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는 그리기에서 발달해 나왔다. 아마도 모든 민족은 색칠하기나 그리기, 긁기, 깎기 등의 수단을 동원해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다른 효용성을 일단 제쳐두면, 이들 그림은 메시지나 메모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기록과 메시지는 흔히 '그림문자'라고 불리지만, 이 용어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기록과 메시지에는 표기처럼 항구적이고 이동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언어형식과 어떤 고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따라서 언어형태의 미묘한 조절 기제를 공유하지 못한다. _ 레너드 블룸필드 , <언어 2>, p12


 레너드 블룸필드(Leonard Bloomfield)의 언어학 입문서인 <언어 Language>에서는 그림에서 시작된 문자가 어떻게 변천되었는가에 대한 과정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사물, 현상에 대한 사용된 그림이 보다 널리 사용되면서 '표준화'되고 점차 일반적인 표현방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자(漢字)의 상형(象形)은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점차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문자 표현을 요구했고, 이른바 육서(六書) - 상형(象形), 회의(會意), 지사(指事), 형성(形聲), 가차(假借), 전주(轉注) - 라는 원리로 발전되었음은 익히 아는 바다.  


 그림에서 실제 문자로 넘어가는 전이과정에 나타나는 또 다른 중요한 국면은 서자와 언어형식과의 연상관계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상황에는 그림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자질이 담겨 있다.... 그림의 사용자가 이런 문제를 만났을 때, 그는 실제로 자기 자신한테 말을 하면서 고민스러운 메시지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언어화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언어는 결국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사물을 전달하는 의사소통의 한 방식이다. 이런 전제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림의 사용자가 차라 말을 하는 순서대로 일련의 서자를 배열하다가, 구어 발화의 각 부분(각각의 단어)을 모종의 서자로 표시하는 관습을 개발해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적인 문자표기는 이러한 단계를 전제로 한다.  _ 레너드 블룸필드 , <언어 2>, p15


 레너드가 말한 중요한 국면 - 서자(書字)와 언어 형식과의 연상관계- '그림이 표현할 수 있는 고비'를 만났을 때, 중국어는 개선(改善)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면, 우리 글인 한글은 '그림 - 문자'라는 전통적인 관계를 끊고, '소리 - 문자'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뛰어난 혁신(革新)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의 결과 일부에게만 열려있던 정보(情報)의 독점 체제가 무너졌기에 3.1운동을 비롯한 조선 후기와 근대의 여러 투쟁에 민중의 참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쓰기는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다. 쓰기는 소수의 언어공동체에서만 어느 정도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이들 소수의 언어공동체 안에서도 아주 최근까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활동이었다.  _ 레너드 블룸필드 , <언어 2>, p11

 

 허웅 선생의 국어 운동은 국민의 글자생활은 한글만으로, 언어생활은 쉽고, 바르고, 고운 말로,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말글의 가치를 높이 받드는, 국어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활동이었다. 선생이 주창한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라는 생각은 글자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 정신이다. 한글만 쓰면 모든 국민들이 모두 편하게 글자생활을 하며 모두가 문화와 정보를 누릴 수 있게 되지만, 한글-한자를 섞어 글자생활을 하면, 일정한 교육을 받은 지식층만이 문화와 정보를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한글만 쓰기를 주창한 것이다._ 허웅, <우리 옛말본> 서문 ,p16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의 인쇄기가 없었다면, 종교개혁(宗敎改革)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역사의 평가를 볼 때, '인쇄기'라는 하드웨어가 아닌 '문자'라는 소프트웨어가 후대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설명할 수 없을만큼 클 것이다. 아마도 그 영향력은 개인적으로 청동기 시대의 '철기 혁명'에 버금가지 않을까. 한글날은 맞아 우리글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독일 전역에서 하급 사제들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승들에 의해 루터의 주장이 널리 알려졌다. 이들이 개신교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들에 의한 모든 것은 70여년 전에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종교 개혁은 서적 출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18년에 독일에서는 단지 200여 권의 책이 출판되었으나 1519년에는 무려 900권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1521년 제국 회의에서 루터의 저서를 모두 불태우라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이미 50만 부 정도가 팔려나간 후였다. _ 마틴 키친, <케임브리지 독일사>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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