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3 - 한니발 전쟁기 리비우스 로마사 3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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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카르가 아이가테스 제도에서 패배하고, 이후 에릭스에서 패배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24년의 전쟁 동안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겪었던 고통을 상기하십시오. 당시 우리의 지휘관은 이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하밀카르였지요.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제2의 마르스(軍神)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로마와의 협정 조건에 따라 우리는 이탈리아에 개입하면 안 되는데도, 이탈리아의 땅 타렌툼에 간섭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지금 그 역사가 바로 사군툼에서 반복되는 중입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26/1226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3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21~30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 전체 시리즈 4권 중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된 3권에서는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 Bellum Hannibalcum, BCE 218 ~ 202)의 시기를 다룬다.  유명한 한니발 전쟁을 배경으로 하기에 <리비우스 로마사 3>의 서술은 마치 <삼국지연의>를 읽는 듯 긴박하게 그려진다. 한니발의 탄생으로 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전쟁 전반부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1)이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 BCE 216)에서 대승을 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시점을 돌아, 전쟁 후반부에서는 로마의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E 235 ~ 183)는 자마 전투(Battle of Zama, BCE 202)에서 압승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짓고, 리비우스의 30권 내용도 함께 끝난다.


 한니발 전쟁을 다룬 책이나 리뷰는 매우 많기에, 굳이 여기에 전쟁의 내용을 다룬 리뷰 하나를 추가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대신, 한니발 전쟁을 바라보는 리비우스 그리고 그가 속한 로마인들의 관점을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한니발은 아주 위험스러운 상황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오히려 전보다 더 탁월한 전술 능력을 선보이며 돌파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칠 줄 몰랐고, 무더위나 혹한이나 똑같이 쉽게 견뎌냈다... 그의 미덕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그가 보인 여러 미덕들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결점 역시 그에 못지않게 대단했다. 그는 비인간적이라고 할 정도로 잔혹했고, 일반적인 카르타고 인보다 더 신의가 없었고, 진실, 명예, 종교, 맹세의 신성함, 다른 사람이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이런 미덕과 악덕의 특징을 갖춘 채, 그는 하스드루발의 지휘 아래 3년을 복무하면서, 장차 위대한 사령관 후보로서 반드시 보아야 하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학습하며 실천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5/1226


 우리는 한니발에 대한 리비우스의 서술에서, 그를 바라보는 로마인의 상반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뛰어난 능력과 부하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리더쉽 등. 리비우스는 지휘관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덕목을 갖춘 한니발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가해지는 그의 인간적인 성품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한니발의 뛰어난 자질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간적인 결점을 드러내며 험담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리비우스의 서술은 로마인이 한니발을 바라보는 시선 그 자체가 아닐까. 마치, 중국인들이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 598 ~ 649)을 죽음 가까이까지 몰아넣은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 594 ~ 666)을 악의 화신으로 기억하듯.


 전하는 말에 따르면 총 45,500명의 보병과 2,700명의 기병이 전사했고, 로마 인과 동맹 시민의 전사자 비율은 거의 같았다고 했다. 전사자 중엔 집정관 직속의 두 재무관 루키우스 아틸리우스와 루키우스 푸리우스 비바쿨루스, 29명의 천인대장, 다수의 전직 집정관, 다수의 전직 법무관이나 토목건축관이 있었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이전 해 사마관이자 몇 년 전에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미누키우스도 전사했다. 원로원 의원이나 원로원 의원 자격이 부여되는 공직을 지낸 사람들 80명도 군단 복무를 자원했는데, 이들도 전투 중에 사망했다. 3천 명의 보병과 1천 5백 명의 기병은 포로로 붙잡혔다. 이상이 칸나이 전투의 개요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230/1226


  로마 역사상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칸나이 전투를 넘어선 패배는 없었기에, 이러한 좌절을 안긴 한니발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리비우스 또한 역사가 이전에 로마인이었기에 이런 주관적인 서술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렇지만, 한니발이 수세(守勢)로 몰리면서 전장이 이탈리아를 벗어나 에스파냐, 아프리카로 옮겨졌을 때 로마군들이 한 행동을 서술한 리비우스라면 과연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의 잔학함을 악(惡)으로 몰아 비판할 수 있을까. 로마군이 한니발 전쟁에서 그리고 제국 팽창 과정에서 벌어질 수많은 참상의 원흉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그런 자격은 없어보인다. 인용부분에서는 동포들의 손에 학살당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로마인의 약탈 또한 정도가 결코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런 유혈극은 전쟁에서 벌어지는 통상적인 과정이었다. 격분한 로마 인들은 저항 가능한 무장한 적들과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수백 명의 힘없고 무방비 상태인 여자들과 아이들이 동포들의 손에 학살당한 것이었다. 시장엔 커다란 화톳불이 붙었고, 종종 아직도 숨을 쉬는 사람들이 그 불에 던져졌다. 화톳불은 피의 강으로 거의 꺼졌다. 마침내 도살을 맡은 자들이 그 끔찍한 일을 끝냈고,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손에 칼을 든 채로 불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학살이 끝나자 로마 인들이 도시에 나타났다. 이 광경에 로마 인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라며 멈춰 섰다. 잠시 그들은 입을 벌린 채 서서 그 참상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시신과 잡다한 물건이 싸인 곳에서 금과 은이 반짝거리는 걸 보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탐욕에 휩싸여 화톳불 속에서 그 보물들을 낚아채고자 했다. 화톳불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은 뒤에서 물건을 빼내려고 밀려오는 무리 때문에 불길에서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고, 몇몇은 불속으로 밀려들어가 타죽었고, 다른 일부는 맹렬한 열기에 온 몸을 그을렸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866/1226


 리비우스의 한니발에 대한 평가는 후반부에 다시 이루어진다. 한니발 몰락기에 리비우스 자신이 직접 역사서의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이루어진 재평가는 앞서와 사뭇 결이 다르다. 


 실제로 나는 한니발이 성공을 누릴 때보다 운이 기울었을 때 더욱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고국에서 머나먼 적의 영토에서 13년 동안 싸우면서 많은 흥망성쇠를 겪은 그의 군대는 카르타고 인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 온갖 국적의 천민들이 뒤범벅된 그런 군대였고, 병사들은 법, 관습, 언어가 모두 달랐으며, 예절, 의복, 장비는 물론 섬기는 신과 종교 의식의 형태도 어느 것 하나 같은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이 잡다한 무리를 굳게 결속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단 한 번도 싸우는 일이 없었으며, 한니발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놀라운 건 급료를 지급할 자금이 빈번히 부족하고 식량도 자주 떨어졌음에도 일절 반항의 기미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는 그런 일로 장교와 병사 모두가 형언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승전의 희망이 전부 사라진 데다 하스드루발이 전사함과 동시에 휘하 병력이 괴멸하고, 이탈리아의 작은 구석인 브루티움 하나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전역을 포기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진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841/1226


 로마의 반격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연이어 세력을 잃어가고,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에스파냐를 포기하고 넘어온 동생 하스드루발마저 죽음을 당한 절박한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 한니발에게 리비우스는 경의를 표한다. 그는 포르투나(fortuna)에 맞선 비르투(virtu)의 고귀함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리비우스의 서술에서 앞선 한니발에 대한 악의적인 서술만큼 진실성을 느끼기 어렵다. 이제 승기를 잡은 자의 어설픈 관용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리비우스의 경의에도 불구하고 <리비우스 로마사 3>을 통해 한니발은 사악한 전쟁신(神)에서 거센 운명에 맞서는 인간(人間)으로 격하된 느낌이다. 이렇게 리비우스가 악(惡)으로 규정한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전쟁은 왜 일어난 것일까? 


 한니발은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사군툼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 도시를 직접 공격하면 로마가 행동에 나설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는 먼저 올카데스 부족 영토를 침공했다. 이 부족은 에브로 강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카르타고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 안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카르타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6/1226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배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그들이 동정을 얻기는 힘든 일이었다. 전략 회의가 열렸고, 모두가 정당한 분노를 느끼며 카르타고 파괴를 촉구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저런 방어 시설과 자원을 갖춘 도시를 포위하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은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게다가 스키피오는 자신이 노력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사실상 끝낸 전쟁의 영광을 자신의 후임자가 가져가고, 승리의 보상도 그가 챙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이에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평화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갔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098/1226


 리비우스는 한니발 전쟁의 발단을 한니발의 사군툼 공격에서 찾는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평화를 위한 협약이 카르타고의 친로마 중립 도시 사군툼 공략으로 깨지면서 평화를 위한 로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고, 로마는 평화를 지키기위한 정의로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음을 강조한다. 21권의 시작이 한니발의 맹세와 성장, 사군툼 공략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숨겨진 진실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리비우스가 서술하지 않은 부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후 해외 진출 방향을 에스파냐 방면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카르타고의 속사정과 이마저도 에브로 강 이남으로 제한하려는 로마의 압력과 중립 도시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카르타고를 자극했던 로마의 술수는 과연 한니발 전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리비우스 로마사 3>의 내용은 매우 흥미진지하다.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 1937~ ) 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2권 <한니발 전쟁>에서 전쟁 관련한 대부분의 내용이 리비우스의 저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몰입도가 높은 역사서다. 다만, 카르타고와 로마가 벌이는 검투 경기에 열광한 독자들의 시선이 피끊는 전장에 머무는 동안, 그들에게 씌워진 선(善)-악(惡)의 프레임은 승자(勝者)가 정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스페인의 로마 동맹시인 사군툼을 포위 공격한 것이었다. 그 전에 그러니까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인들은 동부 스페인의 공동체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곳에 진출한 카르타고의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로마는 기원전 226년 에브로 강 이남의 지역(카르타고가 지배하는 지역)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나 곧 그것을 위반했다. 당연히 카르타고는 로마의 이런 움직임에 반발했다. 카르타고 인들은 스페인의 광업과 농업 자원에 투자한 자국의 중요한 상업적 이해사항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크게 우려했다. 로마 원로원은 그 전의 맹세는 무시해 버리고 카르타고를 물리쳐 달라는 사군툼의 호소에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맹세 위반이라는 국제적 신의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카르타고는 어차피 인간적 도덕성이 결여된 야만인이므로 그런 맹세는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게 로마의 일방적 판단이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142/1226


스페인 부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두는 능력이 탁월했던 하스드루발 덕분에 로마 인들은 평화 협정을 갱신하여 에브로 강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영토 구분선으로 삼아, 사군툼의 중립성을 확보함으로써 일종의 완충국 역할을 그 도시에 맡겼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2/1226

스페인의 전반적인 상황은 어떤 측면으로는 이탈리아와 무척 비슷했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무척 달랐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령관을 잃은 카르타고 인들이 대서양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던 점은 이탈리아의 상황과 유사했다. 하지만 스페인이 이탈리아와 다른 것은 지역의 특성이나 그곳 주민들의 기질이 세상 다른 어떤 곳보다 패배를 태연하게 여기며 새로운 적대 행위에 나서는 일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이 로마 인들의 첫 번째 속주가 되고,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야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리더십과 지원 아래 완전히 정복된 마지막 지역이 된 이유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842/1226

로마 인들과 카르타고 인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았고, 둘 다 똑같이 끔찍하게 시달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후자는 병으로 고통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식량 공급마저 부족했다. 한니발은 유노 라키니아 신전 근처에서 여름을 보냈고, 그곳에 제단을 세웠고 제단 밑에는 자신의 업적을 장황하게 기록한 기명(記銘) 판을 설치했다. 기명 속의 문장은 카르타고어와 그리스어로 새겨졌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92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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