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카 이전에는 거의 모든 국가가 시암의 영향 아래 있었다. 권력의 이동이 정치권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말라카의 제국주의는 북쪽으로 확장되었으며 반도에서 시암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이전에 포르투갈인들은 보통 그들의 함선에서 장거리 대포로 먼저 포격을 가하였다. 이 포격은 도시를 맞추기는 하였지만 방어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와 같이 지속된 피해는 신속히 복구되었는데, 말라카에는 항상 자원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폭격 이후에 이루어진 공격도 병력의 숫자가 적어서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 산악지대에 있는 나라는 동남아에서 향신료, 특히 고품질의 정향을 생산하는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이 나라는 말라카와 아랍 선교사들의 노력을 통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중국 무역상들은 포르투갈인들에게 만약 그들이 도시를 점령하면 귀중품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으로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말라카 측의 주요 약점은 장거리 대포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약점을 미리 알았고, 포의 사격거리 밖에 머물면서 말라카의 공급을 차단하였다.

16세기 대부분의 기록들은 말라카의 해군에 강력한 리더십이 없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약점으로 인해 말라카는 자신의 항구에서 그들의 강력한 자산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일부 기록은 두 명의 해군 제독이 술탄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물러났을 개연성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항 투아 제독이 수립한 공포 요소는 포르투갈인들이 공격하였을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배신하는 중국인이 없었더라면, 포르투갈인들은 지원병을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국 무역선들은 포르투갈인들을 판타이 힐리르(Pantai Hilir)와 우종 파시르(Ujong Pasir)에 몰래 실어다 날랐다. 포르투갈 군대는 말라카 병사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인도 상인처럼 변장하였다. 사실 대부분의 포르투갈 용병은 남인도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새벽에 도착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말라카의 방어는 다툭 샤반다르, 라자 멘델리아르, 그리고 다툭 니카 찬 예우 캄(Datuk Nika Chan Yeow Kam) 등이 변절한 후에 무너졌다.

말레이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강가에 건설되었고, 이에 따라 인구이동과 동원에 필요한 수상 운송이 필요하였다. 선박에 상당히 의존하였다는 것은 동남아 전체에 걸쳐 공통된 특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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