이 어떻게 왜 부서져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살피는 과정이다... 문화 번역은 경계가 분명하고 뚜렷하며 통일된 두 언어 사이의 번역이 아니다. 그보다 번역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양쪽 언어 각각을 변화시킬 것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67


 비평적 관점이 없다면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작동 영역이 시작되는 힘의 관계의 미지성에, 또한 탈정치화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평성 critiality이란, 이미 경계가 정해전 영역에 있을 만한 딱히 어떤 위치도, 어떤 장소나 자리도 아니다. 비평적 활동의 하나는 경계 설정 행위 자체를 꼼꼼히 살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실험이나 에포케 epoche 혹은 어떤 의지 행위를 통해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토대 자체의 열개 dehiscence와 파열을 겪어야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74


 동전에는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쪽이나 저쪽 편에서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염두에 두는 비평적 실천을 개발하려 한다. 합법화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즉, 인식 가능성과 인정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89


 전반적으로, <젠더 허물기>는 <젠더 트러블>에서 제기했던 문제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간 느낌을 준다. <젠더 트러블>이 '젠더'라는 범주에 대해 버틀러의 생각을 밝히고 새로운 개념을 정립했다면, <젠더 허물기>는 <젠더 트러블>의 '젠더'를 스스로 무너뜨렸다고 해야할까. 거칠게 요약해서 '젠더는 만들어진다' 는 수행성을 전편에서 강조했다면 '만들어진 젠더는 경계를 고려치 않는다'는 새로운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강조되는 수행성이 연극적 수행성이라면, <젠더 허물기>에서의 수행성은 언어적 수행성이 상대적으로 강조된다. 이와 같은 여러 형태의 수행성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우리가 사회를 바꾸는 선순환(善循環) 속에서 사회는 조금씩 달라진다는 말을 저자는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이라는 범주는 자기 안에 인종 간 권력 격차 작용을 자신의 역사성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범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인간'은 결코 파악될 수가 없다. 인간 범주가 시간 속에 만들어지며 또 광범위한 소수자들을 배제해야만 작동된다는 말은, 그런 범주에서 배제된 자들이 그 범주에 대해, 그 범주에서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 범주에 대한 새로운 표명이 시작할 것임을 의미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29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젠더 허물기>은 여러 주제들을 다룬다. 성전환 문제, 게이 결혼 문제, 근친애 문제, 타자의 문제 등등. 얼핏 보면 각각 별개의 문제로 보이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경계를 넘어서는 가로지르기'의 주제로 수렴될 수 있을 듯하다. 어느 주제에서는 경계가 이분법구조, 국가, 상징계로 모습을 다르게 하여 나타나지만, 이들이 갖는 문제는 수행성을 통해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을 듯하다. <젠더 허물기> 안의 현실 주제에 대한 버틀러의 생각을 아는 즐거움은 각자의 몫으로 넘기기로 하고, 이번 리뷰에서는 <젠더 허물기>의 전체적인 얼개를 살피는 정도로 마무리한다...

라캉은 이폴리트의 공식을 재해석하면서 다의성을 만들기 위해 소유격을 이용한다. 즉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사실 욕망하는 욕망이 욕망되는 욕망과 다른지는 분명치 않다. 그들은 최소한 동어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게 의미하는 바는 스스로를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욕망은 자신의 쇄신을 모색하지만 자신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복제해야 하고, 그에 따라 과거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욕망은 단일한 욕망으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형상을 취하면서 자신에게 타자가 된다. 욕망이 또한 원하는 것은 대타자의 욕망이고, 여기서 대타자는 욕망의 주체로 생각된다. - P221

이 논쟁(게이 결혼)은 문화란 무엇이고 누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주체들이 어떻게 재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집중한다. 이 논쟁은 문화란 무엇이고 누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주체들이 어떻게 재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집중한다. 이 논쟁은 또한 국가의 위상에 관심이 있으며, 특히 성적 결합의 형식을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국가 권력에 관심이 있다. - P179

여성의 구조적 지배를 다른 모든 젠더 분석이 나아가야 할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틀은, 젠더가 특정 집합의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정치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여러 방식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페미니즘 자체의 존속 가능성도 위험에 빠뜨린다... 페미니즘이 항상 여성에 대한 성적/비성적 폭력에 대항해왔다는 점은 다른 운동들과 연합할 기반으로 작용해야 한다. 몸에 대한 공포증적 phobic 폭력은 반-동성애공포증, 반-인종차별, 페미니즘, 트랜스 및 인터섹스 행동주의와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 P22

말하기가 행하기의 한 형식이라면 그리고 행해진 부분이 자기라면 대화는 뭔가를 함꼐 행하는 양식이고 다른 것이 되어가는 양식이다. 이런 교환 과정 중에 뭔가가 성취되겠지만 그게 다 완성될 때까지는 무엇이 혹은 누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 P2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키넌은 남자가 여자를 지배한다고 간주하는 이성애의 위계적 구조가 바로 젠더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 성적 불평등은 한 사람의 특질로 멈추어 젠더의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움직이다가 섹슈얼리티의 형태를 취한다. 젠더는 남녀 간의 불평등한 섹슈얼리티가 굳어진 형태로서 나타난다"  (Femminism Luinodified, pp. 6~7). 불평등한  섹슈얼리티가 굳어진 형태가 젠더라면, 불평등한 섹슈얼리티는 젠더에 선행하고 젠더는 섹슈얼리티의 결과물이 된다. 그러나 젠더라는 선험적 개념 없이 불평등한 섹슈얼리티를 개념화하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티고네의 주장 동문선 문예신서 288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순 옮김 / 동문선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티고네는 어떤 언어를 통해서 자기 행동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가, 또는 어쩌면 그 주권의 부인을 거부하는 것인가?...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언설(utterance)이 갖는 발화 수반 수행문(illocutionary)의 실패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의 저항은 매장 행위와 매장한 인물간의 분리를 거부하면서 다시 화자가 그 말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언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나는 내 행동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I will not deny my deed)"라는 말은 "나는 부인하지 않습니다(I do not deny)", 즉 나는 강요에 못이겨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가 되고, 이는 다시 말해서 나는 억지로 부인하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말이고, 내가 부인하지 않게 될 것은 나의 행위(my deed)라는 말이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25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바라본 주인공 안티고네는 여러 면에서 두 개의 모순이 충돌하는 인물이다. 부계로는 아버지이자, 모계로는 오빠인 오이디푸스와의 관계 속에서는 혈연의 모순 문제가 발견되며, 크레온과의 설전을 통해 자신의  죽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는 '행위'와 이를 변호하는 자신의 '발화'에서도 모순을 드러낸다. 버틀러에 따르면 친족을 매장하는 행위는 여성적이지만, 크레온과 말다툼을 통해 행위를 변호하는 발화는 남성적인 것으로 또다른 모순이다. 이처럼 버틀러가 바라본 안티고네는 헤겔과 라캉의 해석과는 달리 전형성을 갖지 못한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안티고네의 매장 행위와 그녀의 언어적 저항은 둘 다 코러스, 크레온, 그리고 메신저로 하여금 그녀를 '남자답다'고 부르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안티고네는 어떤 남성적 통치권의 형태,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는 남성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남성적 통치권은 그 상대편이 여성적인 동시에 열등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27


 안티고네는 친족 신의 이름을 걸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친족 신의 명령을 위반함으로써 행동한다. 그 위반은 친족에게 금기의 차원이나 규범의 차원을 주지만 동시에 그것의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실 이 두 행위는 서로 맞서는 것이기보다는 서로를 거울처럼 되비치고 있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29 


  개인적으로 버틀러의 해석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크레온의 역할이다. 헤겔의 <안티고네> 구조에서 크레온은 '국가법'의 상징이며, 라캉의 <안티고네> 구조에서는 상징계에서 욕망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다. 반면, 버틀러에게 크레온은 안티고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니라, 안티고네의 거울이 되고, 안티고네와의 논쟁을 통해 교차점이 되면서 모순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내는 '조력자'다.


 안티고네는 자신이 반대하는 것의 위상이나 언어를 전유해서 크레온의 통치권을 가장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오빠에게 운명지어진 영광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극 전체에서 언제나 이중적이다. 즉 그녀는 살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아이들을 낳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이디푸스가 자식들에게 했던 저주, 평생 동안 '사형을 선고받는' 저주를 받아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살지 못했던 삶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크레온이 마련한 삶 속의 무덤으로 다가갈 때 그녀는 지금껏 내내 자신의 것이었던 어떤 운명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존속될 수 없는 욕망, 안티코네가 더불어 살아가는, 다름 아닌 근친상간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닌가?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50


   <안티고네>라는 드라마에서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금기 그 자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한다. 즉 금기를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무엇인가를 빼앗는 권력 작용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금지하고 있는 그 죄 자체를 자리바꿈(displacement)함으로써 자신을 증식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자는 말이다. 근친상간의 금기와 그에 대한 무서운 비유는 근친상간이야말로 친족에 가장 중추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감추는 친족계보를 그려낸다. 그러면서 규범의 한가운데에 '일탈(aberration)'을 세워두는 것이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113


 결국, 버틀러는 <안티고네의 주장>을 통해 여러 모순이 뒤섞인 보편적이지 않는 '안티고네'라는 인물이 갖는 모순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기대한다. 기존의 체계가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를 대체하는 법칙과 체계는 안티고네의 죽음으로부터 도래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안티고네의 죽음은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알리는 새로운 서막으로 버틀러는 해석한다. 


 안티고네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어떤 행위가 금지되었어도, 그녀는 금지된 행위를 하며, 그 행위는 어떤 기존 규범에 단순 동화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녀는 행동할 권한이 없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면서, 인간됨의 전제 조건이 되는 친족이라는 어휘를 뒤덮는다. 그러면서 은밀히 우리에게 인간이 된다는 것의 전제 조건이 정말 무엇이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안티고네는 그 어떤 최종적인 동일시도 불가능한 주장의 언어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배제되어 있는 호칭의 언어 안에서 말한다... 또한 그녀가 자신에게 속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한, 안티고네는 정치적 규범들의 어휘 안에 있는 어떤 교차점(chiasm)으로 작동하게 된다. 만일 친족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전제 조건이라면, 안티고네는 정치적 비유어의 오용을 통해서 이룩된 새로운 영역의 인간에 대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영역의 인간은 인간보다 못한 것이 인간으로서 말할 때, 젠더가 뒤바뀌고, 친족이 자신이 토대한 법 위에서 비틀거릴 때 생겨난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138


 이처럼 버틀러의 해석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에 중점을 둔 헤겔의 해석이나 안티고네의 한계, 극한에 중점을 둔 라캉의 해석과는 달리 안티고네의 내적 모순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이로부터 기존 질서의 전복 가능성을 끌어내며 <젠더 트러블>에서 제기한 문제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느껴진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버틀러의 해석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을 갖는다. 먼저, 자신의 전복적 질서를 끌어내기 위해 작품 외적인 요소를 끌어들인 부분은 다소 무리한 전개로 느껴진다. 소포클레스의 3부작 순서에서 <안티고네>가 먼저 쓰여졌다는 작품 외적 사실이 '과거의 저주'가 현재를 규정한다는 논리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버틀러의 젠더의 수행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된다. 버틀러는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안티고네가 '발화'를 통해 남성성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여성적 행위를 변호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논리를 펼치지만, 이러한 논리는 이미 규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전제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젠더는 수행적이며 행위'라는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의 주장과 이 부분의 해석은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천천히 정리하도록 하고, 기왕 정리한 김에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다뤄진 <안티고네>도 조만간 정리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소포클레스는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를 쓰기 수 년 전에 <안티고네>를 썼지만, <안티고네>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일어나는 행동 다음에 일어난다. 이 뒤늦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저주는 그 저주 자체에 앞서 저주가 명하는 행위 때문에 어떤 시간성을 성립하게 된다. 저주의 말은 이미 언제나 일어났던 것을 미래로 가져간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103

안티고네의 죄는 혼란스럽게 얽혀 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계승하고 전달하는 친족의 계보가 이미 명백한 근친상간적 행위 때문에 혼란스러워진 부계적 위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행위는 안티고네의 존재 조건이고, 그녀의 오빠를 아버지로 만들며, 언어적으로는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친족 위치를 다 차지하는 서사, 친족과 젠더의 일관성을 희생시키면서 그 모든 위치를 다 차지하는 어떤 서사를 시작하게 한다 - P12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풍오장원 2021-05-05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티고네라면 라캉의 논의에서 중요한 재료로 다뤄졌던 기억이 나는데, 버틀러의 안티고네도 궁금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5-05 22:26   좋아요 1 | URL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버틀러는 라캉과 같이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상징계의 극한에 선 안티고네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보입니다. 이미 추풍오장원님께서는 <안티고네>에 대한 라캉의 입장을 알고 계시니 같은 도구를 사용해 다른 길로 가는 <안티고네의 주장>을 더 재밌게 읽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친족법‘과 ‘국가법‘의 대항으로 본 헤겔, ‘남성의 법‘과 ‘여성의 법‘ 다툼으로 본 이리가레이, ‘죽음을 향한 숭고함, 아름다움‘으로 본 라캉의 해석과는 또 다른 버틀러의 해석.

버틀러는 ‘안티고네‘라는 인간 자체에의 균열을 통해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마치 「판관기」속의 삼손이 데릴라에 의해 블레셋인들에게 잡힌 후 죽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건물을 무너뜨리듯,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우리는 기존 양성적 질서를 넘어선 ‘버틀러의 주장‘을 발견한다. 이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근친상간의 금기가 자기 내부에 스스로의 균열을 안고 있는 만큼, 그것은 근친상간을 단순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근친상간을 사회적 해체에 꼭 필요한 어떤 유령으로서 유지하고 또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유령 없이는 사회적 관계가 나타날 수도 없는 그런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안티고네》라는 드라마에서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금기 그 자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한다. 즉 금기를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무엇인가를 빼앗는 권력 작용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금지하고 있는 그 죄 자체를 자리바꿈(displacement) 함으로써 자신을 증식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자는 말이다. 근친상간의 금기와 그에 대한 무서운 비유는 근친상간이야말로 친족에 가장 중추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감추는 친족계보를 그려낸다. 그러면서 규범의 한가운데에 ‘일탈(aberration)‘을세워두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근친상간의 금기가 사회적으로 존속 가능한 친족 일탈의 토대가 될 수도 있는가 하는 점이다.  - P11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5-0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틀러를 삼손에 비유하신 저 표현 너무 멋져요!! 다른 내용은 알듯 말듯 어렵네요.😳

겨울호랑이 2021-05-02 14: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본문에서는 자세하게 논의가 전개되는데, 제가 핵심만 적어서 그런 것 같네요. 리뷰에서는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1-05-02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티고네는 그리스신화에서 드물게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판단기준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던데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있는걸까요? 가끔 저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에서 너무 너무 어려운 이론들을 뽑아내는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네요. ^^;;

겨울호랑이 2021-05-02 17:01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안티고네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단순히 ‘휘브리스‘로 해석하기엔 여운이 많이 남는다 보여집니다. 그래서, 이로부터 근대 이후의 과제들의 근원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온 것같네요^^:)
 

이 책의 요점은 (가끔 생기는 드래그에 대한 비하에 저항하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드래그를 진정한 모범적인 젠더의 표현물로 치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젠더의 당연시된 지식이 실제에 대한 선제적이고 폭력적인 경계선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