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신론 - 개정판
윤내현 지음 / 만권당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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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은 오늘날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상류와 중류 및 난하의 하류 동부 연안에 있는 갈석산을 서쪽 경계로 하여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을 그 강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의 서부 변경, 즉 난하의 하류 동부 연안에 있었던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이 서한 제국의 원조를 받아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침략, 잠식하고 끝내는 오늘날 요하로부터 멀지 않은 지역까지를 차지해 위만조선이 성립되었다. 그 후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오늘날 요하까지 차지해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었다.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에도 고조선은 오늘날 요하 동쪽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었던 연맹부족을 통어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왕실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443


  윤내현(尹乃鉉, 1939~ )의 <한국 고대사 신론 韓國 古代史 新論>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화 속의 국가 고조선(古朝鮮) 역사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다. 우리에게 단군  왕검(檀君王儉)에 의해 설립되어, 한 무제(漢 武帝, BCE 156~87)가 보낸 군대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일대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후 이후 낙랑군이 고구려(高句麗)에 의해 복속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과 삼국시대 이전 시대의 역사. 이 역사에 대해 저자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한국 고대사 신론>에 실린 여러 논문을 통해 상세한 의문들과 이에 대한 학설을 제기한다. 고조선사에는 문헌 상의 기록 뿐 아니라 고고학적인 유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기본적인 흐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 저자의 이러한 물음의 근간에는 명사(名詞) 문제가 자리한다. 고유명사와 보통명사의 문제.  


 이상과 같이 패수가 여러 강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그것이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에서 연원했기 때문이다... 강에 대한 언어의 어원이 같았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고대에 고조선이 살던 지역 강들의 보통명사인 펴라, 피라, 벌라가 향찰(鄕札)식으로 기록됨으로써 후에 여러 강들이 패수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나타나게 되어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결론을 말하면,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던 패수는 오늘날 난하 또는 그 지류였는데 후에 위만조선의 성장, 한사군의 설치 등에 의해 한의 세력과 문화가 팽창함에 따라 고조선 지역에 있었던 여러 강들이 패수(浿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99


 윤내현은 <한국 고대사 신론>을 통해 패수(浿水), 평양(平壤) 등의 위치 비정 시 지명에 대한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볼 것을 주문한다. 이를 거슬리는 해석은 마치 신라 향가 <처용가 處容歌>에서의 '서울'을 오늘날 서울, 한양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서울의 의미가 수도(首都)이기에 보통명사의 관점에서 신라 시대의 서울과 고려시대의 서울, 조선시대의 서울이 달라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해석은 고대사를 미스터리로 빠뜨리고, 더 나쁘게는 신화(信話)의 세계, 증명되지 않은 무의식과 미신의 시대로 밀어넣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연구는 고조선을 신화의 세계에서 역사의 세계로 바라본 의미있는 학문적 성과라 여겨진다.


 한국 문헌에는 고조선의 도읍이 오늘날 평양이었던 것으로 흔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대 한국어에서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서 '대읍' 또는 '장성'을 뜻했던 것으로서 그것은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평양은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서 굳이 오늘날 평양으로만 한정시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194


 <한국 고대사 신론>에서 제기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고대사에 대한 열린 시각을 요구한다. 수많은 사건들과 세월에 의해 뒤덮이고 소수의 유물과 기록에 대해 과거의 역사를 추정하는 고대사의 경우 현대 남겨진 유물만으로 역사를 끼워 맞추는 해석으로 한계가 있음을 저자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남겨진 유물은 분명 한 시대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지만, 시대의 전반적인 흐름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지나친 실증주의(實證主義)적인 접근 방식이 갖는 한계 또한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평양 지역에서 중국식의 유적이 발굴되어 그것이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보고되자, 고조선이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위치했을 것으로 본 견해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평양지역에서 발견, 발굴된 유적을 면밀하게 검토해본 결과, 그것은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것은 동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의 배후를 친 후 설치했던 군사 지역의 유적인 것이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106


 윤내현의 <한국 고대사 신론>에서는 역사 특히 고대사를 바라볼 때 현재가 아닌 당시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당대인의 시각에서 과거의 사실이 복원되었을 때 비로소 오늘날의 해석이 가능하며, 진정한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한국 열국사 연구>의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여기서는 큰 흐름만 잡도록 하자... 


 중국의 옛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서한(전한) 초까지는 요수가 오늘날 난하에 대한 호칭이었다. 그런데 서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한 후에는 요수가 오늘날 요하에 대한 명칭으로 이동했다. 다시 말하면 요수는 고대에 중국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한 호칭으로서 서한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요수라는 강 이름도 동북쪽으로 이동을 했던 것이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142

중국의 상 왕국에는 국명과 동일한 상이라는 명칭의 읍이 있었고 서주 왕국에도 국명과 동일한 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종주와 성주가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고조선에도 국명과 같은 조선이라는 명칭의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낙랑군에 속해 있던 25개 현 가운데 하나였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영역에 설치되었던 낙랑, 진번, 임둔의 3군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조선의 크기는 위만조선 전체 면적의 75분의 1 정도의 좁은 지역이었던 것이다. - P134

고조선 국가 구조의 기층을 형성햇던 소읍은 일정한 지역의 정치적 중심이었던 진번, 임둔 등과 같은 대읍에 종속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지방의 대읍은 중앙의 대읍인 평양, 즉 왕검성에 종속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국가 구조는 소읍, 대읍, 평양(왕검성)의 순서로 읍이 누층적 관계를 형성한 읍제국가였다. 읍의 거주인은 혈연관계에 기초한 집단이었으므로 읍의 누층적 관계는 부족의 층서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 P232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멸망은 한국 고대에 있어서 읍제국가의 붕괴와 열국시대의 개시를 가져왔으므로 한국사의 범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사의 주류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며, 한국사의 주류를 고조선으로부터 열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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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9-30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열하일기를 읽을 때나 사기를 읽을 때 한사군, 패수 등등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답답하더라구요. 분단 상태라 북쪽을 발굴하기 힘든 것도 짜증나고, 중국이 유적지 발굴하고는 폐쇄해서 비공개하는 것도 답답합니다. 일본은 자꾸 한국 역사를 축소하려고 하고 말이죠. 비전문가이고 잘 모르는 저도 답답한데 전공자 분들이나 학계에 계신 분들은 얼마나 답답할까요...

겨울호랑이 2023-09-30 23:29   좋아요 2 | URL
역사를 바라보는 기준이 민족과 국가가 된다면, 아무래도 이들 개념의 기원인 근대 민족주의와 역사의 관계가 밀접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사료가 되는 사건의 기록, 유물 등 자료와 이에 대한 해석이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이루는 두 줄기라고 볼 때, 특히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근현대사의 얽힌 국가들의 이해가 앞선 시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네요... 치밀한 연구와 학자의 양심이 언젠가는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리라 기대해 봅니다.. ^^:)

Redman 2023-10-01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윤내현의 주장에 대해 먗 가지 궁금증을 적어봅니다
1. 글에 적어준 윤내현의 주장은 얼마나 당대 기록과 자료의 지지를 받는지 궁금합니다. 삐딱한 시선에서 보면, ˝남겨진 유물만으로 역사를 끼워 맞추는 해석˝을 윤내현도 저지르지 않았나 싶고, 자신의 해석이 그다지 역사적 증거에 충실하지 않은 걸 본인도 아니 자신의 논리적 비약과 억지스러운 해석에 조금이나마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런 비판을 한 것 같다는 의심이 듭니다. 사실 그의 방법론과 논지 전개 방식 자체가 전문학자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하기도 하고요

2. 어떻게 고대인의 시각을 복원할 수 있을까요? 플라톤 철학을 전공한 이상인 교수님도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고대 그리스인의 눈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고대 그리스의 눈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꿨습니다. 윤내현은 기록이 고대 그리스보다도 현저히 적은 고조선은 당대인의 시각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고대인의 시각에서 볼 수 있으며, 고대인의 시각에서 과거를 복원한다 해도 그것이 정말 당대인의 시각과 합치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당대인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역사 서술이라는 행위 자체에 내포된 현재성을 간과하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02 07:58   좋아요 0 | URL
말씀주신 사항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선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윤내현의 주장이 다른 학설과 차이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타당성과 신뢰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닌 제가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저자의 여러 논문 내용이 어느 정도 정리된 <한국고대사신론> <고조선 연구(상)> <고조선연구(하)> <한국 열국사 연구>에 수백 페이지에 걸쳐 저자의 주장과 근거가 있고, 학계에서 이와 관련한 치열한 논쟁이 있는 현실에서 비전문가인 일반독자의 타당성과 신뢰성에 대한 평가는 큰 의미가 없다 생각됩니다. 차차 다른 책들도 리뷰로 정리를 할 계획입니다만, 불과 몇 페이지의 리뷰에 저자의 주장과 근거를 다 정리할 수는 없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자의 연구에 대한 평가는 부족한 리뷰보다 원문에 근거해서 내려주시는 편이 더 좋을 듯 합니다.

2. 역사를 거칠게 분류하면 과거의 사실과 이에 대한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일어나는 부분은 해석 부분이겠지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어떤 실을 통해 꿸 것인가가 사실과 해석의 문제라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한국 고대사의 문제는 해석의 문제 이전의 사실의 문제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이상인 교수님의 철학 문제는 해석의 문제라 여겨지고요. 제가 리뷰에서 언급한 부분에서 고대인의 시각에서 보자는 것은 일례로, ‘평양‘, ‘패수‘ 그리고 ‘낙랑‘의 명사들을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생각한 고대인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대의 지명 변천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에 대한 근거로 해당 단어가 여러 지명에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론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 있겠지요. 이처럼 한국 고대사의 문제는 해석 이전의 사실에 대한 논의라는데 철학과 차이가 있다 여겨집니다. 플라톤이 적도(또는 중용)의 개념을 설명할 때 고대 그리스에서 포도주에 적정량을 넣어 희석시키는 것으로 비유해서 설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고대인의 생활양식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깨어진 조각이 없는 부분은 부득이하게 현대의 사고로 연결할 수 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완벽한 사상의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과거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가능하다면 사건이 발생한 당대의 상황에 대한 최대한의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상이 제가 리뷰에서 언급한 사건을 바라보는 고대인의 시각에 대한 의견이었습니다... 제가 드린 답변이 Redman님께 충분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섣부른 제 의견이 저자의 진의를 왜곡시키고 Redman님께 혼란을 드리지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해당 부분에 대해 의문을 갖고 저자의 책을 직접 읽으신다면 많은 의문이 해소되리라 생각하며 답을 마칩니다. 함께 생각해 볼 문제를 제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Redman 2023-10-02 10:30   좋아요 1 | URL
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법도가 세워지는 것은 군주의 보배이며 패거리를 갖추는 것은 신하의 보배가 된다.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지 못하는 것은 패거리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한 치라도 잘못하게 되면 신하는 그 갑절의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나라를 갖고 있는 군주는 그 신하의 도읍을 크게 하지 않는다.

환공이 말하였다. "포숙아鮑叔牙는 어떻소?"
관중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포숙아는 사람됨이 지나치게 곧고 고집이 세며 일처리에 너무 과격한 면이 있습니다. 강직하면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나설 우려가 있고, 고집이 세면 백성들의 마음을 잃게 되며, 과격하면 아랫사람들이 등용되기를 꺼릴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패왕의 보좌역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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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는 군주와 신하의 기본적인 관계를 동상이몽의 관계, 즉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관점에서 보았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본 전통적인 유가의 관점은 그에게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그는 법法ㆍ술術ㆍ세勢라는 세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데 강한 자신감과 신념을 가지고 단호한 어조로 견해를 피력하였다.

한비자는 법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그가 나오기 전에 이미 세 갈래의 큰 학파가 있었다. 첫째는 법을 강조한 상앙, 둘째는 술을 강조한 신불해申不害, 셋째는 세를 강조한 신도愼到였다. 상앙이 주장한 ‘법’은 백성들의 사익 추구를 막고 나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신불해의 ‘술’은 신하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비판을 그들의 행동과 일치시키는 기술로서, 신하들을 잘 조종해 군주의 자리를 더욱 굳게 다지는 인사정책을 말한다. 신도의 ‘세’는 군주만이 가지는 배타적이고 유일한 권세를 말한다. 한비자는 이 세 학파의 주장을 두루 수용해 발전시켰다.

한비자는 유가나 묵가의 사상을 반대한 것과는 달리 도가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도가는 인간의 본성이 순박하다고 보고 절대적인 자유를 옹호한 반면, 한비자는 인간을 악하다고 보고 사회적인 통제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도가와 한비자는 ‘무위(無爲)’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지러운 나라로써 잘 다스려지는 나라를 공격하는 자는 망하고, 사악한 도道로써 바른 도를 치는 자는 망하며, [천리를] 거스르는 도리로써 천리를 따르는 자를 치는 자는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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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27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맹렬히 가열차게 읽으시는 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3-09-27 13: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yamoo님께서도 풍성한 한가위 연휴 보내시고, 그림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허턴은 그런 격변이 일어나기보다는 오늘날 작용하는 과정과 자연법칙이 과거에도 동일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동일과정의 원리principle of uniformitarianism라고 불리곤 하는데, 지질학자 아치볼드 게이키의 말을 빌리면 "현재는 과거의 열쇠"라는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글에 따르면 허턴은 "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지질학에 대한 인간의 사고에서 가장 뚜렷하고 급진적 변화를 가져왔다. 바로 대단히 긴 지질학적 시간을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허턴은 이 지질학적 과정만으로 현재 세상에 있는 모든 지형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으며 성경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구 역사에서는 침식, 운반, 퇴적, 산맥의 융기라는 과정이 주기적으로 여러 번 반복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화산은 미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기고 경건한 신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화산은 용광로의 화구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허턴의 생각은 용암이 관입하여 구워진 탄층을 통해서 추가로 확인되었다. 허턴은 이 열기관 때문에 만들어지고 솟아오른 산맥이 훗날 퇴적물이 되어 바다로 운반된다고 믿었다. 이는 융기, 침식, 퇴적, 다시 융기 순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이었다. 이 모든 생각은 역동적인 지구라는 전체적인 골자의 일부분이다. 이런 역동적인 지구는 아주 오래되었으며 끊임없이 재생되고 재활용되었다.

라이엘의 걸작 『지질학 원리Principles of Geology』가 1830년부터 1833년까지 세 권의 책으로 발표되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법적 의견서legal brief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변호사라면 다 알겠지만, 사실 절대로 ‘간단한brief’ 글이 아니다). 그는 답사에서 관찰한 결과와 책으로 얻은 지식을 총동원하고 변론 기술을 활용하여 지구에 대한 동일과정론적 시각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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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에픽테토스는 오로지 ‘선택’과 ‘선택에 따른 행동’만이 우리에게 좌우되며 나머지(신체나 사물)는 별개의 것으로 남는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좌우되는 것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선택 자체라고 본 것이다.

명상록』을 쓰면서 아우렐리우스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융합시키면서 내용의 차원에서는 그가 배운 이론들을 활용하고 방법의 차원에서는 대화와 변증법적인 양식을 활용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단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대화록의 두 대화자로 동일한 인물, 즉 자기 자신을 등장시킬 뿐이다.

세네카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근거를 자연세계에서 발견했다. 벌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왕벌이 다른 벌들에 비해 탁월한 것은 단순히 몸집이 크기 때문이아니라 공격용 무기(침)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자연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군주가 백성들 앞에서 이와 동일한 비폭력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 세네카의 생각이었다(『자비에 관하여』, I 19, 3).

어떤 경우에든 세네카는 한 개인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한 정확한 검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즉 국가의 부패를 이유로 정치 참여의 거부를 합리화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보았다. 세네카의 이러한 입장에서 그가 제시하는 철학적 근거 뒤에 어떤 식으로든 네로를 모략하는 인물로 몰리고 싶어하지 않는 정치적인 신중함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된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건강이나 재산 혹은 여행의 편리함 같은 것들은 오로지 병과 가난과 불편함에 비해 ‘선호할’ 만하고 ‘가치’가 있을 뿐이다. 반면에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덕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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