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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평점 :
이 책은 저자가 인터넷에 연재한 서평문을 엮은 서평집이다. 이 책의 다소 난삽한 서문을 통해 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책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보자. 정희진에게 책이란 "정치적으로 치열"하고 "자기 내부의 모순까지 껴안는 명확한 당파성의 소유자"이다. 한마디로, 책이란 명확한 정치적 입장연관성을 갖는다. 이러한 책에 대한 정의는 저자가 책을 고르는 기준과 저자의 독서 행위를 짐작하게 한다. 저자는 책을 고를 때 "관점"을 중요시하고, "'주류'의 관점 밖에서 쓰인,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는다. 그런 책은 "지적 자극"을 안겨다주어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주류'란, "서울 출신, 남성, 서양,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건강한 사람, '학벌 좋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대체 어느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가 하면, 정확하게 규정한 부분이 없어 알기 어렵다. 한국 사회의 주류를 벗어난 관점이라고 보면 좋을까? 이런 규정이 없다는 것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상은 '어떤 책을 읽은 것인가'라는 교양 쌓기의 수단으로서의 공부의 기본적인 주제이다. 저자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서문에 이어지는 "좁은 편력"에 따르면, "책을 읽은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습득이고, 하나는 지도 그리기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책의 내용을 익히고 내용을 이해해서 필자의 주장을 취하는 것이다.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 후자는 책 내용을 익히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는 읽고 있는 내용을 기존의 자기 지식에 배치하는 것이다." 저자는 "객관적, 일방적, 수동적"인 습득보다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인 지도 그리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입장연관성을 가지는 책을 읽을 때 독자도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책의 위상과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여 나의 입장과 저자의 입장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독서할 때 중요하다. 이때 주의할 것은 책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느 책이든 한계가 있음을 인지할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독서론을 이렇게 길게 정리한 내 서평은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습득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자는, '지도 그리기'가 가능하려면 먼저 '습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독서는 먼저 최대한 객관적으로, 저자의 언어를 통해 저자의 입장에서 책 내용을 요약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저자가 "자기만의 프레임"을 갖게 된 것도 그 이전에 쌓였던 공부와 독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쌓고 유기적으로 지식 체계를 형성해 나가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만 그려서는 안 된다. 저자는 독서가 한 권의 책이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습득이 없으면 책은 통과만 하고 나갈 수 있다. 저자는 책 내용 요약을 불필요하다고 보지만, 그런 요약에 사유를 발달시키는 힘이 있다.
여기서 하나만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에 수록된 저자의 서평을 다 읽지는 않았고, 내가 읽어보았거나 관심 가는 책의 서평만 읽었다.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홉스의 <리바이어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니체 <선악을 넘어서>, <신약성서>, <극단의 시대>, <님의 침묵>, <이상 문학 전집>, <거짓의 사람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등등. 저자의 주 분야인 여성학과 문학 서평에서는 군데군데 인상적인 통찰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분야, 특히 고전 서평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개념과 용어를 엄밀하게 규정하고 최신의 논의를 수용하여 자신의 공부를 진척시키는 독서가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최신의 논의가 무조건 낫다는 속물적 연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구가 계속되면서 이전의 논의와 이해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래서 역사 책이나 사회과학 서적은 20~30년 이상 된 책은 이론 성격이 강하거나 그 분야의 고전이 아닌 이상 오래오래 소중히 간직할 이유도 읽을 이유도 특별하게 없다. 그리고 고전 번역과 관련해서는 더 나은 번역본이 있으면 그것을 읽어야 한다. 홉스 <리바이어던>을 읽고 무엇인가 진지하게 말하려면 진석용 역을 읽어야 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무엇인가를 논의하려면 박상섭 역이나 곽차섭 역, 강정인/김경희 역 셋 중 하나를 읽는 것이 기본이다. 저자는 1990년에 나온 중역본으로 보이는 서적을 인용한다. 저자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도 박찬국 역이나 김정현 역을 빼고 1983년에 출간된 중역본을 읽는다.
치졸하게 번역본으로만 뭐라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논의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문장이 많았다. 가령, 홉스 <리바이어던> 사족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대영제국의 지식인 홉스에게 '식민지는 국가의 번식으로서 국가가 출산한 자녀'였다." '식민지'와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 '제국'을 거론한 듯한데, 토머스 홉스의 역사적 배경으로 '잉글랜드 커먼웰스'나 '잉글랜드 내전'을 빼고 '대영제국'을 언급한 것이 과연 타당한가 싶다. 홉스의 정치철학이 '제국'이라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깊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의문. (혹시나 나의 생각이 틀렸다면 누군가 알려주시길 바란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서평에서는 "마키아벨리는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유토피아를 꿈꾸던 청렴한 지식인이었다"라고 쓴다. 마키아벨리가 청렴한지는 그 자신과 신만이 아실테고, 그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꿈'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마키아벨리의 유토피아론은 무엇일까? 마키아벨리는 꿈 속에서 두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첫 번째 무리는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었고, 두 번째는 지옥으로 가는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타키투스 등 고대의 위대한 저자들의 영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고대의 저자들과 정치를 논하겠다며 지옥에 있고 싶다고 했다. 곽차섭은 이 꿈이 "고대인의 영광과 위대함...이 자신의 시대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키아벨리의 희망을 표현"했다고 해석한다.(곽차섭 역, <군주론> 해제 참조) 그런데 이를 유토피아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유토피아론이 있던가? 회페의 <정치철학사>나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을 봐도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저자는 저 내용에 어떠한 문헌적 근거를 댈 수 있을까?
그리고 저자는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요약하여 한국에 적용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다룬 글에서 정희진은 이렇게 쓴다. "벤야민은 탈식민을 외치고 있다." 이는 벤야민이 한 말이 아니라, 슈미트의 독재정론을 숭모하여 모조한 '비상사태 테제'를 저자가 확장하여 얘기한 것이다. 그리고 '비상사태론'으로 한국 정당들의 '비상'대책위원회를 비판하는 것은 벤야민 논의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여 적용했다기보다는 벤야민을 외피로 자신의 얘기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습득을 등한시한 지도 그리기의 폐해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이미 심드렁해진 나는 목차를 펴보고 관심 가는 책 제목을 따라 아무 글이나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님의 침묵> 서평에서 "모든 예술은 남겨진 자의 고통에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그마저도 대충 읽게 되었다. 이런 책임 없는 문장은 저자에 대한 신뢰도만 깎을 뿐이다.
인터넷에 연재된 짧은 글에 너무 많은 것을 지적하는 듯 싶지만, 잡글과 논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람의 글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정희진의 책을 더이상 읽거나 참조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책의 제목은 '정희진처럼 읽기'이나 이 책은 정희진처럼 읽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