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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러 지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의 재구(reconstruction)는 전 세계 초기 농업 관련 지식과 관습이 어디서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밝혀내는 강력한  도구를 제공한다. 이같은 언어학 연구는 많은 경우 고고학 자료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역사적 재구를 통해 발견한 자료가 쌓이면 과거의 어느 민족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를 밝혀낼 수 있다. 일단 그것이 밝혀지면 고고학자들이 탐구해야 할 지역, 새롭게 탐구해야 할 주제가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의 새로운 과제도 설정된다. 게다가 차용어의 경로를  조사해보면 지식의전파 경로 또한 드러난다. 기원전 제7천년기에 염소와 양이라는 어휘가 초기 쿠시어파에서  나일 사하라어족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 P179

한국에서 벼농사가 본격화된 시기는 금속기 사용 및 견인 동물 우경(牛耕)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요소가 한꺼번에 ‘패키지‘로 도입된 시기가 민무늬토기 시대인데, 이 무렵 한반도 전역에 고인돌 거석 무덤이 확산되었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  매장지의 거석 기념물이 확산되던 것과 비교되는 현상이다. 서유럽에서 발달한 집단 무덤과 달리 한반도의 고인돌에는 한 사람만 묻혔다. 이는 당시 갈수록 강화되던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P279

초기 농업 공동체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유럽과 중국 지역의 도처에서 마을을 둘러 환호를 건설했고, 유럽의대서양 연안이나 한국 같은 경우는 거석(巨石)을 이용하여 무덤을 조성했다.  초기 농업 사회의 맥락에서 이러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은 노동의가치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함으로써 사회적 업적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같은 거대한 업적이 소규모 사회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더욱 주목을끈다. 이는 강력한 전통의 계승과 사회적 불평등을 지속하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건축물들은 공동체의 의무 유지를 강조하는 선언문같은 것으로 해석된다. 즉 가정 단위뿐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의 이익을위해서도 노동력을 투자할 의무가 있다는 선언이었다.  - P291

야훼 숭배주의 모델에 따르면, 통치자는 농업 생산을 통제하고 상의하달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한다. 의사 결정은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생산 수단과 방식은 명령에 따라 예속 노동자에게 의무로 부과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사례는 몇몇 극단적인 전제 군주 체제에서나 볼 수 있었을 뿐, 대부분의 초기 도시에서는 다양한 문제가  다양한 차원에서 결정되었으며 권력 관계의 복잡한 연결망을 통해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도시라면 공통적으로 고민한 근본 문제가 있었다. 이 많은 인구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먹여 살릴 것인가? 관개 시설 이용이나 곡물 다양성 선택 같은 의사 결정을 제대로 했는지 파악하려면 기본적으로 운송 능력과 생산량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결정적 요인은 어떤 농업 시스템이든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 · 정치 · 경제적 의무 시스템이다. 그래서 의사 결정에 필요한 자연환경 요인, 기술적 요소, 사회적 제약을 검토해야 하고, 정보의 활용 능력이나 문화적 규범의 유연성이 다양한 요소들을 얼마나 강화했는지 혹은 얼마나 제한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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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발전의 핵심을 두 가지 들라면 첫째, 상부에서여러 도구가 발달한 것이고 둘째, 18세기에 여러 수단과 방법이 증가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어땠을까? 유럽과 가장 거리가 먼  경우는 중국으로서 이곳에서는 제국의 행정이 경제의 계서화를 가로막았다. 단지 효율성 있게 돌아가는 것은 하층의 읍 및 도시의 상점과 시장뿐이었다. 유럽과 가장 유사한 경우는 이슬람 권과 일본이다. 물론 우리는 세계적인 차원의 비교사를 다시시도해보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거나 아니면 적어도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도록 해줄 것이다.
- P184

내가 "경제 (economie)" — 또는 시장경제 — 라고 부른 것과
"자본주의(capitalisme)"라고 부른 것 사이의 영역 차이는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중세 이래 유럽에서 언제나  지속되던 상수(常數)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산업화 이전 시기의 모델에 세번째의 영역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非)경제라는 제일 아래층이다. 경제는 이곳을 부식토로 삼아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전체를 장악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 최하층은 거대하다. 이 위에 시장경제의 영역이 수평적으로 여러 다양한 시장과 연결을 늘려간다. 이곳에는 어느 정도의  자동성(automatisme)이 있어서 수요와 공급과 가격을 연결해준다. 마지막으로 이 시장경제라는 층의 옆에, 차라리 그 위에, 반(反)시장(contre - marché)의 영역이  있다. 이곳은 가장 약삭빠르고 가장 강력한 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바로 이곳이 자본주의의 영역이다. 그것은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 P323

간단히 말해서 자기 영역이 아닌 곳에 자본주의가 침투한 것은 그 자체로는 정당화가 안 된다. 단지 상업의 필요성이나 이익에 따라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생산에 손을 댔다. 자본주의가 생산 영역에 침입하는 것은 기계 사용이 생산의 조건들을 변화시켜서 산업도 이윤의 확대가 가능해진 영역이 된 산업혁명기에 가서야 일어난다. 이때 자본주의는 그런 것에 의해서 크게 변형되고 나아가서 확대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국면에 따라 변화하는 행보를 포기한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9-20세기가 되어서는 산업과는 또 다른 조건들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산업시대의 자본주의라고 해서 그것이 단지 산업생산 양식에만 연관된 것은 결코 아니다.
-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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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확산 - 대륙별 구석기 문화 케임브리지 세계사 2
데이비드 크리스천 엮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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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 시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이동에 관한 이야기다. 때로는 다른 생물이 잠식하지 않은 생태 환경의 빈 공간(niche)을 찾아 들어가기도 했고, 행동 양식의 한계를 극복하여 이전에는 살 수 없었던 곳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동은 대개 수축과 팽창의 과정이었다(p235)... 인류의 확산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이동 과정에서 해부학적, 기술적, 사회적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뇌 용량의 변화, 뾰족한 돌촉을 부착한 발사체의 발명, 교환 체계의 발달 등이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237


 데이비드 크리스천(David Christian, 1946 ~ )의 < 케임브리지 세계사 2 Cambridge World History Vol. 2 : 인류의 확산>에서 우리는 빙하기(氷河期)에 이루어진 인류의 확산과 간빙기(間氷期)에 이뤄진 문화의 다양성을 접하게 된다. 이와 함께, 인류 문화사에 있어서 현생 인류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준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석기 시대 문화 전체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석시 시대 후반부 문화 일부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현생 인류 문화가 고인류(古人類)가 만들어낸 문화의 기반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의 후기 석기 시대 층위, 그리고 아프리카 바깥의 후기 구석기 층위에서 발견되는 유골은 언제나 완전한 현생인류의 유골이라는 사실이다. 반면 중기 구석기 혹은 중기 석기 시대와 관련된 지층에서 발견된 유골은 예외없이 다른 고인류의 유골이다... 요약하면 아프리카 고인류는 중기 석기, 다른 고인류는 중기 구석기, 완전한 현생 인류는 후기 석기 및 후기 구석기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115


 우리 이야기의 기본 틀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기후 변화는 딱 한차례뿐이다. 약 15만~ 20만 년 전으로, 빙하기 관련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호모 사피엔스의 최초 출현이 연결되는 시기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례적으로 확정된 시기는 약 10만 년 전이었다. 그때 문화적 변화도 함께 일어났다. 당시는 빙하기였다. 빙하기는 훨씬 전부터 지속되어왔으며, 약 2만 년 전에 가장 극심했다... 1만 8000년 전에서 1만 5000년 전 사이, 기온이 다시 올라가는 온난기가 시작되었다. 온난기가 시작되면서 빙하가 녹아내렸고, 결과적으로 바닷물의 온도가 내려갔다. 그 영향을 받는 위도의 범위에서는 일시적으로 기후의 전체적 흐름과 반대되는, 즉 기온이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환경에서 인류 문화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다양성이 출현했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66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는 문화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고인류가 창조한 문명을 빼앗은 종족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상 여러 곳에서 살던 고인류들은 10만년 전 빙하기에 대륙 여러 곳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호모 사피엔스의 도전은 점차 거세지면서 5만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거의 멸종의 상태에까지 이른다. 생체적인 능력으로는 고인류에 미치지 못했지만, 이 시간 동안 이들은 추상적인 '사고'와 '언어'의 힘을 통해 우세종으로 살아남아, 세상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데 성공한다. <창세기>의 선악과를 선택한 이브와 아담, 그리고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호모 사피엔스의 선택과 승리를 묘사한 것이었을까. 


 중동과 유럽에는 네안데르탈인이 있었고, 아시아에는 데니소바인을 비롯하여 아마도 다른 종류의 고인류들도 있었던 것 같다. 다른 고인류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들은 이후로도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으나, 먹이와 자원을 두고 완전한 현생인류 조상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밀려났다(p109)... 혼종(混種) 사례도 몇 건 보고되어 있다. 현생 인류 조상의 유골에서 소량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추출된 사례가 있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110 


 해부학적 현생인류와 완전한 현생인류는 전혀 달랐다. 완전한 현생인류는 지구상 거의 모든 기후 조건에 적응했다. 그리고 이들의 진출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다른 고인류들이 멸종했다. 10만 년 전 아프리카를 벗어난 아프리카 고인류는 이처럼 모든 기후 조건에 적응할 능력이 없었고, 다른 고인류들과의 경쟁에서 그들을 압도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4만 8000년경 우리 모두의 조상인 완전한 현생인류는 이러한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115


 호모 사피엔스의 특성은 정신적 능력과 관련이 있다. 아마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그 특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텐데, 우리가 아는 한 정신적 능력이 인류가 가진 매우 예외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정신적 능력들 가운데 문화 다양성과 관련해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상상력(imagination)이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과 관련된 진화의 부산물이 두 가지 더 있다. 바로 기대(anticipation)와 기억(memory)이다. 내가 보기에 인류 문화에 자유를 부여한 힘은 바로 상상력이었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64


 현생인류의 특징은 생물학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모든 종류의 고인류와 달리, 또한 다른 모든 영장류 동물과 달리 완전한 현생인류는 질식사할 위험이 매우 컸다. 그러나 장점도 있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언어 소통에 필요한 모든 소리를, 특히 기본 모음(primary vowels)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현생 인류의 언어생활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장점은 분명 생존에 유리한 조건이었고, 그 이익은 당연히 생물학적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118


 <케임브리지 세계사> 2권 <인류의 확산>에서는 호모 사피엔스가 빙하기라는 기후의 특성을 활용해 기술의 힘을 갖고 현생 인류가 앞선 종(種)을 대체하고, 석기 문명의 주권을 잡은 역사가 서술된다. 진화(進化)의 역사에서 그들은 육체적 능력을 다소 반납하고, 대신 정신적 능력을 선택하면서 살아남게 된다. 모든 대륙이 빙하로 연결되던 시기에 가능했던 이들의 확산은 이제 간빙기가 되어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지역은 서로 다른 환경에 고립될 것이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 고립된 호모 사피엔스들에게는 이미 전(前)시대에 만들어진 신분제가 있었고, 다음 시대 농경 시대는 신분제에 의해 또다른 변화가 예정되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당시에 인류가 거주하던 지역 어디를 가더라도 문화의 핵심 요소는 비슷했다. 언어, 정치 구조, 사회생활 등은 이미 상당히 다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슷한 기술을 이용해서 수렵채집 경제생활을 했고, 비슷한 종류의 음식을 먹었고, 비슷한 수준의 물질문화를 향유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종교 생활의 양태도 비슷했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90


 이주의 원인은 모호하지만 이주의 결과는 명확하다. 이주 때문에 사람들의 관계, 집단의 규모와 조직, 세계를 보는 방식, 다른 생물들과 관계 맺는 방식 등이 모두 바뀌었다. 이때 바뀐 여러 가지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결과 중 하나는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었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82


 우리 인간은 추위의 산물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분명하게 시작되는 시기는 기온이 낮은 상태(기존 표현으로 "빙하기")가 지속되는 와중이었다. 그동안 특이한 문화적 분기가 발생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만 년 남짓 전의 일이었다. 그 뒤 지구의 기온이 다시 오르자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뒤 지구의 기온이 다시 오르자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61


 이주자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충분한 이동기술과 후속 번식력이 있었다는 사싱이다. 불을 이용한 요리도 아마 인구 성장을 가능케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요리를 하면 음식을 더 쉽게 소화할 수 있다. 우리 인간처럼 소화기관이 짧고 턱이 약하고 이가 뭉툭한 데다 위가 하나뿐인 동물이 섭취할 수 있는 에너지원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결과적으로 요리는 인류의 진화에 매우 유리한 요인을 제공했다. _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 <인류의 확산> , p80


빙하기에는 유라시아 대부분이 툰드라였다. 사냥을 하기에는 빙하의 끄트머리와 툰드라가 만나는 부근이 가장 좋았다. 그곳에 서식하는 동물들은 체내에 지방을 효율적으로 저장하도록 진화되어 있었다. 지방은 오늘날 별로 좋은 소리를 못 듣지만,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방을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 세상에서 에너지 효율이 가장 높은 식재료가 바로 동물성 지방이다(p85)... 그들이 좋아한 음식은 그들에게 미학적, 감성적, 지성적 삶을 가져다 주었다. 적어도 그 영향은 부정하기 어렵다. 빙하기의 예술가들에게 지방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빌렌도르프(Willendorf)의 비너스>다. - P86

고인류의 발성으로는, 비록 다양한 소리를 낼 수는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나 동작에 대한 소통만 가능했다. 이에 비해 완전한 현생인류는 문장 구사 능력을 통해 끝없이 어휘와 의미를 만들어냈다. 문장을 만들어내려면 반드시 추상 능력이 있어야 했다. 즉 사물과 경험을 분류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또한 자신이 획득한 지식을 일정한 패턴으로 조직화하는 능력과, 직접 주어지지 않은 대상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p119)... 무엇보다 중요했던 점은 완전한 문장 구사 능력으로 사회적 협력의 규모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능력 덕분에 친족 구조의 개념화 및 정형화가 가능해졌고, 이를 기반으로 더 큰 영역의 사회 집단과 집단 간 협력적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 P120

완전한 문장 구사 능력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여전히 남아 있는 언어 능력을 언어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가 기원이 되는 단 하나의 언어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원 언어의 방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상호 진화해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언어의 역사는 인구학적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즉 예전 고인류의 언어적 의사소통에서 완전한 문장 구사 능력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비교적 좁은 지역,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상호 교류가 가능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 P122

고인류를 포함한 인류 전체 가운데 진정한 유럽인은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이 유일한 것 같다. 이러한 결과는 네안데르탈인의 진화가 유럽의 환경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럽의 환경이란 지역적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과 분리된 지리적, 유전자적 고립을 의미한다(p211)... 네안데르탈인이 그 이전 조상들과 다른 점은 빙하기에 적응하는 능력이었다... 그들이 빙하기 기후에 적응하는 데 결정적이었던 것은, 매머드나 털코뿔소 등의 대형 동물을 사냥하는 기술이었다. 이런 사냥감은 그들에게 풍부한 단백질과 지방을 제공했다. - P213

기후 변화는 동식물 생태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물론 인류도 예외일 수 없었다. 온난하고 습한 시기에는 인류와 다른 생물들이 북쪽으로 서식지를 넓혔다. 대개는 원래 살던 곳에서 수직 방향 북쪽으로 이동했고, 서식 환경이 적당한 이웃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 동안 서로 다른 집단 간의 교배가 이루어졌다. 환경이 좋아질 때는 개체수도 증가하기 마련이었다. 춥고 건조한 시기에는 서식지가 축소되고 지역에 따라 사람들이 사라지는 경우가 생겨났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난처에 국한되었다. 이처럼 인류의 아시아 지역 거주지는 기후 변화에 따라 좌우되었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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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 일상생활의구조 -하 까치글방 98
페르낭 브로델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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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제시하고자 한 것은 음식으로부터 가구까지 또 기술에서부터 도시까지 모든 광경을 전체적으로 보려는 시도였으며, 나아가서 필연적으로 물질생활이 현재 어떠하고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경계를 한정하려는 시도였다... 두번째 목적은 서술상의 부조화에 빠질 우려 때문에 이제까지 역사가들이 거의 제시하지 않았던 일련의 풍경들을 그려가면서, 분산된 자료들을 분류하고 정돈하여 커다란 흐름을 잡아내고, 단순화된 역사 설명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818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1-2>는 일상생활의 모습을 통해 3층 피라미드 구조의 가장 하층부인 물질생활의 모습을 그려낸다. 15-18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물질생활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경제 체제하에서 여러 제약으로 인해 분명히 성장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한계는 기술, 에너지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의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전 시기에 있었던 일련의 흐름 덕분이었다. 


 중요한 점은 사실 축력과 인력, 그리고 땔나무가 이론의 여지 없이 상위의 두 계정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물레방아를 이용한 해결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은 것은 부분적으로는 기술적인 이유에서였지만, 더 큰 이유는 물레방아가 자리잡고 있는 곳에서는 큰 힘이 필요하지 않았던 반면 이 시대에는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에너지의 부족은 앙시앙 레짐 경제의 주요한 핸디캡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전에 이미 선행단계가 있었다. 가축의 힘을 보다 잘 이용하게 해주는 멍에의 발전, 나무를 태워서 얻는 힘, 강이나 바람을 이용하는 초보적인 모터, 게다가 더 많은 사람의 힘을 작업에 투여하는 것 등에 힘입어 15-17세기 중에 유럽은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었다. 느리기는 했지만 힘과 세력, 실용적인 지성(intelligence pratique)이 증대했다. 1730-1740년대부터 점점 더 활발한 진보가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러한 앞시기의 팽창에 근거한 것이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529


 이전 시기의 물질문명은 분명히 급격한 개선을 만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물질문명의 전세계적인 전파는 하나의 문명권의 독주(獨走)를 허용하지도 않았고,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유럽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결코 앞선 문명이 아니었다.


 중국은 야금술이 대단히 일찍 발달했다는 점에서 논의의 여지가 없는 우월성을 가진다. 중국인들은 기원전 5세기경에 이미 철의 주조를 알고 있었고, 일찍이 석탄을 사용했으며, 아마도 기원후 13세기에 코크스를 이용해서 광석을 용해했던 듯하다. 이에 비해 유럽은 14세기까지는 용해된 상태의 철을 얻지 못했으며, 아마도 17세기에 코크스를 사용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대체로 1780년대 이후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5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앞설 수 있었다면, 그 원인 중 하나는 전쟁(war)으로 귀속된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에서 '사치'가 유럽사회의 특징 중 하나였다면, 2권에서는 '전쟁'이 또다른 특징으로 언급된다. '사치'를 위한 욕망, 욕망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전쟁'을 위해 유럽은 물질문명을 발전시켜나간다. 교회 종을 만드던 주조술로 총포를 만들었으며, 총포를 조달하기 위해 금융업을 발전시켰고, 금융업은 많은 자본이 필요한 인쇄업에 투자되면서 정보를 독점시켜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 연결고리는 유럽의 '도시(sity)'가 갖는 특징이다.


 총포와 화기는 국가의 전쟁, 경제생활, 무기 생산의 자본주의적 조직 등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왔다. 조금씩 조금씩 산업이 집중되는 모습을 띠어가기 시작했으나 그것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전쟁산업은 여전히 다양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어느 한 곳에 마음대로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없는 문제가 있어서, 이것을 해결하려면 강을 따라가거나 숲을 통과하여 에너지를 찾아가야 했다. 오직 부유한 국가만이 새로운 전쟁의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자기 책무를 수행하며 독립을 유지하던 도시들이 쇠퇴한 것도 이런 문제에서 기인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562


 중요한 것은 13세기부터 장기적인 긴장이 물질문명을 흥기시켰고 서구세계의 심리를 변형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가들이 황금에 대한 갈망, 세계에 대한 갈망, 혹은 향신료에 대한 갈망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 실용적인 적용에 대한 추구가 늘 함께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도록 인간의 노력을 경감시키고 동시에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실제적인 발견들이나 세계를 장악하려는 의도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발견들이 집적된 것, 그리고 에너지원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크게 흥미를 가진 것은 유럽이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유럽의 참모습이었으며 우월성의 약속이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593


 정신과 지성에 관한 것으로부터 일상생활의 물품과 도구에 관한 것까지 수많은 문화적 자산들 사이에 관계를 정립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질서를 정립하는 것, 그것이 문명이다(p819)... 인구가 밀집된 모든 세계는 한묶음의 기본적인 응답들을 만들었고,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굳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집착을 가져오는 타성의 힘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요 요소의 하나이다. 문명은 역사의 한 카테고리이며 필요한 분류이다. 15세기 이전 개별적인 문명 혹은 문화가 있었다(p820)... 많은 페이지에 걸쳐서 나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치와 빈곤이라는 삶의 두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막연한 단어인 사회보다는 차라리 사회경제(socio- economie)를 이야기해야할 것 같다. 그렇지만 사회와 경제라는 두 좌표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원인이면서 결과인 국가가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띠고 등장하여 관계를 교란시키고 왜곡시키며, 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경제의 구조물 형성에 때로 중요한 역할을 떠맡는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821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에서 우리는 물질문명에서 꼭대기 층인 자본주의로 가는 '사다리'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물질문명이 느린 속도로 수평적으로 퍼져나갔다면, 도시는 외부와 단절하여 수직적으로 응축된다. 성벽으로 둘러쌓여진 내부공간은 치열한 계급 투쟁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외부 침입자들로부터 함께 지켜나가할 공동의 공간이었다. 오늘날 프리이어리그(Premier League), 분데스리가(Budesliga), 라리가(La liga)에서 보여지듯 도시 중심의 유럽문화는 길드(guild)문화였으며 동시에 부르주아(bourgeois) 문화였다. 이제 시간이 흐른 뒤 교통수단의 발달 등으로 공간적 제약이 극복된다면, 이들 도시들은 견고하게 묶여지고 근대 민족주의(nationalism)가 탄생할 것이었다. 


 어느 곳에 있든 간에 언제나 도시는 명백한 규칙성을 가진 일정한 수의 현실(realite)과 가정(processu)을 의미한다. 강제적인 분업 없이는 도시가 존재할 수 없고 도시가 없으면 약간이라도 진보한 분업이 있을 수 없다. 시장 없는 도시는 불가능하고 도시 없는 지역시장 혹은 민족시장은 불가능하다... 사실 사회와 경제의 근본적인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시장의 이쪽에 위치하느냐 저쪽에 위치하느냐에 따른 것이다. 또 보호와 동시에 강제를 하는 권력이 없다면 도시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일 권력이 도시의 외부에 존재한다면 이 권력은 도시 안에서 추가적인 차원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것은 또 다른 성격의 활동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시가 없다면 세계에 대한 개방이나 원거리 교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696


 유럽의 차이점과 독창성은 무엇인가? 유럽의 도시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도시는 독자적인 세계로서,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경향에 따라 발전해왔다. 도시는 영방국가를 눌러 이겼다 ; 영방국가는 느릿느릿 자리잡아갔고, 도시가 자신의 이해에 맞는다고 판단하여 도와줄 때에만 영방국가가 확대되었으며, 그나마 도시의 운명의 확대판, 그리고 흔히는 무미건조한 복사판에 불과했다. 도시는 주변 농촌 지역을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지배했고, 마치 식민지 이전의 식민지처럼 다루었다(도시 다음에는 국가가 마찬가지로 이 지역을 그대로 다룰 판이었다). 도시의 연락망은 마치 성좌(星座) 같은 모양이었는데, 도시는 이 신경망을 통해 자신의 경제정책을 운영했으며, 흔히 방해물을 깨버리고 언제나 특권들을 만들어내고 또 되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지켜갔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742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의 결론부는 유럽의 도시로 마무리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명품 아파트 단지의 선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 물물교환과 화폐경제가 공존하는 시장경제, 그리고 이들 위에서 유일하게 자율성을 갖는 자본주의가 만나는 수직적 공간인 도시. 독자들은 1부의 마지막인 도시를 통해 2부의 시작 시장경제로 자연스럽게 안내된다.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에 해당되는 내용은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1941)의 두 저서 <사치와 자본주의> <전쟁과 자본주의>와 연결된다. 관심있는 이들은 이와 함께 읽는다면 더 좋은 독서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이제 2부로 넘어갈 차례다...


 경제생활과 함께 우리는 일상사, 또는 무의식적인 일상성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경제생활은 아직 규칙성을 띠고 있다. 먼 과거에서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발달해온 분업은 매일매일의 활동적이고 의식적인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분리와 만남을 가져온다... 그러나 제일 꼭대기층에는 자본주의와 그것이 사방에 펼쳐놓은 광대한 그물망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미 악마적인 놀음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정교한 기구는 제일 아래 수준에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아마도 모든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자기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제1장에서 불평등한 세계의 수준 차이를 강조하면서 이 점을 말하려고 했다. 이 세계를 활성화시키고 상층의 구조를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것은 크든 작든 이 불평등, 이 부정의, 그리고 이 모순이다. 이 상층의 구조만이 진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자본주의만이 상대적으로 운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822


 이것이 전(前)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모습을 창출하도록 만드는 요소이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물질적 진보인 동시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가혹한 착취를 가져온 원인이며 그 표시이다. 그것은 반드시 인간의 노동인 "잉여가치"의 수취에 의한 것만은 아니며, 힘과 상황의 불균형에서도 기인된다. 그러한 불균형 때문에 한 국가의 차원이든 전세계의 차원이든 상황에 따라 언제나 정복할 곳이 생기고, 다른 것보다 더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착취 분야가 생긱는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p823


모든 것이 기술이다. 그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지만, 거기에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드센 노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고 단조로운 노력도 포함된다... 기술은 결국 역사의 넓이를 가지고 있고, 필연적으로 역사의 완만함과 모호함을 나누어가진다. 기술은 역사에 의해서 설명되고 또 기술이 역사를 설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못 된다. 이와 같이 그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못 된다. 이와 같이 역사 전체라는 극단적으로 확대된 영역에서는 하나의 움직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움직임과 다양한 방향, 다양한 "톱니바퀴의 물림"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결코 단선적인 역사란 없다. - P473

참으로 이상한 것은 중국이 그렇게 일찍이 앞서가다가 13세기 이후에 정체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아무런 진보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용해와 제철 기술의 성취는 단지 앞시대 것의 반복에 불과했다. 코크스를 이용한 용해는, 그것이 알려져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발달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헤아리기도 힘들고 설명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중국의 운명은 전체적으로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 P538

또 다른 문제는 유럽의 뒤늦은 성공이다(p538)... 11세기나 12세기 이후 유럽에서 수차를 사용하게 된 것은 결정적인 진보를 가져왔다. 이것은 대단히 느린 과정이기는 했지만 어떠한 값을 치르고서라도 모든 중요한 생산지역에 설치되었다. 숲 속의 제철소에 대신해서 간변에 제철소가 들어섰다. 거대한 풀무, 광석을 부수는 공이, 그리고 여러 번 가열한 철을 두드리는 망치 등을 물의 움직임으로 움직였다. 이러한 진보와 아울러 14세기 말에 용광로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 P540

상품으로서 책은 도로, 교통, 시장에 연결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책은 유럽에 유리하게 힘을 더해주는 수단이었다. 모든 사상들이 서로 만나고 교환되었다. 인쇄술은 옛날의 필사본 형태로 좁은 한계 속에 갇혀 있던 책의 전파를 가속화시키고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강력한 장애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속화가 일어났다. 인쿠나불라의 시대인 15세기에는 라틴 어가 가장 중요했고, 그와 함께 종교서적과 신앙서적이 주류를 이루었다. 16세기 초에 고대 문헌들이 라틴어 및 그리스 어 판본으로 나옴으로써 인문주의의 공격적인 대의(大義)에 봉사하게 되었다. 약간 뒤에 종교개혁과 가톨릭 종교개혁 역시 인쇄술을 자신들의 필요에 이용했다. - P576

크게 보면 유럽내에 서로 상이한 두 개의 해상 세력이 있었던 셈이다. 하나는 지중해 세력이고 또 하나는 북유럽 세력인데, 이 둘은 곧 경제적으로 -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또 서로 섞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배의 나포(拿捕)와 지배, 그리고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13세기에 리스본의 융성은 활기에 넘치는 주변적인(peripherique) 해상 자본주의 경제의 교훈을 점차 잘 습득한 중개항의 융성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조건 속에서 지중해의 긴 배들은 북유럽의 해상 세력에 모델을 제공했고,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던 라틴 범포를 제시해주었다. 반대 방향으로는 북유럽 배의 겹쳐잇기와 특히 역풍을 더 잘 헤쳐나가게 하는 에탕보 키가 바스크 족 등의 중개를 통해 지중해 지역 조선소에 전해져서 이곳 풍토에 적응해갔다. 교환과 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융합해갔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문명의 단위가 확고히 자리잡아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 P581

유럽은 나머지 지역과는 달랐으며 이미 괴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유럽은 온갖 종류의 화폐를 경험하고 있었다. 최저층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도 더 흔히 물물교환, 자급자족, 그리고 원시적인 화폐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은 실제 화폐들을 아끼기 위한 오래된 궁여지책이나 임시변통이었다. 그러나 그 위의 상층에서는 금화, 은화, 동화 같은 금속화폐들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유럽은 이런 것들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형태의 신용이 있었다. 이런 것들은 유럽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대륙의 부(富) 위에 거대한 그물을 펼치는 이러한 체제는 전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고 또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설명되는 것이었다. 16세기에 아메리카의 "보물"이 극동에까지 수출되어 이곳에서 지방화폐나 금속괴로 변환했으며 이것이 유럽의 이익이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사실이 아니다. 유럽이 세계를 삼키고 소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 P659

자본주의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화폐의 게임에 들어간다면 그것들은 유사(類似) 화폐(pseudo-monnaie)이기도 하고 진짜 화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나면 캉티용이 제일 처음 이에 대해서 말한 바와 같이 일반적인 "화해(reconciliation)"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만일 모든 것이 화폐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크레딧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이는 슘페터가 말한 바와 같다 : "화폐는 크레딧 도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소비재라는 종국적인 지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 P691

15세기부터 서유럽의 도시들은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했다. 인구는 늘어났고 대포의 발달은 이전의 성벽을 가소로운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성채는 수평 방향으로 확대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한번 만들어지면 거대한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는 더 이상 옮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방어선 앞으로 빈 공간을 두는 것이 방어 전술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건축, 정원 만들기, 식목 등을 금했다. 그래서 도시의 팽창이 저지되었고, 이전에 비해서 더욱 수직 방향으로의 변화를 강요당했다. - P723

각 지방이 자기 언어를 말하는 독립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자기 기념물을 건조하며, 파리와 그 세계가 알지도 못하는 세련되고 위계적인 사회를 이루었던 그 시대를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상상도 하지 못한다. 괴물 같은 파리는 이 경탄할 만한 내용물을 먹고 그것을 소진시켜 버린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문제에서 파리나 런던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경제생활의 일반적인 움직임만이 여기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이차적인 지점들을 소진시켜서 핵심적인 곳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지점들은 이번에는 확대된 세계의 차원에서 그들 사이의 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게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만일 수송 속도가 조금이라도 빨라지면 모든 질서가 바뀔 것이었다. - P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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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생활과 함께 우리는 일상사, 또는 무의식적인 일상성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경제생활은 아직 규칙성을 띠고 있다. 먼 과거에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발달해온 분업은 매일매일의 활동적이고 의식적인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분리와 만남을 가져온다. 일상적인 노동과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이 삶은 약소한 이익을 누리는 미시 - 자본주의로서, 그것은 그렇게 밉살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일 꼭대기층에는 자본주의와 그것이 사방에 펼쳐놓은 광대한 그물망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미 악마적인 놀음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정교한 기구는 제일 아래 수준에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아마도 모든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자기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제1장에서  불평등한 세계의 수준 차이를 강조하면서 이 점을 말하려고 했다. 이 세계를 활성화시키고 상층의 구조를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것은 크든 작든 이 불평등, 이 부정의, 그리고 이 모순이다. 이 상층의 구조만이 진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자본주의만이 상대적으로 운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 P822

 물질생활이나 일상적인 경제생활이라는 유연성 없는 경제구조 앞에서 자본주의는 원하는 대로, 또 가능한 대로 간섭해 들어갈 수 있는 영역, 또는 반대로 포기할 수 있는 영역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요소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구조를  다시  만들며,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다른 구조들을  변형시킨다. 이것이 전(前)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모습을 창출하도록 만드는 효소이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물질적 진보인 동시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가혹한  착취를 가져온 원인이며 그 표시이다. 그것은 반드시 인간의 노동인 "잉여가치"의 수취에 의한 것만은 아니며, 힘과 상황의 불균형에서도 기인된다. 그러한 불균형 때문에 한 국가의 사원이든 전세계의 차원이든 상황에 따라 언제나 정복할 곳이 생기고, 다른 것보다 더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착취 분야가 생기는 것이다. 선택한다는 것, 선택할 수있다는 것, 비록 그 선택이 아주 제한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 P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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