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3 - 한니발 전쟁기 리비우스 로마사 3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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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카르가 아이가테스 제도에서 패배하고, 이후 에릭스에서 패배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24년의 전쟁 동안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겪었던 고통을 상기하십시오. 당시 우리의 지휘관은 이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하밀카르였지요.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제2의 마르스(軍神)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로마와의 협정 조건에 따라 우리는 이탈리아에 개입하면 안 되는데도, 이탈리아의 땅 타렌툼에 간섭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지금 그 역사가 바로 사군툼에서 반복되는 중입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26/1226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3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21~30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 전체 시리즈 4권 중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된 3권에서는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 Bellum Hannibalcum, BCE 218 ~ 202)의 시기를 다룬다.  유명한 한니발 전쟁을 배경으로 하기에 <리비우스 로마사 3>의 서술은 마치 <삼국지연의>를 읽는 듯 긴박하게 그려진다. 한니발의 탄생으로 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전쟁 전반부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1)이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 BCE 216)에서 대승을 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시점을 돌아, 전쟁 후반부에서는 로마의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E 235 ~ 183)는 자마 전투(Battle of Zama, BCE 202)에서 압승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짓고, 리비우스의 30권 내용도 함께 끝난다.


 한니발 전쟁을 다룬 책이나 리뷰는 매우 많기에, 굳이 여기에 전쟁의 내용을 다룬 리뷰 하나를 추가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대신, 한니발 전쟁을 바라보는 리비우스 그리고 그가 속한 로마인들의 관점을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한니발은 아주 위험스러운 상황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오히려 전보다 더 탁월한 전술 능력을 선보이며 돌파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칠 줄 몰랐고, 무더위나 혹한이나 똑같이 쉽게 견뎌냈다... 그의 미덕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그가 보인 여러 미덕들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결점 역시 그에 못지않게 대단했다. 그는 비인간적이라고 할 정도로 잔혹했고, 일반적인 카르타고 인보다 더 신의가 없었고, 진실, 명예, 종교, 맹세의 신성함, 다른 사람이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이런 미덕과 악덕의 특징을 갖춘 채, 그는 하스드루발의 지휘 아래 3년을 복무하면서, 장차 위대한 사령관 후보로서 반드시 보아야 하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학습하며 실천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5/1226


 우리는 한니발에 대한 리비우스의 서술에서, 그를 바라보는 로마인의 상반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뛰어난 능력과 부하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리더쉽 등. 리비우스는 지휘관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덕목을 갖춘 한니발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가해지는 그의 인간적인 성품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한니발의 뛰어난 자질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간적인 결점을 드러내며 험담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리비우스의 서술은 로마인이 한니발을 바라보는 시선 그 자체가 아닐까. 마치, 중국인들이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 598 ~ 649)을 죽음 가까이까지 몰아넣은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 594 ~ 666)을 악의 화신으로 기억하듯.


 전하는 말에 따르면 총 45,500명의 보병과 2,700명의 기병이 전사했고, 로마 인과 동맹 시민의 전사자 비율은 거의 같았다고 했다. 전사자 중엔 집정관 직속의 두 재무관 루키우스 아틸리우스와 루키우스 푸리우스 비바쿨루스, 29명의 천인대장, 다수의 전직 집정관, 다수의 전직 법무관이나 토목건축관이 있었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이전 해 사마관이자 몇 년 전에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미누키우스도 전사했다. 원로원 의원이나 원로원 의원 자격이 부여되는 공직을 지낸 사람들 80명도 군단 복무를 자원했는데, 이들도 전투 중에 사망했다. 3천 명의 보병과 1천 5백 명의 기병은 포로로 붙잡혔다. 이상이 칸나이 전투의 개요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230/1226


  로마 역사상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칸나이 전투를 넘어선 패배는 없었기에, 이러한 좌절을 안긴 한니발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리비우스 또한 역사가 이전에 로마인이었기에 이런 주관적인 서술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렇지만, 한니발이 수세(守勢)로 몰리면서 전장이 이탈리아를 벗어나 에스파냐, 아프리카로 옮겨졌을 때 로마군들이 한 행동을 서술한 리비우스라면 과연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의 잔학함을 악(惡)으로 몰아 비판할 수 있을까. 로마군이 한니발 전쟁에서 그리고 제국 팽창 과정에서 벌어질 수많은 참상의 원흉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그런 자격은 없어보인다. 인용부분에서는 동포들의 손에 학살당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로마인의 약탈 또한 정도가 결코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런 유혈극은 전쟁에서 벌어지는 통상적인 과정이었다. 격분한 로마 인들은 저항 가능한 무장한 적들과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수백 명의 힘없고 무방비 상태인 여자들과 아이들이 동포들의 손에 학살당한 것이었다. 시장엔 커다란 화톳불이 붙었고, 종종 아직도 숨을 쉬는 사람들이 그 불에 던져졌다. 화톳불은 피의 강으로 거의 꺼졌다. 마침내 도살을 맡은 자들이 그 끔찍한 일을 끝냈고,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손에 칼을 든 채로 불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학살이 끝나자 로마 인들이 도시에 나타났다. 이 광경에 로마 인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라며 멈춰 섰다. 잠시 그들은 입을 벌린 채 서서 그 참상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시신과 잡다한 물건이 싸인 곳에서 금과 은이 반짝거리는 걸 보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탐욕에 휩싸여 화톳불 속에서 그 보물들을 낚아채고자 했다. 화톳불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은 뒤에서 물건을 빼내려고 밀려오는 무리 때문에 불길에서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고, 몇몇은 불속으로 밀려들어가 타죽었고, 다른 일부는 맹렬한 열기에 온 몸을 그을렸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866/1226


 리비우스의 한니발에 대한 평가는 후반부에 다시 이루어진다. 한니발 몰락기에 리비우스 자신이 직접 역사서의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이루어진 재평가는 앞서와 사뭇 결이 다르다. 


 실제로 나는 한니발이 성공을 누릴 때보다 운이 기울었을 때 더욱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고국에서 머나먼 적의 영토에서 13년 동안 싸우면서 많은 흥망성쇠를 겪은 그의 군대는 카르타고 인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 온갖 국적의 천민들이 뒤범벅된 그런 군대였고, 병사들은 법, 관습, 언어가 모두 달랐으며, 예절, 의복, 장비는 물론 섬기는 신과 종교 의식의 형태도 어느 것 하나 같은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이 잡다한 무리를 굳게 결속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단 한 번도 싸우는 일이 없었으며, 한니발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놀라운 건 급료를 지급할 자금이 빈번히 부족하고 식량도 자주 떨어졌음에도 일절 반항의 기미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는 그런 일로 장교와 병사 모두가 형언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승전의 희망이 전부 사라진 데다 하스드루발이 전사함과 동시에 휘하 병력이 괴멸하고, 이탈리아의 작은 구석인 브루티움 하나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전역을 포기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진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841/1226


 로마의 반격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연이어 세력을 잃어가고,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에스파냐를 포기하고 넘어온 동생 하스드루발마저 죽음을 당한 절박한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 한니발에게 리비우스는 경의를 표한다. 그는 포르투나(fortuna)에 맞선 비르투(virtu)의 고귀함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리비우스의 서술에서 앞선 한니발에 대한 악의적인 서술만큼 진실성을 느끼기 어렵다. 이제 승기를 잡은 자의 어설픈 관용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리비우스의 경의에도 불구하고 <리비우스 로마사 3>을 통해 한니발은 사악한 전쟁신(神)에서 거센 운명에 맞서는 인간(人間)으로 격하된 느낌이다. 이렇게 리비우스가 악(惡)으로 규정한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전쟁은 왜 일어난 것일까? 


 한니발은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사군툼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 도시를 직접 공격하면 로마가 행동에 나설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는 먼저 올카데스 부족 영토를 침공했다. 이 부족은 에브로 강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카르타고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 안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카르타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6/1226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배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그들이 동정을 얻기는 힘든 일이었다. 전략 회의가 열렸고, 모두가 정당한 분노를 느끼며 카르타고 파괴를 촉구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저런 방어 시설과 자원을 갖춘 도시를 포위하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은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게다가 스키피오는 자신이 노력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사실상 끝낸 전쟁의 영광을 자신의 후임자가 가져가고, 승리의 보상도 그가 챙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이에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평화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갔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098/1226


 리비우스는 한니발 전쟁의 발단을 한니발의 사군툼 공격에서 찾는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평화를 위한 협약이 카르타고의 친로마 중립 도시 사군툼 공략으로 깨지면서 평화를 위한 로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고, 로마는 평화를 지키기위한 정의로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음을 강조한다. 21권의 시작이 한니발의 맹세와 성장, 사군툼 공략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숨겨진 진실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리비우스가 서술하지 않은 부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후 해외 진출 방향을 에스파냐 방면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카르타고의 속사정과 이마저도 에브로 강 이남으로 제한하려는 로마의 압력과 중립 도시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카르타고를 자극했던 로마의 술수는 과연 한니발 전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리비우스 로마사 3>의 내용은 매우 흥미진지하다.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 1937~ ) 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2권 <한니발 전쟁>에서 전쟁 관련한 대부분의 내용이 리비우스의 저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몰입도가 높은 역사서다. 다만, 카르타고와 로마가 벌이는 검투 경기에 열광한 독자들의 시선이 피끊는 전장에 머무는 동안, 그들에게 씌워진 선(善)-악(惡)의 프레임은 승자(勝者)가 정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스페인의 로마 동맹시인 사군툼을 포위 공격한 것이었다. 그 전에 그러니까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인들은 동부 스페인의 공동체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곳에 진출한 카르타고의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로마는 기원전 226년 에브로 강 이남의 지역(카르타고가 지배하는 지역)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나 곧 그것을 위반했다. 당연히 카르타고는 로마의 이런 움직임에 반발했다. 카르타고 인들은 스페인의 광업과 농업 자원에 투자한 자국의 중요한 상업적 이해사항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크게 우려했다. 로마 원로원은 그 전의 맹세는 무시해 버리고 카르타고를 물리쳐 달라는 사군툼의 호소에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맹세 위반이라는 국제적 신의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카르타고는 어차피 인간적 도덕성이 결여된 야만인이므로 그런 맹세는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게 로마의 일방적 판단이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142/1226


스페인 부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두는 능력이 탁월했던 하스드루발 덕분에 로마 인들은 평화 협정을 갱신하여 에브로 강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영토 구분선으로 삼아, 사군툼의 중립성을 확보함으로써 일종의 완충국 역할을 그 도시에 맡겼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2/1226

스페인의 전반적인 상황은 어떤 측면으로는 이탈리아와 무척 비슷했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무척 달랐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령관을 잃은 카르타고 인들이 대서양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던 점은 이탈리아의 상황과 유사했다. 하지만 스페인이 이탈리아와 다른 것은 지역의 특성이나 그곳 주민들의 기질이 세상 다른 어떤 곳보다 패배를 태연하게 여기며 새로운 적대 행위에 나서는 일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이 로마 인들의 첫 번째 속주가 되고,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야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리더십과 지원 아래 완전히 정복된 마지막 지역이 된 이유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842/1226

로마 인들과 카르타고 인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았고, 둘 다 똑같이 끔찍하게 시달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후자는 병으로 고통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식량 공급마저 부족했다. 한니발은 유노 라키니아 신전 근처에서 여름을 보냈고, 그곳에 제단을 세웠고 제단 밑에는 자신의 업적을 장황하게 기록한 기명(記銘) 판을 설치했다. 기명 속의 문장은 카르타고어와 그리스어로 새겨졌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92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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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장비가 술을 많이 마시고 계략이 부족하다는 서술은 없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장비가 술을 많이 마시고 사고를 치며, 용맹하지만 머리는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는 독자들과 청중들을 위해 장비의 이미지를 바꾼 것이다.

『삼국지/촉서』의 기록이 부족하여 통혼 계보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지만, 현재의 자료로는 촉나라 황실이 관우·장비·마초·제갈량의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은 이들 후손들을 조상들처럼 촉나라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친위 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지만, 장비의 자손들은 대부분 장비와 달리 무장이 아닌 문신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장비의 후손들이 문관, 관우·조운의 후손들이 무장으로 활동한 점을 비교하면 장비 역시 교양과 학식을 갖췄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점 때문에 장비의 딸들이 현모양처의 자질을 길러 황후에 임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기록 이면에 감춰진 장비의 진면목이다.

요컨대 조조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선양이라는 정권 교체 방식이 만연한 시대에 조조는 상대적으로 존중되었지만, 선양과 찬탈이 터부시되던 송나라 이후에는 악인으로 낙인찍혔다.

한편으로 조조는 악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투에서 초반에는 지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때 독자와 청중들은 가슴 졸이며 조조가 지기를 바라지만 거의 대부분 이긴다. 앞에서 통계수치를 내본 것처럼 조조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관도 전투처럼 접전을 벌였던 적도 있지만 대부분 손쉽게 일방적으로 이겼다. 그러나 소설 삼국지에서 조조가 처음부터 손쉽게 이겼다고 기록하면 독자와 청중들은 얼마나 허무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독자와 청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도 이러한 허구적인 내용을 추가해야 했다. 조조는 소설 삼국지의 흥행을 위해 왜곡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시대 분위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전근대사를 두 시기로 나누라면 당나라와 그 이전의 시기, 송나라와 그 이후의 시기로 나눈다. 이 두 시기는 확실히 다르다. 대체로 후자의 시기에는 수나라 때 창시된 과거제도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당나라 시대까지 가문의 힘에 의해 출세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송나라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과거에 합격해야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민들이 지배층에 대거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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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이 1월4일 기자회견을 열고 중재에 나섰다. "정부도, 서울시도, 그리고 대다수 언론도장애인들이 왜 지하철에 타고자 하고 선전전을 이어가려 하는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고만 말하며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 뿐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혐오와 갈등의 열차를 멈추고, 대화에 나서야 합니다." - P10

문제는 현재 윤석열 정부가 앞세운해법에는 ‘일본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제3자)이 한국 기업의 돈을 받아서 피해자(채권자)에게 주는 안만나와 있다. 일본 기업(채무자)의 사과와 참여가 담보되지 않은 방식이다. ‘한국 선(先) 참여, 일본 후(後)동참‘이라는 백브리핑이 나오지만, 아직까지는 확실한 게 없다. 30%대로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 중인 기시다 내각이 이를 할 수 있을지 당장 의문이 나온다.  - P13

핵심은 ‘일본의 과거 사죄와 한국의미래 지향‘이다. 두 내용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가 빠지면 공동선언은 성립하지않는다는 의미다. 한·일 관계에서 이 두가지가 같이 작동할 때 선순환했다. 한국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이슈해결에서도 예외 없는 원칙이다. - P15

아픈 한국 현대사를 살아오며 10대소녀는 이제 구순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2012년부터 한국 법정에서 미쓰비시 손해배상 소송, 미쓰비시 국내 상표권·특허권 압류 소송, 압류 자산 강제매각 1·2심등 여덟 번을 승소했지만 여전히 배상금도, 사죄도 받지 못했다. 수십 년간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싸워온 당사자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데 집권 8개월째에접어든 정부는 이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려 한다.  - P18

조씨가 이렇게 버젓이 부동산 사업을벌일 수 있었던 데에는 검찰의 늑장 수사가 한몫했다. 서울남부지검은 경찰로부터 사건을 받은 이후에도 별다른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담당 검사가바뀌기도 했다. 검찰의 늑장 수사·기소는조씨가 법망으로부터 빠져나갈 길도 마련해줬다.  - P31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육군 대장 출신으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냈다. 그가 보기에 이번 사건의 본짙은 강경책과 유화책의 대립이 아니다.
무능이다. 상대 기체를 요격하지 못한 작전 실패만 뜻하지 않는다. 4성 장군 출신인 김 의원은 윤 대통령이 "위기관리의ABC도 모르는 판단만 했다"라고 말했다. - P33

이처럼 어린이 보행 안전을 위해 아직 해보지 않은 일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한국 사회는 지난 3년간 ‘민식이법‘과
‘스쿨존‘ 테두리에 갇혀 좀체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구해야 할 답은 ‘민식이법이 옳은가 그른가, 스쿨존 제한속도는 적절한가 아닌가‘를 넘어 ‘도로 위에서 아이들이 덜 죽고 덜 다치는 방법‘인데 말이다.  - P41

엄마들은 출산과 육아를 앞두고 맘카페에 가입하거나 먼저 그것을 경험한 친구·선배들과 만나면서 지식을 전수받고 또 실전에서 문제가 생길 때 도움을 청하기도 하죠.
그런데 아빠들은 이런 모임도, 동지도, 스승도 없습니다. 충분히 배우지 못하고 무작정 투입된 아빠들이 실전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에라, 못하겠다‘ 다시 육아 전선에서 뛰쳐나오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겠죠.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로 가려면 단순히 아빠의 육아 참여를 독려하는 데서 더나아가야 합니다. 아빠의 실질적 육아 능력을 기르는 일 또한 필수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인식하고 팔 걷어 도와야 합니다. - P53

AI 섹스 로봇은 수많은 질문을 낳는다.
외로워서 섹스 로봇을 선택한 인간들이,
그 때문에 더 완전히 고립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요양원 노인이나 장애인 등 성생활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섹스 로봇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챗GPT처럼 고도로 발달된 챗봇과 섹스 로봇이 결합될 경우, 사람들이 섹스 로봇을 연인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그러면 그 연인의 ‘로봇권‘을주장하는 이들도 나타나지 않을까. 로봇과의 섹스가 ‘뉴 노멀‘이 되기 전에, 우리는 이 질문들에 답을 해야 한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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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와 다른 소년들의 상태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정서적 접촉에 대한 자폐적 장애’로 명명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카너는 도널드와 비슷한 행동 패턴이란 맥락에서 최초로 사용한 "자폐적"이란 말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 어린이들이 아주 이른 유아기부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능력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반적 건강 상태와 "타고난 지적능력"에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자폐증 또는 자폐적이란 말 역시 카너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병의 증상을 뜻하는 말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바로 조현병이다. 이런 차용은 이후 자폐증을 논의할 때 두고두고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지만, 카너 입장에서 보면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당시 조현병이란 병명은 환각, 사고장애, 현실과 비현실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잡다한 정신질환에 널리 사용되었다.

결정적인 두 가지 특징을 파악한 사람이 바로 카너였다. 어린이들은 극단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극단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동일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그는 두 가지 극단적 성향이 새로운 증후군의 핵심이며, 그때까지 차이점에 주목한 탓에 공통점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듀이는 1950년대에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아들 덕에 고대 방랑자들의 행동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었다. 신성한 바보들의 행동을 광기나 성스러움이 아닌 자폐증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 선입견에 구속되지 않았으며", 고립된 상태로 사는 데 만족했다. 몇몇은 의식儀式에 가까운 틀에 박힌 행동을 반복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빅터가 놀랄 만큼 선택적으로 듣는다는 것이었다. 특정한 소리는 마치 귀가 안 들리는 것처럼 완전히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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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샘 2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2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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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EC은 창설 초기에 단 두 가지 목적에만 주력했다. 첫째는 석유회사들이 일방적으로 주요 조치를 취할 때 조심하게 하는 것, 둘째는 석유업자들이 공시가격을 다시 내릴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OPEC이 초기 10년 동안 별로 비중 있게 보이지 않았던 데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이란을 제외한 모든 회원국에서, 지하에 매장된 석유자원이 이권자인 석유회사 소유였으므로 회원국의 통제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218


 대니얼 예긴(Daniel Yergin, 1947 ~ )의 <황금의 샘 The Prize>은 19세기 말 영국, 석탄,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패권이 20세기 미국, 석유, 에너지 혁명으로 대체되는 역사를 다룬다. 1권에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를 중심으로 한 석유 메이저(슈퍼메이저 Supermajor)의 역사를 주로 다루어졌다면, 2권에서는 여기에 대항하는 OPEC가 주도권을 잡은 20세기 후반까지의 석유 산업의 역사가 다루어진다. 20세기판 제국주의 열강들의 동인도회사라 할 수 있는 슈퍼메이저들의 압력에 대항하여 가격 주도권을 상실한 공급자들의 모임이었던 OPEC. 이들은 이떻게 석유의 가격결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반격의 역사가 여기에 펼쳐진다. 1945년 전후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의 후유증은 매우 컸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세계 전역은 전장(戰場)이 되었고, 유럽의 열강들 또한 이러한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전후 복구를 위한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 무엇보다도 에너지원인 석유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석유 부족의 원인은 명백했다. 전후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소비가 가공할 정도로 급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쉘사의 설명이다. 옥탄가 100인 전투기용 항공 연료가 아니라, 휘발유와 가정의 난방 연료처럼 민간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정유소들을 재설계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금과 물자가 필요했다. 또한 전 세계적인 철강 부족 현상도 문제였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46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유럽의 에너지 위기였다. 석탄 생산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생산성도 저조했고 노동 인력마저 와해되었다. 더구나 많은 나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석탄 광부노조를 주도했다. 석유는 문제의 단편적 해결책에 불과했고, 산업용 보일러와 발전소의 석탄만 대체할 수 있었다. 석유는 분명히 유럽의 항공기, 자동차, 트럭들의 유일한 연료원이었다. 당시 미국 정보의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독되어 있었다. "석유 없이는 마셜 플랜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66


 전쟁 기간 동안 배급제로 억제되었던 석유 수요는 종전 후 바로 폭증했고, 미국은 더 이상 에너지를 공급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소련은 동유럽으로 세력을 뻗치고 새롭게 석유 자원을 확보하면서 빠르게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러한 상황에 서구 세계를 구원할 자원공급자가 바로 페르시아만 인근 중동국가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열강들이 오스만 투르크를 해체시키기 위해 수많은 독립국가들로 분할통치했던 이들 지역이지만, 전후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하게 커지면서 국제정치관계의 축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제 더이상 과거처럼 일방적인 가격 수용자(price taker)가 아니었다. 


 전후 석유산업의 질서는 두 가지 토대 위에 세워졌다. 하나는 중동에서 조업하는 대형 석유회사들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규정한 1940년대의 석유 협정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석유회사들과 산유국, 그리고 정부 간의 석유 이권 및 계약 관계였다. 이 두 가지를 토대로 세계 석유 질서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 대형 석유회사와 소비국 정부들은 이익 반분 원칙을 따르지 않을 경우 발생할 결과를 우려하여 그것을 준수할 수밖에 없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183


  슈퍼메이저들과 산유국들의 이익배분구조는 50:50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다만, 이러한 안정은 1960년대 후반 석유 수요가 공급을 초월하고, 미국의 베트남전 패전 등으로 힘을 상실하면서 깨졌다. 가격 결정권이 중동 산유국들로 넘어오면서 이제 슈퍼메이저 대신 OPEC가 석유 시장의 지배자로 등장한다. 이들은 강력한 공급량 조절을 통해 1973년과 1978년 2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Oil Crisis)를 통해 자신들의 변화된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이란-사우디, 이란-이라크의 내부 갈등과 북해 유전, 멕시코 유전 등 비OPEC 지역의 유정(油井) 개발, 선물(futures) 거래라는 금융 거래 등으로 과거와 같은 위상을 더는 갖지 못하게 된다.


 전후戰後의 중동 석유 질서는 미국과 영국의 지배력 아래에서 형성되고 유지되었다. 1960년대 후반, 양국의 정치적 힘은 퇴조했고 이는 석유 질서의 정치적 기반 역시 약화되었음을 의미했다. 미국은 월남의 실패로, 수년 동안 돈은 돈대로 들고 인기가 떨어져 진창에 빠진 신세가 되었다.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반미주의가 풍미하고 이는 제국주의, 신新식민주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294


 세계 전역의 수요가 한정된 공급량을 놓고 경합했기 때문에 시장가격은 공식가격을 상회했다. 이는 20년간에 걸친 과잉생산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결정적인 변화였다. 오랫동안 시장가격은 만성적인 과잉 생산을 반영해 공식가격을 하회했고, 이것은 기업과 정부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었다. 수출국들도 이 새로운 파도에 편승하고자 했다. 공식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익이 기업에 흡수되는 것을 손놓고 보지는 않았다.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336


  우리는 흔히 시아파의 나라 '이란'과 주변국들의 갈등을 이스라엘에 효과적으로 대항하지 못하는 아랍의 분열 문제로 아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는 진실의 절반에 불과하다. 사우디-이란의 경쟁 관계는 과거 아람코, 앵글로-이란, 걸프=쉘로 대표되는 대규모 유정 개발 조약 시기부터 시작된다. 이후 이란이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0 ~ 1989)가 정권을 잡은 후 혁명 수출을 두려워하는 사우디 왕조와의 대립이 진행형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경우는 다수의 시아파 시민들을 소수의 수니파 후세인 정권이 지배하던 이라크 정권이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으며 일어난 전쟁으로 이의 배후에는 유전 지대의 귀속 문제가 자리한다. 결국 이들 사우디-이란, 이란-이라크 갈등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알리(Ali ibn Abi Talib, 601 ~ 661)의 불행으로 부터 시작된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문제의 본연에는 정치와 경제적 이권 문제임을 파악하게 된다. 


 두 나라 사이에는 많은 갈등 요인이 있었다. 사우디는 아랍 종족으로 수니파 회교국이었고, 이란은 아랍 종족이 아니며 시아파 회교국이었다. 양국은 중동 지역 및 산유국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고, 영토 확장의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석유 생산량을 두고 경쟁하면서 양국 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질투와 의심을 키워나갔다. 석유 생산은 바로 부富를 의미했고 부는 힘, 영향력, 존경이었기 때문이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231


 이란 국왕은 1968년 이라크의 실권을 장악한 비종교적인 바스당 체제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라크와 이란 양국의 최대 현안은 샤트 알 아랍, 이라크 영내를 흐르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과 이란 영내의 하천 몇개가 만들어낸 삼각주 지대를 둘러싼 문제였다. 샤트 알 아랍 수로는 120마일에 걸친 양국의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샤트 알 아랍의 삼각주지대에 건설된 아바단 정유소를 보유한 이란으로서는 페르시아 만으로나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출구는 아니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516


 <황금의 샘 2>에서는 1990년대 걸프 전쟁까지 석유를 둘러싼 국가, 기업들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을 볼 수 있다. 국가 이익 앞에서 영원히 굳건할 것으로 보이는 미국-이스라엘, 미국-일본의 관계가 흔들리는 모습, 석유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감산(減産) 협정을 어기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비정한 외교관계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석유 위기와 함께 대두된 대체 에너지 개발 문제가 이미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화두였음을 생각해볼 때, 최근 강조되는 기후위기와 이에 대한 대첵으로 RE100에 대한 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겠다. 그 이면에 포스트 페트로(Post Petro)시대의 에너지 패권에 대한 정치적 야욕은 과연 없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에 대한 현재 우리의 준비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추가로 던지게 된다. 


 이제 책 전반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황금의 샘>은 석유의 역사를 통해 '도전-응전'이라는 경제사의 일면을 확인시켜 준다. 석유의 역사는 단지 한 상품의 역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석탄에서 석유로의 주력 에너지원의 변화 과정에서 보여지는 정치적 문제, 대중문화 및 소비사회로 정의되는 20세기 문화사, 석유 결제 대금을 둘러싼 달러 패권이라는 경제 문제 등 석유는 모든 분야에서 깊숙히 관계한다. 저자는 이러한 석유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문제 - 기후 위기, 대체 에너지 문제, 중동 문제 -등의 배경과 전망 등을 상세히 풀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가격 인센티브와 안보에 대한 동기부여가 OPEC 이외의 지역에서 석유 개발을 촉진하고 있었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 새로운 지역들이 세계 석유 공급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데에는 신규 석유생산지 3곳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알래스카, 멕시코, 북해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모두 1973년 석유 파동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반대와 기술적 장애, 시간이라는 단순한 요인, 에너지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긴 준비 기간 등의 이유로 개발되지 못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453


 석유산업 구조 개편의 핵심은 '가치의 공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가치의 공백'이란 회사의 주가가 회사 소유의 석유 및 가스 매장량의 시장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하지 못함을 가리키는 용어다. 주식 가격과 자산 가치의 차이가 크다는 것은 기업에게 치명적이다. 새로운 경영 방식을 통해 과거의 경영이 하지 못했던 '주주들의 가치' 증대를 도모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탐사에 의해 석유를 1배럴 추가하려면. 기존에 운영되는 자산을 구입하는 것에 비해 2~3배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멕시코 만이나 텍사스에서 탐사를 하는 것보다 뉴욕의 증권거래소에서 석유를 구하는 것, 즉 평가절하된 회사를 매입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여기에서도 '주주들의 가치'가 추진력이 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2> , p547


자국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99%를 수입하는 일본은 가능한 한 최저가격을 선호할 것이라 예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격이 너무 낮을 경우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대체에너지 부문의 투자를 줄여서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결국 새로운 취약성을 노출해 또 다른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 둘째, 석유는 일본의 수입품 중 상당부분을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낮은 가격은 막대한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를 더욱 확대할 것으로 보였다. 이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와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의 석유업계와 정부는 대체로 8달러가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 P600

석유의 역사는 승리의 파노라마와 비극적이고 값비싼 희생을 치른 오류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성의 고귀한 면과 비열한 면을 모두 보여준 하나의 무대였다. 창조성 ·헌신 · 기업가정신 · 독창성 · 기술 혁신이 탐욕 · 부패 · 맹목적인 정치적 야심 ? 폭력 등과 함께 존재했다. 석유는 물질세계를 지배할 힘을 부여했다. 석유는 농약이나 연료로 형태를 바꾸어 인류의 의식주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또한 세계 정치와 경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인류는 많은 피를 흘렸다. 석유를 손에 넣어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은 석유가 중심적 위치를 유지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문명의 모든 측면은 석유의 현대적이고 매혹적인 연금술에 의해 변화되어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바로 석유의 시대다. - P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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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1-15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오래전에 읽었어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겨울호랑이 2023-01-15 19:50   좋아요 1 | URL
저는 이번에 알았는데 이미 90년대에 고려원에서 초판이 출간된 책이네요. 지금도 저자의 직관이 유효한 것을 보면 시대를 앞선 책이라 여겨집니다.^^:)

서니데이 2023-02-07 2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2-07 22:5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