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을 내쫓은 뒤, 조조는 앞서 패퇴시킨 청주 황건적을 제북국까지 추격했다. 궁지에 몰린 청주 황건적은 항복했다. 그리하여 192년 겨울, 조조는 항복해온 황건적 군사 30여만 명과 남녀 100여만 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들 가운데서 정예를 골라 군인으로 충원했는데, 이들을 청주병이라고 불렀다.

조조가 처음 동군에 왔을 때 그의 병력은 1,000~1,500명이었을 것이다. 물론 『삼국지』에 기록되지 않은 병력 충원이 중간에 있었을지도 모르므로 이를 감안해 그보다는 조금 더 많았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조조는 이 병력으로 청주 황건적을 물리치고 그들을 전력으로 흡수함으로써 병력을 대거 늘렸다. 이는 조조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조조는 연주자사 자리를 쉽게 얻은 편이었다. 하지만 연주를 지키고 지배권을 관철하기 위한 싸움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적들과 쉼 없이 싸웠다. 192년부터 193년까지 불과 1년 반 동안 흑산적과 청주 황건적, 공손찬, 원술 등과 싸워 모두 승리하고서야 연주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원술은 군웅 중 한 명이라고 하기엔 모순덩어리 인물이었다. 제대로 된 지역 기반을 차지하지도 못하고, 사촌형(실제로는 형) 원소보다 설쳐대며 황제를 자칭했지만 흉년으로 경제가 파탄되면서 자멸했다. 이런 별볼일없는 인물이었지만 초기에는 최강의 무장 손견을 부하로 두어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손견이 전사한 후 원술은 몰락했다.

원술이 남양군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지역 기반이 1개 군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남양군의 전략적 이점을 제대로 활용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데서 찾아야 한다. 그는 폭정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으며, 손견 외에는 믿을 만한 장수 하나 얻지 못했고, 군사력도 갖추지 못했다.

원술이 회남의 2군(구강군과 여강군)만 지배했건 장강 이남과 회수 이북의 몇 개 군국을 지배했건 간에, 중요한 사실은 원술의 지역 기반이 여러모로 불리한 곳이었다는 점이다

조조가 수십만 명의 서주 백성을 죽이고 여러 현을 도륙한 잔학 행위는, 당시 조조에게나 동시대 사람들의 눈에나 그의 효심을 증명하는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곧 ‘악행의 대가’를 받았다. 그가 서주에서 아버지의 복수에 온 신경을 쏟는 사이, 과거 그를 연주자사로 만든 진궁이 장막·장초 형제와 결탁하여 여포를 연주의 새 주인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게다가 연주의 여러 군현도 조조에게 등을 돌리고 여포에게 항복했다. 졸지에 본거지를 잃은 조조는 복수를 그만두고 연주로 돌아가 강적 여포와 싸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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