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주가 도사(道士)인 왕서하(王栖霞)에게 물었다. "어떤 도(道)이어야 태평을 이를 수 있겠소?"
대답하였다. "제왕 된 사람이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다스리고서야 마침내 가국(家國)을 잘 다스리게 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아직도 오히려 굶주림으로 성내고 배부름으로 기뻐하는 것을 버릴 수 없는데 어찌 태평을 논하겠습니까?" 송(宋)황후는 스스로 드리워 놓은 발 안에서 칭찬하며 지극한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애초에, 당주가 제왕(齊王)이 되어 지정사(知政事)였을 때에 매번 과실이 있을 적마다 상몽석(常夢錫)이 항상 곧은 말로 바로잡아 주었는데, 처음에는 비록 화를 내고 원망하였지만 끝내는 그가 정직하고 도량이 넓다고 믿었다.

풍연로가 예부원외랑에서 중서사인·근정전학사(勤政殿學士)로 옮기자 강주(江州, 강서성 구강시)관찰사인 두창업(杜昌業)이 이를 듣고 한탄하며 말하였다.

"국가에서 여러 신하들을 몰아쳐 부리는 것은 관작에 있을 뿐이다. 만약 한 마디의 칭지(稱旨)로 갑자기 지위와 명망을 높이 올린다면 이후에 공로를 세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무엇으로 그들에게 상을 주겠는가?"

애초에, 민주(?主) 왕희(王曦)는 강종(康宗, ?主 王昶)을 모시고 연회를 열었는데 마침 신라(新羅)에서 보검(寶劍)을 바치자, 강종이 들어서 동평장사인 왕담(王?)에게 보이면서 말하였다. "이것이 어디에 쓰이는 것이오?"
왕담이 대답하였다. "신하가 되어서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의 목을 베는 것입니다." 당시 왕희는 이미 다른 뜻을 품고 있어서 두려운 모습으로 얼굴색이 변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시 검을 바치는 사람이 있자 왕희는 명령하여 왕담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의 시신의 목을 베게 하였다.

애초에, 하양(河陽, 치소는 맹주) 아장(牙將)인 교영(喬榮)이 조연수(趙延壽)를 좇아 거란에 들어갔는데, 거란에서 회도사(回圖使)로 삼으니 진에 왕래하며 판매하고 무역하여 대량(大梁, 하남성 개봉시)에 저택을 두었다. 거란이 진과 틈이 생기자 경연광(景延廣)이 황제에게 유세하여 감옥에 교영을 가두게 하고 저택 안에 있는 재화를 모두 빼앗았다.

무릇 거란의 사람들 가운데 진의 경내에서 판매하고 무역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그들의 재화를 탈취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말씀을 올려 거란은 큰 공로를 가지고 있으니 저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전사(營田使)인 등의문(鄧懿文)에게 명령하여 도망한 사람의 토지를 장부에 올리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밭 갈고 씨 뿌려서 조세를 내게 하였다. 백성들이 옛날의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좇아야 겨우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게 되니 각기 그 본업을 잃었다. 또 사람들이 재물을 들이면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니 재산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관직이 높고 낮은 차이가 되었다. 부상(富商)과 대고(大賈)는 같은 반열의 직책에 포진하였다. 외관(外官)에서 돌아온 사람은 반드시 공물을 바친 것을 책임 지웠다. 백성들에게 죄가 있으면 부자는 재물을 내게 하였고 힘이 센 사람은 군사로 삼았으며 오직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만이 형벌을 받았다. 또 함을 설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익명서(匿名書, 발신자의 이름을 감춘 편지)를 던져 넣어서 서로 들추어내어 고발하게 하니 심지어 멸족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거란에서는 진(晉)이 토욕혼(吐谷渾)을 초무하고 받아들여서 사자를 파견하여 와서 책망하였다. 황제가 근심하며 계책 만들 방법을 알지 못하였는데, 5월 기해일(16일)에 비로소 병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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