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라는 발명>은 출판사가 서평 이벤트를 진행했는지, 서평 자체는 많다. 홍성욱 교수가 감수를 한 것까지 보면 출판사에서도 꽤 공도 들인 듯하다. 이 글에서는 유럽 근대 초기 지성사 및 학술사(history of scholarship) 연구자 드미트리 레비틴(Dmitri Levitin)의 비판적 서평을 옮겨놓는다. 이를 통해 과학이 구태의연한 기독교가 지배하는 학문적 구세계에서 벗어나는 익숙한 서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평 원문

https://www.lrb.co.uk/the-paper/v38/n18/dmitri-levitin/such-matters-as-the-soul


레비틴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과학이 이토록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고, 그것도 적지 않은 재정적 권력(예컨대 리고[LIGO]의 총 비용은 약 6억 2천만 달러에 달한다)까지 가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이 사건들이 일어난 것만큼 오래된 해석이자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지해온 대답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1492년 이전까지, 문해력을 가진 유럽인들은 고전 시대의 권위 있는 텍스트를 통해 우주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이 텍스트들에 따르면 변화는 달 아래의 세계(sublunary world, 이를 넘어가면 불변의 천상의 영역이었다)에만 국한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대척점(antipodes) 없는 지구가 있었다. 이러한 지식을 전파하던 기관(institutions), 주로 대학은 경직된 라틴어 현학의 중심지였다. 그러던 중 아메리카가 발견되었고, 책이 아닌 경험에서 오는 지식을 향한 새로운 존중이 일어났으며, 이는 공식 학문 기관 밖에서 활동했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의 발견으로 절정을 맞이했다(한편 그 기관들은 비극적이게도 구시대의 권위에 얽매여 있었다). 이른바 ‘과학혁명’은 점진적이지만 확실하게 합리주의(raionalism)의 시대를 열었고, 이는 중세 세계의 미신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고대 문헌의 권위 맹신을 몰아냈다.


이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이 데이비드 우튼(David Wootton)의 야심차고 예리하며 논쟁적인 신간에서 제시된다. 그러나 혁명을 말하기에 앞서 무엇이 혁명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하며, 무엇인가를 경직되고 고루하다고 치부하기에 앞서 과연 상황이 그 정도로 나빴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과학혁명 이전의 과학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리고 서구 세계에는 과학 발전의 용광로가 될 만한 어떤 고유한 조건이 있었던 것일까?


과학과 유사한 어떤 것의 기원들이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특히 이들은 의학, 수학, 천문학의 기법과 관찰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룩했다. 바빌로니아의 천문학과 수학은 상당히 발전하여 기원전 1천년경까지는 달의 월식 예측이 가능할 정도였다(이들의 천문학은 대부분 점성술적 목적을 위해 발전한 것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천문학(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은 기원전 3~2세기 헬레니즘 그리스에 전해졌고, 그 유산은 향후 2천년간 유럽 천문학 사업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자연에 대한 사변이 기원전 6세기 이래로 한 그리스 집단에 의해 혁신되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현대 역사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지만, 이오니아의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소수의 사상가 집단이 이전 세대는 알지도 못했고, 또 이전 세대를 직접 비판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는 데는 학계의 대체적인 합의가 있다. 그들은 세계의 형태와 구성, 즉 하나의 물질(substance)로 이루어졌는지 여러 물질로 이루어졌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떠올린 답이 현대의 관점에서는 공상적이고 비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자연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가 지진이나 번개 같은 현상을 신들의 개입으로 설명했다면, 기원전 6세기 탈레스는 지구가 물 위에 떠 있으며 지진은 파동의 떨림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서로의 견해를 알고 비판하기도 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믿었고, 아낙시만드로스는 그것이 무한한 원초적 덩어리(아페이론, apeiron)라고 했으며,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보았다. 신화를 지어낸 앞선 이들과 달리, 이 철학자들은 각자의 설명이 상호 배타적이라는 점을 인식했고, 하나의 설명이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토론의 과정이 필요함을 인식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지적 탐구는 실용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탐구는 탐구 자체를 위해 수행되었거나, 관조의 삶(life of contemplation)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는 신념에서 나왔다. 이러한 자연주의로의 전환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 결과는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현대과학의 핵심을 이루는 두 가지 방법론적 원칙을 발전시켰다. 첫째는 수학을 자연 현상 이해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는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이 개척했고,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Eudoxus of Cnidus, 기원전 408–355)의 천문학 모델에서 절정에 이른다. 에우독소스는 행성들이 주기 중 특정 시점에서 보이는 역행 운동 등 복잡한 천체 궤도가 복잡한 동심원 모델로 설명될 수 있다고 제안했는데, 이 모델은 케플러 시대까지 많은 수정을 거치며 살아남았다. 두 번째 핵심 발전은 때로는 매우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경험적 연구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예는 우리가 히포크라테스 저작집(Hippocratic Corpus, 현대인과 달리 히포크라테스 자신은 이 저술들 알지 못했다)이라고 부르는 의학저술로, 대부분 기원전 5세기 말~4세기 초에 작성되었다. 이 저술들은 철학자들의 저술보다 훨씬 실용적이지만, 질병과 같은 현상의 자연성(naturalness)을 주장하려는 열망을 공유한다. 예컨대 「신성한 병에 대하여」(On the Sacred Disease)라는 논고는 간질을 설명하면서 신을 끌어들이는 해석을 반박한다. 이후 4세기에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동물학 서적에서 특히나 철학적·의학적 접근을 결합했는데, 이 저술은 놀라운 사실 수집의 산물로 500종 이상의 동물이 언급되고, 약 120종의 어류와 60종의 곤충도 포함되어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학교를 세웠고, 일부는 오래 지속되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첫 번째 후계자들인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와 스트라톤(Straton)이 운영한 리케이온(Lyceum)에서 이루어진 것 같은 연구 프로그램 같은 것을 지속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제도적 혁신은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는데, 기원전 280년경 세워진 무세이온(Museum, 현대적 의미의 박물관museum이 아니라 종교 성지, 도서관, 철학 학교 등을 동시에 겸한 공간이었다)은 후원에 기반한 고등 학문 기관의 최초 사례로, 후대에는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같은 로마 황제들이 아테네 등지에 철학 강좌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이러한 기관이 근대적 대학으로 발전했을까?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철학을 수용했고 기술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물레방아, 수력 톱, 심지어 소에 의해 움직이는 외륜선까지), 추상적인 자연 철학, 수학, 천문학에는 여가 활동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 점은 그리스적 성취가 얼마나 우연적이며, 장기적인 기관 안에서 전승되지 못할 경우 사상과 탐구 방식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위에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로마가 무너지고 도시 인구가 줄어들자, 과학 관행은 제도적 기반과 함께 쇠퇴했다. 이것은 종종 주장되듯이, 불관용적이고 반지성적인 그리스도교의 잘못은 아니었다. 수도원 교육이 과학적 문제에 집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해도 여전히 때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했는데, 예컨대 6세기~9세기 아일랜드 수도원에서는 수학이 융성한 것이 그러하다. 그리스의 과학 탐구 전통은 상당히 약화되었고, 주된 원인은 (다소 의아하게도) 헬레니즘 사상의 자연스러운 계승자인 비잔틴 제국에서의 체계적인 과학 활동의 부재 때문이었다.


결국 그리스 과학 전통을 되살린 것은 이슬람이었다. 이는 주목할 만한 발전이다. 문해율이 낮고, 종교적 계시를 통해 연결된 부족 사회가 어떻게 단 몇 세기 만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번역 운동과 학문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을까? 결정적 계기는 8세기 우마이야 왕조가 아바스 왕조에 의해 전복된 사건이었다. 이로써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 부족주의 모델은 제국적 이념과 이에 수반되는 국제적 관료제로 대체되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정복지의 엘리트들—페르시아인, 베르베르인, 시리아계 기독교인 등—이 새 수도 바그다드(762년 건설)로 모였고, 종이 제조라는 중국의 기술이 도입되었다. 이 종이는 파피루스나 양피지보다 훨씬 가볍고 튼튼하며 저렴했다.


이후 300여 년간 그리스의 거의 모든 과학 문헌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슬람 과학의 목적은 그리스인에 비해 덜 추상적이었고 더 실용적이었다. 그들이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가장 큰 진전을 이룬 분야는 수학(회계 목적 포함), 천문학(점성술과 거의 분리되지 않음), 의학이었다. 알바타니(al-Battani)와 같은 이슬람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발견과 방법을 개선했다. 이후에 그들은 현대의 연구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관측소를 세웠다. 가장 유명한 관측소는 오늘날 이란 동북부에 위치한 마라가(Maragha)에 있는 것으로, 여기서 14세기 이븐 알샤티르(Ibn al-Shatir)가 달과 행성 모델이 개발했으며,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sbus, 1543)에 수학적으로 동일한 형태로 등장한다. 울루그 베그(Ulugh Beg, 1394–1449)의 별자리 목록 『지즈 이 술타니』(Zij-i Sultani)는 저술된지 200년이 더 지나서도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원들 사이에서 여전히 수요가 있었다. 광학 분야에서도 탁월한 성과가 있었다. 10세기 말, 아부 사드 알알라 이븐 사흘(Abu Sa‘d al-‘Ala’ ibn Sahl)은 볼록 렌즈와 곡면 거울 실험을 통해 굴절의 법칙을 사실상 발견했다. 300년 후 카말 알딘 알파리시(Kamal al-Din al-Farisi, 1267–1319)는 물을 채운 유리 구슬로 무지개 생성 조건을 실험하여, 무지개가 반사뿐 아니라 굴절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잘못 알려졌던 이론을 수정한 것이다).


12세기 유럽의 위대한 ‘르네상스’는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이 가장 많았던 지역, 예컨대 11세기 말 재정복된 톨레도(Toledo)나 캄파니아(Campania)의 살레르노(Salerno)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거의 전적으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과학 문헌과 그에 대한 아랍 주석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서구인들의 가장 치열한 노력은 관측 천문학이나 동물학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을 정교화하는 데 집중되었다. 물론 니콜 오렘(Nicole Oresme, 1320경–1382)의 운동학 연구처럼 갈릴레이가 이후 활용한 중요한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16~17세기 들어 일반적이게 된 스콜라주의 자연철학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정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중세 유럽이 하나의 진정한 혁명적인 혁신, 오늘날까지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을 형성한 혁신을 탄생시켰다. 바로 대학이다.



12세기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 중심지에서 대학은 사적 학자들과 그 제자들의 공동체로 시작되었으며, 장인들이 사용하던 길드(guild) 모델을 채택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보호했다. 13세기 초에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의 대학들이 이미 번성하고 있었으며, 135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약 75만 명의 학생이 유럽 대학에 입학했고, 그 무렵에는 이미 60개의 기관이 설립되어 있었다. 중세 및 근세 초 대학에 대한 흔한 오해는 대학들이 종교가 지배하는 기관으로서 논쟁이 엄격히 통제되고 검열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대학은 놀라울 만큼 세속적이고 자유로웠다. 대다수 학생이 다녔던 교양학부(faculty of arts)는 오직 세속적 과목만을 가르쳤다. 그 중심은 자연철학이었는데, 비록 신학의 시녀로 간주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신학과 무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Libri naturales)에 수록된 주제들, 즉 천체, 생성과 부패, 원소, 기상현상, 동물, 광물, 영혼을 다루었다. 신학적 주제는 금지되었고, 상위 학부인 신학부(또 다른 상위 학부인 법학부와 의학부 또한 상당 부분 세속적이었다)로 진학한 소수의 학생들만이 자연철학적 학식을 종교적 목적에 적용했다.

다른 선진 사회들도 - 고대 그리스와 중세 이슬람뿐만 아니라 중국 역시 - 지식을 보존하고 공적 기록을 유지하는 자체적인 수단을 발전시켰으나, 결코 대학이라는 제도를 만들지는 않았다. 이슬람 세계에서 과학 교육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위대한 천문대 같은 기관들은 후원자가 죽으면 사라지곤 했다. 그 밖의 곳에서는 과학 교육이 독학자(autodidacts)나 개별 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랍 과학은 최소한 14세기까지 서구 과학보다 ‘앞서’ 있었지만, 서유럽은 고전 과학 전통의 제도화라는 독보적인 성취를 이룸으로써, 학문에 사회적 인가를 부여하고, 학자들에게 직업적 기회를 창출했으며, 무엇보다도 최소한 그리스인들이 제기했던 질문들에 대해서는 과학적 호기심이 방해받지 않고 추구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이러한 상황은 15세기와 16세기의 유럽 르네상스 시기에도 이어졌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일부 역사가들이 여전히 가정하듯, 단지 수사적 양식과 문헌학적 세부 사항에만 집착했던 것이 아니었다. 특히 그리스 문헌의 재발견과 재해석은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큰 충격을 주었다. 레기오몬타누스(Regiomontanus)의 꼼꼼한 프톨레마이오스 편집본은 코페르니쿠스의 급진적 사상에 주된 영감을 주었고, 플리니우스(Pliny)의 『자연사』(Natural History)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가장 경험적으로 접근한 아리스토텔레스와도 전혀 다른 과학 모델을 제시했으며,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Galen)의 새로운 그리스어 본문과의 교류는 학문적 의학(learned medicine)을 변혁시켰다.


인문주의는 빠르게 대학 교과과정에 통합되었고 거의 반대를 받지 않았다. ‘새로운 과학’(new science)은 존경받는 고대 전통의 상속자임을 주장할 수 있었고, 실제로 여러 면에서 그러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토마소 캄파넬라(Tomasso Campanella),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같은 외부자들은 자신의 새로움을 과시하고 전통을 폄하하길 좋아했다. 역사가들은 과거에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이제 우리는 더 잘 알고 있다. 16세기는 집약적인 도시화의 시기였고, 그에 따라 대학 대학 입학생 수도 크게 증가했다(잉글랜드의 경우, 이러한 수준의 고등교육과 대학 제도를 통한 사회적 이동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볼 수 있었다). 도시화는 또한 약제사(apothecaries) 같은 ‘비학문적’(non-learned) 실무 전문가들의 수요를 증가시켰는데, 그들은 실용적이고 ‘손으로 익히는’(hands-on) 지식을 찬양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조차도 학문적 의사들(learned physicians)과의 빈번한 갈등 속에서 고전 의학 전통을 환기했는데, 자신들을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진정한 상속자라고 주장하기 위해 인문주의 학문 연구를 끌어왔다.


고전적인 과학적 호기심 전통의 제도화가 더욱 깊어짐에 따라, 16세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실험 결과들은 점점 더 사회적·정치적 이유보다는 과학적 이유로 수용될 수 있었다. 천문학의 경우, 티코 브라헤(Tyco Brahe)의 일주 시차(diurnal parallax) 발견과 갈릴레오의 금성 위상 망원경 관측은 초월적 세계가 불변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붕괴를 가져왔다(아직은 태양중심설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우튼이 다루는 핵심 주제에 들어서며, 그는 새로운 발견들이 과학 공동체의 상당 부분에 의해 수용된 경로를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설명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덜 극적일지 모르지만 방법론의 차원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1643년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Evangelisa Torricelli)의 수은 실험이었다. 수은을 가득 채운 유리관을 거꾸로 뒤집어 수은이 담긴 그릇에 넣으면, 관 속의 수은은 내려가 30인치 정도 높이에 머물고 그 위에는 진공 상태가 형성된다. 이 결과는 매우 논쟁적이었으며(진공의 가능성은 그리스 시대 이래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우튼은 실험적 증거가 어떻게 먼저는 프랑스에서, 이어서 이탈리아와 잉글랜드에서 과학적 합의를 형성했는지를 다시금 보여준다. 많은 과학혁명 입문서들이 잉글랜드 내 발전에 과도하게 집중했지만, 과학 공동체가 정치적 논쟁이나 종교적 정체성과 같은 지역적 사회학적 요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편지와 인쇄술을 통해 전달된 발견들에 의해 움직였음을 보여주는 우튼의 서술은 신선할 정도로 국제적이다(우튼이 라틴어가 18세기까지 보편적 학문 언어로 남아 있었다는 점을 더 강조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새로운 관측은 오래된 이론에 치명적이었다.”라고 우튼은 쓴다. 그는 과학적 결론이 수용된 과학적·경험적 이유에 초점을 맞추며, 근대 초기 과학의 사회적 맥락에 집착한 나머지 실제 과학적 실천의 내용을 경시하는 경향에 대한 환영할 만한 교정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튼은 사회학적 설명을 너무 열심히 배제하려고 하여 개별 발견의 힘과 과학혁명의 참신성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와 이슬람 과학은 간단히 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서구에서는 11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대학에서 오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만이 가르쳐졌으며, 모든 이가 “알아야 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다 있다고 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해로운 결합은 ‘의례적 반복’으로 점철된 지적 문화를 만들어냈고, 그 속에서는 참신성이 불가능했다. 오직 제도권 외부의 인물들―처음에는 콜럼버스, 그 다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적 정통에 맞선 영웅적 과학자들―의 발견만이 진보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진보는 ‘불가피’했는데, 경험적 사실의 발견 자체가 그것들의 수용을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류 제도적 문화가 정말로 그렇게 후진적이었을까? 17세기에 대학이 호기심을 보존하는 도구로서 맡은 역할이 여전히 중심적이었음을 믿을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결국 왕립학회가 창립되기 전 옥스퍼드에서 모였던 초기 회원들과,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과 토머스 윌리스(Thomas Willis)를 포함한 다수의 핵심 회원들은 그곳의 천문학 혹은 자연철학 교수였다. 변화는 몇몇 급진적 외부인이 보수적 주류를 무너뜨려서가 아니라, 주류가 전통적 틀 안에서 변화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예컨대 갈릴레오의 『대화』(Discorsi, 1638)에 담긴 역학, 운동, 공기의 무게에 관한 발견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의 소장파 역사학자 르네 라파엘(Renée Raphael)은 이탈리아에서의 꼼꼼한 기록 연구를 통해, 예수회 대학 교사들(뿐만 아니라 영어권, 아일랜드, 프랑스 출신 독자들 역시)이 갈릴레오의 실험 결과와 이론적 결론을 자신의 연구에 통합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을 대체했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주장과 방법이 ‘전통적 학문 방식과 책 중심의 학문 방법을 통해 흡수되었기’ 때문이었음을 증명했다.



17세기의 과학은 그 모든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는 그리스, 아랍, 중세의 선행 전통과 유사했다. 사실 ‘과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자연철학, 수학, 의학을 혼합했고, 영혼과 같은 문제들―이는 전통적으로 신학이 아니라 자연철학의 영역이었다―도 18세기까지 ‘과학적’ 사유의 한 주제로 남아 있었다. 우튼은 ‘수학자’와 ‘과학자’(그가 호감을 가지는 인물들에게 적용)와 ‘자연철학자’(그가 덜 호의적으로 보는 인물들에게 적용)라는 시대착오적 구분을 선호한다. 어쩌면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라 단지 사실을 캐내려는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한 케플러는, 동시에 1619년에 친구에게 “나를 수학 계산이라는 쳇바퀴에 완전히 매이지 않게 하고, 내 유일한 즐거움인 철학적 사색에 시간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던 그 케플러와 동일 인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우튼은 수학을 유일한 혁신의 원천으로 만들려는 열망을 보인다. 그는 “과학혁명은 여러 혁명이 아니라 단 하나의 혁명이며, 그 이유는 단순히 다른 모든 혁명의 영감은 모두 수학자들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열망은 다른 사유 영역에서의 혁신을 가려 버린다. 충격적이게도 의학은 단지 베살리우스(Vesalius)와 그 후계자들이 원근법 회화의 발전에서 일부 영감을 받은 해부학 도해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오직 '세계의 수학화'(The Mathematisation of the World)라는 제목의 한 장에서만 다루어진다. 이는 낸시 시라이시(Nancy Siraisi) 같은 학자들이 16세기 의학―그 상당 부분은 대학 같은 전통적 기관과 인문주의 주석 같은 전통적 실천에 기반해 있었다―이 직접 경험과 관찰의 중요성을 높이고, 과학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일반적 경향에 어긋난다. 이런 공동체가 ‘정상과학(normal science)에 해당하는 어떤 것도 세운 적이 없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혈액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우튼은 거의 언급하지 않은 인물)야말로 케임브리지와 파도바 대학에서 훈련받은 열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으며, 옥스퍼드의 자연철학자들과 의사들의 한 세대를 고무시켜 초기 왕립학회의 핵심을 형성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 “18세기에 근대 화학은 연금술의 연속이 아니라 연금술에 대한 반박으로 자리잡았다”는 말이 사실일 수는 있지만, 바로 연금술적 실험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에서 17세기의 미세입자 이론으로 나아가는, 우튼이 크게 칭송하는 이행에 필요한 주요 경험적 증거를 제공했다(연금술사들은 물질이 작은 구성 요소로 분해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열될 수 있다고 믿는 데에 당연히 열정적이었다).


우튼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문헌적·인문주의적·권위 기반 문화가 경험적·합리주의적·데카르트 이후의 과학과 사상의 자유의 문화로 대체되면서 근대성(modernity)이 출현했다는 통설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선전가들이 처음 만들어낸 것으로,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치적 스펙트럼을 아우르며 모든 이에게 무언가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우파에서는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는 (때로는 종교적) 집단도 이를 수용했고, 좌파에서는 승리주의자들(마르크스주의자, 세속주의자)뿐만 아니라 비관주의자들('계몽주의 기획'을 비판한 프랑크푸르트학파)도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고대인과 근대인’(ancients and moderns)이라는 단순한 구분을 따르지 않았다(그 논쟁은 1680년대 프랑스와 1690년대 잉글랜드에서 잠깐 벌어진 사소한 일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실험적·수학적 실천을 문헌적 전통에 근거지었다. 그것은 그들이 진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갈릴레오의 예수회 독자들(그리고 갈릴레오 자신)처럼, 자신들이 하는 일이 대학에서 그토록 세밀히 연구해 온 고대 전통의 틀 외부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몇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베이컨은 우튼이 말하듯 콜럼버스를 '자신의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라, 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특히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를 원시적 실험주의자로 묘사한 르네상스 의학 텍스트에서 얻은 상(像)였다.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은 자신의 발견들을 고대 화학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데 집착했고, 헨리 파워(Henry Power)는 그리스 및 근동 천문학의 역사에 대해 다른 과학자들에게 장문의 문헌학적 편지를 썼다. 에드먼드 핼리(Edmund Halley)는 아폴로니오스(Apollonius)의 『원추곡선론』(Conics)의 유실된 제8권을 복원하기 위해 아랍어를 배웠고,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자신의 발견이 오랜 역사적 전통의 일부라는 믿음을 단순한 ‘개인적 기행’이 아니라, 동시대 문헌학적 저술에 대한 깊은 독서에 기초해 가졌던 것이다.


실제로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이 ‘근대성’의 출현의 주요 동인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과학은 종교적 도그마에 훨씬 후대까지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과학’과 ‘종교’ 간의 가장 뜨거운 논쟁―세계의 나이와 창세기와 자연철학 이론의 양립 가능성에 관한 논쟁―조차도 물리학과 지질학만큼이나 새로운 성서 해석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오히려, 조제프 스칼리제르(Joseph Scaliger) 같은 문헌학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후기 인문주의야말로 교육받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장 큰 곤란을 안겼다. 성서가 여러 판본과 많은 문헌적 문제를 지닌 인간이 쓴 텍스트라는 사실, 초기 그리스도교가 본질적으로 유대교의 한 분파였다는 사실, 그리스도교 도그마가 그리스 철학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인간의 연대기가 성서적 연대를 훨씬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사실, 심지어 천체 현상을 징조(portens)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등 말이다. 다시금 이러한 논증들은 급진적 외부인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역사-신학적 사상은 많은 이들로부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안다―오히려 제도화된 주류 내에서 발전되었다. 성직자들은 이런 생각들을 교파 간(inter-confessional) 전쟁에서 치명적인 무기로 열정적으로 붙잡았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계몽주의’라 부르든 부르지 않든, 그 사상의 기원은 데카르트의 인문주의 배척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라틴어 기반의 인문주의적 학술 연구―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랍어 및 기타 근동 언어의 지식이 모든 것이었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즉 과학과 종교의 가짜 전쟁(종교인들 중에서도 성서 근본주의자들만이 과학 때문에 정말로 골치를 썩인다)이나 과학철학에서의 낡은 실재론자 대 구성주의자 논쟁(현대 과학의 예측력을 누가 진정 의문시하는가?)에는 현대에 있어 초기 근대 과학사의 가장 강력한 함의가 있지 않을 것이다. 17세기 지적 세계에서 근대성의 기원들을 찾는다면, 우리는 이를 과학만큼이나 인문학에서도 발견할 것이다. 흔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이 사실이 오늘날 인문학을 옹호하는 적절한 기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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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개정판
최준식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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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식의 <무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깊숙하게 박혀 있는 무교를 '한국인의 근본 종교'로 복권하고자 한다. 무당은 "이상한 귀신을 섬기는 한참 덜떨어진 기괴한 인간"이 아니며 무교는 단순히 점을 봐주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이 아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저자가 구사하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저자는 '무교'가 미신적인 무속(巫俗)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같은 나름의 체계를 갖춘 '종교'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무교는 어떠한 의미에서 종교인가? 무교에는 신(신령)과 인간(신도) 사이를 매개하는 무당이라는 사제가 있다. 신령, 무당, 신도의 세 요소는 굿이라는 무교의 고유한 의례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구조에서 무교는 신도가 무당이라는 특수한 사제 계급의 중개로 신령을 만나 도움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무당은 신도가 신령과 교통하기 위해 중개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사제에 해당한다. 즉,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무교는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기에 종교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한국 고유의 정신인 무교가 서양의 종교와 유사하기 때문에 미신이 아니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둘째로, 저자는 무교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우월한' 고등종교인 그리스도교와 불교 역시 '저열한' 미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무교나 그리스도교나 "종교 신앙은 일반적으로 다 같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는 무교, 그리스도교, 불교의 신앙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신의 성격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는 보살이라는 허구적 존재를 신봉하며 그것에게 자신의 문제 해결이나 복을 빈다. 이는 신적 존재에 의존하지 말고 이성적 가르침에 의거하며 살아가라는 붓다의 본래 정신에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신앙이다. 저자가 더 가혹하게 비판하는 그리스도교 역시 증명되지 못하는 신을 믿으며, 내용의 진리값이 확실치도 않은 성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불교나 그리스도교 역시 "신도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를 믿는다면, 동일한 이유로 무교만이 미신 취급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논리를 이렇게 가져가면, 차라리 무교(無敎)가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저자는 이러한 주장으로 무교(巫敎)를 옹호한다.

그렇다면 무교가 미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무교는 늘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교나 불교는 권력에 습합해 있었기 때문에 '미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 권력의 논리에 의해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가 결정되었고, 본래 한국인의 보편 신앙이었던 무교는 외래 종교인 유교와 불교에 의해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무교는 한국인의 정신적인 뿌리였으며 현대에도 성행하고 있지만, 늘 권력에 밀려 미신으로 폄하받았다. 고려 때부터 조정은 서서히 무당을 탄압하더니 조선 시대에는 본격적인 탄압 방안이 강구되었다. 식민지 정부와 박정희 정권도 대대적인 무당 탄압 정책을 펼쳤다. 무교가 힘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저자가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무교는 '어떤 중심 교리를 믿는다'와 같은 확실한 교리 체계"가 없으며 무당과 신도 사이에 잘 조직된 중앙집권적 체제 같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교는 더 밑으로, 더 주변으로 스며들어 간 것이지, 그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저자의 권력 환원론적 논리는 너무 진부하고 음모론적이다. 특히 무교와 다른 종교의 역사적 관계를 권력과 억압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 특히 그렇다. 한국 그리스도교사의 사례에 국한해서 보자면 1세대 선교사들은 한국의 무교를 미신으로 보는 관점을 끝까지 고수했지만, 이들의 태도는 제국주의적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권력을 지닌 이들에 의한 일방적인 억압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옥성득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을 인용해보겠다. "샤머니즘에 대한 한국인의 믿음과 마귀의 실존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 선교사와 한국인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접촉점을 제공했다. 북미 선교사는 귀신들림에 대한 한국인의 관점을 수용했고 한국인은 성령의 능력을 경험했다. 능력 대결에 따른 귀신 추방은 기독교의 우월성을 입증해주었다." 권력을 모든 변화의 변수로 본다면, 이러한 교류를 설명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권력에 의한 종교 대체 논리는 조선 시대 때 숭유억불 정책과 천주교 박해에도 그 종교들이 오늘날 많은 성도 수를 거느리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무교의 주변화와 무교의 생명력에 대한 저자의 주장에는 논리적 모순이 감지된다. 저자는 무교가 권력의 논리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서사를 짜지만, 정반대로 무교는 한국인의 근본신앙으로서 그 생명력을 잃은 적이 없었다. 저자는 무교가 쇠퇴한 역사적 현상과 한국인의 정체성 사이에 있는 이 간극을 "이중적인 태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를 공적으로는 무교를 내쫓으려 하면서 뒷문으로 다시 무교를 불러들이는, 위선의 발로만으로 볼 것인가? 동일한 역사적 현상을 저자와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 무교는 권력에 밀렸어도 결코 사라진 적이 없으며 오히려 불교와 그리스도교 등 다른 종교를 샤머니즘적 신앙 속에 흡수하여 존속했다.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서 가장 흥미로운 현상이 바로 이 부분이다. 어떠한 종교가 들어와도 무교는 이들과 이질감 없이 공존할 수 있다(나홍진의 <곡성>에서 가톨릭 사제와 무당이 동시에 한 영화에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것을 떠올려보라). 무교는 체계적 교리가 없어도, 오히려 그러한 교리가 없었기 때문에 무한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중적 태도로 지칭한 것을 그저 위선적 태도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무교와 다른 종교가 접촉하고 결합한 지점을 더 섬세하게 따져봐야 무교, 나아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이해하는 데 더 유익하고 건실한 연구가 될 것이다.

<무교>는 확실히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이해할 때 무교는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며 더 탐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한국의 무교는 모든 면에서 풍부하다. 앞으로 한국인들은 지금처럼 종교 제국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전통을 외래의 시각으로 폄하하고 부정하는 것을 하루빨리 청산하고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인들은 무교가 중심이 된 우리의 민간신앙을 연구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고 과감한 재정 투자를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그저 한국의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좋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태도로 귀결된 우려가 있으며, 실제로 저자가 그러한 오류에 빠져 있다. '외래' 종교인 그리스도교와 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서슴치 않는 저자지만, 무교에 대해서는 작은 흠결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신병을 영적 정화 과정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설득력이 없으며, 신내림을 거부하는 무당의 주변 인물이 죽는 '인다리 현상'이 무당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회의 책임이라고 지탄하는 주장은 논리가 극히 빈약하다. 저자는 다른 종교에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인다리 현상의 사례가 많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본인도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니 내놓는 다른 종교의 안다리를 거는 수준의 얄팍한 빈정거림이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입장에서 또 한 가지 비판을 더 해보자면, 그리스도교의 신을 믿는 것과 무교의 신을 믿는 것은 결코 같은 행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등 신과 저속한 잡종 신령의 구도로 이 문제를 풀어가며 여기서 어느 종교의 신이든 다 마찬가지의 존재라는 결론을 낸다. 그러나 진정한 핵심은 고등 신과 하위 신의 문제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로마의 다신교 신앙의 문제점으로 비윤리성을 지목했다. 로마의 신들은 인간에게 복종만을 요구할 뿐 윤리적 삶을 명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은 신자에게 올바른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다른 고등 종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무교의 신들은 "선악 개념이 불분명"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주지 않으며, 신자들의 삶을 책임지지도 않는다. 무당이 사제처럼 신과 인간을 매개하여도 그들이 신자를 보살핀다는 관념은 없다. 무교적 신앙은 있어도 무교적 삶의 방식은 없다. 그저 "금세리 인간들에게 큰 벌을 내릴 것처럼 외치다가도 신도들이 싹싹 빌면 곧 관대한 신으로" 바뀌는 비일관적인 신령들일 뿐이다. 무교적 신앙이 위험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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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 수업으로 읽었던 책(몇 달만 빨리 나왔다면...)

그래서 조금만 자세히 소개하자면

출판사는 이 책을 이스라엘-하마스 문제의 기원에 대한 책으로 홍보하는 듯하지만, 사실 이 책은 브렉시트를 전후로 하여 영국에서 강해진 영제국에 대한 향수를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겠다는 더 큰 목표를 가지고 쓰였다. 영제국과 케냐의 관계,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 등으로 유명한 저자는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 영국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강압과 폭력의 역사를 들추어낸다. 한국인으로서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잘 안 와닿을 수 있지만, 실제로 영국에서는 영국 덕분에 그나마 영국의 식민지들의 상황이 개선될 수 있었다는 나이젤 비거(Nigel Biggar) 같은 신학자의 개소리가 꽤 통용되고 있다(한국에서는 일본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될 수 있었다는 이영훈 류의 주장을 떠올리면 될듯하다).

엘킨스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liberal imperialism)라는 개념을 통해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한다는 명분으로 식민지에서의 초법적 폭력과 수탈을 정당화한 영국의 모순적 행태를 고발한다. 그러한 이중적 행태에 대한 영제국의 도덕적 파탄과 폭력으로 가득 찬 이 책은 일관된 내러티브로 긴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서술했다. 그래서 매우 술술 읽힌다는 큰 장점이 있으며, 영제국사의 권위자이자 영국과 케냐의 재판에 실제로 참여하기도 한 인물이 쓴 책이라는 점에서 영제국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다만 목적의식이 워낙 뚜렷하고, 엄밀한 학문적 분석보다는 서술에 치중되어 있어 비판적으로 보자면 저자의 서술에서 의문이 가는 지점들도 여럿 있다(Lauren Benton이라는 또 다른 저명한 제국사/법제사 연구자는 실제로 이 책에 매우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 그렇지만 한번쯤 일독할 가치는 있으며, 세계사에서 안 좋은 짓은 영국이 다했다는 농담 섞인 말이 얼마나 사실인지 확인해볼 수 있다.

엘킨스와 정반대되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저자가 책에서 비판하기도 하는 학자 중에 니얼 퍼거슨이 있는데, 한국어로도 책이 번역되어 있다. (차마 권하지는 못하겠다) 알라딘 '책 속으로'에 있는 문장만 봐도 엘킨스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마거릿 맥밀런, <평화를 끝낸 전쟁: 1914년으로 향하는 길>, 책과함께

지난 2014년 서양에서는 1차 세계대전 개전 100주년을 앞두고 전전 유럽을 새롭게 조명하는 굵직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마거릿 맥밀런의 <평화를 끝낸 전쟁>이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 같은 서평매체에서는 아예 그런 책들만을 추려서 특집호를 내기도 했다. 이 경쟁장에서 새로운 표준 서사라는 평가를 받은 책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이지만, 마거릿 맥밀런의 책도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도 다행히 같이 비교해볼만한 책이 몇 권 출간되었다.













애덤 스미스, <북메이커: 책 제작자 18인의 생애로 읽는 책의 500년 변천사>, 책과함께

서책사와 관련된 책이 나오면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이 책은 일단 도서관에 신청했다.

이 책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책의 문화사를 연구한다는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더 경력을 검색해봐야 할 듯하다. 책 내용 자체가 매우 흥미롭다. 단순히 책 제작의 역사를 무미건조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역사적/문화적 의미까지 짚는 역동적인 서술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각 챕터마다 한 인물에 집중하는 식으로 설명을 전개하는 듯한데, 책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지니게 되면서 각 행위자가 어떤 고민을 하고 무슨 역할을 했을지도 알 수 있다면 꽤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 같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서책사의 대가인 앤드류 페티그리의 책들이 있다(난 <루터, 브랜드가 되다>만 읽어봤는데, 루터를 인쇄업과 관련해서 분석하는 이 책도 추천할 만한 책). 최근 한국에 자주 번역되어 나오는데, 별다른 주목을 못 받는 게 아쉽다.




<옥스퍼드 책의 역사>는 Oxford handbook 시리즈를 번역한 것인데, 이 시리즈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한 꼭지씩 담당해서 집필하는 개설서라 하나 장만하면 두고두고 볼 만하다. 남아시아, 동아시아에 대한 내용도 있다는 게 이 책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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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비트는 근대적 역사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섭리에 대한 믿음이 근대의 진보이념으로 변모하였다고 주장한다. 역사철학이란 근대인이 신학적 원리를 경험적 사실 일반에 적용한 이념이었다. 뢰비트 자신의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철학은 "역사적 사건과 결과를 연결시키고 궁극적 의미와 관련지어 주는 원리를 실마리 삼는 세계사에 대한 체계적 해석"(die systematische Ausdeutung der Weltgeschichte am Leitfaden eines Prinzips, durch welches historische Geschehnisse und Folgen in Zusammenhang gebracht und auf einen letzten Sinn bezogen werden)이다.

이러한 뢰비트의 규정에 따르면 역사철학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의미를 묻는 지적 활동이다. 이러한 의미의 역사철학은 신학에서 도출되는데, 무엇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유대-그리스도교적 사유 틀 속에서 제기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목적(telos)이다. 이 목적은 사물 외부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사물이나 사건, 생명체는 그 자체로서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지만, 그것이 존재하고 만들어진 목적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다(연장선상에서 뢰비트는 독일어 Sinn이 '의미', '목적', '목표'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역사의 의미를 묻는 것은 의미가 부재한 사태의 나열일 뿐인 과정을 그 목적에 따라 인과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이거니와, 뢰비트의 지적대로 역사철학이 역사적 사건의 궁극적 의미를 찾는다면 이는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종말론적 미래의 지평에서 역사의 최종 목적을 앎으로써 역사의 전체 과정을 사유할 수 있다. 역사의 궁극 목적이 역사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다.

뢰비트는, 이렇게 역사를 그 최종 목적에 따라서 성찰하는 목적론적인 역사철학은 그리스도교적 어휘와 사상 구조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고대와 그리스도교는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구분되었고, 그에 따라 역사를 사유하는 방식도 정반대였다. 고대의 시간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마치 계절이 돌고 돌듯이 동일한 현상이 무한히 회귀하고 순환함을 전제한다. "자연적 세계에 대한 관조(Anschauung)가 지배하고 있던 이러한 지적 분위기에서는 일회적이고 독자적인 역사적 사건의 세계사적 의의 따위가 존재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들[고대 그리스인]이 시종일관 문제삼았던 것은 '우주의 이치'(Logos der Kosmos)였지 '우주의 지배자'(Herrn der Geschichte)가 아니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 폴리비오스의 역사서술에도 반영되었다. 그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 제일전제는 "과거란 영속적인 원천으로서 그 자리에 있다"(wird die Vergangenheit als immerwährender Ursprung ver-gegenwärtigt)는 원리다. 과거에 일어난 사태는 현재, 당연히 미래에도 동일하게 반복될 것이며, 따라서 과거에서 시간적으로 뒤에 일어날 일을 유추할 수 있고, 역사란 미래의 궁극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종말론적 도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우주의 이치가 실현되는 장이다.

유대-그리스도교적 사유는 "미래지향적"(futuristisch) 역사관을 통해 '역사'(historein)의 고전적 의미를 전복했다. 모든 역사란 "구속사"(Heilsgeschehen)다. 최고신인 야훼-하느님의 세계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 세계관은 세계의 종말을 사유하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인은 역사의 단초를 상상하고 종말을 예기하면서 역사의 처음과 끝이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을 그리며 나아간다고 여긴다. 신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이 역사는 신의 뜻의 완성이라는 궁극 목적을 향한 도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과거는 영속적으로 반복되는 원천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비적 과정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엮는 필연적인 우주의 법칙이 없다는 점에서 미래는 과거와 단절되어 있으며 미래는 결코 예측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예언자가 미래를 예언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폴리비오스처럼 고정불변의 법칙을 찾는 것과 다르다. 예언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확정되지 자연적 운명에 따라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어떠한 보호와 인도도 거부하며 스스로의 의지와 신앙을 통해 종말론적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이자 진보의 이념이라는 세속화된 형태로 근대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사고방식이다.

세속적 진보에 대한 믿음은 섭리적 믿음에서 변모된 것으로, 근대인은 신학적 원리를 진보로 세속화하여 이 원리를 경험적 사실 일반에 적용함으로써 역사철학을 전개했다. 진보에 대한 관심은 "메시아적 일신론"의 계보 위에 있고, 진보적 믿음 자체가 목적론적/종말론적 도식 내에서야 가능한 관념이다. 토크빌, 슈펭글러, 토인비가 그리스도교적 신에 대한 믿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할지라도 "그 일이 과거에 어떻게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세속화된 종말론, 즉 근대의 진보적 역사관을 표방하고 있다.

뢰비트는 근대적 역사철학의 그리스도교적 기원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진보에 대한 세속적 신앙이 갖고 있는 신학적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렇게 세속화된 이념과 신학 사이의 실체적 동일성과 연속성을 드러내고자 뢰비트는 책에서 다루는 중요한 사상가들과 문헌들(부르크하르트, 마르크스, 헤겔, 콩도르세와 튀르고, 콩트, 프루동, 볼테르, 비코, 보쉬에, 요아킴, 아우구스티누스, 오로시우스, 성서)을 시간역순으로 배열하는 구조를 채택했다. 이로써 오늘날의 친숙한 이념이 점차 낯선 사상으로 바뀌어가면서도 오늘날의 사상이 어디서 유래하고 변천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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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르크 프라이, <요한복음과 만나다>, 비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내가 원하던 성서 입문서이다. 입문서라면, 어떤 책의 내용을 쉽고 재밌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텍스트 형성사와 사상사적 위치, 읽는 법, 오늘날에 주는 의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꼼꼼한 해설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 요소들의 조화를 잘 이루어야 좋은 입문서인지 아닌지가 판가름난다고 본다. 성서의 경우 텍스트 형성사만 강조하면 본문을 조각조각 해체하고 분석하여 텍스트를 하나의 전체로서 읽을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역사적 해석을 고려하지 않으면 자의적 텍스트 읽기만 남게 될 것이다.

외르크 프라이는 바로 그러한 두 극단을 피하고, 때로는 (좋은 의미로) 학자답게 꼼꼼하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요한복음의 의미를 해설해주고 있다. 총 3부 구성을 취하는 이 책은 1부에서 요한복음 저술 연도, 자료 등 역사적 문제를 다룬다. 외르크 프라이는 요한복음의 일관된 문체에 주목하면서 요한복음이 한 명의 저자가 쓴 책일 가능성을 주장하고, 2부에서는 요한복음을 톺으면서 이 책의 신학적 특징을 밝혀 보인다. 제3부는 요한복음을 읽는 법을 간략하게 제시한다. 입문서로 갖추어야 할 요소는 다 갖춘 셈이다.

제2부가 분량으로나 내용으로나 이 책의 백미였는데, 다른 세 복음서와 구분되는 (때로는 이것들에 비판적이기까지 한) 예수에 대한 요한복음의 이해를 통해 부활 신앙, 성육신, 십자가 신학과 같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문제에 요한복음이 어떠한 주장을 하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 달리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라고 가장 분명하게"(p. 101) 말하고 또 증명하는 "가장 대담한 신학자"(p. 108)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신학적 의의를 강조한다.

"요한이 말하는 부활 신앙은 예수가 진실로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임을, 그의 신적 정체성과 위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제자들은 부활절이 지나고 성령의 가르침을 통해 이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부활절 계시를 통해 요한은, 제자들은, 그리고 요한복음을 읽는 이 모두는 예수가 실제로 누구인지 이해하고, 그의 얼굴과 이야기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외르크 프라이는 이러한 신학적 특징과 의의를 꼼꼼하게 주석 달듯이 차근차근 분석하면서 설명한다. 제3부는 1, 2부에 비하면 독해법에 대한 설명이 다소 소략하다는 인상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그럴 뿐 전체적으로 묵직한 주제들을 평이하고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서사 구조와 수사적 표현을 통해 사복음서가 그리는 서로 다른 예수의 초상을 해설한 리처드 버릿지의 <복음서와 만나다>와 같이 읽으면 요한복음과 마르코, 마태오, 루가 복음을 더 입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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