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론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26
맬서스 지음, 이서행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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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원제는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으로, 'Principle'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다면 '인구론'이 아닌 '인구의 원리' 쯤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겠다. 1798년에 초판이 출판되고 1826년에 개정 6판까지 출간되었는데, 개정되면서 제목과 책의 내용에 큰 변화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인용할 때는 몇 판인지를 반드시 같이 적어야 한다. 그런데 번역자와 출판사는 몇 판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6판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번역이 잘 된 편이기는 하지만, 역시 동서문화사의 책은 사는 것이 아니다.

2.

맬서스의 주장은 한 문장으로 집약된다. "인구는 제어되지 않을 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식량은 단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2>에서 인용) 그렇다면 맬서스가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엘리 알레비에 의하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에는 "인권의 이론으로 제기된 논란에 인구의 원리에 관한 논란이 겹치게 되었다." 당시는 인구의 원리가 빈곤과 같은 경제적 문제와 밀접하게 붙어있던 시기였으니, 빈자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논쟁은 곧 경제적 권리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대립된 입장을 보인 인물이 고드윈과 맬서스였다. 맬서스는 고드윈을 비롯한 콩도르세 등의 유토피아론을 반박하기 위해 <인구의 원리>를 구상하였다. 콩도르세와 고드윈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무한히 진보하여 점점 더 완벽한 인간으로 완성되어 갈 것이라고 보았다. 콩도르세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여 생계수단을 능가하는 단계를 우려했지만, 그런 일은 먼 미래에나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유토피아에서는 인구가 늘어나도 모두 평등하게 잘 산다.

맬서스는 인구의 원리를 가지고 이들을 논박하여, 무한한 낙관적 진보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논의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반해, 식량은 그 속도를 못 따라가니 제어되지 않는 인구의 수는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모두 잘 살게 되면 식량 생산량은 그대로인데 인구가 늘어나게 되고 부족해진 식량 자원을 두고 파멸적인 싸움이 일어난다.

3.

맬서스는 인구의 증가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구가 늘어나고 번성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목사이기도 했던 맬서스는 이때 분명 창세기 1장 22절 "생육하고 번성하여"를 인용하고 있다) 인구의 감소는 죄악이다. 그러나 인구가 조절되지 않고 무한히 늘어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난 죄악이라고 보았다. 맬서스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인구가 증가하되 식량 생산량과 어느 정도 상응하는 속도로 조절되는 상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적 차원에서는, 식량 증가 없이 인구를 증가시키고 빈자를 게으르게 만드는 구빈법을 폐지해야 한다. 빈자의 도움받을 권리를 철폐해야 잘못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개인은 도덕적 억제심을 발휘해야 한다. 덮어놓고 아이를 낳으면 가족부양이 어려워지므로 "자녀 부양 능력을 갖출 때까지" 결혼과 성욕을 삼가야 한다.

맬서스 이전에는 인구와 개인의 생계에 대한 관리의 책임 소재가 정부에 있다고 여겼다. 고드윈은 사회의 인위적 제도로 인해 빈곤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맬서스는 같은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 빈곤은 인간의 생리적 본성의 문제이다. 정부가 할 일은 인민을 교육하여, 인민 자신들이 빈곤해진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자신들의 이익인지 가르치는 것뿐이다. 인민은 교육을 통해 본능을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충동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4.

맬서스의 논의는 아직 산업혁명의 효과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시기에 쓰였다. 그래서 그는 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될 수 있는 시대를 생각하지 못하였다. 식량이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가 된 오늘날에 맬서스의 인구 원리 테제,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된 사회적 처방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이 미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인구 관리 문제에서 맬서스는 정부보다 개인이 주체라고 보는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실제로 <인구의 원리> 이후에 기존 사회보장 제도가 변화되기도 하였다. 사상사적으로도 이 책은 특별하다. 맬서스는 애덤 스미스의 전통 위에 있는 사상가이며, 자연신학적 토대를 가졌던 정치경제학자이기도 했다. 맬서스의 경고는 제임스 밀을 통해 벤담의 사상과 결합하여 철학적 급진주의의 탄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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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만나다 - 탄생, 갈등, 성장의 역사 비아 만나다 시리즈
로널드 헨델 지음, 박영희 옮김 / 비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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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창세기>의 기원과 <창세기>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지를 다룬 책이다. 창세기에는 한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하느님의 6일간의 창조 이야기,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낙원 생활과 뱀의 유혹으로 인한 타락과 낙원에서의 추방, 카인과 아벨,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던 사건,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이집트의 총리까지 올라가게 된 이야기 등등.

이러한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도 매혹적이고 재미있다. 그래서 창세기는 종교적으로는 물론이고, 철학적, 문학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으며, 때로는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야말로 창세기의 강인한 생명력과 창세기가 그 모든 공격에도 불구하고 읽을 가치가 있는 문헌임을 증명한다. 그러한 창세기의 해석사와 창세기 해석 방법론을 알고자 할 때 참조할 수 있는 책이 로널드 핸델의 <창세기와 만나다>이다.

창세기는 고대에 여러 자료를 결합하여 만들어진 문헌이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유대교 랍비, 플라톤주의자, 기독교 시대 교부들,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 문헌을 상징적으로 읽어왔다(이것은 2~4장까지의 내용이다). 그러나 중세 말 이후 상징주의적 해석은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16~17세기 이후로 상징적 해석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흐름을 가속화했던 인물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였다. 가톨릭의 상징적 해석에 반대하여 루터는 역사적 비평을 강조했다. 스피노자는 루터처럼 상징적 해석을 비판한 이들의 방법론을 한층 체계화하여 성서의 영적 권위를 비판하였다.

그런 흐름 위에서 결정적인 국면은 근현대 과학의 창세기 비판이다. 이 내용을 담은 제6장 "창세기와 과학"은 '종교와 과학'이라는 주제로 중요한 논점들을 던져준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창세기의 역사성과 과학성이 의심받았다. 6일 창조가 진짜로 벌어졌는가? 창조론인가, 진화론인가?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의 근거가 어디있냐? 등등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생산적이지도 않은 비판과 질문부터 잘못된 논의들이 이때를 기점으로 분출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과학의 관점에서 창세기와 기독교 교리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신곡>이 과학적으로 틀리다는 이유로 <신곡>을 읽을 가치가 없다고 일소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비판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과학의 도전에 맞서 신앙의 진실성과 '성경'의 권위를 옹호하고자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이라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근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 당연하게도 진화론이나 빅뱅 같은 현대 과학의 중요한 발견과 상식을 이들은 거부한다. 건강하지 못한 편견으로 가득한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 정통이라 자부하지만, 그들의 나이는 백 수십년 밖에 안 된다.

과학적 근거로 창세기를 비판하는 것이나 창세기를 과학으로 옹호하는 이들이나 모두 핵심을 놓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다. 창세기의 핵심은 재미난 이야기이다. 앞서 언급한 천지창조-아담과 이브-노아-아브라함 등의 이야기는 당연히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창세기 속 이야기와 인물들은 어떠한 전형을 이룬다. 그것은 히브리인의 인간관과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과학이나 역사로 해소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문학적, 종교적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고대의 플라톤주의자와 랍비들의 과도해보일 정도의 상징적 해석이 오늘날의 창조과학보다 훨씬 낫다.

제7장은 에밀리 디킨슨, 프란츠 카프카, 에리히 아우어바흐 등의 인물이 어떻게 창세기를 받아들이고 해석했는지를 다룬다.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나 카프카의 소설들, 디킨슨의 시에서 창세기가 중요한 모티프를 이루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다. 이런 내용들은 나중에 카프카와 아우어바흐를 읽을 때도(물론 읽게 된다면) 요긴하겠지만, 창세기가 가진 풍부함을 깨닫게 되는 설명이기도 하다. "창세기의 생애는 문학적, 도덕적 상상력의 원천이자 문학적 가치를 지닌 본문으로서 활력을 얻게 되었다."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 이 책의 첫 문장이 더 없이 적절하게 느껴진다. "많은 이가 소멸을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노트로 정리할 내용, 더 읽어볼 책이 쏟아지는 책이다.

더 읽을 책

야로슬라프 펠리칸, <성서, 역사와 만나다>, 비아

스티븐 그린블랫, <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 까치

존 폴킹혼,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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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민중반란> '저자 후기'에서 조경달은 자신이 어째서 동학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얘기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조선인의 피를 타고났음에도 일본에서 태어나야만 했던가. 생각해보면 이것은 나의 소년기부터의 의문이었으며, 나를 조선에 대한 연구로 이끈 원초적이고 소박한 문제의식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주제가 바로 갑오농민전쟁이었다."

이것은 저자가 왜 동학농민운동을 연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이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저자가 살아간 생활공간인 일본은 저자의 문제의식과 관심사를 규정하였다. 이것에 대한 고민에서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단과 민중반란>이라는 책까지 쓰게 되었다.

강유원의 서평집 <주제>는,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의식과 주제에 따라 장을 나눠, 해당 주제의 책에 대한 서평을 실었다. 그 주제들이란 "책과 교양" "역사" "근대" "파시즘" "전쟁" "한국과 동아시아"이다. 왜 이 주제들을 선택했는가. <주제> 서문을 옮겨보겠다. "궁극적으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이는 손에 책을 쥐는 순간이면 항상 답해야 할 물음이다. '책과 교양'에 담긴 게 그것이다. '역사'와 '근대'는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원리를 책에서 깨우쳐 보려는 시도이다. 근대의 가장 두드러지고 절망적인 모습은 '파시즘'과 '전쟁'이다. 나는 독재자 박정희의 유사-파시스트 권위주의 시대에 유아기와 청소년 시절을, 살인자 전두환 정권 시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파시즘은 그침 없이 찾아야 하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한국과 동아시아'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의 소산이다. 그곳을 떠나면 나의 책읽기와 글쓰기는 무의미할 것이다."

강유원의 문제의식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조경달처럼 그가 살아왔던 시대와 공간에서이다. 근대 이후 한국, 더 넓게는 동아시아에서 태어나 박정희와 전두환 시기를 살아왔다는 겪음이 그의 관심사를 일차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조경달은 근현대 한국사를 공부하였고, 강유원은 서양철학과 사상사를 공부하였다. 둘의 공부 영역은 다르지만, 왜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은 비슷하다. 그들에게 공부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바탕으로 나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보면, 둘의 전공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 둘의 공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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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17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마지막에 나온 공부의 정의를 아침에 보니까 책 읽고 글 쓰는 의욕이 생겨요. 이제 출근해야 해서 당장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ㅋㅋㅋㅋ 공부의 정의를 간직하면서 책 읽고 글 쓸 수 있는 저녁을 기다려야겠어요.

Redman 2023-05-17 09: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열심히 공부하게 되는 하루 되십쇼 cyrus님!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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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인터넷에 연재한 서평문을 엮은 서평집이다. 이 책의 다소 난삽한 서문을 통해 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책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보자. 정희진에게 책이란 "정치적으로 치열"하고 "자기 내부의 모순까지 껴안는 명확한 당파성의 소유자"이다. 한마디로, 책이란 명확한 정치적 입장연관성을 갖는다. 이러한 책에 대한 정의는 저자가 책을 고르는 기준과 저자의 독서 행위를 짐작하게 한다. 저자는 책을 고를 때 "관점"을 중요시하고, "'주류'의 관점 밖에서 쓰인,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는다. 그런 책은 "지적 자극"을 안겨다주어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주류'란, "서울 출신, 남성, 서양,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건강한 사람, '학벌 좋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대체 어느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가 하면, 정확하게 규정한 부분이 없어 알기 어렵다. 한국 사회의 주류를 벗어난 관점이라고 보면 좋을까? 이런 규정이 없다는 것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상은 '어떤 책을 읽은 것인가'라는 교양 쌓기의 수단으로서의 공부의 기본적인 주제이다. 저자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서문에 이어지는 "좁은 편력"에 따르면, "책을 읽은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습득이고, 하나는 지도 그리기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책의 내용을 익히고 내용을 이해해서 필자의 주장을 취하는 것이다.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 후자는 책 내용을 익히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는 읽고 있는 내용을 기존의 자기 지식에 배치하는 것이다." 저자는 "객관적, 일방적, 수동적"인 습득보다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인 지도 그리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입장연관성을 가지는 책을 읽을 때 독자도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책의 위상과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여 나의 입장과 저자의 입장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독서할 때 중요하다. 이때 주의할 것은 책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느 책이든 한계가 있음을 인지할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독서론을 이렇게 길게 정리한 내 서평은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습득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자는, '지도 그리기'가 가능하려면 먼저 '습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독서는 먼저 최대한 객관적으로, 저자의 언어를 통해 저자의 입장에서 책 내용을 요약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저자가 "자기만의 프레임"을 갖게 된 것도 그 이전에 쌓였던 공부와 독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쌓고 유기적으로 지식 체계를 형성해 나가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만 그려서는 안 된다. 저자는 독서가 한 권의 책이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습득이 없으면 책은 통과만 하고 나갈 수 있다. 저자는 책 내용 요약을 불필요하다고 보지만, 그런 요약에 사유를 발달시키는 힘이 있다.

여기서 하나만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에 수록된 저자의 서평을 다 읽지는 않았고, 내가 읽어보았거나 관심 가는 책의 서평만 읽었다.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홉스의 <리바이어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니체 <선악을 넘어서>, <신약성서>, <극단의 시대>, <님의 침묵>, <이상 문학 전집>, <거짓의 사람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등등. 저자의 주 분야인 여성학과 문학 서평에서는 군데군데 인상적인 통찰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분야, 특히 고전 서평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개념과 용어를 엄밀하게 규정하고 최신의 논의를 수용하여 자신의 공부를 진척시키는 독서가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최신의 논의가 무조건 낫다는 속물적 연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구가 계속되면서 이전의 논의와 이해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래서 역사 책이나 사회과학 서적은 20~30년 이상 된 책은 이론 성격이 강하거나 그 분야의 고전이 아닌 이상 오래오래 소중히 간직할 이유도 읽을 이유도 특별하게 없다. 그리고 고전 번역과 관련해서는 더 나은 번역본이 있으면 그것을 읽어야 한다. 홉스 <리바이어던>을 읽고 무엇인가 진지하게 말하려면 진석용 역을 읽어야 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무엇인가를 논의하려면 박상섭 역이나 곽차섭 역, 강정인/김경희 역 셋 중 하나를 읽는 것이 기본이다. 저자는 1990년에 나온 중역본으로 보이는 서적을 인용한다. 저자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도 박찬국 역이나 김정현 역을 빼고 1983년에 출간된 중역본을 읽는다.

치졸하게 번역본으로만 뭐라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논의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문장이 많았다. 가령, 홉스 <리바이어던> 사족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대영제국의 지식인 홉스에게 '식민지는 국가의 번식으로서 국가가 출산한 자녀'였다." '식민지'와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 '제국'을 거론한 듯한데, 토머스 홉스의 역사적 배경으로 '잉글랜드 커먼웰스'나 '잉글랜드 내전'을 빼고 '대영제국'을 언급한 것이 과연 타당한가 싶다. 홉스의 정치철학이 '제국'이라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깊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의문. (혹시나 나의 생각이 틀렸다면 누군가 알려주시길 바란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서평에서는 "마키아벨리는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유토피아를 꿈꾸던 청렴한 지식인이었다"라고 쓴다. 마키아벨리가 청렴한지는 그 자신과 신만이 아실테고, 그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꿈'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마키아벨리의 유토피아론은 무엇일까? 마키아벨리는 꿈 속에서 두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첫 번째 무리는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었고, 두 번째는 지옥으로 가는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타키투스 등 고대의 위대한 저자들의 영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고대의 저자들과 정치를 논하겠다며 지옥에 있고 싶다고 했다. 곽차섭은 이 꿈이 "고대인의 영광과 위대함...이 자신의 시대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키아벨리의 희망을 표현"했다고 해석한다.(곽차섭 역, <군주론> 해제 참조) 그런데 이를 유토피아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유토피아론이 있던가? 회페의 <정치철학사>나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을 봐도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저자는 저 내용에 어떠한 문헌적 근거를 댈 수 있을까?

그리고 저자는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요약하여 한국에 적용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다룬 글에서 정희진은 이렇게 쓴다. "벤야민은 탈식민을 외치고 있다." 이는 벤야민이 한 말이 아니라, 슈미트의 독재정론을 숭모하여 모조한 '비상사태 테제'를 저자가 확장하여 얘기한 것이다. 그리고 '비상사태론'으로 한국 정당들의 '비상'대책위원회를 비판하는 것은 벤야민 논의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여 적용했다기보다는 벤야민을 외피로 자신의 얘기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습득을 등한시한 지도 그리기의 폐해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이미 심드렁해진 나는 목차를 펴보고 관심 가는 책 제목을 따라 아무 글이나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님의 침묵> 서평에서 "모든 예술은 남겨진 자의 고통에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그마저도 대충 읽게 되었다. 이런 책임 없는 문장은 저자에 대한 신뢰도만 깎을 뿐이다.

인터넷에 연재된 짧은 글에 너무 많은 것을 지적하는 듯 싶지만, 잡글과 논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람의 글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정희진의 책을 더이상 읽거나 참조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책의 제목은 '정희진처럼 읽기'이나 이 책은 정희진처럼 읽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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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15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험상 한 번이 아닌 ‘두 번 이상 책이 내 몸과 머리를 통과할 때’ 전보다 책이 새롭게 보였어요. 그리고 이전에 책을 읽으면서 생긴 오독과 편견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

Redman 2023-05-15 09:39   좋아요 2 | URL
저는 어떤 책에 대한 서평을 보고 평가가 바뀌기도 합니다. 중요한 줄 몰랐던 책이 매우 중요하단 것, 반대로 좋았던 책이 별 거 없는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2023-05-15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풍오장원 2023-05-2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있는 이 책에 대한 글 중 유일하게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Redman 2023-05-27 20:02   좋아요 0 | URL
어우 과찬이십니다 ㅎㅎ
 

나는 브로델의 '역사'는 그의 '신화'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이 글을 쓰기 전이나 이 글을 마친 후나 변함이 없다. 그의 역사학은 웅장하지만 짜임새가 없고,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사례와 수사학적 비유가 과다하며, 수다가 범람하기 때문에, 군데군데 대역사가다운 식견이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으로서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있는 브로델을 역사의 무대로 끌어내려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구조와 인간, 구조와 변동 등 역사학의 중요 문제에 대해 그가 변죽만 울린 것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역사가의 권위에 눌려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을 대신 하면서 논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할 뿐 역사를 만드는 일은 아니다. 

'들어가는 글' 7p


김응종 교수에 따르면,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제대로 평가가 필요하다. 저자 김응종은 사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프랑스 아날학파에 대한 책도 쓴 적 있다. 브로델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알고 싶다면 위의 인용문으로도 충분하다.


이 책의 제1부는 브로델의 역사학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담고 있으며, 이 부분에서 브로델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적 흐름과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다. 제2부는 브로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두 책 <지중해>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그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전개하고 있다. 2부에서는 두 책을 지은 브로델의 방법론, 문제의식과 의도, 브로델의 책을 읽는 방법과 저자의 평가가 담겨 있다.


브로델의 역사학은 이렇게 요약된다. "인간은 장기지속적인 구조에 갇혀 있는 수인(囚人)....구조는 감옥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 달리 말하면 역사 속의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브로델에게 개인은 바다 위의 출렁거리는 물결과 같고, 공중을 떠다니는 먼지와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움직일 뿐이다." 이 인용문에는 브로델 역사학의 주요 핵심인 '구조'와 '자유',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한 설명모형인 '장기지속'이 모두 들어가 있다. 브로델 역사학은 구조주의라고 불린다. 이때 브로델이 의미하는 '구조'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틀이다. 브로델 역사학에서 인간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브로델에게는 구조만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는 단지 인간의 자유를 문제시했을 뿐이다.


브로델은 "아날학파가 추구해온 '새로운 역사'의 결정"이라는 평가를 듣지만, 브로델 이후 역사학은 이런 관점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1968년 이후 아날학파 역사학은 역사에서의 인간의 능동적 힘을 강조하며 새로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런 학자들로는 조르주 뒤비, 자크 르 고프, 임마누엘 윌러스틴, 안드레 군더 프랑크, 로제 샤르티에, 클리포드 기어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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