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봄>은 12.12 사태라는 한국현대사에서 중요한 순간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 수작이다. 극은 전두광(황정민)을 위시한 하나회 세력들의 쿠데타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이태신(정우성)의 대립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12.12를 쿠데타를 성공시키려는 쪽과 저지하려는 쪽의 대립뿐만 아니라, 서로 정반대되는 가치관을 지닌 인물상의 대립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전두광은 권력욕을 의인화하면 딱 저런 사람일 것 같은 인물이다.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만 살아있는 듯하며, 매우 강압적으로 부하들을 지배하려 든다. 이러한 권력욕과 우두머리 기질이야말로 전두광의 동기를 설명해준다. <서울의 봄>에서는 전두광이 노태건(박해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이 명령 내리기를 좋아하는 거 같지? 사실 인간이라는 동물은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위 대사는 한마디로 야비함이며, 이 야비함이야말로 김성수가 창조한 악역들을 관통하는 원리다. 김성수의 전작 <아수라>에서도, <서울의 봄>에서도 악역들은 약한 상대는 영혼까지 지배하려 들면서도 강한 상대에게는 한없이 비굴해진다. 반대로 약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강자에게 빌붙는 유형의 인물들이다. 복종을 바치는 대상이 콩고물을 줄 수 없단 게 확인되면, 언제라도 그를 배신할 수 있는 잔챙이 중의 잔챙이들인 것이다.
<아수라>의 박성배는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 폭력을 쓰는 인물로 봐야 한다. 박성배가 하는 폭력적인 행동은 부하들의 기를 제압하려는 목적인 경우가 많다. 전두광의 강압적인 언행 역시 위와 같은 원리의 연장선상이다. 더 높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수컷들의 무리에서 남성성과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 전두광이다. (차이점은 박성배가 이미 권력에 자리에 올랐다면, 전두광은 권력자에 올라가려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흡사 동물의 왕국을 연상시킨다. 그건 하나회의 구성원들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유리해지면 '전 장군'이라 부르며 전두광에게 아첨을 부리면서도 상황이 불리해지자 전두광을 탓하고 그에게 해결책을 강구하라고 닦달한다. 비굴함의 극을 보여주는 이들은 좋게 말해도 엄살 피우는 아이, 더 직관적으로는 원숭이 무리를 닮았다. 전두광은 그러니 원숭이 무리의 알파메일 쯤 되는 셈이다.
이태신은 가치관, 행동 동기, 부하들을 대하는 방식 모든 면에서 전두광과 정반대다. 전두광이 욕망의 화신이라면, 이태신은 어떠한 외압이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대의에 따라 움직이는 참군인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전두광이 주요 요직을 독차지할 동안에, 이태신은 수경사 직 제안을 자진해서 거절한 것이 이 인물의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정우성이라는 배우 자체가 가지는 선한 이미지가 이태신이라는 캐릭터와도 완벽히 부합하여 인물의 감정에 설득력을 더한다. (배우가 동일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이태신은 <아수라>의 한도경과도 닮은 점이 있는데, 이태신이 전두광 같은 인물에게 굴복하면 한도경처럼 될 것 같다.)
성격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측면에서도 전두광과 이태신은 대비된다. 김성수는 매우 뚜렷하게,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똑같은 상황을 반복하여 두 인물이 어떻게 다른지를 묘사한다. 한 예로, 부하가 든 총을 자신의 가슴에 겨누며 자신을 쏘라고 한 장면을 보자. 이 행동을 전두광이 했을 때는, 그저 부하를 조종하여 강압적으로 자신의 명령을 따르게 하려는 의도밖에 없다. 반면에 같은 행동을 이태신이 했을 때는, 자신의 가치와 대의를 막고자 한다면 자신을 쏠 수밖에 없다는 의도가 있다. 다시 말해 전두광이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권력자라면, 이태신은 사상으로 상대를 감화하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과 이태신의 갈등은 사악한 욕구만을 좇아 움직이는 야만적인 인물과 올바름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 간의 대립이었으며, 그 때문에 전두광 세력의 승리가 더욱더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이태신의 패배가 그 인물 자체의 문제나 전두광의 압도적인 실력 때문이 아니라 제자리에 있어야 하나 제 역할을 다하지 않은 인물들의 무능 때문이라는 점이 더 분노를 자아낸다. 이러한 캐릭터와 인물 갈등이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반 전두광 세력의 의로움을 부각하려는 일부 장면은 지나치게 촌스러웠다(특히 정해인이 연기한 배역과 관련된 장면들이 그러했다). 이런 단점들에도 감독은 훌륭한 연출로 단점을 상쇄할 만큼 긴장감 있고 흡입력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의 결말을 안다면 그 긴장감조차 통한과 자조 섞인 허탈감으로 변하게 될 뿐이었다.
같이 볼 만한 영화들
12.12의 배경이 되는 사건의 막후를 장르적으로 그린 <남산의 부장들>
12.12.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택시운전사>
이렇게 '영화로 보는 한국현대사'도 좋을 것 같다.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 대통령 역을 맡았던 이성민 배우가 <서울의 봄>에서는 정상호가 되었단 게 재밌는 포인트.
김성수 <아수라>
추천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느와르 장르적 재미는 충분하고, 황정민의 연기는 이 영화에서 더 탁월했다.
<서울의 봄>하고도 비슷한 부분이 있어, 느와르 장르 팬이라면 같이 봐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