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과학이 이토록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고, 그것도 적지 않은 재정적 권력(예컨대 리고[LIGO]의 총 비용은 약 6억 2천만 달러에 달한다)까지 가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이 사건들이 일어난 것만큼 오래된 해석이자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지해온 대답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1492년 이전까지, 문해력을 가진 유럽인들은 고전 시대의 권위 있는 텍스트를 통해 우주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이 텍스트들에 따르면 변화는 달 아래의 세계(sublunary world, 이를 넘어가면 불변의 천상의 영역이었다)에만 국한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대척점(antipodes) 없는 지구가 있었다. 이러한 지식을 전파하던 기관(institutions), 주로 대학은 경직된 라틴어 현학의 중심지였다. 그러던 중 아메리카가 발견되었고, 책이 아닌 경험에서 오는 지식을 향한 새로운 존중이 일어났으며, 이는 공식 학문 기관 밖에서 활동했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의 발견으로 절정을 맞이했다(한편 그 기관들은 비극적이게도 구시대의 권위에 얽매여 있었다). 이른바 ‘과학혁명’은 점진적이지만 확실하게 합리주의(raionalism)의 시대를 열었고, 이는 중세 세계의 미신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고대 문헌의 권위 맹신을 몰아냈다.
이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이 데이비드 우튼(David Wootton)의 야심차고 예리하며 논쟁적인 신간에서 제시된다. 그러나 혁명을 말하기에 앞서 무엇이 혁명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하며, 무엇인가를 경직되고 고루하다고 치부하기에 앞서 과연 상황이 그 정도로 나빴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과학혁명 이전의 과학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리고 서구 세계에는 과학 발전의 용광로가 될 만한 어떤 고유한 조건이 있었던 것일까?
과학과 유사한 어떤 것의 기원들이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특히 이들은 의학, 수학, 천문학의 기법과 관찰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룩했다. 바빌로니아의 천문학과 수학은 상당히 발전하여 기원전 1천년경까지는 달의 월식 예측이 가능할 정도였다(이들의 천문학은 대부분 점성술적 목적을 위해 발전한 것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천문학(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은 기원전 3~2세기 헬레니즘 그리스에 전해졌고, 그 유산은 향후 2천년간 유럽 천문학 사업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자연에 대한 사변이 기원전 6세기 이래로 한 그리스 집단에 의해 혁신되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현대 역사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지만, 이오니아의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소수의 사상가 집단이 이전 세대는 알지도 못했고, 또 이전 세대를 직접 비판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는 데는 학계의 대체적인 합의가 있다. 그들은 세계의 형태와 구성, 즉 하나의 물질(substance)로 이루어졌는지 여러 물질로 이루어졌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떠올린 답이 현대의 관점에서는 공상적이고 비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자연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가 지진이나 번개 같은 현상을 신들의 개입으로 설명했다면, 기원전 6세기 탈레스는 지구가 물 위에 떠 있으며 지진은 파동의 떨림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서로의 견해를 알고 비판하기도 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믿었고, 아낙시만드로스는 그것이 무한한 원초적 덩어리(아페이론, apeiron)라고 했으며,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보았다. 신화를 지어낸 앞선 이들과 달리, 이 철학자들은 각자의 설명이 상호 배타적이라는 점을 인식했고, 하나의 설명이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토론의 과정이 필요함을 인식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지적 탐구는 실용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탐구는 탐구 자체를 위해 수행되었거나, 관조의 삶(life of contemplation)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는 신념에서 나왔다. 이러한 자연주의로의 전환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 결과는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현대과학의 핵심을 이루는 두 가지 방법론적 원칙을 발전시켰다. 첫째는 수학을 자연 현상 이해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는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이 개척했고,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Eudoxus of Cnidus, 기원전 408–355)의 천문학 모델에서 절정에 이른다. 에우독소스는 행성들이 주기 중 특정 시점에서 보이는 역행 운동 등 복잡한 천체 궤도가 복잡한 동심원 모델로 설명될 수 있다고 제안했는데, 이 모델은 케플러 시대까지 많은 수정을 거치며 살아남았다. 두 번째 핵심 발전은 때로는 매우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경험적 연구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예는 우리가 히포크라테스 저작집(Hippocratic Corpus, 현대인과 달리 히포크라테스 자신은 이 저술들 알지 못했다)이라고 부르는 의학저술로, 대부분 기원전 5세기 말~4세기 초에 작성되었다. 이 저술들은 철학자들의 저술보다 훨씬 실용적이지만, 질병과 같은 현상의 자연성(naturalness)을 주장하려는 열망을 공유한다. 예컨대 「신성한 병에 대하여」(On the Sacred Disease)라는 논고는 간질을 설명하면서 신을 끌어들이는 해석을 반박한다. 이후 4세기에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동물학 서적에서 특히나 철학적·의학적 접근을 결합했는데, 이 저술은 놀라운 사실 수집의 산물로 500종 이상의 동물이 언급되고, 약 120종의 어류와 60종의 곤충도 포함되어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학교를 세웠고, 일부는 오래 지속되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첫 번째 후계자들인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와 스트라톤(Straton)이 운영한 리케이온(Lyceum)에서 이루어진 것 같은 연구 프로그램 같은 것을 지속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제도적 혁신은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는데, 기원전 280년경 세워진 무세이온(Museum, 현대적 의미의 박물관museum이 아니라 종교 성지, 도서관, 철학 학교 등을 동시에 겸한 공간이었다)은 후원에 기반한 고등 학문 기관의 최초 사례로, 후대에는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같은 로마 황제들이 아테네 등지에 철학 강좌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이러한 기관이 근대적 대학으로 발전했을까?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철학을 수용했고 기술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물레방아, 수력 톱, 심지어 소에 의해 움직이는 외륜선까지), 추상적인 자연 철학, 수학, 천문학에는 여가 활동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 점은 그리스적 성취가 얼마나 우연적이며, 장기적인 기관 안에서 전승되지 못할 경우 사상과 탐구 방식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위에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로마가 무너지고 도시 인구가 줄어들자, 과학 관행은 제도적 기반과 함께 쇠퇴했다. 이것은 종종 주장되듯이, 불관용적이고 반지성적인 그리스도교의 잘못은 아니었다. 수도원 교육이 과학적 문제에 집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해도 여전히 때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했는데, 예컨대 6세기~9세기 아일랜드 수도원에서는 수학이 융성한 것이 그러하다. 그리스의 과학 탐구 전통은 상당히 약화되었고, 주된 원인은 (다소 의아하게도) 헬레니즘 사상의 자연스러운 계승자인 비잔틴 제국에서의 체계적인 과학 활동의 부재 때문이었다.
결국 그리스 과학 전통을 되살린 것은 이슬람이었다. 이는 주목할 만한 발전이다. 문해율이 낮고, 종교적 계시를 통해 연결된 부족 사회가 어떻게 단 몇 세기 만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번역 운동과 학문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을까? 결정적 계기는 8세기 우마이야 왕조가 아바스 왕조에 의해 전복된 사건이었다. 이로써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 부족주의 모델은 제국적 이념과 이에 수반되는 국제적 관료제로 대체되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정복지의 엘리트들—페르시아인, 베르베르인, 시리아계 기독교인 등—이 새 수도 바그다드(762년 건설)로 모였고, 종이 제조라는 중국의 기술이 도입되었다. 이 종이는 파피루스나 양피지보다 훨씬 가볍고 튼튼하며 저렴했다.
이후 300여 년간 그리스의 거의 모든 과학 문헌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슬람 과학의 목적은 그리스인에 비해 덜 추상적이었고 더 실용적이었다. 그들이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가장 큰 진전을 이룬 분야는 수학(회계 목적 포함), 천문학(점성술과 거의 분리되지 않음), 의학이었다. 알바타니(al-Battani)와 같은 이슬람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발견과 방법을 개선했다. 이후에 그들은 현대의 연구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관측소를 세웠다. 가장 유명한 관측소는 오늘날 이란 동북부에 위치한 마라가(Maragha)에 있는 것으로, 여기서 14세기 이븐 알샤티르(Ibn al-Shatir)가 달과 행성 모델이 개발했으며,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sbus, 1543)에 수학적으로 동일한 형태로 등장한다. 울루그 베그(Ulugh Beg, 1394–1449)의 별자리 목록 『지즈 이 술타니』(Zij-i Sultani)는 저술된지 200년이 더 지나서도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원들 사이에서 여전히 수요가 있었다. 광학 분야에서도 탁월한 성과가 있었다. 10세기 말, 아부 사드 알알라 이븐 사흘(Abu Sa‘d al-‘Ala’ ibn Sahl)은 볼록 렌즈와 곡면 거울 실험을 통해 굴절의 법칙을 사실상 발견했다. 300년 후 카말 알딘 알파리시(Kamal al-Din al-Farisi, 1267–1319)는 물을 채운 유리 구슬로 무지개 생성 조건을 실험하여, 무지개가 반사뿐 아니라 굴절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잘못 알려졌던 이론을 수정한 것이다).
12세기 유럽의 위대한 ‘르네상스’는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이 가장 많았던 지역, 예컨대 11세기 말 재정복된 톨레도(Toledo)나 캄파니아(Campania)의 살레르노(Salerno)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거의 전적으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과학 문헌과 그에 대한 아랍 주석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서구인들의 가장 치열한 노력은 관측 천문학이나 동물학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을 정교화하는 데 집중되었다. 물론 니콜 오렘(Nicole Oresme, 1320경–1382)의 운동학 연구처럼 갈릴레이가 이후 활용한 중요한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16~17세기 들어 일반적이게 된 스콜라주의 자연철학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정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중세 유럽이 하나의 진정한 혁명적인 혁신, 오늘날까지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을 형성한 혁신을 탄생시켰다. 바로 대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