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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 정해일(27일)에 한림학사 노휴(盧?)가 말씀을 올렸다. "폐하께서 처음으로 대보(大寶)에 나아가셨는데, 의당 깊이 여원(黎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국가에 백성이 있는 것은 마치 초목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아서 마치 겨울과 가을에 북돋우고 물을 대주면 봄과 여름에 잘 자라서 번영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 어떤 경우에는 조세(租稅) 외에 또 다른 요역이 있는데, 조정에서 만약에 위무하여 살도록 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실제로 살 방도가 없습니다. 빌건대 주현(州縣)에 칙령을 내리시어서 응당 내지 못하여 남은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모두 중지하고 잠사와 보리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고, 이어서 있는 곳에 의창(義倉)을 열어서 빨리 진휼(賑恤)하여 공급하십시오.

봄이 깊어진 다음에 채소 잎과 나무의 싹이 있게 될 것이고 뽕나무의 오디가 이어주니 점차 먹을 만한 것이 있게 될 것이지만, 지금 몇 달 동안이 더욱 군색하고 급하니, 이를 시행하는 것을 늦출 수 없습니다."

지금 그 명호(名號)를 비록 강등시킨다 하더라도 병사들의 숫자는 아직 그대로이니, 지군(支郡)으로 만들게 되면 양향(糧餉)이 공급하지 못하게 되고, 나누어 다른 번부(藩部)에 예속시키게 되면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으니 혹은 옛날부터 내려온 악도(惡徒)들이 서로 도와주게 된다면 다시 창광(猖狂)한 짓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늙거나 어린 사람 300여 명을 형구(刑具)를 채워서 가두니 물의가 비등하여 도로에서는 탄식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치에 통달하고 천명을 아시는 군주가 포학하고 밝지 못하다는 비방을 받으시겠습니까? 대개 편안하면서 위험한 일이 있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분노하면서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았던 연고로 말미암았습니다. 엎드려서 바라건대, 성스러운 염려를 조금 돌이키시어서 갇혀 있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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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년(1920년) 10월, 혼춘의 비적사건을 구실로, '비적소탕'이란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 혼춘을 강점하고 우리 겨레의 학살을 감행했다. 그들의 장교라는 것들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여 각 부락의 민가, 교회, 학교를 비록 수만 석의 양곡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사람의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짓을 그들은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했다. 조손(祖孫)이 동시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가 한자리에서 참혹한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여 그의 아내에게 보이기도 하고, 아우를 죽여 형에게 보이기도 했다. 죽은 부모의혼백 상자를 가지고 도망가던 형제가 일시에 화를 당하기도 했으며, 산모가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숨지기도 했다. _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하)> , p214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1920년대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에서 행해진 양민학살의 참상을 전하지만, 이같은 참상이 간도 지역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3.1운동 직후 국내에서도 수많은 학살이 있었고, 간도지역에서는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의 패전 직후 보복성 학살을 일제는 감행한다.


 3.1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의 시공간은 독립운동의 거대한 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의 장이었다. 3.1운동의 온 과정에서 무수한 폭력행위가 자행되었다. 시위 참가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부상을 입은 시위 참가자에 대한 방치,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에게 가해진 폭행, 조사 과정에서의 고문, 마을 방화와 재파괴 등 그 형태도 다양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행위들은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어왔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19/322


 지난 2019년 발행된 <3.1운동 100년> 중 한 연구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학살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무고한 양민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라는 관점은 언뜻 문제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학살자 중심의 관점이라는 지적이다. '무고(無辜)'에 초점을 맞출 경우, 일제의 만행이 지나쳤다는 정도로 희석될 수 있기에, 본질적으로 학살의 성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학살은 학살자의 의도와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피학살자의 조건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존 연구에서 3.1운동 당시의 학살이 '평화적'이며 '비폭력적'인 상황에서 자행되었다고 서술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을 자행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서술에 따르면 일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살된 사망자에게는 '피학살자'라는 표현이 가능하지만, 폭력적 시위가 발생한 지역에서 사망한 사망자들은 '피학살자'로 보기 어렵다. 이는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들을 '폭민'으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탄압을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설명하고자 한 일제 측의 논리와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20/322


 저자 김강산은 연구를 통해 3.1운동이후 일어난 학살이 단순한 폭력적 진압이 아닌, 민족말살의 한 수단임을 밝혀내며 그 주체가 일본제국주의 중추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본군에 의해 행해진 무수한 학살의 악몽은 이 시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우금치 전투(牛禁峙戰鬪) 등에서 보인 왜(倭), 일본군의 만행은 이후 역사 속에서 (변용된 주체에 의해) 제주 4.3사건, 보도연맹사건,  5.18민주항쟁 등의 모습으로 다르게 재현되어왔다.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의 국내진출이 얼마나 트라우마가 되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전 대통령 후보자간 토론에서 나온 일본군이 국내 진입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어느 후보자의 언행은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의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3.1운동 102주년과 함께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둔 오늘. 그날의 함성과 이를 잔혹하게 짓밟은 일본군의 만행이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재현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과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 또한 함께 하게 된다...


 3.1운동 당시 자행되었던 학살은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살인(homicide)사건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벌였던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3.1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식민주의의 본질이 학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25/322


 유엔의 제노사이드조약을 3.1운동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3.1운동에 대한 탄압은 엄중한 처치 명령, 군대 출병 등 위로부터의 정책적 결정을 통해 조직적/의도적으로 야기된 전시 제노사이드의 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3.1운동의 탄압을 전쟁 상황으로 기획했던 주체들에게는 제노사이드의 "직접적인 또한 공연한 교사"가 성립한다. 셋째, 학살을 실행한 각각의 주체에게도 살해에 의한 제노사이드로서, 제노사이드의 범죄가 성립한다. 이뿐만 아니라 개인이 아닌 조직, 단체로서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제노사이드의 핵심에 있다. _ 김강산, <3.1운동의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제노사이드> <3.1운동 100년 2>, p129/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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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훈은 더욱 스스로 교만하여 매일 유연(遊宴)을 하니 주중(周重)이 간하였다. "옛날부터 교만하고 사치하며 일락하면 얻었다가 다시 잃게 되고 이루었다가 다시 패배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물며 아직 얻지도 못하고 성공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방훈은 마침내 무리들을 모아놓고 겉으로 선언하였다.
"나 방훈은 처음에 나라의 은혜를 입기 바라면서 신하로서의 절개를 모두 온전하게 하였는데, 오늘의 일은 앞에서 가졌던 뜻을 이미 어그러뜨렸다. 이로부터 나 방훈은 여러분 가운데 진정으로 반란할 사람과 더불어 마땅히 경내(境內)의 군사들을 쓸어버리고,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하여 패배한 것을 돌려서 공로를 이룰 뿐이다." 무리들은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최언증이 마침내 도우후(都虞候) 원밀(元密)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방훈을 토벌하게 하고 방훈의 죄를 헤아리며 사졸들에게 명령하고 또 말하였다. "보통사람들을 도탄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역시 장사(將士)들을 오염시켰다. 만약에 국가가 군사를 발동하여 주살하고 토벌하면 옥석(玉石)이 함께 타버릴 것이다." 또 말하였다.
"무릇 저들의 친속은 걱정하고 의심할 것이 없으니 죄는 한 몸에 그치고 반드시 연좌시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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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환관이 곁에서 모시다가 말하였다. "군사를 발동하면 드는 비용이 매우 큽니다."
왕식이 말하였다. "신이 국가를 위하여서는 비용을 아까워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군사가 많으면 도적은 속히 깨뜨려지니 그 비용도 줄어듭니다. 만약 군사가 적어 도적을 이길 수 없다면 세월을 늘리고 끌어서 도적의 형세는 더욱 커지니 강(江, 장강)·회(淮, 회하)의 여러 도적들이 장차 벌떼처럼 일어나 그것에 호응할 것입니다. 국가의 용도(用度)는 다 강·회를 바라보는데, 만약 막고 끊어서 통하지 않게 되면 위로는 구묘(九廟)로부터 아래로는 10군(軍)11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급할 것이 없으니 그 비용을 어찌 이루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옛날부터 밝은 주군이 숭상하는 것은 간하는 것을 좇기를 물 흐르는 것과 같이 하였는데 어찌 이미 시행하였다 하여 고치지 않는 일이 있겠습니까! 또 칙서는 폐하로부터 그것을 내보낸 것이니, 폐하로부터 그것을 고치는데 어찌 불가합니까!" 듣지 않았다.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어렵고 쉬운 것을 가지고 다투지 말고, 사는 집에 불사르지 말며, 평민을 죽여서 수급(首級)을 늘리지 말라! 평민 중에서 위협을 받고 좇은 사람은 모아서 항복시키도록 하라. 도적의 황금과 비단을 얻으면 관(官)에서 묻지 않겠다. 포로로 얻은 사람은 모두 월인(越人)이니 풀어주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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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은 말씀을 올려서 군사를 발동하여 공격하고 토벌하지 않게 해달라고 청하고, 또 말하였다.
"지금 해와 달과 같은 밝음을 가지고서 어리석고 미혹된 무리를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리고 명령에 귀순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 형세로 볼 때 매우 쉽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무신(武臣)들은 싸우지 않고 공로를 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논의하는 사람들이 신속한 효과가 있도록 책임 지우려는 것뿐입니다."

중서문하에서 주문을 올렸다. "세역(稅役)의 법은 천하가 모두 똑같습니다. 폐하께서 누차 덕음(德音)을 내시어 안팎으로 하여금 획일하게 만들려고 하였는데, 지금 다만 정광만을 면제하시니 예전의 뜻에 조금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일이 비록 지극히 작은 것이나 본체에 관련된 것은 많습니다."

황상이 화청궁(華淸宮, 섬서성 임동현 서부)으로 행차하려고 하자, 간관이 그것을 논하기를 매우 절실하게 하니, 황상은 이 때문에 중지하였다. 황상은 간하는 것을 즐겨 들었고 무릇 간관이 일을 논하는 것과 문하성한에서 봉박(封駁) 것이 이치에 진실로 맞으면 대부분 뜻을 굽혀 그것을 좇았는데, 대신의 상주문을 받으면 반드시 향을 사르고 손을 씻고서 그것을 읽었다

여러 악공들이 그를 위하여 구해달라고 요청하려고 하였는데 황상이 후원(後苑)에 행차하여 음악을 연주하는 기회를 틈타 마침내 빈자리를 만들어놓고 비파를 두었으며 뜰에 늘어서서 절을 하고 또 울었다. 황상이 그 연고를 묻자, 대답하였다. "나정이 폐하에게 잘못하였으니 만 번 죽어야 하지만, 그러나 신 등은 그 천하의 절세 기예(技藝)를 애석하게 여기며, 연회의 유희에서 다시 받들 수 없게 됩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너희들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나정의 기예이나 짐이 아끼는 것은 고조(高祖)와 태종(太宗)의 법이다."
끝내 곤장으로 그를 죽였다.

영호도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10년간 정권을 잡았고 은혜와 대우를 가장 크게 받았지만 그러나 연영전에서 일을 상주할 때마다 매번 땀으로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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