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가 아버지의 원수 도겸을 공격하러 서주로 출병하여 연주의 방비가 허술한 상황이 되자 연주 동군에 주둔하고 있던 조조의 부하 진궁이 장막·장초 형제와 상의하여 여포를 연주목으로 영입했다. 여포는 이 기회를 붙잡았다. 그는 연주로 쳐들어가 194년 2월부터 195년 윤5월(음력의 윤달이 5월 다음에 오면 윤5월이라고 부른다)까지 약 1년 반 동안 그곳을 지배했다. 여포가 방랑 끝에 처음으로 지역 기반을 가지는 순간이었다.

조조는 적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아량을 가진 인물이었다. 조조 자신과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를 욕한 진림을 포용했을 정도다. 그러나 은혜를 저버리고 배신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보복했다. 이는 비단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딴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부하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포가 동군을 침입하자 연주의 군현이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에 붙었다는 기사가 사실이라면, 연주 군현의 지방관들은 조조를 ‘주군’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포와 싸우며 여러 군현을 공략했고, 진류태수 장막을 내쫓고 가족들을 죽여버림으로써 조조는 반대 세력을 일소했다. 이로써 그는 연주를 확실히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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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을 내쫓은 뒤, 조조는 앞서 패퇴시킨 청주 황건적을 제북국까지 추격했다. 궁지에 몰린 청주 황건적은 항복했다. 그리하여 192년 겨울, 조조는 항복해온 황건적 군사 30여만 명과 남녀 100여만 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들 가운데서 정예를 골라 군인으로 충원했는데, 이들을 청주병이라고 불렀다.

조조가 처음 동군에 왔을 때 그의 병력은 1,000~1,500명이었을 것이다. 물론 『삼국지』에 기록되지 않은 병력 충원이 중간에 있었을지도 모르므로 이를 감안해 그보다는 조금 더 많았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조조는 이 병력으로 청주 황건적을 물리치고 그들을 전력으로 흡수함으로써 병력을 대거 늘렸다. 이는 조조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조조는 연주자사 자리를 쉽게 얻은 편이었다. 하지만 연주를 지키고 지배권을 관철하기 위한 싸움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적들과 쉼 없이 싸웠다. 192년부터 193년까지 불과 1년 반 동안 흑산적과 청주 황건적, 공손찬, 원술 등과 싸워 모두 승리하고서야 연주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원술은 군웅 중 한 명이라고 하기엔 모순덩어리 인물이었다. 제대로 된 지역 기반을 차지하지도 못하고, 사촌형(실제로는 형) 원소보다 설쳐대며 황제를 자칭했지만 흉년으로 경제가 파탄되면서 자멸했다. 이런 별볼일없는 인물이었지만 초기에는 최강의 무장 손견을 부하로 두어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손견이 전사한 후 원술은 몰락했다.

원술이 남양군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지역 기반이 1개 군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남양군의 전략적 이점을 제대로 활용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데서 찾아야 한다. 그는 폭정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으며, 손견 외에는 믿을 만한 장수 하나 얻지 못했고, 군사력도 갖추지 못했다.

원술이 회남의 2군(구강군과 여강군)만 지배했건 장강 이남과 회수 이북의 몇 개 군국을 지배했건 간에, 중요한 사실은 원술의 지역 기반이 여러모로 불리한 곳이었다는 점이다

조조가 수십만 명의 서주 백성을 죽이고 여러 현을 도륙한 잔학 행위는, 당시 조조에게나 동시대 사람들의 눈에나 그의 효심을 증명하는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곧 ‘악행의 대가’를 받았다. 그가 서주에서 아버지의 복수에 온 신경을 쏟는 사이, 과거 그를 연주자사로 만든 진궁이 장막·장초 형제와 결탁하여 여포를 연주의 새 주인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게다가 연주의 여러 군현도 조조에게 등을 돌리고 여포에게 항복했다. 졸지에 본거지를 잃은 조조는 복수를 그만두고 연주로 돌아가 강적 여포와 싸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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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체스는 6세기경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굽타 왕조 시기에 그것은 차투랑가(Caturanga)라고 불렸다. 이 게임은 말라카 이외의 페르시아와 다른 지역으로 건너갔다. 전 세계의 모든 무역 항구에서 체스 게임을 하였다.

제국은 여러 측면에서 안정적이고 강력한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정의와 사회규칙에 관한 문제를 포함해서 강력한 문명이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갖추었다. 술탄 무자파르는 조화와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23개 지역과 식민지에 44개 조항의 교회법을 마련하여 시행하였다.

이 모스크는 공적인 사회활동에 중요하였다. 그의 통치 이전의 모스크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말레이 문서에 따르면, 두 명의 술탄이 모스크 건설에 관여하였다. 바로 만수르 샤와 마흐무드 샤였다. 포르투갈인들이 대모스크를 허물어 버린 이후 마흐무드 샤는 재임기간 중 캄파르에 새로운 모스크를 세웠다.

동남아의 이슬람 전파는 주로 말라카로부터 조직된 비폭력적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영향력과 무역에 있어서의 물질적인 우위는 주변국들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술탄국의 이슬람을 채택하고, 국교
(國敎)로 삼도록 하였다.

말라카는 교육을, 특히 귀족들의 교육을 우선시하였다. 기록에, 술탄은 기꺼이 전임 카디인 마울라나 유수프에 가까이 다가가서 공부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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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카 이전에는 거의 모든 국가가 시암의 영향 아래 있었다. 권력의 이동이 정치권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말라카의 제국주의는 북쪽으로 확장되었으며 반도에서 시암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이전에 포르투갈인들은 보통 그들의 함선에서 장거리 대포로 먼저 포격을 가하였다. 이 포격은 도시를 맞추기는 하였지만 방어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와 같이 지속된 피해는 신속히 복구되었는데, 말라카에는 항상 자원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폭격 이후에 이루어진 공격도 병력의 숫자가 적어서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 산악지대에 있는 나라는 동남아에서 향신료, 특히 고품질의 정향을 생산하는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이 나라는 말라카와 아랍 선교사들의 노력을 통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중국 무역상들은 포르투갈인들에게 만약 그들이 도시를 점령하면 귀중품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으로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말라카 측의 주요 약점은 장거리 대포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약점을 미리 알았고, 포의 사격거리 밖에 머물면서 말라카의 공급을 차단하였다.

16세기 대부분의 기록들은 말라카의 해군에 강력한 리더십이 없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약점으로 인해 말라카는 자신의 항구에서 그들의 강력한 자산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일부 기록은 두 명의 해군 제독이 술탄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물러났을 개연성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항 투아 제독이 수립한 공포 요소는 포르투갈인들이 공격하였을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배신하는 중국인이 없었더라면, 포르투갈인들은 지원병을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국 무역선들은 포르투갈인들을 판타이 힐리르(Pantai Hilir)와 우종 파시르(Ujong Pasir)에 몰래 실어다 날랐다. 포르투갈 군대는 말라카 병사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인도 상인처럼 변장하였다. 사실 대부분의 포르투갈 용병은 남인도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새벽에 도착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말라카의 방어는 다툭 샤반다르, 라자 멘델리아르, 그리고 다툭 니카 찬 예우 캄(Datuk Nika Chan Yeow Kam) 등이 변절한 후에 무너졌다.

말레이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강가에 건설되었고, 이에 따라 인구이동과 동원에 필요한 수상 운송이 필요하였다. 선박에 상당히 의존하였다는 것은 동남아 전체에 걸쳐 공통된 특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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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초선은 여포가 동탁의 시비와 사통한 데서 모티브를 따온 허구의 인물이다. 정사의 단편적인 에피소드 2개를 엮어 동탁과 여포의 사이가 틀어졌음을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풀어간 소설 삼국지가 더 재미있다. 양자라고 해도 한 여성을 두고 부자가 싸우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니 두 사람 모두 패륜으로 몰아 비난한 것이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왕윤은 황실의 부흥을 위해 동탁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한서/왕윤전』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동탁을 죽인 후 그는 실수를 연발했다. 결과적으로 왕윤은 동탁을 죽인 후 뒷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가 뒷수습마저 잘했다면 정국은 다시 통일과 평화로 전환되어 삼국지 자체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실제와 역사와 달리 소설 삼국지는 유우를 ‘나약한’ 지방관으로 각색하여 유비의 화려한 데뷔를 빛낸 조연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우리는 유우를 다른 군벌들과는 다른 잣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군웅할거 상황을 설명한 여러 책과 지도에서, 유우는 여타 군웅과 구별되지 않은 채 그중 한 명이었던 것처럼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유우는 엄밀한 의미에서 단 한 번도 군웅의 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명장의 자질을 갖춘 황보숭과 주준이 자신의 처세보다 국가와 대의를 더 생각했더라면, 후한 말의 혼란은 어쩌면 일찍 종식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동탁 집권 이후 조정이 급속한 권력 쇠퇴를 겪은 것과는 정반대로 다시 권력과 위엄을 되찾고 지방 세력을 복종시켜 좀 더 오래 황실이 보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조연을 연기하는 데 만족했다. 문신인 왕윤과 유우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진 반면, 무장인 황보숭과 주준은 역적 동탁을 제거할 기회도 버리고 자신의 영달을 꾀했다. 그들의 선택은 당시 중국인들에게는 뼈아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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