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晉主)는 중도교(中度橋, 하북성 정정현 동남쪽 호타하교)에 도착하여 두중위(杜重威)의 영채를 보자, 탄식하며 말하였다.
"하늘이시여! 우리 가문이 무슨 죄를 져서 이 도적놈에게 파괴되었습니까!" 통곡하다가 떠나갔다.

거란주는 유지원이 관망하여 오지 않는 것을 알고 백문가가 돌아오기에 이르자 유지원에게 말하게 하였다. "너는 남조(南朝, 진)를 섬기지 않고 또한 북조(北朝, 요)도 섬기지 않으니 속으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가?" 번한공목관(蕃漢孔目官)인 곽위(郭威)가 유지원에게 말하였다. "야만인이 우리를 원망하는 것이 깊습니다. 왕준(王峻)은 거란이 탐욕하고 잔인하여 인심을 잃어 반드시 오랫동안 중국에 있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유지원에게 권고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나아가 탈취할 것을 권고하였다. 유지원이 말하였다.
"군사를 부리는 데에는 느슨하게 해야 할 때도 있고 급하게 해야 할 때도 있어서 마땅히 때에 따라 적당하게 통제해야 하오. 지금 거란은 새로이 진의 군사 10만을 항복시켜 호랑이같이 경읍(京邑, 진의 도읍인 ?州)을 점거하였는데도 아직은 다른 변화가 없으니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겠소? 또 그들이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재화(財貨)에 그치고 있으니 재화가 이미 만족하게 되면 반드시 장차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오. 하물며 얼음과 눈이 이미 녹고 있으므로 형세로 보아 오래 머무르기 어려운 것이니, 의당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고 그런 다음에 그곳을 빼앗는 것이 만 가지로 온전할 수 있을 것이오."

"지금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의를 하지 않아도 같으니 이는 하늘의 뜻입니다. 왕께서 이 기회를 틈타서 이를 빼앗지 못하고 겸손하고 양보하여 자리 잡지 아니하게 되면 인심도 또 옮겨질까 두려우며 옮겨지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유지원이 이를 좇았다.

백성들의 재물을 거두어서 장수와 사졸들에게 상으로 내리는 것을 논의하는데, 부인(夫人) 이씨(李氏)가 간하였다. "폐하께서는 하동을 이용하여 대업(大業)을 창업하셨는데, 아직 그 백성들에게 은택(恩澤)을 주지 않고 먼저 그들이 살아가는 자산을 빼앗는다면 거의 새로이 된 천자는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을 갖지 않은 것이 됩니다. 지금 궁중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꺼내어서 군사들을 위로한다면 비록 다시 넉넉하지는 않을지라도 사람들은 원망하는 말이 없을 것입니다."

풍연로(馮延魯)가 말하였다.
"성에서 항복하지 않는 까닭은 이들이 구원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서로 대치만 하고 싸우지 않으면 다만 우리 군사들을 지치게 할 뿐이어서 그들을 풀어놓아 언덕으로 올라가서 그들을 모조리 죽이게 하는 것만 못한 것이니, 성은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비장(裨將)인 맹견(孟堅)이 말하였다. "절(浙, 오월)의 군사가 이곳에 도착하여서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으니 한 번 싸워서 죽으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풀어놓아 그들이 언덕에 오르게 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들에게 죽음을 다하려 할 것이며 그 날카로움을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어찌 모조리 다 죽일 수 있겠습니까?"

거란주가 하양이 혼란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세 번이나 실수하였으니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반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러 도(道)에서 전(錢)을 긁어모은 것이 한 가지 실수이고, 상국(上國, 요)의 사람들로 하여금 풀과 곡식을 약탈하게 한 것이 두 번째 실수이며, 일찍이 절도사들을 파견하여 진(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게 한 것이 세 번째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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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좌가 철전을 주조하여 장사(將士)들에게 녹(祿)을 보태주는 문제를 논의하니 그의 동생인 아내도우후(牙內都虞候) 전홍억(錢弘億)이 간하였다. "철전을 주조하는 것에는 여덟 가지의 해로움이 있습니다. 새로운 전(錢)이 이미 시행되고 나면 구전(舊錢, 동전)이 모두 이웃 국가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이 첫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할 수 있으나 다른 나라에서 사용할 수 없다면 상고(商賈)들이 다니지 않아서 많은 물건들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 둘째입니다. 동(銅)이 금지된 것이 지극히 엄격한데도 백성들이 오히려 몰래 주조하는데 하물며 집에는 솥과 가마가 있고 들에는 가래와 쟁기가 있으므로 법을 위반하는 것이 반드시 많게 될 것이니, 셋째입니다. 민인(?人)들이 철전을 주조하였다가 혼란스러워지고 도망하였으니 본받기에 부족하니, 넷째입니다. 국가재용(國家財用)이 다행히 풍요로운데도 스스로 공핍(空乏)함을 보이는 것이니, 다섯째입니다. 녹봉으로 내려주는 것은 일정한데, 아무런 연고 없이 그것을 보태어주어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여섯 번째입니다. 법이 변하여 폐단이 생겼다 하여 갑자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일곱째입니다. 전(錢)이란 것은 국성(國姓)인데 이를 바꾸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여덟째입니다." 전홍좌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거란에서는 한림승지(翰林承旨)·이부상서인 장려(張礪)가 거란주에게 말하였다. "지금 대요(大遼)는 이미 천하를 얻었으니 중국의 장상(將相)은 의당 중국 사람을 기용하여 그것으로 삼아야 하고 북방 사람이나 좌우에 있는 가까이하고 익히 아는 사람을 기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정령(政令)이 어그러지고 잃는다면 인심은 복종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이를 얻는다고 하여도 오히려 장차 이를 잃을 것입니다." 거란주가 좇지 않았다.

애초에, 고려왕(高麗王) 왕건(王建)이 군사를 사용하여 이웃 나라를 집어삼키고 멸망시켜서 자못 강대하였는데, 호승(胡僧)인 말라(襪?)를 통하여 고조에게 말하였다.
"발해는 우리와 혼인관계에 있는데 그 왕이 거란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청컨대 조정과 더불어 그들을 쳐서 빼앗기를 바랍니다."

고조가 회보하지 않았다. 황제는 거란과 더불어 원수가 되자, 말라가 다시 이를 말하였다. 황제는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방을 어지럽혀서 그들의 군대 기세를 분산시키고자 하였는데, 마침 왕건이 죽자 아들인 왕무(王武)21가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를 호칭하고 표문을 올려 상사(喪事)를 보고하였으며, 11월 무술일(5일)에 왕무를 대의군사(大義軍使)·고려왕으로 삼고 통사사인(通事舍人) 곽인우(郭仁遇)를 파견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뜻을 알려서 거란을 치도록 하였다. 곽인우가 그 나라에 도착하자 그들의 군대가 극도로 미약하고 지난번 말라의 말은 다만 왕건이 과장하고 속여서 말한 것일 뿐 실제로는 감히 거란과 더불어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을 보았다. 곽인우가 돌아오자 왕무는 다시 다른 이유를 가지고 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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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위·시중인 풍도(馮道)가 비록 수상(首相)이었으나 어기어 둘이 가능하다고 하여 조치하여 결정하는 것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말하였다. "풍도는 태평한 시절의 좋은 재상이지만 지금 어려운 시기여서 비유하자면 선승(禪僧)으로 하여금 매를 날게 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애초에, 고조(高祖, 석경당)가 북쪽 요새의 땅을 분할하여 거란에 뇌물로 주었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부주(府州, 섬서성 부곡현) 자사인 절종원(折從遠)이 역시 북쪽에 속하게 되었다. 거란이 하서(河西, 섬서성 북부)의 백성들을 모두 옮겨서 요동(遼東, 요녕성)을 채우려고 하자 그 주(州)에 사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절종원이 이로 인하여 험요를 지키고 그들을 막았다.

오래 지나서 점차 느슨해졌는데, 두지민을 돌아보니 이미 거란 사람들에게 사로잡힌바 되자 황보우가 말하였다. "두지민은 의로운 군사이니 버려서는 아니 된다." 모용언초와 더불어 말에 뛰어 올라 거란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두지민을 빼앗아서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거란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들을 출동시켜 와서 싸우니, 두 장수가 말하였다. "우리는 형세로 보아 도주할 수 없으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뿐이오."

황인풍이 조용히 진계순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은 충성·믿음·인(仁)·의(義)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내가 일찍이 부사(富沙, 富沙王인 王延廷)에게 공로가 있었는데 중간에 그를 배반하였으니 충성스럽지 아니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조카를 나에게 의탁하였는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를 죽였으니 신뢰가 없는 것이며, 근래에 건(建, 복건성 건구시)의 군사들과 더불어 싸웠는데 죽은 사람들이 모두 향곡(鄕曲)의 옛날 사람들이었으니 어질지 못하였으며, 처자를 버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게 하였으니 의롭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몸 중에서 열은 가라앉았고 아홉은 떴으니 죽은들 남은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이어서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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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주가 도사(道士)인 왕서하(王栖霞)에게 물었다. "어떤 도(道)이어야 태평을 이를 수 있겠소?"
대답하였다. "제왕 된 사람이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다스리고서야 마침내 가국(家國)을 잘 다스리게 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아직도 오히려 굶주림으로 성내고 배부름으로 기뻐하는 것을 버릴 수 없는데 어찌 태평을 논하겠습니까?" 송(宋)황후는 스스로 드리워 놓은 발 안에서 칭찬하며 지극한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애초에, 당주가 제왕(齊王)이 되어 지정사(知政事)였을 때에 매번 과실이 있을 적마다 상몽석(常夢錫)이 항상 곧은 말로 바로잡아 주었는데, 처음에는 비록 화를 내고 원망하였지만 끝내는 그가 정직하고 도량이 넓다고 믿었다.

풍연로가 예부원외랑에서 중서사인·근정전학사(勤政殿學士)로 옮기자 강주(江州, 강서성 구강시)관찰사인 두창업(杜昌業)이 이를 듣고 한탄하며 말하였다.

"국가에서 여러 신하들을 몰아쳐 부리는 것은 관작에 있을 뿐이다. 만약 한 마디의 칭지(稱旨)로 갑자기 지위와 명망을 높이 올린다면 이후에 공로를 세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무엇으로 그들에게 상을 주겠는가?"

애초에, 민주(?主) 왕희(王曦)는 강종(康宗, ?主 王昶)을 모시고 연회를 열었는데 마침 신라(新羅)에서 보검(寶劍)을 바치자, 강종이 들어서 동평장사인 왕담(王?)에게 보이면서 말하였다. "이것이 어디에 쓰이는 것이오?"
왕담이 대답하였다. "신하가 되어서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의 목을 베는 것입니다." 당시 왕희는 이미 다른 뜻을 품고 있어서 두려운 모습으로 얼굴색이 변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시 검을 바치는 사람이 있자 왕희는 명령하여 왕담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의 시신의 목을 베게 하였다.

애초에, 하양(河陽, 치소는 맹주) 아장(牙將)인 교영(喬榮)이 조연수(趙延壽)를 좇아 거란에 들어갔는데, 거란에서 회도사(回圖使)로 삼으니 진에 왕래하며 판매하고 무역하여 대량(大梁, 하남성 개봉시)에 저택을 두었다. 거란이 진과 틈이 생기자 경연광(景延廣)이 황제에게 유세하여 감옥에 교영을 가두게 하고 저택 안에 있는 재화를 모두 빼앗았다.

무릇 거란의 사람들 가운데 진의 경내에서 판매하고 무역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그들의 재화를 탈취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말씀을 올려 거란은 큰 공로를 가지고 있으니 저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전사(營田使)인 등의문(鄧懿文)에게 명령하여 도망한 사람의 토지를 장부에 올리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밭 갈고 씨 뿌려서 조세를 내게 하였다. 백성들이 옛날의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좇아야 겨우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게 되니 각기 그 본업을 잃었다. 또 사람들이 재물을 들이면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니 재산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관직이 높고 낮은 차이가 되었다. 부상(富商)과 대고(大賈)는 같은 반열의 직책에 포진하였다. 외관(外官)에서 돌아온 사람은 반드시 공물을 바친 것을 책임 지웠다. 백성들에게 죄가 있으면 부자는 재물을 내게 하였고 힘이 센 사람은 군사로 삼았으며 오직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만이 형벌을 받았다. 또 함을 설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익명서(匿名書, 발신자의 이름을 감춘 편지)를 던져 넣어서 서로 들추어내어 고발하게 하니 심지어 멸족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거란에서는 진(晉)이 토욕혼(吐谷渾)을 초무하고 받아들여서 사자를 파견하여 와서 책망하였다. 황제가 근심하며 계책 만들 방법을 알지 못하였는데, 5월 기해일(16일)에 비로소 병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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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명령을 어긴 사람은 장수이고 사졸이란 장수의 명령을 좇는 사람인데, 또 무슨 죄이겠습니까! 받아들였다가 그 장수를 죽여서 적국에게 사죄하며 사졸을 조문하고 그들을 어루만지니 이는 좋기는 하지만 어찌 반드시 백성을 버리고서 적국에 보탬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 신하들이 또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요청하자, 당주는 말하였다. "존호는 헛된 미명(美名)이고, 또 옛날 것이 아니요." 드디어 받지 않았다.
그 후로부터 자손들이 모두 그 법을 계승하여 존호를 받지 아니하였고, 또 외척으로 정사를 보좌하지 못하게 하자, 환관들이 정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되니, 모든 다른 나라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신미일(9일)에 이숭(李崧)이 주문을 올렸다. "여러 주(州)의 창고에 있는 양식 가운데는 계산하여 장부에 올린 것 외에 나머지가 자못 많습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법령 이외로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면 그 죄는 법을 굽힌 것과 같다. 창리(倉吏)는 그의 죽음을 특별히 용서하지만 각기 그들을 아프게 징계하라."

신이 바라건대, 폐하께서 농업을 가르치고 전투를 익히며 군사를 기르고 백성을 쉬게 하며 나라에 걱정거리가 없고 백성에게는 여력(餘力)을 갖기를 기다리고, 그러한 후에 틈을 보아 움직일 것이며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또 업도(?都, 광진부·하북성 대명현)는 부유하고 강성하며 국가의 울타리인데 지금 주수(主帥)가 대궐에 가면 군부(軍府)에는 사람이 없으니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곳간을 단속하지 않는 것은 도둑을 유혹하는 것과 같다는 말과 용맹한 장부가 굳게 문을 닫고 있어야 한다는 뜻을 보니, 빌건대 폐하께서는 대략 순행(巡幸)을 덧붙이시고 간사한 모의를 막으십시오."

전홍좌는 따뜻하고 공손하였으며 책을 좋아하고 사인(士人)들을 예우하였고, 몸소 정치에 관한 업무에 힘을 썼으며 사악한 일이나 숨겨진 일을 들추어내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일 수 없었다. 백성 가운데 좋은 벼를 헌상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홍좌가 창리(倉吏)에게 물었다. "지금 비축하여 놓은 것이 얼마나 되는가?" 대답하였다. "10년의 분량입니다." 왕은 말하였다.
"그렇다면 군대양식이 충분하니 내 백성을 관대하게 할 수 있다." 마침내 명령하여 그 경계 안에 3년간 세금을 거두는 것을 면제하게 하였다.


당주(唐主, 李?)는 성품은 절약하고 검소하여 항상 버드나무로 만든 신을 신었고, 손을 씻거나 얼굴을 씻을 때는 철 동이를 사용하였으며, 더우면 푸른 칡으로 만든 휘장 안에서 잠을 잤고 좌우의 사령(使令, 심부름을 하는 사람)은 오직 늙고 못생긴 궁인들이고 의복의 장식도 거칠고 간단하였다.

나라의 일로 죽은 사람 모두에게는 3년분의 녹봉을 주었다. 사자를 나누어 파견하여 민전(民田)을 돌면서 조사하도록 하여 비옥하고 척박한 것을 가지고서 그 세금을 정하였는데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공평하다고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강·회(江·淮)에서는 군사를 조달하거나 부역을 일으키는 일과 다른 부세를 징수하는 일은 모두 세전(稅錢)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것을 준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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