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도시들 1 - 도시의 탄생과 정보 기술 케임브리지 세계사 5
노먼 요피 외 지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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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도시화란 사람들이 모이고 사회적 계층이 나뉘는 과정을 말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도시는 다양한 사회적 분파의 다양한 관심사가 서로 충돌하고 협상하는 가운데 발달했다. 통치자(중간 계층의 정치 지도자 포함)와 백성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도시에서는 대규모 노동력 동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새로운 산업이 발달했고, 기술 혁신과 규모의 경제가 이를 뒷받침했다. 사회적 측면에서 도시는 기존의 혈연 중심 관계를 약화시켰다. 전통적 인간관계는 더 높은 권위 아래 복속되었고, 새로운 최고 권력에 의해 노역과 세금 의무가 부과되었다. 도시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면서 도시민의 정체성도 새삼 발달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지와 주변 환경은 도시 구조에 걸맞게 변해갔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544


  케임브리지 세계사 5 <고대의 도시들 1 : 도시의 탄생과 정보 기술 Cambridge World History Vol. III>는 신석기 혁명 이후 세계 각지에서 출현한 고대 도시문명을 다룬다. 농경 문화는 많은 산출량에 비례하는 노동 투입을 요구했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내부에서 계급과 분업을 발생시키고, 외부와는 배후지와는 생산물을 주고 받으며 문명권을 바꾸어 나갔다. 이 같은 측면에서, 저자는 도시는 고대 문명의 결과물이자 출발점이라 규정한다.


 도시국가는 단지 도시 하나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자원과 인력을 공급하는 상당한 규모의 배후지를 거느렸으며, 배후지는 사회/정치적 조직에 의거해 도시에 결부되어 있었다. 배후지와 도시로 구성된 많은 도시국가가 있었고, 이들은 커다란 하나의 문화권에서 "대등정치제(peer-polity)"로 공존했다. 상호 전쟁을 통해 그중 한 도시국가가 전체 문화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차지한 헤게모니는 흔히 변화되었고, 이후 도시 국가의 자치 체제가 무너지고 더 큰 규모의 영토국가가 들어선 뒤에는 헤게모니 자체가 "붕괴"되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63


 최초의 도시가 부상한 이후 도시 네트워크의 형성과 해체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기원전 제2천년기 중엽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치 환경이 근본적 변화를 겪기 이전까지는 도시 네트워크 체제가 유지되었다. 도시 체제가 작동하면서 부와 정치 권력이 엘리트 계층의 손에 집중되었다. 경제 부문은 갈수록 차등이 심화되었고 효율성이 높아졌다. 사람들이 도시로 들어왔다가 다시 시골로 되돌아가기도 했고, 시골의 통제는 갈수록 강화되었다. 과거의 정체성은 변형되었고 새로운 도시 정체성이 발달했다. 세기를 거듭하는 동안 도시가 만들어낸 풍경 또한 변화를 계속했다. 정치적 관행과 이데올로기가 발달했을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건축물도 새롭게 들어섰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468


 <고대의 도시들 1>의 전체 주제는 고대 도시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건축', '문자'  그리고 '종교'의 조합이었다. 도시를 이루는 하드웨어인 '건축'과 소프트웨어인 '정보 전달 수단'과 컨텐츠인 '종교'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된 요소임이 본문에서 확인된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종교'는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날씨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기후는 농경 문화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기후에 따라 적합한 거주 형태가 결정되었고, 날씨에 따라 행사가 결정되었다. 거주 형태에 따라 건축물이 들어섰고, 농사를 위해 행사가 진행되었다. 건축물이 정(靜)적이라면, 의례는 동(動)적이었다. 또한, 주기에 따라 달라지는 의례는 건축물의 배치에 영향을 주고 고대 도시는 만들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고대 도시에서 '종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모든 것이었다.


 도시에서 권력 표현의 핵심은 기념비적 건축물과 그를 둘러싼 공간이었다. 기념비적 건축물 위주로 도시 설계가 이루어졌고, 의례 행사가 건축물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의례 행사는 영원한 동시에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p224)... 초기 문명의 두드러진 혁신이었던 도시는 신앙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도시는 곧 신앙 체계가 물리적으로 구현된 것이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225


 고대 도시의 전형적 구조는 밀집된 주거 구역과 개방된 공간 혹은 건축물들이 몇 차례 번갈아가며 구성되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구성 방식은 행사를 개최하는 데 필수적이었다(p208)... 행사에 사용되는 특별한 물품은 흔히 멀리서 가져왔다. 중요한 물품은 전문 수공업자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행사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통치자나 엘리트 계층에게 후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사회의 지도층에 속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209


 행사의 핵심은 이동이었다. 행사와 기념식을 위해 건물과 통로가 조성되었고, 그에 따라 이동 경로가 정해졌으며, 사람들이 이동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도록 설계가 되었다. 도시 공간을 이용한 행사와 그 의미는 주민의 의식에 각인되었다. 이외에 다른 지역을 오가는 것도 또 한 가지 이동의 유형이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214


 도시의 외관에 건축물이 토대가 되었다면, 도시의 체제 유지를 위한 기반은 문자(文字 letter)였다. 이미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사회적 불평등은 이 시기에는 더욱 확대되었고, 사회적 계층화가 상당 정도로 진척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계층 별로 자신의 역할이 고정되면서 일은 점차 전문화, 분업화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보편적인 문자가 사용되며, 고대 도시 특성의 한 축을 담당한다.


 고대 도시를 운영하려면 모든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체제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야만 이질적 집단들을 서로 연결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대개의 도시는 전문 행정 관료 체제를 동원했다. 도시에는 갈수록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점차 질서도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워낙 가까이에서 상호 의존적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소요되는 물량과 행정 관리를 인간의 기억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문화된 기록 관리(record- keeping) 수요가 생겨나게 되었다. 문제는 도시를 구성하는 인력과 필요한 물자의 흐름을 추적하고 조정하는 일이었다. 도시의 등장과 함께 위계질서와 통제 체제는 더욱 확고하고 정교해졌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386


 도시화 과정은 어느 한 공간에 주민이 몰려드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관습의 근본 구조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참여의 장(field)으로 사람들을 이끌어내고, 말하자면 그 새로운 장에서 참여자들이 새롭게 규정되는 동시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둘째는 획일화다. 획일화는 도시화 과정의 핵심이다. 권력은 기호(signifier)와 의미(signified)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다양한 권력 기관(제도)을 통해 바로 그 공간을 파고든다. 권력의 목적은 유통되는 의미를 규정하는 것, 그리고 허용 가능한 담론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311


 케임브리지 세계사 5 <고대의 도시들 1>에서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는 농경문화의 요구에 맞춰 기후가 적합한 지역에 도시가 형성되었음을 고대 이집트,  중국, 동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잉카 문명을 통해 보여준다. 이들 문명 모두 신(神) 중심의 권력 구조와 함께 왕, 귀족, 엘리트 계층, 농민 등 서열화된 계급사회의 면을 보인다. 또한, 의례(儀禮)를 통해 이들은 권위를 입증하고 권위를 만들어갔으며, 권위를 사용해 건축물을 만들어 권위를 강화하고, 강화된 권위로 체제를 유지하고자 문자를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자를 통한 정보 독점이 그들의 체제를 굳히는데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삶 역시 오늘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신석기 혁명기 이후 인류는 적어도 주제면에서는 같은 고민을 수천 년 동안 반복해오고 있는 셈이다. 


 도시의 성장을 정치적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친족 기반 집단의 지도자들이 연맹이나 의회를 형성하여 분쟁을 조정했고, 본인의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들을 이끌고 동맹이 체결된 곳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정치적 연맹체에서 단일한 지도자가 출현했고, 사람들이 모일수록 그들의 권위는 더욱 높아져갔다. 이를 근거로 농업의 집약화, 대규모 토목 공사, 군사 원정 등을 조직할 수 있었고, 전쟁 포로를 잡아 와서 도시에서 노예로 쓸 수 있었다. 사원은 새로운 정치 현실에 신성(神聖)한 면모를 더하는 기능을 잠당하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481


 고대의 도시들 속에서 우리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이 구성한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의 틀을 떠올리게 된다. 농작물과 농기구 생산, 생산물 보관을 위한 회계시스템 등에서 우리는 1,2,3차 산업의 물질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도시-주변부'와의 교환에서는 시장경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아직 자본주의의 싹은 이미 트고 있었는데, 이들의 발화는 다음 편 <고대의 도시들 2  : 권력과 제국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을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유통 관계가 중요했는데, 도시 안에서 사람들이 생산한 농산물 혹은 수공업품을 서로 교환하는 시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형성되기 전, 생산과 교환은 사회 및 정치적 관계와 긴밀히 얽혀 있었다. 그 관계에 따라 초기 시장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통제되었다. 따라서 논쟁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초기 도시가 등장할 때 이미 정치적 협상 및 정치권력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 같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545


 도시에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개념이 출현했던 증거도 있다. 바로 "시민(citizen)" 개념이다. 기원전 제3천년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엘리트 계층과 노동자 계층을 막론하고 기관에서 보유한 배급 명단에는 출신 도시가 기록되어 있었다. 출신 민족 명칭보다는 출신 도시 명칭이 당시 사회에서 더 보편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553


마야 도시의 구성 의도를 해석한 설득력 있는 견해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마야인은 멀리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길들여지지 않고 위험해 보이는 성스러운 공간(동굴, 언덕 등)을 ‘포착‘ 내지 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도시 중심에 가져다 놓고 엘리트 계층의 통제 아래 두고자 했다. 인간의 재주로 만들어낸 건축물을 자연적이면서도 영원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언덕은 언제가 그곳에 있었지만, 왕이나 엘리트 계층의 주도로 다시 만들어진 언덕은 오래된 것인 동시에 새로운 곳이었다. - P135

제1천년기에 이미 사회의 계층화는 중앙의 통치자로부터 지방이나 특정 지역 단위까지 보편화되어 있었다. 비문을 통해 지역 엘리트 계층 또한 의례로써 권위를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힌두교의 통치 기술과 토착 애니미즘 신상을 혼합하여 왕국의 수도를 성지로 만들었고, 그곳이 의례 행정의 중심이 되었다. 성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의례용 건물 건축이었다. - P187

고대 중국에서 주요 도시의 종말은 대개 경제적 이유보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왕조가 바뀌거나 제국이 탄생하면 도시는 새로운 사이클로 접어들었다. 이전의 도시에서 개발된 어떤 부분들은 새로운 혁신을 거쳐 유지되었다. 무엇보다 문자가 바로 그러한 사례였다. 상나라의 문자 체계와 필사자들은 정복 왕조 주나라에 의해 그대로 채택되었다. 주나라는 중국의 더 넓은 지역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도시를 건설했으며, 그 과정에서 문자도 보급되었다. 문자는 정치, 종교, 행정, 군사, 문화 생활은 물론 도시 바깥에서도 사용되었다. - P300

다른 도시들이 파편적으로 자연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였다면, 콘코와 티와나쿠의 정치권력은 인간과 곡물과 가축의 생존에 핵심이 되는 자연 과정의 일부를 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의례 관습 덕분이었다. 그들의 의례 행위는 자연환경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핵심적 자연 현상을 영적 존재로 이해했다. 자연의 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사회적, 공간적, 우주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데 성공한 집단은 월등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기원후 500년경부터 이들은 엘리트 계층으로 대두되었으며, 이후로는 티와나쿠의 기념비적 건축물 주변에서 살았다... 기념비적 건축물과 석상이 나타내는 것, 즉 압축 모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자연 현상을 움직이는 작동의 주체로서의 조상신이었다. - P458

도시에서 사원은 가장 중요한 시설물이었다. 사원은 다양한 문화적 행위가 거행되는 구심점으로, 대중이 참여하는 의례는 물론 농산물이나 수공업품의 생산도 사원에서 이루어졌다. 도시의 통치자는 사원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이와 같은 관계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p555)... 성벽은 다양한 관점에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성벽을 건설한 목적이 적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도시민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통치자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는지, 주변에서 도시가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는지 등이 관심 분야였다. - P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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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와 17세기 동안에 국제 무역의 거대한 발전은 레알 은화가 세계 각지로 대량으로 확산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국제 무역이 도달한 수준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대량의 레알로 대표되는 유동성이 시장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만일 레알이 거부되어 유통량이 감소한다면, 국제 무역은 급격한 쇠퇴를 감수해야 했다. 이와 같은 점은 당시 외관상모순적인 공고문들이 오락가락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각국은 처음에는 스페인 악화가 시장에서 국내 양화를 구축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레알을  금지했다가도, 나중에는 특히 동양 국가들과의 무역 활동이 빈사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면서도 국내 화폐를 보호하기 위해 국내 화폐와 레알의 교환 비율을 조정해가며 결국 레알을, 적어도 특정한 레알을 슬며시 다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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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에서 권력 과시의 핵심은 도시 건설이었다. 왕조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의 멤피스 건설부터 오늘날 카이로의 전신인 푸스타트(Fustat) 건설까지, 그리고 기원후 640~642년 무슬림의 정복 이후에도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도시 건설을 통해 자신의 시대와 변화의 시작을 알리고 권력을 과시했다.  그들이 건설한 수도는 다른 많은 문명의 도시들과 같은 양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신왕국 이후로 이집트 도시의형태는 외형상 다른 지역의 도시와 더욱 비슷해졌다. - P112

동남아에서 도시화는 깊은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 도시의 등장은 동남아 국가의 운영과 궤를 같이했으며, 권력과 의례와 행사의 혼합으로 도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혼합적 성격은 비록 일회적 성격의 행사는 끝나면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기어츠가 소개한 발리의 경우와는 달리) 실질적 권력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세대와 세기를 거듭하는 동안 동남아 국가를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다. 크메르의 고대 국가에서 도시화는 보다 분명한 관계를 드러내었다.  - P191

도시에서 권력 표현의 핵심은 기념비적 건축물과 그를 둘러싼 공간이었다. 기념비적 건축물 위주로 도시 설계가 이루어졌고, 의례 행사가 건축물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의례 행사는 영원한 동시에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정해진 형식에 따른 종교문화와 통치자의 생애주기에 따른 의례 행사는 정기적으로 꾸준히 이어졌고,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로  거대한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전자의 범주에 속하는 행사는 대개  제한된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행사는사람들의 눈에 띄기보다는  배제를 통해 권력을 과시하는 방식이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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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시간은 따라서 전체사의 상층구조의 작동과 관련을 가진다. 그 상층구조는 밑의 층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창조하고 부양해준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그것의  무게가  아래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의 움직임과 위에서 아래로 움직임의중요성이 변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에서도세계의 시간이 모든 것을 다 책임지지는 못한다. - P13

이 공간 내에서는 각각의 개별 경제들이 계서제를 이루고 있다.
그중 어떤 것들은 가난하고 어떤 것들은 소박한 수준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중심에 위치한 하나의 경제만이 상대적으로 부유하다. 이로부터 불평등, 전압차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이 전체를 작동시키는 힘이 된다. 이것이 "국제분업"을 야기한다.  - P24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상에서 살펴본, 14세기 이후 등장하는 유럽의지배적인 도시들의 연쇄의 역사는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세계-경제의 발전사를 보여준다. 이 세계 - 경제들은 중심이 강하냐 약하냐에 따라서 전체적인 통합과 통제의 정도가 달라졌다. 또 이 연쇄를 통해서 우리는 항해, 상업, 공업, 크레딧, 정치세력 또는 무력 등 지배의 무기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를 알 수 있다. - P38

경제적인 예속이 아무리 명백하다고 해도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든지간에 세계 - 경제라는 질서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며 이것 혼자서 사회의 여러 질서를 모두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경제는 결코 고립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의 영역과 공간은 동시에 다른 실체들 문화, 사회, 정치 - 이 자리잡고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경제에 섞여 들어가서 경제를 돕기도 하고 반대로 방해하기도 하는것이다. 이런 것들을 구분해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관찰하는것 - 경험적 현실로서 프랑수아 페루가 이야기하는 "현실적 현실(réel réel)" 은 총체성(globalit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한 의미의 사회 또는 전체집합(ensemble des ensembles)이라고 부른 바있다. 각각의 개별 집합은 그 파악 불가능성 때문에 실생활 속에서는다르 지하드가 섞여서 존재한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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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세계사 2 - 대륙별 구석기 문화 케임브리지 세계사 4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엮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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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가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친 지점은 인간이 서로를, 그리고 주변 환경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석기란 경제적 변혁을 일컫는 말이기는 해도 사육과 재배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식량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이용하는지, 그 관점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기술적 및 사회적 혁신도 함께 요구되었다.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신석기 패키지"라고 한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8


 초기 농업과 관련된 인간의 반응 양상들을 살펴보면. 선호하는 식물의 야생 서식지를 유지하는 활동을 했고,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곳을 중심으로 머무르며 생활의 이동성이 감소했으며, 이용 가능한 식량 자원의 변화에 따라 식생활 패턴을 바꾸었고, 작물재배 혹은 야생 작물 관리를 통해 원하는 동식물의 밀도를 높여 나갔다... 식량 생산이 지속되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서 농업에 의존하는 사회가 더욱 많아졌고, 그들이 농업에 적합하도록 주변 환경을 바꾸게 되었다... 농업은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능한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90


 그레이엄 바커(Graeme Barker, 1946 ~ )와 캔디스 가우처(Candice Goucher, 1953~ )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4 Cambridge World History Vol. 2 Ch.8-23 : 농업과 세계사 2 : 지역별 농업의 기원 >에서는 '신석기 혁명'의 모습을 지역별로 세부적으로 살펴본다. 자연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던 시기, 홀로세를 살아가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농사를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주(定住.)생활의 형태가 등장하고, 창고 등 건물들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신분제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했다.


 재배 및 사육, 그리고 마을의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사회적 관계도 새롭게 바뀌었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몇몇 사회적 관념의 변화는 이후 시기의 변화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즉 의례, 가족 및 공동체 구조, 횡적/종적 사회관계, 축제 등의 행위가 이때 모두 고도화되었다. 이러한 행위의 대부분은 신석기 시대 물질문화의 풍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76


 남아시아의 신석기 발전은 크게 보아서 기본적으로는 "신석기 혁명"의 가장 고전적인 패턴을 그대로 따랐다. 먼저 영구 정착지가 등장했고, 이후 농업이 개발 혹은 유입되었으며, 그다음으로 토기가 제작되었다. 남아시아에서 신석기의 대표적인 특징, 즉 토기와 정주 생활과 가축과 작물 등은 모두 신석기 시대 말기에 등장했다. 남아시아의 신석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변종들이 연속된 장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67


 특정 유형의 건축 재료, 즉 나뭇가지를 엮어 벽체를 만들고 초가지붕을 씌운 오두막 건물의 흔적이었다. 토크와 유적의 발굴 사례에서 보듯이 이러한 구조물을 대개 원형이었고, 안에는 화덕 자리가 있었으며, 대개는 가운데 기둥 자리 구멍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러한 건물화 함께 발견되는 이모작의 흔적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건물의 흔적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이모작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한 장소에서 머물러 살아야만, 또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갠지스강의 주기적 범람과 갠지스 평원에서 자라는 벼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49


 자원 증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농업으로 변화한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첫째, 사람들은 식량 자원을 생산할 수 있는 특정 식물에 집중하여 갈수록 관리를 강화하면서 그 식물을 의도적으로 심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둘째, 사람들은 숲속에서 원하는 식물을 심기 위하여 새로운 환경, 즉 농지를 조성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53


 이와 함께 차이점도 발견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축의 활용, 관개시설의 운용 등이다. 이들의 사용은 해당지역의 기후와 재배하기 적합한 작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졌지만, 결과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토양의 비옥도와 재배작물의 특성, 관개시설의 유무는 투입 노동력의 비율과 가축사육의 필요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단기적으로는 계급제, 장기적으로는 문명의 성격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게 된다. 


 동양에서 곡물의 중요성은 서양에 비교하자면 가축의 중요성에 맞먹는다. 유럽에서 농업은 복합 영농으로, 곡물 생산은 언제나 동물 사육과 함께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농업은 언제나 곡물 생산에 집중했으며, 선사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 음식은 대체로 채식 위주였다. 다만 최근에 그 경향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45


 동물 사육은 일본의 초기 농업 사회에서 그 역할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야요이 시대부터 말과 소는 주로 농사일에 사용되었고, 인간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운송 수단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사육의 목적이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고기나 우유를 비롯한 축산물을 활용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집돼지도 야요이 시대부터 사육되지 시작했으나, 야요이 시대의 식생활에서 돼지고기가 차지한 비중은 미미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28


  "농업"에서 식량 생산 활동을 총칭하는 의미를 포함한다. 곡물 재배 위주(원경 園耕, farming), 가축 사육 위주(유목 herding 혹은 목축 pastoralism), 혹은 농경과 유목을 함께 병행하는 경우(농목업 agropastoralism)를 모두 농업의 개념에 포함된다... 다양한 식량 생산 시스템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식량 수급의 안전성을 높이고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복잡한 사회관계와 교환 체계가 마련되어야 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78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시기에 지역별로 생산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농업의 전파 방향이 일방적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신석기 혁명의 초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수렵채집, 목축, 농경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안정적인 식량 확보'라는 농업만의 장점은 전반적인 생활 수준의 악화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주된 생활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앞선 시대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렌시스와 공존하다가 이들을 대체한 것처럼.


 인도아대륙 전체적으로 볼 때 농업의 확산 방향은 완전히 다르고 서로 상충되기도 했다. 갠지스 평원에서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보자면 대체로 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전파되었고, 서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이처럼 상충되는 패턴은 농업과 인구 확산 모델 연구를 촉진했고, 이로써 상호 작용과 다양한 흐름들이 밝혀졌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33


 초기 목축민과 달리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초기 농경 공동체들(EFC)은 동부 및 남동부 습윤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우기가 남반구 여름철로 국한되는 지역이었다.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으므로 그중 일부 지역의 생태 환경은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들 지역 가운데 대부분에는 이미 후기 석기 시대(LSA) 문화를 보유한 수렵채집인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예전처럼 천연자원을 계속 이용했고, 농업 공동체와는 이웃에서 공존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13


 <농업과 세계사 2>에서는 구체적으로 여러 지역의 농경문화가 소개된다. 이들 중 일부는 청동기 문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느 문명은 소멸되기도 하지만, 세계 전역에 자리 잡은 문명을 보노라면 문화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든 문명은 저마다의 환경에서 각자 최선의 길을 선택해 발전했던 것이 아닐까. 이들 문명에 대해 현대의 관점에서 우월과 열등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잔혹하다고 알려진 아즈텍(Aztec)문명을 생각해보자. 포로들을 인신공양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잔혹한 제국의 문화에 대해 야만적이라고 평가를 내리지만, 이들 문화권에서는 포로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토지가 제한적이었고, 지력(地力)도 떨어지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의 인신공양의 풍속을 단순히 잔혹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고대 왕이나 귀족 등이 죽었을 때 가까운 이들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의 경우에도 죽은 이(死者)를 위한 강제적인 풍습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지도자에 의한 정치 보복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개인의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증이 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이유로 생겨났을 수 있는 문화의 성격을 규정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통(傳統 tradition)이라 알려진 많은 것들이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다른 나라의 문화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전통, 문화의 많은 부분이 신석기 시대 농경 생활로부터 유래된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서로 다른 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임을 신석기 혁명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당시 농업인은 기존에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확장을 시도하기보다는 새로운 지역으로 찾아 들어가 원하는 생태 환경의 니치(niche)였다. 그러나 규모가 제한적이고 수용 한계가 뚜렷했기에, 각각의 충적선상지에서 부양할 수 있는 인구 규모는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00


 벼농사는 대규모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 또한 논농사는 고도의 사회적 협력과 공동체의 단결 및 상호 의존을 필요로 했다. 이는 사회 내부적으로 발달하던 위계질서와 상충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갈등은 야요이 시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p318)... 벼농사는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차별의 세습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분화가 최초로 나타났는데, 이를 촉진한 것이 벼농사였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19


요약하자면 갠지스 강 중류 지역에서는 먼저 야생종 벼를 관리하기 시작했고(BCE 7000 이후),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기원전 2000년 경에 이르러 농업-목축 기반의 정착 마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농업 마을 주변으로는 수렵-채집-어로 문화 공동체가 곳곳에 산재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제2천년기에 집약적 벼농사의 관행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뒤로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사회가 복잡성을 더해서 마침내 철기 시대의 도시가 등장했다. 그때가 기원전 제1천년기 중엽이었다. - P150

일본 고고학은 대개 야요이 시대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기존에는 야요이 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300년경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기원전 제1천년기로 수정되었다. 이 무렵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신토(神道)라고 불리게 될 문화 및 신앙이 구체화되었으며, 고문헌에서 일본이라는 명칭도 최초로 등장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새로운 도래인(渡來人)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존의 조몬인과 뒤섞였으며, 오늘날 대부분 일본인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일본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 벼농사에 기반을 둔 야요이 문화는 기존의 수렵채집문화, 원주민 문화, 조몬 시대의 문화를 대체했다. 전통적으로 야요이 이전의 문화는 오늘날 일본인의 직접적 조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 P291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 태국에서 신석기 유적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제3천년기 중엽이었다. 당시 정주 생활이 강화되었고, 문양을 새긴 토기, 간석기 자귀, 사육종 돼지와 닭, 재배종 벼가 등장했다. 홀로세 중기가 끝나갈 무렵, 즉 기원전 제3천년기 말 대륙동남아 몇몇 지역에서 매장지와 주거지가 혼재된 장소가 등장했다. 그곳에서는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했다. 기원전 제2천년기 말기에 이르러 태국 남부 해안 혹은 그에 가까운 곳에서 해양 생활에 적응한 뚜렷한 정주 생활 장소가 등장했다. 여기서도 농업의 흔적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 P393

화전을 했던 장소에서는 식량, 약품, 공예품을 만들 재료, 천이나 밧줄을 만들 섬유, 지붕이나 벽의 재료 혹은 바구니를 만드는 데 사용할 나무껍질, 고무, 불 피울 때 사용할 송진, 유향목,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코킹, 향료, 나무 기름, 염료, 사냥을 위한 독성 물질, 지붕에 덮을 나뭇잎, 지붕 조각, 건축 자재, 도구나 배나 무기를 만들 원재료 등을 구했다. 이런 시스템에서 농부는 숲속의 특정 구역을 개간하고 관리하는데, 이는 한 구역을 완전히 갈아엎어서 농지를 만드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오히려 숲의 구조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개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해리스(Harris)에 따르면 "화전과 원경(園耕)은... 다른 농업 시스템과 달리 자연환경의 구조, 기능적 역학, 균형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 - P423

바닥면을 인공적으로 높이면 배수가 원활하고 습지에서도 농사가 가능했다. 이런 식의 밭을 치남파스(chinampas)라 했는데, 멕시코 분지의 호숫가 지역에서 농업의 중요한 요소였다. 치남파스는 호수의 진흙과 수생 식물, 그리고 가정 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등으로 만들었다. 치남파스는 대개 좁게 만들었지만 상당히 길게 늘일 수 있었고, 가장자리를 따라 나무를 심기도 했다. 약 1만 2000헥타르의 치남파스가 아즈텍 제국 수도의 인구를 먹여 살렸다. - P587

초기 농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유용한 통로는 바로 그들의 시간 관념이다. 숲을 제거하고, 소규모 농지를 조성하고, 가축을 기르는 등의 일은 분명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토지와 공간을 소유하는 것 또한 연속성이라는 농업 이데올로기의 일부였다(p669)... 현재의 시간 속에서도 삶은 굴러간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 역시 복잡한 관계 가운데 할 일이 많았고, 그날그날 해야 할 일뿐만 아니라 특별한 일도 있었다(p670)...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은 신석기 시대 유럽 농업인의 특징이기도 했다. 과거에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것은 곧 현재의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 P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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