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사 1 -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 한국경제사 1
이영훈 지음 / 일조각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인들은 지적 공백상태에서 서구의 학문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수입하였다. 지적으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 경험 자체가 빈약하고 단순하였다... 이같은 현실적 제약에 눌려 남한의 역사학자들은 알게 모르게 인간 사회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으로 그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정립한 한국사상 韓國史像에 공감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4


  이영훈(李榮薰, 1951 ~)의 <한국경제사 1 :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는 저자 자신이 구분한 4개 시대 중 제1시대(기원전 3세기 ~ 기원후 7세기), 제2시대(8~14세기), 제3시대(15~19세기)의 3개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 시기의 변곡점들은 고전 출현, 삼국통일, 조선건국과 일본에 의한 강점(저자에 따르면 일본에 의한 근대문명 이식)이다. 한국경제사지만 이 책의 주된 분석 대상은 조선시대이며, <한국경제사 1>에서의 초점 중 하나는 노비제 국가 조선이다.


 새로운 연구는 14~17세기가 한국사에 있어서 노비제의 전성기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 이전의 삼국, 통일신라, 고려 시대에 노비의 인구 비중은 그리 크지 않으며, 아무래도 10% 미만이었다. 그에 비해 15~17세기의 노비는 전체 인구의 30~40%에 달하였다. 그리고 노비의 일부분은 세계사적으로 노예의 범주에 속하였다. 노비 인구의 팽창은 생산자 대중에 가해진 인격적 예속이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6


 저자는 15세기의 시대 변화에 주목한다. 앞선 시대인 고려시대 이전 사회의 특성이 공동체 중심 사회라면,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로 변화했고 그 과정에서 높은 조세(역)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이들이 노비로 전락하면서 시대적 단절이 야기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5세기는 커다란 전환기였다. 토지가 개인의 재산으로 바뀜에 따라 사회가 신분관계로 분열하였다. 그 이전의 신라~고려 시대는 농민, 수공업자의 생산활동, 국왕/귀족의 수조 收租활동, 사원을 중심으로 한 종교활동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왕도에 집결한 귀족, 관료, 중앙군의 공동체가 지방의 군현공동체를 지배하는 체제였다. 그 공동체사회가 15세기에 이르러 각 사람이 양반, 상민, 노비라는 신분으로 구분되고 대립하는 신분제사회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앞서 강조한 대로 인구의 13~40%가 노비로 떨어졌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47


 그렇다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단절을 가져온 계기는 무엇인가. 저자는 '정호(丁號)'에서 그 차이를 찾는데, 고려시대의 정호 제도가 토지와 인구에 대한 역(役)이 부과되었다면, 조선시대의 역은 오로지 인구에 대한 부과라는 점에서 일종의 퇴행이 일어났다고 파악한다. 


 고려의 정호는 토지와 인구의 구조적 결합이었다. 그에 비해 15세기 초의 호는 토지와 무관한 순수한 인적 구성이었다. 전술한 대로 조선왕조는 양전을 행함에 있어서 토지를 5결의 규격으로 구획하고 거기에 천자문으로 정호 丁號를 달았다. 그 과정에서 8결 또는 17결을 표준적 규모로 했던 고려의 정호가 크게 해체되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48


 1468년, 보법을 시행한 지 4년 만에 세조가 사망하였다. 이후 양반관료들은 세조의 개혁을 하나씩 취소하거나 수정해 갔다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는 양반관료의 이해관계를 각인하는 형태로 변질되어 갔다. 1471년 토지 5결을 1정으로 간주하는 보법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취소되었다. 이로써 토지와 인구의 구조적 결합으로서 정호를 기초로 했던 고려왕조의 백성 지배체제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조선왕조는 개별 호에 대해 호가 보유한 토지와 무관하게 호의 인정 수를 기준으로 군인을 선발하는 순수 인신지배체제로 전환하였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56


 토지와 인구에 대한 역 부과가 아닌 인구에 대한 역 부과가 극심한 신분의 양극화를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토지를 고려하지 않은 역 부과는 대규모 토지, 농장을 소유한 계층에게 상대적으로 세부담을 경감시켜주었던 반면, 토지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과도한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특히, 역성(易姓)혁명과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과 같은 정치사건은 세조 이후 지방의 사림(士林)의 세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양민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인적 교류는 왕조의 교체기를 맞아 더욱 활발해졌다. 역성혁명과 뒤이은 정치적 격변은 양반관료로서 실세한 많은 사람들을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처변 妻邊 등의 다양한 연고를 좇아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그 지역의 강세한 지방세력을 피해 주로 속현이나 향/부곡에 정착하였다. 그렇게 그 모습을 드러낸 농촌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을 가리켜 보통 품관 品官이라 하였다... 세조 연간에 군대 편성에서 진관체제 鎭管體制가 성립함에 따라 중앙군의 위상이 격하되었다. 한성은 더 이상 고려의 개경과 같은 지배세력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67

 

  저자는 이러한 논의를 조선시대 초기로부터 한국사 전반으로 확장시켜 일본 강점 시대 이전 사회를 전근대적 노예사회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 뉴라이트 사관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다른 실증적 자료에 의한 반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에 대한 반론은 <한국경제사 1>내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 이전 '정호제도'를 토지와 인신에 대한 역부과임을 저자가 밝히고, 이것이 조선시대와 앞선 시대의 다른 점이라고 언급했음에도 한국사회에서 토지지배로 가지 않았다는 설명은 무엇인가. 만약 이것이 온전한 토지에 대한 과세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토지와 건물에 과세되는 재산세와 인구에 대해 과세되는 주민세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렇게 토지지배와 무관한 인신지배는 이전의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요컨대 한국사에서 지배계급의 생산자 대중에 대한 지배체제가 인신지배에서 토지지배로 이행한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생산자 대중이 노예에서 농노로 진화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역사의 진행은 14세기 이후 17세기까지 인격적 예속이 강화되는 역의 추세였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6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조선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논지를 함께 제기한다. 납공노비를 노예로 볼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노예제 생산양식이 과연 지배적 생산양식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저자는 노예제로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점도 함께 제기한다.


 조선시대가 되어 전체 사회구성에 있어서 노예제 범주가 대폭 확장했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노비 가운데는 주인가와 떨어져 자신의 가족과 토지를 보유한 납공노비의 범주가 있었다. 납공노비의 토지는 법적으로 그들의 소유였다. 납공노비는 그들의 토지에 부과된 조세와 공물을 조선왕조에 납부하였다. 그에 관한 한 납공노비는 일반 양인농민과 마찬가지로 공민이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88


 15~17세기 조선시대 노예제 생산양식인 가작 家作농업이 동시대의 지배적 생산양식이었을까. 이 같은 가설을 논박하기는 어렵지 않다.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생산양식은 조선왕조와 전부 佃夫와의 관계였다. 국가가 전국의 토지를 국전 國田으로 지배하고 일반 백성이 그 토지를 차경하면서 조세와 공물을 납부하는 관계야말로 동시대의 가장 규정적인 생산관계를 이루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89


 <한국경제사 1>에서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보다 넓고 깊게 이루어진다. 좌파인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역사철학의 틀을 통해 극우 역사사상인 뉴라이트 역사관이 나오는 상황이 다소 역설적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역사사료에 충실하고자 한 실증분석은 책이 갖는 장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제한적인 데이터에 대한 좁고 한정적인 해석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예를 들어, 세조 시대 이후 향촌에 정착한 양반들의 움직임을 단순하게 반(反)도시화, 근대화에 역행되는 움직임으로만 볼 수 있을까. 조카를 죽이고 숙부가 왕이 된 사건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들 사건은 지방 귀족에 의한 주민 착취의 의미를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한계는 다른 자료를 통해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16세기 후반이면 농촌사회에서 이른바 사족 士族으로 불리는 양반신분의 범주가 뚜력하게 대두하였다. 그렇게 양인의 범주로부터 양반신분이 분리되면서 양역을 부담하는 일반 양인을 상민 常民으로 천시하는 신분감각이 발달하였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신분제는 초기의 양천제에서 점차 양반-상민의 반상제 班常制로 바뀌어 갔다 - P359

조선왕조는 소규모 가족경영을 지배체제의 기초로 삼은 농노제 내지 공납제 국가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으로서 양반관료는 대규모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다. 조선왕조는 양반관료와 대립하면서 결탁하였다. 그 같은 지배연합은 토지에 대해서는 소유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은 몰인격적 지배체제를, 인구에 대해서는 공적 예속의 양인과 사적 예속의 노비를 구분하는 지배체제를 창출하였다. - P3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