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수용사는 푸코의 사상만큼이나 흥미로운 주제이다. 푸코의 수용에는 영어권 학술출판시장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 프랑스어 문헌을 직접 읽기 어려운 독자들은 자국어 번역이 없다면 영역본을 통해 푸코를 접할 수밖에 없으며, 푸코에 관한 학술적 논의가 가장 많이 유통되고 전달되는 통로 역시 영어권 학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한 이들을 제외한다면 푸코를 읽는 압도적 다수의 연구자들은 (설령 그것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영어권에서 구축된 푸코 해석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푸코 수용사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현상은, 푸코가 실제 수행한 작업과 수용자들 사이의 학적 기반의 차이다. 실제 푸코가 무엇을 하는지에 집중한다면 푸코의 작업은 대부분 역사적 분석에 기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푸코에 대하여 가장 활발하게 논의하고 푸코의 이미지를 구축한 학계는 철학계처럼 역사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이었다. 바로 이 간극으로 인해 푸코는 다소 불합리하게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던 철학자, 하이데거주의자, 반계몽주의자로 평가받았으며, 영미권의 좌파 급진주의자들이 푸코의 일부 저술만 선별적으로 읽어 푸코를 권력 편재의 이론가로 소개했다. 물론 푸코는 자신에게 부여된 이러한 평가들 중 무엇 하나에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 책이 푸코에 대한 관습적 해석을 따른 예시







폴 벤느의 책이 지닌 미덕은,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과 푸코의 방대한 저술을 종합함으로써, 대다수 입문서와 달리 푸코를 ‘포스트모던·구조주의 철학자’나 ‘권력의 이론가’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실체 위에서 사유하고 작업한 ‘회의주의 역사가’로 재위치시키는 데 있다. 벤느는 책의 첫 문장부터 푸코에 대한 전통적 평가들을 반박하며 시작한다. “아니다, 푸코는 구조주의 사상가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는 이른바 ‘68 사상’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상대주의자도, 역사주의자도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의 편재를 간파한 이도 아니었다...그는 회의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사실들, 자신이 쓴 책의 모든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의 진실만을 믿었다.”(p. 9) 이러한 관점은 벤느가 1978년에 쓴 「역사학을 혁신한 푸코」(Foucault ne rêvait pas à la révolution)의 내용을 확대한 것에 가까운데, 이 논고는 푸코를 일종의 유명론자, 즉 선험적·초역사적 전제들을 거부하고 구체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역사 속 실천을 이해하려는 역사가로 그려낸다. 푸코의 이데올로기적 견지가 아니라 역사를 분석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관점은 저자가 일급의 고대사가였을 뿐 아니라, 생전에 푸코와 학문적·인격적으로 깊은 친분을 맺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벤느 역시 콜레주드프랑스 로마사 교수를 역임했으며, 푸코의 동료로서 그의 행동과 말, 강의를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푸코가 다룬 주제나 그의 주장을 개괄하는 개설서는 많아도 푸코의 사고방식과 방법을 다룬 글은 희귀한데, 자신이 일반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역사가이자 역사학 방법론에 대한 책을 저술한 적도 있기에 벤느는 푸코의 저술에 흐르는, 역사의 복잡한 결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과 방법론을 더 민감하게 포착한 것일 수도 있다.



  제목이 지시하는 바처럼, 본서는 푸코의 ‘사유’ 방식과 푸코의 친구가 바라본 ‘인간’ 푸코에 대한 글들이 수록된 학술 에세이다. 이중 전자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1~8장이 유용할 것이고, 푸코의 인간적 면모를 알고 싶은 독자라면 9~11장(2장 초반부에도 당대 프랑스 학계의 냉정한 반응에 실망한 푸코에 대한 사적이면서 흥미로운 코멘트가 들어가 있다)이 특히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푸코의 사유방식을 다룬 장들은, 원서가 출간된 2008년 당시 읽을 수 있는 푸코의 저술을 폭넓게 인용하면서 그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가능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장 “세계사 안의 모든 것은 특이하다 - 담론”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만 이해되는 담론 개념이 푸코의 역사 분석에서 지니는 함의와 그 기능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벤느가 강조하는 바는, 푸코의 독특한 사유방식은 현상에 곧바로 거대한 일반론을 적용하는 대신 그것을 가장 미시적인 수준으로 분할하여 분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유방식을 집약한 개념이 담론이다. 담론이란 “날 것은 역사적 구성물(formation historique)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촘촘한 묘사이며 그 종국의 개별적 차이에 대한 규명이다.”(p. 14) 푸코는 보편성을 상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성을 파악하고자 하며, 담론은 그런 측면에서 과거의 특이성(singularité)이 보여주는 궁극적 차이(differentia ultima)를 드러내는 개념이다. 이 특이성의 핵심은 어떤 대상이나 실체의 본질적 성격을 가정하지 않은 채 구체적 사실로부터 대상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데에 있다. 푸코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천(practice)의 세부 사실, 즉 당대인이 실제로 말한 것과 행한 것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실천에 대해 어떠한 담론을 형성했는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일반적이고 초역사적인 진리를 거부한 회의주의자면서 각 시대의 담론적 실천이 현실의 다양한 영역에 어떻게 파고들며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했는지를 파헤치려 한 역사가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벤느는 푸코의 방법론을 사람들이 행하거나 말한 것을 해석하는 동시에 그들의 언행과 제도에 무의식적으로 전제된 것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실증주의”(p. 28)로 규정한다.



  푸코는 일반적 진리를 거부하고 구체적 실천에서 역사적 현상을 분석하는 유명론자라는 벤느의 주장은 이후 장들에도 일관되게 관철된다. 2장 “역사적 아프리오리만이 있을 뿐이다”는 1장의 분석을 확장하여 담론 개념을 더 명료화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 아프리오리’란, 특정한 시대의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점이나 전제를 가리킨다. 관습, 말, 지식, 규범, 제도 등을 작동시키는 담론이 이에 해당하는데, 마치 투명한 ‘어항’처럼 그 안에 있는 존재는 이를 직접 볼 수 없지만, 이를 통해서 현상을 해석한다. 담론적 실천 혹은 ‘장치’(dispositif)는 담론을 사회 속에 구현한다. 제3장은 벤느가 푸코를 규정하는 또 다른 술어인 ‘회의주의’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푸코의 회의주의는 모든 지식의 확실성이 아니라, 초역사적이고 일반적인 진리만을 겨냥한 회의주의였다. 푸코는 역사적 사실들의 실재성, 혹은 경험적 특이성은 긍정했는데, 푸코는 이 구체적 사실이 역사적으로 언제나 관점에 따라, 그리고 어떤 담론을 통해서만 획득된다고 주장한 점에서 상대주의도 아닌, 관점주의(perspectivisme)에 가장 가깝다. 푸코의 작업은 당대인이 해석한 작은 사실에 암묵적으로 전제된 담론을 드러내는 “역사적 해석학”(p. 58) 위에서 작동한다. “푸코의 예리한 책들은 반란자의 것이 아니다...그것들은 검으로, 사무라이의 칼로 쓰인 글이다.”(p. 67) 4장은 푸코의 고고학 연구를 (푸코가 사숙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계보학과 연결지어 개념과 실재가 역사적으로 형성되거나 변화하는 양상을 분석하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푸코는 동일해보이는 실재더라도 시대마다 다른 담론 속에서 다르게 파악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4장의 백미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개념과 푸코 담론을 비교하는 대목인데, 두 세쪽 정도로 짧지만 핵심 요점이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5장은 푸코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례로서 예수를 비롯한 1세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다. 제6장 “하이데거가 뭐라고 했든, 인간은 지성적 동물이다”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인간론과 푸코의 사상을 조목조목 비교하면서 다시금 역사적 실증주의자로서의 푸코의 특징을 강조한다.
















  구체적 사실, 특이성, 담론, 장치와 연결시켜 주체(subject) 및 주체화(subjectivation)와 지식-권력의 문제를 논의하는 7~8장은, 후기 푸코의 주제와 사유방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역사가로서 푸코의 관심사는 지식과 관련된 과학기술이 국가의 통치와 얽히는 양상이었다. 16세기 이래 근대적 통치의 특징은, 권력의 획득·유지술이 아니라(푸코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권력획득술의 텍스트라고 본다) 국력 강화의 수단으로서 신민 통치가 중요해졌고, 그 과정에서 전문지식과 기술이 본격적으로 정치의 영역에 들어가 통치를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통치술의 목표는 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구(population)의 조건을 개선하여 국력을 강화하는 데 있다. 푸코는 무엇이 인간을 좋게 만드는가를 판단하는 필터가 생기거나 바뀌고, 늘어나는 과정에서 과학이 수행한 역할에도 주목한다. 여기서 진실의 문제가 개입된다. 진실 체제와 그 실천은 지식-권력의 장치를 구성한다. 이때 푸코가 말하는 권력이란 “타자의 품행(conduite)을 물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인도하는(conduire) 능력이다.”(p. 134) 장치는 과학적으로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언표들의 규칙을 형성한다. 지식과 과학은 이 규칙 아래에서 인간이나 공동체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고 여겨지기에 사람들을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세상 어디서든 장치 안에서 진리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복종하게 만드는 권력을 지니며, 인간 주체를 그에 복종하게끔 형성한다. 군주의 권력이 정당하다는 것은 진리이며, 군주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우리는 그의 충실한 신민[주체, subject]이 된다.”(p. 125) 이 장들에서 더욱 돋보이는 부분은 막스 베버(Max Weber)나 토머스 쿤(Thomas Kuhn)의 작업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들을 푸코의 작업과 비교하는 대목인데,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푸코의 주체화와 엮는 부분은 베버의 주장을 푸코와 연결짓는 가능성을 주며, 푸코가 간과했던 종교적 지평까지도 시야에 넣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함의를 음미하며, 책의 방향을 발전시키기 위한 몇 가지 평가를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푸코의 실제 입장은 모든 일반화된 이론,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종래의 개념이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벤느의 수사학적 문장들은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 둘째, 역사서술과 관련하여 푸코는 어떠한 시대도식을 전제하고서 작업을 했는가이다. 푸코는 주로 ‘근대’를 이해하고자 했으나 그의 작업은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른다. 이 과정에서 푸코가 생각하는 시대적 특징이 있고, 각 시대가 다른 시대로 어떻게 이행했는지에 대해서도 자신의 도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역사가로서 푸코의 사유를 들여다본다면 푸코의 도식을 알 필요가 있다(이 점에서 『안전, 영토, 인구』가 가장 중요한 책이다). 그러면 벤느가 누락한, 회의주의적 역사가 푸코가 무비판적으로 전제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푸코의 방법론은 어떠한 학자를 참조하며 만들었는가이다. 벤느는 니체의 계보학을 강조하지만, 그 자신이 규정했듯이 푸코는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는 해석학 전통에 서 있다. 이때 주목할 만한 대상은 독일의 신칸트주의 사상사가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이다. 영미권에서도 최근에야 카시러의 해석학과 푸코의 연관성이 주목받고 있는데, 푸코가 참조한 대상을 통해서 푸코의 사유 형성을 더 정교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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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백
후지모토 타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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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와 동경과 후회와 그리움의 4컷 만화가 서로를 이끌어주는 뒷모습이 되어, 그럼에도 만화를 그리는 힘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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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은 즐거움뿐만 아니라 귀찮음과 고통도 준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과 그에 기초하여 만든 일관된 서사와 설명틀을 폐기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틀을 짜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알게 된 사실의 증거력이 더 크고 사태를 더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제공한다면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설명을 취해야 한다. 물론 이 새 것도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만 참이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은 늘 (그것이 더 정합적이라는 전제하에) 더 나은 설명틀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개방적이어야 할 것이다.

서양 사상사에 관심을 가지는 여러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바로 그러한 신선함과 반성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강의를 듣는 학생을 위한 교재이지만, "해당 강좌를 수강하지 않는 학생.독자"도 염두에 두었다. 그러므로 굳이 특정 대학의 교재라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서양 지성사를 공부하고 싶은 일반 교양 독자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입문서이다. 이 분야에 익숙하지 않거나 기초적인 지식만 가진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기존의 통념을 깨부술 수 있을 것이며, 깊이 있게 잘 정리된 통사 책이라는 점에서는 지성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머리말에서 밝히듯이 "이 책은 서구의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 전통을 특히 정치사상의 역사를 중심으로 조망하는 시선을 제공"하기 위해 쓰였다. 이 책 전반에서 '지성사'라고 할 때는 대체로 '언어맥락주의'(linguistic contextualism)라는 20세기 후반 영미권 학계에서 발전한 특수한 역사학 방법론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 책은 언어맥락주의 방법론을 따라 서술한 정치사상사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언어맥락주의란 무엇인가? 이는 20세기 중반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 존 포콕(John G. A. Pocock), 존 던(John Dunn) 등 이른바 '케임브리지 학파'로 분류되는 일군의 학자들이 발전시킨 역사학의 한 분과로, 이 분야에 속한 지성사가들은 과거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문제를 고민했는지, 그때 그곳에서 통용되는 지식과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질문하면서 "철저한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과거의 사상적/언어적 맥락을 재구성"한다. (지성사 방법론에 대해서는 리처드 왓모어, 이우창 옮김, <지성사란 무엇인가>, 오월의봄 3장과 역자 해제 참조) 지성사는 특정 사상가가 어떠한 지적 맥락 속에서 어떠한 역사적 사건을 마주쳤으며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언어로 표현했는지를 질문한다. 이러한 '사상사적 방법론'은 사상이 현실에서 가진 함의를 더 잘 드러낸다.










본서는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 고대 플라톤에서 현대의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서구 지성사의 전개를 조망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입문서다. 이 책의 특징은 목차 구성만 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 다른 정치사상사 저술의 목차와 비교해보자. 거의 60여년 전에 나온 쉘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이나 비교적 최근에 저술된 오트프리트 회페의 『정치철학사』는 정치사상의 역사를 플라톤에서 존 롤스에 이르는 주요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개별 인물에 대한 심층적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반면, 텍스트에만 주목하여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 배경이나 지적 맥락, 중요한 사건 등에는 무관심하여 역사적 맥락을 탈각시킬 위험이 있다(그렇기에 신뢰할 수 없는 내용 또한 들어가 있는 편이다). 또 다른 정치사상사 입문서인 우노 시게키의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역시 고대와 중세, 그리고 초기 근대 이후를 세기별로 구분하는 방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인물 중심의 정치사상사 서술에 머물러 있다.








반면 본서 <서구지성사 입문>은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상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특정 인물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로크나 홉스, 애덤 스미스, 몽테스키외, 마르크스 같은 정치사상사의 정전에 포함된 인물들의 '텍스트(text)'보다는 그들이 속했던 '맥락'(context)을 보게 된다. 여러 공저자가 참여했기 때문에 하나의 통사로서의 서사는 약하지만, 장 구성을 통해서 어떠한 시대 흐름을 의도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먼저 플라톤을 시작으로 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정치사상을 1~2장에서 살펴본 다음 본격적으로 근대 초기(early modern)로 들어온다. 4~8장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 지성사를 짚은 뒤, 종교개혁과 그로 인한 총체적 혼란을 당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를 살핀다. 18세기까지의 사상은 종교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고민위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9장은 프랑스 혁명 시기에 일어난 지적 변화를 민주정 논의에 비추어 이해한다. 이로써 서양지성사에서 프랑스혁명이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장과 11장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흐름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두 축으로 삼아 조망한다. 12장부터는 20세기의 역사로 들어와 양차 세계대전과 이후 냉전 시대 속에서 지성사를 간략하지만 깊이 있게 조망한다.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지성사가 이후 시대 지성사와 비교하면 분량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서구 지성사를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해한다는 목표는 달성했다. 또 다른 교과서인 <서양사 강좌>(아카넷)와 함께 읽는다면 그러한 사상이 펼쳐지던 시대에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함께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내 생각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대목은 셀 수 없이 많다. 윤비가 쓴 2장 "중세 정치사상의 흐름"과 제3장 "르네상스와 정치이론의 변동"은 발터 울만(Walter Ullmann)이나 퀜틴 스키너의 저술 외에는 이 분야에 대해 거의 모르는 나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특히 3장을 읽고 인문주의자의 정치사상에 대한 내 기존의 상(像)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은연중에 (북부 르네상스는 제외하고) 피렌체 공화정의 공화주의 사상을 14~15세기 초 인문주의 정치사상 전체의 경향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인문주의는 자연철학과 의학에 치중된 학문경향에 대한 비판과 고대에 대한 동경을 제외하면 어떠한 통일된 적극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정치사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문주의자 자체가 공화주의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직업적 수사학자로서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고용주가 교황인지, 도시의 공화정부인지, 혹은 전제군주인지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이 특정 체제를 공격하거나 옹호할 때는 "이데올로기적 신념보다는 대개 분쟁의 상대방이 이쪽과 다른 정치체제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대 지식인들이 택한 입장을 정형화된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시대적 관행과 맥락에서 분석해야 한다는 함의를 개인적으로 얻어간다.

근대 초기 지성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4장과 6장이 특히 유용했다. 4장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이후"는 지성사의 측면에서 종교개혁 시기의 역사서술도 주목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종교개혁은 그 자체로 기억의 재구성이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저마다 자신의 교리와 신학이 정통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한편으로, 상대방의 논거와 자료를 이데올로기적일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 상당히 정교하게 비판하면서 역사학적 기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자국의 역사와 종교적 상황에 집중하는 서술방식도 채택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섭리라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관점을 고수하면서도 새로운 학문 경향이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신앙과 신학의 문제에서 출발해 유럽 전역이 휩쓸린 전쟁과 정치적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17세기 후반은 이 종교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마무리된 시점이었고, 이것이 이후 사상의 특징을 결정했다. 통사적으로는 4장과 곧바로 이어지는 이우창이 쓴 6장 "18세기 유럽 계몽사상"은 밀도가 매우 높지만 몹시 즐거운 에세이다. 이 에세이는 계몽주의 사상의 실제 문제의식을 통해서 계몽의 성격을 재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주로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중후반의 시기를 아우르면서 계몽주의의 특징을 드러내는 몇 가지 주제를 취해 계몽을 설명한다. 유럽의 계몽주의는 "기독교 교회와 구체제의 지배에 맞서 자유로운 이성의 발달을 강조한 철학적.과학적 운동"이 아니었다. 계몽사상가로 분류되는 이들은 역사적으로 17세기의 "끊임없는 전쟁과 극한 대립, 그리고 이를 초래한 종교적 갈등과 야심, 야만적인 폭력은 더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어둠...을 극복하고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계몽사상가들은 인간과 사회를 올바르게 관찰하여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학문적 경향 속에서 이성이 아니라 정념(passion)과 본성(nature)에 근거하여 인간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그에 맞는 바람직한 정부 형태를 고안했다. 통념과 달리 계몽사상가는 이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는 데 있어 이성 말고도 경험적 관찰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추론과 관찰은 인간과 사회의 원리를 밝힘으로써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낙관적 경향의 토대가 되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는 복수의 교파와 종파가 병존하는 상황에서 각 종파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면서 다양한 관용 전략을 구사했음을 밝힌 것도 이우창의 에세이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계몽사상가는 종교를 비판하고 상대화하는 주장을 취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유지했음에 유념해야 한다. 계몽주의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는 세속화는-그러한 과정이 실제 일어나기는 했다면- 곧바로 종교를 대체한 매끄러운 과정이 아니라 여러 우회로를 거쳐온 굴곡진 역사였다. 이승은의 "18세기 상업사회의 정치사상과 정치경제학"까지 보면은 이 굴곡진 계몽의 역사가 정치경제학 논의로 전환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홍철기가 쓴 제10장 "혁명 이후의 정치사상"은 '자유주의'(liberalism)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써야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리버럴리즘'은 자유를 뜻하는 리버티(liberty)가 아닌 '관대함'이라는 뜻의 '리버럴리티(liberality)'에서 나왔다. "개인의 자유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개인이 오직 자유만 누린다면 이러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국가는 지속성을 갖거나 진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개인들의 자유가 보존되고 확장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대함과 관후함의 덕성, 즉 자유로운 국가에 대한 의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3장과 14장을 같이 놓고 읽는다면, 프랑스혁명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형성된 자유주의 자체도 역사적으로 상당한 의미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지식인들은 산업자본주의의 도래라는 전례 없는 현상에 직면하여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역할을 새로운 각도에서 사고하기 시작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이는 자유주의를 19세기식 자유방임주의 전통에서 떼어 내 국가의 책임성과 접목하는 과정이었다."(13장) 냉전 자유주의란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대해야 했던 나치즘과 전체주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부상에 맞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된 자유주의 사상을 이른다." (14장) 따라서 자유주의라 할 때도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하나의 일관된 이론적 실체를 상정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읽은 후 누가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이랬다'라는 주장을 한다면,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자유주의?'라고 되물으면 된다.

안두환은 18세기 유럽의 세력균형 논의(8장)와 전간기 국제사회의 변화와 국제질서에 대한 관념 변화(12장)를 설명했는데, 정치사상사에서 정의론과 권력론에 비해 소홀히 취급되는 국제정치사상을 포괄하여 의미가 있었다. 12장에서는 베르사유 조약 이후 전간기 국제질서의 긍정적 측면(국제사회, 국제주의 운동의 성장 등)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 소소한 성과이다. 13장부터 15장은 (케임브리지 학파식 지성사는 아니었지만) 내가 거의 공부해보지 못한 현대 미국 지성사, 냉전, 신자유주의의 지성사에 대한 글이어서 각별히 즐거웠다.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1장 "플라톤의 <국가>: 서구지성사의 위대한 시작"은 다른 장들에 비해 생생함이나 박진감이 덜 느껴졌다. 소크라테스와 투퀴디데스의 정치사상이나 그 이전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폴리스 사회의 정치사상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플라톤의 주장만을 특정 텍스트에 국한해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도 보론으로 언급될 뿐이다!) 정치사상사에서 플라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를 '서구지성사의 위대한 시작'으로 보기에는 플라톤 앞에도 오랜 지적 전통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a)로 표기했는데(p. 40), 같은 지역을 다른 곳에서는 '파도바'로 표기하는(62) 등 자잘한 용어 통일상의 실수도 보였다.

그렇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해서 본서의 가치가 줄지는 않는다.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쓰인 서양 지성사 통사를 정확하고 말끔한 한국어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본서는 이미 제 소임을 다 하고 있다. 이 책에 동봉되는 워크북은 각 장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주고 있어 복습할 때 요긴하다. 거기에 각 장 말미에는 저자들이 해당 주제와 관련한 더 읽을거리도 추천하고 있다. 지성사를 입문하려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충분한 교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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