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장비가 술을 많이 마시고 계략이 부족하다는 서술은 없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장비가 술을 많이 마시고 사고를 치며, 용맹하지만 머리는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는 독자들과 청중들을 위해 장비의 이미지를 바꾼 것이다.

『삼국지/촉서』의 기록이 부족하여 통혼 계보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지만, 현재의 자료로는 촉나라 황실이 관우·장비·마초·제갈량의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은 이들 후손들을 조상들처럼 촉나라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친위 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지만, 장비의 자손들은 대부분 장비와 달리 무장이 아닌 문신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장비의 후손들이 문관, 관우·조운의 후손들이 무장으로 활동한 점을 비교하면 장비 역시 교양과 학식을 갖췄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점 때문에 장비의 딸들이 현모양처의 자질을 길러 황후에 임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기록 이면에 감춰진 장비의 진면목이다.

요컨대 조조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선양이라는 정권 교체 방식이 만연한 시대에 조조는 상대적으로 존중되었지만, 선양과 찬탈이 터부시되던 송나라 이후에는 악인으로 낙인찍혔다.

한편으로 조조는 악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투에서 초반에는 지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때 독자와 청중들은 가슴 졸이며 조조가 지기를 바라지만 거의 대부분 이긴다. 앞에서 통계수치를 내본 것처럼 조조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관도 전투처럼 접전을 벌였던 적도 있지만 대부분 손쉽게 일방적으로 이겼다. 그러나 소설 삼국지에서 조조가 처음부터 손쉽게 이겼다고 기록하면 독자와 청중들은 얼마나 허무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독자와 청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도 이러한 허구적인 내용을 추가해야 했다. 조조는 소설 삼국지의 흥행을 위해 왜곡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시대 분위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전근대사를 두 시기로 나누라면 당나라와 그 이전의 시기, 송나라와 그 이후의 시기로 나눈다. 이 두 시기는 확실히 다르다. 대체로 후자의 시기에는 수나라 때 창시된 과거제도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당나라 시대까지 가문의 힘에 의해 출세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송나라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과거에 합격해야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민들이 지배층에 대거 편입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