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어떤 일에서든 베팅하는 마음가짐으로 생각하면 의사결정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결과의 좋고 나쁨이 의사결정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른 직접적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확실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알아낼 수 있다. 미래를 그려내는 전략을 배우고, 뒤늦게 반응하는 식으로 다급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를 줄이며, 비슷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과 인맥을 쌓고 유지해 우리의 의사결정 과정을 개선시키게 된다. 마지막으로 과거와 미래의 나 자신을 동원해 감정적 의사결정의 수를 줄일 수 있다.(p12)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中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Making Smarter Decisions when you don't have all the facts>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효과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책의 많은 내용이 포커(Poker)를 통해 얻은 저자 애니 듀크(Annie Duke)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많은 부분에서 행동경제학의 원리를 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페이퍼에서는 보다 학술적으로 행동경제학을 다루고 있는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 : 추단과 편향 Judgment under Uncertainty : Heuristics and Biases>과 함께 책의 대강을 살펴보고자 한다.  


 보다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먼저 의사결정자들은 지난 결정에 대해 돌이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 내린 결정이라는 경험을 통해 의사결정자들은 한 단계 나아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에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두 함정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후확증편향을 먼저 살펴보자.


 사후확증편향 hindsight bias이란 어떤 결과가 나온 후에 그 결과가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을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 라든가 '그렇게 될 걸 알았어야 했는데' 같은 말을 할 때 그 사람은 사후확증편향에 시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결과와 의사결정 사이의 과도하게 밀접한 관계로부터 만들어진다. 그것이 우리가 과거의 의사결정을 평가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p23)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中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의 한 주요 측면은 경험으로부터의 학습이다. 어떤 일의 결과를 알게 되면, 그 일이 발생한 까닭을 이해하려고 하고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위해 얼마나 준비를 잘 했는지 평가하려고 한다. 이러한 성과 지식이 우리 자신의 판단에 후견지명 hindsight의 지혜를 베풀지만, 그 장점은 실제보다 높이 평가 된다.(p597)... 사람들은 선견지명으로 알았던 것을 후견지명에서 과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예언을 잘못 기억하기까지 한다.(Fischhoff, 1975)(p598)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 中 


 과거의 결과로부터 의사결정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위험을 말하는 사후확증편향 이외에도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요소는 결과 안에도 내재되어 있다. 결과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기술'과 통제할 수 없는 '운'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기술과 운은 구별하지 못한다. 이는 이 두 요소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지만, 우리 속담에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처럼 결과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패로부터 배울 수 없게 된다.


 어떤 결과가 실력 때문이라고 여기면 우리는 스스로 공을 차지한다. 결과가 운 때문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어떤 결과물이 나타나든 우리는 이 일차적인 분류를 해야하는 의사 결정에 직면한다. 그 의사결정은 해당 결과물을 '운' 바구니에 넣어야 하는지, '실력' 바구니에 넣어야 하는지에 대한 베팅이다.(p138)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中


 많은 사람들이 기술 skill과 운 luck이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 동의하겠지만, 이 둘이 묶이는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원칙적으로 이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기술과 관련된 상황에서는 행동과 그 결과 사이에 인과적 연결이 있다. 따라서 기술 관련 과제에서는 성공을 제어할 수 있다. 반면, 운은 우연히 발생한다. 운이나 우연한 활동으로는 성공을 제어할 수 없다.(p319)... 기술과 우연 요인들이 사람들의 경험과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모든 기술 상황에는 우연의 요소가 들어 있고 거의 모든 우연 상황에는 기술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p330)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 中


[그림] 포트톨리오 위험(by 겨울호랑이)


 '기술'과 '운'과 관련하여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재무관리, 보다 정확하게는 주식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구성자산을 다각화해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위의 포트폴리오 위험은 이러한 구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위의 그림에서 재무관리에서 포트폴리오 위험은 크게 체계적 위험과 비체계적 위험으로 나눌 수 있는데, 비체계적위험은 구성자산 수를 늘리면 점차 감소하지만, 시장 위험인 체계적 위험은 구성자산의 수를 늘리는 것으로 통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 기업상황이 좋지 않을 때 우리는 이 회사 주식을 사지 않음으로써  기업 고유위험을 회피할 수 있지만, 1998년 외환위기(IMF)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시장 구성원들은 시장에 존재하는 한 이 위험을 회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위험은 '통제 가능성'에 따라 체계적 위험과 비체계적 위험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론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결과 분석 시 우리의 통제가능성에 따라 기술 skill과 운 luck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잠시 다른 곳으로 흘렀지만, 다시 결정 문제로 돌아오자.


 이처럼 우리는 과거 결과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편향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확실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주관적인 결과 분석과 주관적인 확률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결정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상당부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제시한다.


 실제의 삶에서 가용성을 가장 분명하게 예시하는 것은 사건이나 시나리오의 우발적 가용성의 영향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서 생생한 핵전쟁의 묘사를 본 후, 어떤 우발적 사고나 고장이 그러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주관적 확률의 증가를 알아챘을 것이다. 어떤 결과에 대한 지속적 몰두가 그 가용성과 그의 지각된 우도를 증가시킬 수 있다.(p244)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 中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에서는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보다 열린 마음으로 주위의 의견을 경청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본다면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푹 빠져 있어서는 내기에서 이길 수 없다. 내기에서 이기려면 미래에 대한 믿음과 예측이 더욱 정확히 세상을 그려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것을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객관적인 사람이 편향된 사람을 이긴다... 자신의 믿음을 세부적으로 수정하려면 다양한 시각과 대안적인 가설들을 열린 마음으로 고려해야 한다.(p207)...  과거, 현재, 미래의 자신이 함께 어울릴 때 우리는 더 나은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런 의사결정에 대해 흡족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p342)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中


 대부분은 아니지만, 여러 경우에 효과적인 위험 관리는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협동을 요구한다... 여기서 논의된 발견들은 비전문가들에게는 중요한 도전이 된다. 더 잘 알고, 검토되지 않거나 지지되지 않은 판단에 덜 의존하고, 위험한 판단으로 편향시키는 요인들을 인식하고, 새로운 증거에 더 개방적이어야 한다. 요컨대, 교육받을 수 있는 잠재력을 깨달아야 한다.(p683)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 中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는 위와 같은 내용으로 독자들이 효과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책 본문에서는 포커 게임과 스포츠 게임 등의 예시를 통해 독자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따라올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어 독자에 대한 배려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의 가장 큰 장점을 든다면, 행동경제학을 알기 쉽게 풀이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이번 페이퍼에서 함께 비교한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은 행동경제학과 관련한 30여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책으로 재미와는 거리가 있는 책이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통계 용어로 어렵게 씌어진 이 논문들에서 도출된 유의미한 결론들을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에서는 일상 생활에 잘 접목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가장 큰 장점이라 여겨진다.


 반면, 많은 통계용어들을 걷어내고 일반 독자들을 위해 쉽게 쓰다보니, 독자들이 새로움을 느낄 여지는 많이 줄어든다. 자기계발서에 관심있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의 제시는 비록 그 구성과 절차가 체계적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부족함을 채우고 즐겁게 읽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이버 페이퍼를 마무리 한다.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를 행동경제학과 관련된 책들과 함께 읽는다면 보다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의 공저자 다니엘 카네만(Daniel Kahneman, 1934 ~ )이 일반인들을 위해 쓴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는다면, 행동경제학의 이론과 실제의 조합을 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정부의 정책부문까지 알고 싶다면 <넛지>를 곁들여도 좋을 듯하다...


* 이 페이퍼는 출판사의 제공한 책으로 작성된 페이퍼 입니다. * 


 1. 기저율(base rate) : 판단 및 의사결정에 필요한 사건들의 상대적 빈도


 2. 통계학에서, 가능도(可能度, 영어: likelihood) 또는 우도(尤度)는 확률 분포의 모수가, 어떤 확률변수의 표집값과 일관되는 정도를 나타내는 값이다. 구체적으로, 주어진 표집값에 대한 모수의 가능도는 이 모수를 따르는 분포가 주어진 관측값에 대하여 부여하는 확률이다. 가능도 함수는 확률 분포가 아니며, 합하여 1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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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1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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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1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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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1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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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1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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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1 0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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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1 0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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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1 09: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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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01 23:36   좋아요 1 | URL
한국사회에서 외부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정도는 떨쳐버려야겠지요...

2018-09-02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H.카(Edward Hallett Carr, 1892 ~ 1982)는 <러시아 혁명 1917 ~ 1929 The Russian Revolution 1917 ~ 1929>을 통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농업 국가인 러시아의 공업화 과정과 여기에서 빚어진 갈등을 밝히고 있다.

 

 애초에 마르크스는 선행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확립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전한다고 예상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이런 토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은 경제적/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를 기대했다. 혁명이 곧바로 국제적 성격을 띨 것이라는 가정하에서만 이 딜레마를 피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경제적으로 후진적이고 수적으로 미약한 한 나라에서 혁명을 통해 도입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의 통일된 프롤레타리아트가 일으킨 혁명의 결과로 예상한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러시아 혁명은 혼성되고 양면적인 성격을 띠었다.(p273) <E.H. 카 러시아 혁명> 中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 ~ 1883)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2단계 혁명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렇지만, 1917년 당시 러시아는 농업국가였으며, 마르크스의 혁명 도식에서 벗어난 국가였다. 이는 온건파인 멘셰비키(Mensheviks)와 볼셰비키(Bolcheviks)가 대립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멘셰비키가 부르주아 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레닌(Vladimir Ilyich Ulyanov, 1870 ~ 1924)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제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거쳐 정권을 확고하게 장악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해야 했다.


 소련의 산업, 특히 중공업은 비효율적인 고비용 생산 부문인 반면, 농민 노동을 무제한으로 공급할 수 있는 농업은 상대적으로 저비용 생산 부문이었다. 자본이 최대 수익을 얻는 방법은 농업에 자본을 투자해서 수출용 잉여 농산물을 증대시켜 산업의 궁극적 발전을 위한 자본재를 비롯한 산업재 수입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자본이 부족하고 미숙련 노동 잉여가 넘처나는 소련 같은 나라에서 합리적인 경로는 자본집약적인 자본재를 생산하는 산업이 아닌 노동집약적인 단순 소비재를 생산하는 산업에 우선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p165) <E.H. 카 러시아 혁명> 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의 현실은 산업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 인구의 다수가 농민인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은 경공업을 발전시키는 방안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소련이 직면한 현실은 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르크스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소련 내부에서 빠른 산업화와 국제적인 혁명의 확산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위해 이들에게 허용된 시간은 결코 넉넉한 것이 아니었다.  


 산업화의 첫째 조건은 농민이 도시와 공장에 필요한 식량을 임금 수준에 견디기 힘든 부담을 주지 않는 가격으로 공급하고, 농민 시장을 위한 소비재 생산에 전용되는 산업 자원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p196)... 공공연하게 공언된 둘째 조건은 노동의 생산성을 임금보다 빠르게 증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산업 팽창에 필요한 재원을 일부나마 산업 이윤 자체에서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p198)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산업화된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농촌은 저렴한 노동력과 식량을 꾸준히 제공할 수 있어야 했으며, 도시 노동자들은 임금 수준 이상의 생산성을 결과로 내어야 했다. 그리고, 이 구조가 선순환(善巡還)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농촌 생산력의 증대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경공업 보다 중공업의 발달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소련은 경제 권한의 집중과 반(反)시장주의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 중, 둘째 요소인 반 시장주의가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두 개의 주요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에는 중앙집중적인 통제와 관리, 소규모 생산 단위의 대규모 단위로의 대체, 통일된 계획 조처 등 경제적 권한과 권력의 집중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상업적/금전적 형태의 분배로부터 이탈, 무상이나 고정 가격의 기본 재화와 서비스 공급 도입, 배급, 현물 지불, 가정된 시장이 아닌 직접 사용을 위한 생산 등이 있었다.(p54)... 그런데 전시공산주의의 둘째 요소, 즉 '시장' 경제를 '자연' 경제로 대체한 것은 그런 기초가 전혀 없었다.(p55) <E.H. 카 러시아 혁명> 中


 통화는 또다시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불확실성과 경계의 분위기 속에서 곡물은 가장 안전한 가치 저장물이었다. 비축물이 있는 농민들로서는 이 물건을 시장에 내놓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p186)... 신경제정책이 토대를 두었던 믿음, 즉 국가에 대한 자발적인 농산물 인도와 시장의 자유 판매를 결합한 체계로 도시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산산이 무너졌다.(p192)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소련의 반 시장주의 정책의 실패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1985)는 그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Afterthoughts on Material Civilization and Capitalism>를 통해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구분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브로델에 따르면 소련 지도부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소련 경제는 시작부터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레닌이 "제국주의(imperialisme)"라고 부르는 것(또는 달리 말하면 20세기 초에 새로 탄생한 독점자본주의)과 경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단순한 자본주의의 병존이 그것이다. 나는 갤브레이스와 레닌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가 "경제(economie)" - 또는 시장경제 - 라고 부른 것과 "자본주의(capitalisme)"라고 부근 것 사이의 영역 차이가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중세 이래 유럽에서 언제나 지속되던 상수(常數)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산업화 이전 시기의 모델에 세 번째의 영역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장경제라는 층의 옆에, 차라리 그 위에, 반(反)시장(contre-marche)의 영역이 있다. 바로 이곳이 자본주의의 영역이다.(p323)<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1, 교환의 세계 上> 中 


 국가는 언제나 계급 지배와 억압의 도구였다.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와 국가의 존재는 양립할 수 없었다. 레닌은 직접 만든 경구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자유란 없다. 자유가 존재하게 된다면 국가란 없을 것이다."(p19)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시장경제는 인류 역사를 통해 꾸준히 존재해온 양식이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한 1920년대의 소련 경제 정책을 결국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등을 추진하지만, 어려운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러한 실패로 말미암아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을 이끌게 된 스탈린(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 1878 ~ 1953)은 국제주의를 포기하게 되었다. 국가를 부정한 마르크스 - 레닌의 이론 대신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E.H. 카가 서술한 소련의 1920년대는 마무리 된다.


 그때까지 일국사회주의는 신경제정책의 연속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신경제정책 또한 국제 혁명의 암울한 전망에 등을 돌렸고, 러시아 농민과의 동맹을 통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제 스탈린은 자급자족하는 러시아, 즉 근대화된 산업과 농업을 통해 변형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된 러시아라는 아주 다른 개념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고 있었다... 일국사회주의는 현홍적인 장기적 전망이었고, 바야흐로 경제 상황에서 감지되기 시작하던 여러 변화와 들어맞았다.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그 주창자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자급자족의 조건으로서 중공업 장려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후진적인 러시아 경제의 자원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도 함축했다.(p119)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코민테른의 결정은 사실상 소련 공산당의 결정이었다. 이 결정을 외국 공산당에 강요할 수 있고 실제로도 강요했지만, 해당 국가에서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대가를 치렀다. 노동자들은 동떨어진 외국의 권력이 자의적이고 때로는 전혀 부적절한 지시를 내리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1920년대 말에 서구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수와 영향력이 쇠퇴하고 동조자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p267)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몰두는 스탈린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일국사회주의 덕분에 스탈린은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들을 러시아 민족주의와 조화시킬 수 있었다. 소수민족이나 작은 나라에 대한 스탈린의 처리 방식에서 민족주의는 쉽게 국수주의로 변질됐다.(p251) <E.H. 카 러시아 혁명> 中


 저자는 E.H.카는 <러시아 혁명 1917 ~ 1929>를 통해 소련의 신경제정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집단화는 토지 혁명을 완성했는데, 이 혁명은 1917년에 농민들이 지주 토지 강탈로 시작됐지만 오랜 경작 방식과 농민의 생활방식을 고스란히 남겨 높았다(p238)... 지난 12년 동안 농업은 여전히 경제 내에서 준 準 독립적인 고립지대로 남았고, 자체의 궤도를 따라 기능하면서 그 궤도를 변경하려는 외부의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 이것이 신경제정책의 본질이었다.(p239) <E.H. 카 러시아 혁명> 中


 농민국가에서 공업국가로의 변신과 국제 혁명의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농촌 - 도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1920년대 소련의 경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소련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것이 1937년 이루어진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러시아 혁명과 우리 역사의 거리는 지리상의 거리보다 짧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출처 : http://webzine.nuac.go.kr/tongil/sub.php?number=1779)


 이처럼 <러시아 혁명>은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 후 10여년에 걸친 소련의 경제사를 '도시 - 농촌'의 대립 관점에서 짧은 페이지임에도 불구하고 밀도있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특히 이 책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독립운동 당시 고려인 이주 사건 외에도 1960년대 이후 우리의 경제발전사의 모델을 제시하는 등 우리 역사에 미친 직간접적인 영향 때문일 것이다. 농촌의 억압을 통한 도시 발전과 중화학 공업의 육성 등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소련 경제사 속에서 우리 자신의 역사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최근 한계에 부딪힌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한계점 역시 이 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지난 역사를 통해 현재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역사책을 읽는 이유라고 한다면, 비록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조금 넘겼지만,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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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4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에 반대하는 스탈린
이 레닌의 후계자가 된 것이 소련에게는
그야말로 대재앙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공산주의 역사발전 이론에서 아직 공업화가
덜 된 러시아에서 PT혁명이 발생했다는 점도
넌센스가 아니었을까요. 사실 독일 정도 되는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났어야 하는데 반대로
파시즘 국가가 되어 버렸으니.

푸틴 짜르 시절에 마치 다시 예전 제정 러시
아 시대로 돌아갔다는 느낌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18-08-24 14:3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물론 마르크스 혁명론이 절대 진리는 아니겠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사회에서 ‘사회주의‘라는 결과만을 추구하다보니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 것 같습니다. 보다 사회가 나아지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문제 인식 공유가 먼저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2018-08-24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4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4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4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6 2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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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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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6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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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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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7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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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8-27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의 좋은 리뷰 잘봤습니다. 전 사회주의가 실패하지 않았다 봅니다.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이 기회가 될 수 있다 보고, 현실 사회주의는 쿠바도 있죠.

저 또한 스탈린을 비판하는 쪽에 가깝고, 레닌과 트로츠키보다 당연히 저평가하는 쪽이기는 하나 스탈린식 경제개발은 설사 트로츠키였다 하더라도 했을거라 봅니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 사정이 워낙 안좋았으니까요. 다만 일국사회주의와 국제사회주의라는 국제적인 측면에선 달랐을 거라 보고, 트로츠키의 경은 스타하노프 운동과 같은 짓은 안했겠죠.

참고로 전 사회주의자입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제 심장을 뜨겁게 만드네요.ㅎㅎㅎ

겨울호랑이 2018-08-27 20:24   좋아요 1 | URL
^^:) 인류 사회가 지속되는 한 ‘평등‘과 관련한 논의는 계속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 역시 이르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주의의 많은 요소들이 ‘복지‘라는 이름으로 제도 안으로 들어올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마르크스를 ‘예언자‘로 생각하고 사회변혁의 공식 틀에 맞춰서 움직이려고 했던 것은 유물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베들레헴에서 예언자가 나와야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군요. 저는 성향이 보수적인 편이라 사회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회주의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느 사상이나 이념도 분명 한계가 있으니까요. ^^:)
 
이하동서설 - 감춰진 동이(東夷)의 실체와 고대 한국
부사년 지음, 정재서 옮김 / 우리역사연구재단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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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은 중국의 고대 문명을 남북 간의 이항구조로 파악하던 전통적인 관념을 뒤집고 동서 간의 대립으로 인식을 전환시켰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며, 이(夷) 곧 동이의 실체를 드러내고 정치적, 문화적 지위를 부각시켰다는 점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p42)... 다만 부사년은 은(殷)과 이(夷)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夏), 주(周)와 대립된 동방의 국가라는 차원에서 친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종족적, 지역적, 기원적으로 구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아 애매한 느낌을 준다. 은(殷)을 고조선과 같은 계통으로 보는 반면 이(夷)의 활동 범주를 대륙 내지인 산동(山東) 등에 국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대 한국은 동이계로 간주하지 않는 셈인데 다소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p43) <이하동서설 : 해제> 中


 <이하동서설 夷夏東西說>은 중국 역사학자 부사년(傅斯年, 1896 ~ 1950)에 의해 이 주장된 내용으로, 중국 고대사를 '하(夏)'와 '이(夷)'의 대립으로 본다는 면에서 1930년대 당시 중국 학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학설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 동쪽의 거대한 지역은 하천에 의해 충적된 대평원이어서 산동반도에 있는 산 몇 개를 제외하면 모두가 해발 1,200m 이하의 평지다... 이에 반하여 서쪽의 거대한 지역은 산과 산 사이에 끼인 고원지대여서 도시는 늘 하천의 양안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는 동쪽의 평지를 동평원구(東平原區), 거대한 산 속에 끼인 서쪽의 고지를 서고지계(西高地系)라고 간략히 부르겠다.(p231)... 분명 이(夷)와 은(殷)은 동쪽 체계에 속하고 하(夏)와 주(周)는 서쪽 체계에 속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235)<이하동서설> 中


 부사년은 먼저 서쪽 고원 지대와 동쪽 평원 지역으로 이루어진 중국 지형에 주목하고 이러한 지형으로부터 '동(東) - 서(西)' 간의 대립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이하동서설>에서 말하는 동이(東夷)는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구이(九夷)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는 다양한 민족이 포함된다. 또한, 은(殷) 또는 상(商)은 동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넓힌 고대 중국의 제국(帝國)이었다.


 무릇 은상(殷商)과 서주(西周) 이전, 혹은 은상이나 서주와의 동시기에 지금의 산동성 전 지역과 하남서의 동부, 강소성(江蘇省)의 북부, 안휘성(安徽省)의 동북부 전체, 아울러 하북성의 발해(渤海) 연안 및 바다 건너 요동(療東)과 조선의 양안(兩岸)까지 일체의 지역의 모든 부족과 모든 성씨들을 전부 '이(夷)'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夏) 한 시대의 대사(大事)란 바로 이러한 이인(夷人)들과의 투쟁이었다.(p155) <이하동서설> 中


 [지도] 하나라 영토 지도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luemir98&logNo=60210194759&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동이(東夷) 가운데에는 부여(夫餘), 읍루(揖婁), 고구려(高句麗), 구려(句麗)[맥이(貊耳)], 예(濊), 한(韓)[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왜(倭) 등이 있다.(p268) <이하동서설> 中


 상인(商人)이 세웠던 제국은 전성기 때 무력이 몹시 강대하였으며, 패망한 이후에도 쓰러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쪽으로 해동에서 일어나 서족으로 기양(岐陽 : 섬서성 기산(岐山)일대)에까지 이르렀던 이 대제국이 당시의 문화 수준에서 건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위대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특수한 무기나 견고한 사회조직에 힘입고서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p122) <이하동서설> 中


 부사년은 이러한 '동-서' 대립 구조의 사례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 이래 후한(後漢)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대립이 있어 왔으나, 이후 이(夷)가 동화되면서 이러한 갈등은 점차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진(秦)이 6국을 통합한 것은 서가 동을 이긴 것이요, 초(楚)와 한(漢)이 진(秦)을 멸망시킨 것은 동이 서를 이긴 것이요, 평림병(平林兵)과 적미군(赤眉軍)이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왕실에 대적한 것은 동이 서를 이긴 것이요, 조조(曺操)가 원소(袁紹)에 대립한 것은 서가 동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양한(兩漢) 때에 이르면 동서의 융합은 이미 상당히 심화되어 대치하는 형국이 삼대에 미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p238) <이하동서설> 中


 저자 부사년은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동-서' 대립이라는 일련의 역사법칙을 도출해낸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립 속에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하동서설>에서 동이(東夷)라는 단어지만, 사실 부사년이 말하고 싶었던 바는 '하(夏)'다. 1928 ~ 1937년까지 은나라의 중심지였던 은허(殷墟) 발굴을 주도한 그는 중국 역사를 보다 이른 시기인 '하'나라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하동서설'을 주장하였고, 이 책은 이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주장한 학설은 이후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해 <이하동서설>의 연구결과는 현재 거의 폐기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하동서설'은 중국 '동북공정 東北工程'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핵심 이론 중 하나라는 점과 그가 만든 대립구도를 바탕으로 많은 재야학자들의 이론이 생산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변증법적 규칙을 따라 전국 시기에 융합 혼재하게 되었으니 이 과정이 바로 하(夏), 상(商), 주(周) 왕조가 교체되어 온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중 두드러진 민족 간의 갈등이 바로 동서방간 이(夷)와 하(夏)의 투쟁인 것이다. 진(秦) 왕조가 시작된 이래 2,000년간에 걸친 고대 중국의 민족적 갈등은 남북간 투쟁으로 개괄될 수가 있으므로 광대한 연해지방 이인(夷人)들은 혹은 북쪽으로 이주하여 베링 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거나,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여러 섬들 및 심지어는 남태평양을 거쳐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p325) <이하동서설 : [부록] 동이(東夷)와 그 역사적 지위> 中


 대개 은나라 사람들은 동방의 이인(夷人)들 가운데에서 가장 선진적인 일부였을 것이며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지니고 갔던 일정한 사회풍습은 은상(殷商)과 떼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사물의 발전추이란 언제나 불균형성을 띠고 있어 선진성과 낙후성이 곧잘 동시에 공존하기도 하므로, 광범위한 동방의 이인(夷人) 지역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원시부락과 그들의 사회적 유물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p314) <이하동서설 : [부록] 동이(東夷)와 그 역사적 지위> 中


 <이하동서설>과 [부록]에 수록된 글 속에서 우리는 동이(東夷)가 중국 문명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반(反) 역할을 수행하는 변증법의 요인에 불과함을 확인하게 된다. 후한 시대 이후 중화 문명이라는 하나의 합(合)으로 녹아들어갔다는 그의 학설 속에서, 고구려 역사가 중국 지방 정부의 역사라는 구도로 발전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야 사학에서 이러한 '동 - 서' 대립 구도를 그대로 차용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하는 것은 우려가 되는 지점이다. 

 

 이처럼 <이하동서설>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역사책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하동서설>을 읽어야 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역사관의 확립을 위해서가 아닐까. 역사(歷史)는 진실(眞實)이어야 하고, 객관적 사실에서 교훈(敎訓)을 끌어내는 것은 후대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바른 역사관의 정립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하동서설'은 목적 역사관의 한계를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역사관은 아니지만,  관련하여 고(故) 리영희님(李泳禧, 1929 ~ 2010)의 언론관과 관련한 명언을 마지막으로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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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0 0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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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0 0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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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1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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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1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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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2 0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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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2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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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2 1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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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3 1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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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3 1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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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그림찾기 : 찾아라!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제목처럼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숨은 그림 찾기 책입니다. 사진처럼 예쁜 그림속에 숨겨진 물건 또는 생물을 반복적으로 찾도록 구성된 책 속에서 단순히 숨은 그림 찾기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각 장의 하단에는 찾아야하는 대상과 숨겨진 대상의 갯수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개(그림)×3 마리‘ 이런 식이지요. 여기까지는 다른 책들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만, 숨은 그림을 찾으면서 독자들은 책의 특징을 파악하게 됩니다. 복수로 찾아야하는 대상들은 나름의 차이가 있습니다. 크기가 다른 새, 먹다 남은 사과, 치와와와 푸들 등이 각각 같은 범주의 대상으로 묶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를 통해 크기, 상태, 종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를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물론, 아이들 자신들은 잘 모르겠지만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1+1=2‘라는 수리적 계산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다름‘을 자연스럽게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린이 그림책 하나를 가지고 너무 깊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면서도, 이 책 속에 담긴 뜻을 나름 찾아보았습니다...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이 읽을 책들이니 이런 고민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아이와 함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면서 저는 어린이 책에 담긴 숨은 의미를 찾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ps. 의도치 않게 포켓몬스터 그림을 자주 그리게 되는 요즘입니다. ‘이상해 씨‘를 그렸는데, 원본 그림과 사본에 많은 공통점이 있길 바라보면서 이번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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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08-17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번 여름 휴가때 요 비슷한 책 덕분에 조카들은 물론 부모님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ㅎㅎ
컬러풀해서 보기에도 즐겁고 은근 다들 집중하면서 찾게 되더라구요. ^^
그나저나 그림실력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8-08-17 09:33   좋아요 1 | URL
^^:) 숨은 그림 찾기나 끝말 잇기 등의 놀이는 모두가 함께 할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설해목님 감사합니다. 나중에 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 ‘아빠보다는 잘 해‘라는 자신감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끄적거려 봅니다. ㅋ

후애(厚愛) 2018-08-17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숨은 그림 찾기 좋아하는데 좀 어려운 책들을 구매해 놓은지 오래 되었는데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정말 잘 그리세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8-08-17 10:25   좋아요 0 | URL
저도 아이 덕분에 오랫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숨은 그림 찾기 책은 여러 권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먼저번에 찾았던 그림을 기억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즐거운 독서를 위해서는 복습을 게을리할 필요가 ㅋ 후애님 부족한 그림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선한 가을 날이 느껴지는 오늘 하루 상쾌하게 보내세요^^:)

2018-08-17 1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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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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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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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15: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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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8-08-17 17: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다는 것! 멋진 능력입니다

연의가 본질을 볼 수 있는 귀한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축복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8-17 18:13   좋아요 2 | URL
나와같다면님 감사합니다.^^:) 아마도 저자는 저보다 훨씬 많은 고민을 했을테니, 보다 많은 가르침이 책 안에 담겨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이번에 동화 등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이 간결해보여도 그 이면의 저자 고민은 만만치 않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연의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한층 성장하면서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길 저 역시 함께 기원합니다!
 

 <유럽 도자기 여행>은 북유럽, 동유럽, 서유럽의 도자기 문화사를 다룬 기행문이다. 독일 마이센(Messein)으로부터 시작되는 유럽 도자기 역사는 중국의 청화백자(靑華白磁)의 수입으로부터 출발한다. 동양 도자기를 만나기 이전 유럽에는 고온을 견뎌낼 수 있는 흙이 없었기 때문에, 남유럽이베리아에서는 러스터웨어(lusteware)라는 도기가, 네덜란드 등에서는 마욜리카(majorlica)등의 자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아름다움은 청화백자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이탈리아든 네덜란드든 유럽은 그릇 제작에 사용한 점토의 특성 때문에 흰색 도기는 꿈도 꾸지 못했다. 유럽은 1710년까지 자기 생산에 필수적인 고령토의 존재를 모르거나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1,3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그릇을 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런 온도에서 휘발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안료인 파란 코발트블루의 존재도 잘 몰랐다.(p34)... 이같은 상황에서 매일같이 칙칙한 그릇만 보다가 하얀 눈처럼 우아하기 그지없는 순백색 그릇을 보았을 때 얼마나 설레었을 것인가!(p37)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청화백자는 백자, 즉 하얀 자기에 푸른색 안료인 코발트블루로 그림을 그려 장식한 것을 말한다. 청화백자는 지구의 도자기 역사를 바꾸어놓은 주역이다... 유럽 왕실은 모두 청화백자에 눈이 멀어 너도나도 파란 코발트블루의 바다에 빠져들었다.(p34) 그래서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 ~ 1900)는 청화백자, 즉 쯔비벨무스터(Zwiebelmuster)에 대해 "일상에서 파란색 도자기를 사용할수록 그 깊은 세계에 점점 도달하기 어려워진다"고 표현했다.(p35)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당시 유럽 상류층은 중국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도자기로 생산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아리타 자기의 수입으로부터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아리타 자기를 만들어낸 이는 조선의 도공 이삼평이었다.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 Ceramic war'으로 부른다는 '임진왜란'의 영향은 이처럼 멀리 떨어진 유럽에도 미치고 있었다.


[사진] 청화백자(출처 : 한국경제매거진)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 ~ 1598) 당시 아리타가 속해 있는 사가현(佐賀縣)의 영주였던 나베지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7 ~ 1619)는 1만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 땅에 쳐들어왔다가 나중에 다시 일본으로 퇴각할 때 수만 명(많게는 10여만 명으로 추산)의 도공을 붙잡아와서 일본에 정착키고 자기를 만들게 만들었다. 이때 일본에 잡혀온 이삼평(李參平, ? ~ 1655)은 아리타에 있는 이즈미야마(泉山)에서 태토를 발견해 이곳에 가마를 만들고 일본 최초의 백색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p138)... 1650년대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는 공식 기록에 의한 것만 해도 100여년 동안 120만여 점이 넘는다고 한다.(p139)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일본 도자기가 유럽 왕실에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바닷길을 막는 쇄국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도자기 제품의 수입이 끊기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과 베트남을 새로운 수입처로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아리타 도자기가 유럽에서 각광받게 된 것이다.(p51)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실크로드(Silk Road)를 통해 중국 자기들이 들어오고,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동양으로 진출한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일본 자기가 수입되면서 유럽 도자기 산업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이 경제 성장을 위해 유럽과 미국의 선진기술을 받아들였던 그 방식 그대로 16세기 유럽인들은 모방을 통해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사진] 유럽 도자기(출처 : 경향신문) 


 품질이 월등히 좋은 중국 자기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자 델프트 마욜리카 산업도 일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눈높이가 높아진 소비자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려면 그들 역시 제품의 질을 높이든지, 기존의 색상을 바꾸든지 무엇인가 변해야 했다. 그러면 델프트 도공들은 과연 처음으로 어떤 일을 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가장 쉬운 방법, 그것은 모방이다... 1640년부터 1800년께까지 델프트 도기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 자기를 성공적으로 모방할 수 있었다.(p52)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동유럽 편에서 누누이 살펴본 바와 같이 마이슨 도자기를 제작하게 한 작센의 군주 아우구스트 1세처럼 샹티이의 루이 앙리 왕자 역시 열렬한 동양 도자기 애호가였고, 특히 일본의 아리타 가키에몬 양식을 좋아했다. 이 점 역시 아우구스트 1세와 똑같다. 그래서 샹티이 공장의 초기 제품은 가키에몬 도자기와 거의 흡사한 '파송 드 자퐁 facon de Japon'이 생산되었다. 이들 제품은 언뜻 보면 어느 것이 아리타 자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다.(p453)  <유럽 도자기 여행 : 서유럽편> 中


 이처럼 유럽 도자기는 중국과 조선, 일본의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음에도 이제는 이들 지역으로 제품을 수출할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유럽 도자기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동양에서 출발한 도자기 산업이 유럽에서 꽃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민 클라인(Armin Klein, 1855 ~ 1883)의 인물화 도자기에는 흡사 라파엘전파의 그림속에나 나올 법한 인물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르민 클라인의 도자기를 보고 있으면 캔버스 대신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불에 구워야 한다는 점에서, 화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이지만 도자기의 그림은 깨지지 않는 한 변색되지 않고 영원불멸한 존재로 남아 있을테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p391)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동양에서 도자기는 그릇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나, 유럽에서는 이를 넘어서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 타일을 비롯하여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까지 활용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신(神)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럽인들의 취향과 도자기의 속성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인간의 유한함을 강조하며 건물에 나무(木)을 많이 사용하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서양만큼 도자기의 절대성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용도에 제한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그림] 극세밀화로 복원된 황룡사 9층 목탑(출처 : 중앙일보)


 그리고, 이러한 수요(需要, demand)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경제주체들의 결합을 유도하고 그 결과가 오늘날의 유럽 도자기 산업과 우리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해 본다. 큰 시장(市場)이 있는 곳에는 생산을 위한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기 마련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기에, 20세기 소비 사회를 통찰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 ~ 2007)의 주장은 유럽 도자기 발전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독점적 생산은 결코 단순히 재화의 생산만은 아닌, 항상 제(諸) 관계의 (독점적) 생산이며, 여러 차이의 생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거대한 트러스트와 미소(微小)한 소비자, 생산의 독점적 구조와 소비의 '개인주의적' 구조 사이에는 논리적 공범관계(共犯關係)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개인이 욕심부리며 '소비하는' 차이는 또한 일반화된 생산의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늘날에는 독점의 영향하에서 대단히 폭넓은 균질성이 생산 및 소비의 여러 내용(재화, 생산물, 서비스, 관계, 차이)을 결합시키고 있다.(p119) <소비의 사회> 中


 <유럽 도자기 여행>에서는 이처럼 유럽의 여러 지역의 아름다운 도자기 사진과 함께 도자기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럽 도자기의 발전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 또한 자리잡고 있음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책을 통해 도자기라는 씨앗의 원산지는 동양이었으나, 이를 꽃피운 곳은 유럽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도자기 문화를 꽃피운 유럽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것에 대해서 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은 우리 곁에 있지만,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은 아닐까. 


 2018년 광복(光復) 73주년을 맞아 근대화(近代化)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부정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유럽 도자기 여행>을 통해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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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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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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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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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2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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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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