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 3.1운동 100주년 기념 연구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박경순 지음 / 굿플러스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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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고 긴장되게 돌아갔다. 일제는 사회주의 소련의 위력이 강화되고 피압박 민중들의 혁명투쟁이 확대 발전되고 있는데 놀라, 그것을 말살하려고 갖은 악행을 다 벌였다. 특히 세계적 공황으로 인한 심각한 내부 정치/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를 식민지 조선에 대한 착취와 수탈의 강화, 대륙 침략의 길에서 찾았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16


 박경순은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에서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민족주의자 중심의 1920년대 항일투쟁의 한계를 지적한다. 저자의 관점에 의하면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비록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의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지속적인 투쟁을 이어가지 못하고 소련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신참변(庚申慘變) 등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탄압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노선을 내걸고 항일무장투쟁에 떨쳐나섰던 민족주의운동세력들 역시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조선 민중의 혁명적 힘을 믿지 못하고, 민중 위에 군림하는 자산가계급의 군대에 불과했다. 민족해방운동을 승리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올바른 지도사상도 없었으며, 주동적 투쟁방략도 갖추지 못했다. 적극적인 투쟁을 회피하였고, 특히 조선 민중들과 깊숙이 결합하여 있지 못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5


 지속적으로 항쟁을 이끌어갈 지도자의 부재, 구체적인 전술과 전략의 부재, 현지인들과의 긴밀한 유대관계 유지 실패가 저자가 바라보는 1920년대 항일투쟁의 실패 이유다. 대부분의 항일 세력들이 소멸한 이후,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을 저자는 김일성(金日成, 1912~1994)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어떤 점에서 달랐는가? 저자에 의하면 이는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한계점 극복으로 요약된다.


 참다운 민족해방의 길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대중투쟁은 그 자체만으로 혁명의 길로 나가지 않는다.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를 이룩하고 민족적 독립과 민중해방의 새 세상을 달성할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올바른 지도이념과 지도노선이 있어야 하고, 혁명 투쟁을 올바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정치적 참모부가 있어야 한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1


 저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단순한 일제에 대한 증오나 미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개혁의 움직임으로 파악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이다. 아비지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의 사상이 항일 투쟁의 방향을 설정했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현실적 적용에 대한 고민은 식민지에서의 반(反)제국주의 투쟁방식을 결정짓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 상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독자적인 신념과 판단에 기초해서 결정하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과 실정에 맞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대와 교조를 반대하고 어디까지나 자주적 관점, 창조적 태도에 기초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길을 걸어 나갔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78


 '지원의 사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김형직 선생의 혁명사상을 가리킨다. 김형직 선생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획득한 자신의 이상과 염원, 사상과 정신을 지원(志遠) 이라는 두 글자에 담았다... '지원의 사상'은 민중중시사상, 무장투쟁에 관한 사상, 숭고한 혁명정신을 정수로 하고 있다(p39)... '지원의 사상'은 결국 총칼을 들고 민중의 힘, 민족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달성할 데에 대한 원대한 사상이었으며, 새세대청년지도자 김성주는 이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사상, 새로운 길을 열어나갔다. 그리고 그 첫 출발점이 바로 타도제국주의 동맹의 결성이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40


 노동계급의 계급적 해방을 민족적 해방에 앞세우고 종주국 노동계급의 투쟁을 식민지 나라의 민족해방보다 중시하는 것은 당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공인된 노선이었다. 이러한 기존 노선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를 김성주 학생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또한 러시아와는 달리 낙후한 반봉건국가인 조선과 같은 식민지 나라들에서 무산혁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역시 중요한 연구주제였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45


 이러한 사상적 투쟁과 함께 김일성은 농촌혁명화 사업을 통해 대중과의 결합을 보다 공공히한다. 농촌의 여러 마을을 하나로 묶고 결집된 세력을 바탕으로 춘황투쟁(春荒鬪爭), 추수투쟁(秋收鬪爭)을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가면서 만주 지역에서의 지지기반을 다져나갔다.


 무기획득 투쟁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사업도 역시 매우 중시되었다. 이 사업의 핵심 고리는 농촌마을들을 혁명화하는 것이었다. 농촌마을들을 혁명화하는 것은 항일무장투쟁의 군중적 토대를 구축하는데서 관건이 되는 핵심 사업이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항일무장투쟁은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기초해서만 발선해 나갈 수 있다.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농촌혁명화사업은 그만큼 중요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134


  박경순의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에서는 만주지역에서의 1930년대 항일투쟁이 급격히 소멸한 시점에 김일성의 독립운동의 의의에 대해 조망한다. 지속적인 투쟁을 위한 사상적 기반 마련과 농촌 지역에 대한 거점 확보를 통한 유격대 활동. 본문에 언급된 내용은 사회주의 세력의 항일투쟁을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을 생각하면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분명 나름의 의의가 있지만, 동시에 여러 한계점도 생각하게 된다.


 본문에서 저자는 김일성의 투쟁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지만, 객관적으로 이전 1920년대의 무장투쟁과는 여러 면에서 소규모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일제의 만주 침략에 큰 장애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 병력이 1932년 만주국(滿洲國)을 설립케 한 일본 관동군(關東軍)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까. 이런 점에서 본다면 본문에 언급된 여러 전과는 1937년 보천보 전투(普天堡 戰鬪)에서 드러나듯 영향력면에서 다소 과장되어 보인다.


 김일성부대는 왕덕림과의 교섭을 단념하고 노정을 바꿔 최종 목적지인 왕청지구로 향했다. 왕청지구로 향할 당시 김일성부대에는 18명밖에 남지 않았다. 40명으로 출발했던 김일성부대가 왜 18명밖에 남지 않았을까?(p151)... 김일성은 대오 16명을 이끌고 1933년 2월 요영구를 거쳐 마촌으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소왕청 마촌에 혁명사령부를 정하고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152


 다른 한 편으로,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연구의 초점이 김일성에 맞춰져 있다는 것또한 한계로 생각된다. 아무리 항일무장세력이 몰락했다고 하지만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항일투쟁은 김일성 등 사회주의 세력밖에는 없었을까? 대략적으로 언급하더라도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의 대한독립군,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의 조선혁명군 또한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활동한 무장투쟁세력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에만 초점을 맞춘 점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보다는 <1930년대 사회주의 세력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김일성을 중심으로>가 보다 정확한 내용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까. 2권을 읽기 전 잠시 연구의 한계점에 정리해 본다.


 김일성 부대는 광대한 지역에서 적에 대한 습격전투를 벌여 적을 소탕하고, 적의 공격을 성과적으로 격퇴했다. 일제가 축소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35년 한 해에만 무려 1,196회의 대소 전투를 벌여 일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조선인민혁명군 북만원정대는 단순히 전투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전투 못지않게 북만에 살고 있는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 그들을 의식화 조직화함으로서 민족해방혁명의 대중적 지반을 확대하는 것 역시 중심적인 목표였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66 


 만주지역에서 독립투쟁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민생단 사건(民生團事件)이라는 대대적인 학살 사건으로 고비를 맞이한다. 이 시기 천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밀정으로 몰려 처형되면서 조중 연합은 약화되었다. 이렇게 갈라진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어떻게 다시 극적으로 항일연합전선을 수립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2>에서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일제가 퍼뜨린 민생단침투설은 당과 대중단체, 군대의 모든 책임적 자리를 자파일색으로 갈아치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패권주의와 출세욕에 불을 붙여 주는 인화물질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이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올리는 천정부지의 숙반실적은 유격구의 혁명역량을 모조리 교살해 치우려는 모략가들에게 끝없는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38

3.1운동의 교훈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상층은 더 이상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계급적 제한성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본의 통치 질서를 인정하고 그 틀 안에서 자신들의 협소한 계급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약간의 양보만을 꿈꾸었다. 이러한 계급적 제한성으로 인해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개량주의자로 굴러 떨어지거나 일제와 타협하면서 ‘민족적 자치‘를 부르짖는 민족배신자로 전락했다. - P25

길회선 철도부설 반대투쟁은 새세대청년지도자 김성주의 지도하에서 조선민중이 중국 민중들과 함께 빛나는 승리를 이룩한 첫 대규모 반일대중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중국 동북침략의 야망을 실현해보려고 갖은 흉계를 꾸며오던 일제침략자들과 그와 야합한 중국반동군벌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들을 놀랍게 한 것은 조중 민중의 단결이었다. - P60

조선의 혁명가들은 카륜회의 이후 항일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하기 휘한 준비사업을 꾸준히 벌여왔다. 그 결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충분하게 갖추어 놓았다. 오랫동안 준비 끝에 항일무장투쟁의 믿음직한 핵심공간들이 튼튼히 꾸려지고, 정치 군사적 경험이 축적되었으며, 대중적 지반이 구축되고, 활동의 중심지대도 마련됐다. 특히 9.18 직후 있었던 대중적인 추수투쟁의 승리로 대중들의 투쟁적 기세도 매우 높아졌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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