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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도시들 1 - 도시의 탄생과 정보 기술 ㅣ 케임브리지 세계사 5
노먼 요피 외 지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10월
평점 :
일반적으로 도시화란 사람들이 모이고 사회적 계층이 나뉘는 과정을 말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도시는 다양한 사회적 분파의 다양한 관심사가 서로 충돌하고 협상하는 가운데 발달했다. 통치자(중간 계층의 정치 지도자 포함)와 백성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도시에서는 대규모 노동력 동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새로운 산업이 발달했고, 기술 혁신과 규모의 경제가 이를 뒷받침했다. 사회적 측면에서 도시는 기존의 혈연 중심 관계를 약화시켰다. 전통적 인간관계는 더 높은 권위 아래 복속되었고, 새로운 최고 권력에 의해 노역과 세금 의무가 부과되었다. 도시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면서 도시민의 정체성도 새삼 발달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지와 주변 환경은 도시 구조에 걸맞게 변해갔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544
케임브리지 세계사 5 <고대의 도시들 1 : 도시의 탄생과 정보 기술 Cambridge World History Vol. III>는 신석기 혁명 이후 세계 각지에서 출현한 고대 도시문명을 다룬다. 농경 문화는 많은 산출량에 비례하는 노동 투입을 요구했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내부에서 계급과 분업을 발생시키고, 외부와는 배후지와는 생산물을 주고 받으며 문명권을 바꾸어 나갔다. 이 같은 측면에서, 저자는 도시는 고대 문명의 결과물이자 출발점이라 규정한다.
도시국가는 단지 도시 하나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자원과 인력을 공급하는 상당한 규모의 배후지를 거느렸으며, 배후지는 사회/정치적 조직에 의거해 도시에 결부되어 있었다. 배후지와 도시로 구성된 많은 도시국가가 있었고, 이들은 커다란 하나의 문화권에서 "대등정치제(peer-polity)"로 공존했다. 상호 전쟁을 통해 그중 한 도시국가가 전체 문화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차지한 헤게모니는 흔히 변화되었고, 이후 도시 국가의 자치 체제가 무너지고 더 큰 규모의 영토국가가 들어선 뒤에는 헤게모니 자체가 "붕괴"되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63
최초의 도시가 부상한 이후 도시 네트워크의 형성과 해체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기원전 제2천년기 중엽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치 환경이 근본적 변화를 겪기 이전까지는 도시 네트워크 체제가 유지되었다. 도시 체제가 작동하면서 부와 정치 권력이 엘리트 계층의 손에 집중되었다. 경제 부문은 갈수록 차등이 심화되었고 효율성이 높아졌다. 사람들이 도시로 들어왔다가 다시 시골로 되돌아가기도 했고, 시골의 통제는 갈수록 강화되었다. 과거의 정체성은 변형되었고 새로운 도시 정체성이 발달했다. 세기를 거듭하는 동안 도시가 만들어낸 풍경 또한 변화를 계속했다. 정치적 관행과 이데올로기가 발달했을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건축물도 새롭게 들어섰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468
<고대의 도시들 1>의 전체 주제는 고대 도시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건축', '문자' 그리고 '종교'의 조합이었다. 도시를 이루는 하드웨어인 '건축'과 소프트웨어인 '정보 전달 수단'과 컨텐츠인 '종교'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된 요소임이 본문에서 확인된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종교'는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날씨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기후는 농경 문화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기후에 따라 적합한 거주 형태가 결정되었고, 날씨에 따라 행사가 결정되었다. 거주 형태에 따라 건축물이 들어섰고, 농사를 위해 행사가 진행되었다. 건축물이 정(靜)적이라면, 의례는 동(動)적이었다. 또한, 주기에 따라 달라지는 의례는 건축물의 배치에 영향을 주고 고대 도시는 만들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고대 도시에서 '종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모든 것이었다.
도시에서 권력 표현의 핵심은 기념비적 건축물과 그를 둘러싼 공간이었다. 기념비적 건축물 위주로 도시 설계가 이루어졌고, 의례 행사가 건축물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의례 행사는 영원한 동시에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p224)... 초기 문명의 두드러진 혁신이었던 도시는 신앙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도시는 곧 신앙 체계가 물리적으로 구현된 것이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225
고대 도시의 전형적 구조는 밀집된 주거 구역과 개방된 공간 혹은 건축물들이 몇 차례 번갈아가며 구성되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구성 방식은 행사를 개최하는 데 필수적이었다(p208)... 행사에 사용되는 특별한 물품은 흔히 멀리서 가져왔다. 중요한 물품은 전문 수공업자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행사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통치자나 엘리트 계층에게 후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사회의 지도층에 속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209
행사의 핵심은 이동이었다. 행사와 기념식을 위해 건물과 통로가 조성되었고, 그에 따라 이동 경로가 정해졌으며, 사람들이 이동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도록 설계가 되었다. 도시 공간을 이용한 행사와 그 의미는 주민의 의식에 각인되었다. 이외에 다른 지역을 오가는 것도 또 한 가지 이동의 유형이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214
도시의 외관에 건축물이 토대가 되었다면, 도시의 체제 유지를 위한 기반은 문자(文字 letter)였다. 이미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사회적 불평등은 이 시기에는 더욱 확대되었고, 사회적 계층화가 상당 정도로 진척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계층 별로 자신의 역할이 고정되면서 일은 점차 전문화, 분업화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보편적인 문자가 사용되며, 고대 도시 특성의 한 축을 담당한다.
고대 도시를 운영하려면 모든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체제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야만 이질적 집단들을 서로 연결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대개의 도시는 전문 행정 관료 체제를 동원했다. 도시에는 갈수록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점차 질서도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워낙 가까이에서 상호 의존적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소요되는 물량과 행정 관리를 인간의 기억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문화된 기록 관리(record- keeping) 수요가 생겨나게 되었다. 문제는 도시를 구성하는 인력과 필요한 물자의 흐름을 추적하고 조정하는 일이었다. 도시의 등장과 함께 위계질서와 통제 체제는 더욱 확고하고 정교해졌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386
도시화 과정은 어느 한 공간에 주민이 몰려드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관습의 근본 구조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참여의 장(field)으로 사람들을 이끌어내고, 말하자면 그 새로운 장에서 참여자들이 새롭게 규정되는 동시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둘째는 획일화다. 획일화는 도시화 과정의 핵심이다. 권력은 기호(signifier)와 의미(signified)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다양한 권력 기관(제도)을 통해 바로 그 공간을 파고든다. 권력의 목적은 유통되는 의미를 규정하는 것, 그리고 허용 가능한 담론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311
케임브리지 세계사 5 <고대의 도시들 1>에서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는 농경문화의 요구에 맞춰 기후가 적합한 지역에 도시가 형성되었음을 고대 이집트, 중국, 동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잉카 문명을 통해 보여준다. 이들 문명 모두 신(神) 중심의 권력 구조와 함께 왕, 귀족, 엘리트 계층, 농민 등 서열화된 계급사회의 면을 보인다. 또한, 의례(儀禮)를 통해 이들은 권위를 입증하고 권위를 만들어갔으며, 권위를 사용해 건축물을 만들어 권위를 강화하고, 강화된 권위로 체제를 유지하고자 문자를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자를 통한 정보 독점이 그들의 체제를 굳히는데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삶 역시 오늘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신석기 혁명기 이후 인류는 적어도 주제면에서는 같은 고민을 수천 년 동안 반복해오고 있는 셈이다.
도시의 성장을 정치적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친족 기반 집단의 지도자들이 연맹이나 의회를 형성하여 분쟁을 조정했고, 본인의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들을 이끌고 동맹이 체결된 곳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정치적 연맹체에서 단일한 지도자가 출현했고, 사람들이 모일수록 그들의 권위는 더욱 높아져갔다. 이를 근거로 농업의 집약화, 대규모 토목 공사, 군사 원정 등을 조직할 수 있었고, 전쟁 포로를 잡아 와서 도시에서 노예로 쓸 수 있었다. 사원은 새로운 정치 현실에 신성(神聖)한 면모를 더하는 기능을 잠당하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481
고대의 도시들 속에서 우리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이 구성한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의 틀을 떠올리게 된다. 농작물과 농기구 생산, 생산물 보관을 위한 회계시스템 등에서 우리는 1,2,3차 산업의 물질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도시-주변부'와의 교환에서는 시장경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아직 자본주의의 싹은 이미 트고 있었는데, 이들의 발화는 다음 편 <고대의 도시들 2 : 권력과 제국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을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유통 관계가 중요했는데, 도시 안에서 사람들이 생산한 농산물 혹은 수공업품을 서로 교환하는 시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형성되기 전, 생산과 교환은 사회 및 정치적 관계와 긴밀히 얽혀 있었다. 그 관계에 따라 초기 시장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통제되었다. 따라서 논쟁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초기 도시가 등장할 때 이미 정치적 협상 및 정치권력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 같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545
도시에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개념이 출현했던 증거도 있다. 바로 "시민(citizen)" 개념이다. 기원전 제3천년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엘리트 계층과 노동자 계층을 막론하고 기관에서 보유한 배급 명단에는 출신 도시가 기록되어 있었다. 출신 민족 명칭보다는 출신 도시 명칭이 당시 사회에서 더 보편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1> , p553
마야 도시의 구성 의도를 해석한 설득력 있는 견해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마야인은 멀리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길들여지지 않고 위험해 보이는 성스러운 공간(동굴, 언덕 등)을 ‘포착‘ 내지 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도시 중심에 가져다 놓고 엘리트 계층의 통제 아래 두고자 했다. 인간의 재주로 만들어낸 건축물을 자연적이면서도 영원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언덕은 언제가 그곳에 있었지만, 왕이나 엘리트 계층의 주도로 다시 만들어진 언덕은 오래된 것인 동시에 새로운 곳이었다. - P135
제1천년기에 이미 사회의 계층화는 중앙의 통치자로부터 지방이나 특정 지역 단위까지 보편화되어 있었다. 비문을 통해 지역 엘리트 계층 또한 의례로써 권위를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힌두교의 통치 기술과 토착 애니미즘 신상을 혼합하여 왕국의 수도를 성지로 만들었고, 그곳이 의례 행정의 중심이 되었다. 성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의례용 건물 건축이었다. - P187
고대 중국에서 주요 도시의 종말은 대개 경제적 이유보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왕조가 바뀌거나 제국이 탄생하면 도시는 새로운 사이클로 접어들었다. 이전의 도시에서 개발된 어떤 부분들은 새로운 혁신을 거쳐 유지되었다. 무엇보다 문자가 바로 그러한 사례였다. 상나라의 문자 체계와 필사자들은 정복 왕조 주나라에 의해 그대로 채택되었다. 주나라는 중국의 더 넓은 지역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도시를 건설했으며, 그 과정에서 문자도 보급되었다. 문자는 정치, 종교, 행정, 군사, 문화 생활은 물론 도시 바깥에서도 사용되었다. - P300
다른 도시들이 파편적으로 자연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였다면, 콘코와 티와나쿠의 정치권력은 인간과 곡물과 가축의 생존에 핵심이 되는 자연 과정의 일부를 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의례 관습 덕분이었다. 그들의 의례 행위는 자연환경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핵심적 자연 현상을 영적 존재로 이해했다. 자연의 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사회적, 공간적, 우주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데 성공한 집단은 월등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기원후 500년경부터 이들은 엘리트 계층으로 대두되었으며, 이후로는 티와나쿠의 기념비적 건축물 주변에서 살았다... 기념비적 건축물과 석상이 나타내는 것, 즉 압축 모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자연 현상을 움직이는 작동의 주체로서의 조상신이었다. - P458
도시에서 사원은 가장 중요한 시설물이었다. 사원은 다양한 문화적 행위가 거행되는 구심점으로, 대중이 참여하는 의례는 물론 농산물이나 수공업품의 생산도 사원에서 이루어졌다. 도시의 통치자는 사원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이와 같은 관계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p555)... 성벽은 다양한 관점에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성벽을 건설한 목적이 적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도시민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통치자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는지, 주변에서 도시가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는지 등이 관심 분야였다. - P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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