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과 세계사 2 - 대륙별 구석기 문화 케임브리지 세계사 4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엮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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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가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친 지점은 인간이 서로를, 그리고 주변 환경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석기란 경제적 변혁을 일컫는 말이기는 해도 사육과 재배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식량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이용하는지, 그 관점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기술적 및 사회적 혁신도 함께 요구되었다.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신석기 패키지"라고 한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8


 초기 농업과 관련된 인간의 반응 양상들을 살펴보면. 선호하는 식물의 야생 서식지를 유지하는 활동을 했고,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곳을 중심으로 머무르며 생활의 이동성이 감소했으며, 이용 가능한 식량 자원의 변화에 따라 식생활 패턴을 바꾸었고, 작물재배 혹은 야생 작물 관리를 통해 원하는 동식물의 밀도를 높여 나갔다... 식량 생산이 지속되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서 농업에 의존하는 사회가 더욱 많아졌고, 그들이 농업에 적합하도록 주변 환경을 바꾸게 되었다... 농업은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능한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90


 그레이엄 바커(Graeme Barker, 1946 ~ )와 캔디스 가우처(Candice Goucher, 1953~ )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4 Cambridge World History Vol. 2 Ch.8-23 : 농업과 세계사 2 : 지역별 농업의 기원 >에서는 '신석기 혁명'의 모습을 지역별로 세부적으로 살펴본다. 자연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던 시기, 홀로세를 살아가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농사를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주(定住.)생활의 형태가 등장하고, 창고 등 건물들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신분제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했다.


 재배 및 사육, 그리고 마을의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사회적 관계도 새롭게 바뀌었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몇몇 사회적 관념의 변화는 이후 시기의 변화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즉 의례, 가족 및 공동체 구조, 횡적/종적 사회관계, 축제 등의 행위가 이때 모두 고도화되었다. 이러한 행위의 대부분은 신석기 시대 물질문화의 풍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76


 남아시아의 신석기 발전은 크게 보아서 기본적으로는 "신석기 혁명"의 가장 고전적인 패턴을 그대로 따랐다. 먼저 영구 정착지가 등장했고, 이후 농업이 개발 혹은 유입되었으며, 그다음으로 토기가 제작되었다. 남아시아에서 신석기의 대표적인 특징, 즉 토기와 정주 생활과 가축과 작물 등은 모두 신석기 시대 말기에 등장했다. 남아시아의 신석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변종들이 연속된 장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67


 특정 유형의 건축 재료, 즉 나뭇가지를 엮어 벽체를 만들고 초가지붕을 씌운 오두막 건물의 흔적이었다. 토크와 유적의 발굴 사례에서 보듯이 이러한 구조물을 대개 원형이었고, 안에는 화덕 자리가 있었으며, 대개는 가운데 기둥 자리 구멍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러한 건물화 함께 발견되는 이모작의 흔적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건물의 흔적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이모작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한 장소에서 머물러 살아야만, 또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갠지스강의 주기적 범람과 갠지스 평원에서 자라는 벼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49


 자원 증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농업으로 변화한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첫째, 사람들은 식량 자원을 생산할 수 있는 특정 식물에 집중하여 갈수록 관리를 강화하면서 그 식물을 의도적으로 심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둘째, 사람들은 숲속에서 원하는 식물을 심기 위하여 새로운 환경, 즉 농지를 조성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53


 이와 함께 차이점도 발견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축의 활용, 관개시설의 운용 등이다. 이들의 사용은 해당지역의 기후와 재배하기 적합한 작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졌지만, 결과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토양의 비옥도와 재배작물의 특성, 관개시설의 유무는 투입 노동력의 비율과 가축사육의 필요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단기적으로는 계급제, 장기적으로는 문명의 성격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게 된다. 


 동양에서 곡물의 중요성은 서양에 비교하자면 가축의 중요성에 맞먹는다. 유럽에서 농업은 복합 영농으로, 곡물 생산은 언제나 동물 사육과 함께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농업은 언제나 곡물 생산에 집중했으며, 선사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 음식은 대체로 채식 위주였다. 다만 최근에 그 경향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45


 동물 사육은 일본의 초기 농업 사회에서 그 역할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야요이 시대부터 말과 소는 주로 농사일에 사용되었고, 인간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운송 수단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사육의 목적이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고기나 우유를 비롯한 축산물을 활용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집돼지도 야요이 시대부터 사육되지 시작했으나, 야요이 시대의 식생활에서 돼지고기가 차지한 비중은 미미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28


  "농업"에서 식량 생산 활동을 총칭하는 의미를 포함한다. 곡물 재배 위주(원경 園耕, farming), 가축 사육 위주(유목 herding 혹은 목축 pastoralism), 혹은 농경과 유목을 함께 병행하는 경우(농목업 agropastoralism)를 모두 농업의 개념에 포함된다... 다양한 식량 생산 시스템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식량 수급의 안전성을 높이고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복잡한 사회관계와 교환 체계가 마련되어야 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78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시기에 지역별로 생산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농업의 전파 방향이 일방적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신석기 혁명의 초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수렵채집, 목축, 농경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안정적인 식량 확보'라는 농업만의 장점은 전반적인 생활 수준의 악화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주된 생활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앞선 시대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렌시스와 공존하다가 이들을 대체한 것처럼.


 인도아대륙 전체적으로 볼 때 농업의 확산 방향은 완전히 다르고 서로 상충되기도 했다. 갠지스 평원에서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보자면 대체로 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전파되었고, 서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이처럼 상충되는 패턴은 농업과 인구 확산 모델 연구를 촉진했고, 이로써 상호 작용과 다양한 흐름들이 밝혀졌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33


 초기 목축민과 달리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초기 농경 공동체들(EFC)은 동부 및 남동부 습윤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우기가 남반구 여름철로 국한되는 지역이었다.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으므로 그중 일부 지역의 생태 환경은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들 지역 가운데 대부분에는 이미 후기 석기 시대(LSA) 문화를 보유한 수렵채집인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예전처럼 천연자원을 계속 이용했고, 농업 공동체와는 이웃에서 공존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13


 <농업과 세계사 2>에서는 구체적으로 여러 지역의 농경문화가 소개된다. 이들 중 일부는 청동기 문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느 문명은 소멸되기도 하지만, 세계 전역에 자리 잡은 문명을 보노라면 문화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든 문명은 저마다의 환경에서 각자 최선의 길을 선택해 발전했던 것이 아닐까. 이들 문명에 대해 현대의 관점에서 우월과 열등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잔혹하다고 알려진 아즈텍(Aztec)문명을 생각해보자. 포로들을 인신공양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잔혹한 제국의 문화에 대해 야만적이라고 평가를 내리지만, 이들 문화권에서는 포로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토지가 제한적이었고, 지력(地力)도 떨어지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의 인신공양의 풍속을 단순히 잔혹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고대 왕이나 귀족 등이 죽었을 때 가까운 이들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의 경우에도 죽은 이(死者)를 위한 강제적인 풍습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지도자에 의한 정치 보복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개인의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증이 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이유로 생겨났을 수 있는 문화의 성격을 규정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통(傳統 tradition)이라 알려진 많은 것들이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다른 나라의 문화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전통, 문화의 많은 부분이 신석기 시대 농경 생활로부터 유래된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서로 다른 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임을 신석기 혁명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당시 농업인은 기존에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확장을 시도하기보다는 새로운 지역으로 찾아 들어가 원하는 생태 환경의 니치(niche)였다. 그러나 규모가 제한적이고 수용 한계가 뚜렷했기에, 각각의 충적선상지에서 부양할 수 있는 인구 규모는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00


 벼농사는 대규모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 또한 논농사는 고도의 사회적 협력과 공동체의 단결 및 상호 의존을 필요로 했다. 이는 사회 내부적으로 발달하던 위계질서와 상충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갈등은 야요이 시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p318)... 벼농사는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차별의 세습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분화가 최초로 나타났는데, 이를 촉진한 것이 벼농사였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19


요약하자면 갠지스 강 중류 지역에서는 먼저 야생종 벼를 관리하기 시작했고(BCE 7000 이후),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기원전 2000년 경에 이르러 농업-목축 기반의 정착 마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농업 마을 주변으로는 수렵-채집-어로 문화 공동체가 곳곳에 산재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제2천년기에 집약적 벼농사의 관행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뒤로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사회가 복잡성을 더해서 마침내 철기 시대의 도시가 등장했다. 그때가 기원전 제1천년기 중엽이었다. - P150

일본 고고학은 대개 야요이 시대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기존에는 야요이 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300년경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기원전 제1천년기로 수정되었다. 이 무렵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신토(神道)라고 불리게 될 문화 및 신앙이 구체화되었으며, 고문헌에서 일본이라는 명칭도 최초로 등장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새로운 도래인(渡來人)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존의 조몬인과 뒤섞였으며, 오늘날 대부분 일본인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일본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 벼농사에 기반을 둔 야요이 문화는 기존의 수렵채집문화, 원주민 문화, 조몬 시대의 문화를 대체했다. 전통적으로 야요이 이전의 문화는 오늘날 일본인의 직접적 조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 P291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 태국에서 신석기 유적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제3천년기 중엽이었다. 당시 정주 생활이 강화되었고, 문양을 새긴 토기, 간석기 자귀, 사육종 돼지와 닭, 재배종 벼가 등장했다. 홀로세 중기가 끝나갈 무렵, 즉 기원전 제3천년기 말 대륙동남아 몇몇 지역에서 매장지와 주거지가 혼재된 장소가 등장했다. 그곳에서는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했다. 기원전 제2천년기 말기에 이르러 태국 남부 해안 혹은 그에 가까운 곳에서 해양 생활에 적응한 뚜렷한 정주 생활 장소가 등장했다. 여기서도 농업의 흔적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 P393

화전을 했던 장소에서는 식량, 약품, 공예품을 만들 재료, 천이나 밧줄을 만들 섬유, 지붕이나 벽의 재료 혹은 바구니를 만드는 데 사용할 나무껍질, 고무, 불 피울 때 사용할 송진, 유향목,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코킹, 향료, 나무 기름, 염료, 사냥을 위한 독성 물질, 지붕에 덮을 나뭇잎, 지붕 조각, 건축 자재, 도구나 배나 무기를 만들 원재료 등을 구했다. 이런 시스템에서 농부는 숲속의 특정 구역을 개간하고 관리하는데, 이는 한 구역을 완전히 갈아엎어서 농지를 만드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오히려 숲의 구조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개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해리스(Harris)에 따르면 "화전과 원경(園耕)은... 다른 농업 시스템과 달리 자연환경의 구조, 기능적 역학, 균형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 - P423

바닥면을 인공적으로 높이면 배수가 원활하고 습지에서도 농사가 가능했다. 이런 식의 밭을 치남파스(chinampas)라 했는데, 멕시코 분지의 호숫가 지역에서 농업의 중요한 요소였다. 치남파스는 호수의 진흙과 수생 식물, 그리고 가정 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등으로 만들었다. 치남파스는 대개 좁게 만들었지만 상당히 길게 늘일 수 있었고, 가장자리를 따라 나무를 심기도 했다. 약 1만 2000헥타르의 치남파스가 아즈텍 제국 수도의 인구를 먹여 살렸다. - P587

초기 농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유용한 통로는 바로 그들의 시간 관념이다. 숲을 제거하고, 소규모 농지를 조성하고, 가축을 기르는 등의 일은 분명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토지와 공간을 소유하는 것 또한 연속성이라는 농업 이데올로기의 일부였다(p669)... 현재의 시간 속에서도 삶은 굴러간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 역시 복잡한 관계 가운데 할 일이 많았고, 그날그날 해야 할 일뿐만 아니라 특별한 일도 있었다(p670)...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은 신석기 시대 유럽 농업인의 특징이기도 했다. 과거에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것은 곧 현재의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 P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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