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장기의 19세기까지 세계체제의 정치경제학과 그것의 산만한 수사학 사이에괴리가 존재해왔다고 주장했다. 제4권에서 우리는 근대세계체제의 세 가지 주요 이념인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의 발전에 의해서 이 괴리의 극복을 필수적이게 만든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영향이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 어떻게 항상 중도적  원칙이자 신조였는지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중도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다른 두 이념을 사실상 중도적 자유주의의 화신(化身)으로 변형시키면서 "길들여 왔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장기의 19세기의 끝무렵에 중도적 자유주의가 세계체제의 지문화의 지배적인 신조였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었다. - P413

우리는 어떻게 중도적 자유주의가 그 이념을 세 가지 중요한 영역에 부과했는지를 자세히 검토했다.  첫 번째는 영국과 프랑스가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모범 사례로 부각되었듯이, 세계체제의 중심부에 "자유주의 국가"가 창설된 것이었다. 두 번째는 포함에서 배제로 시민권의 원칙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우리는 여성, 노동계급, 그리고 종족적/인종적 "소수집단" 등 배제되었던  세 주요 집단들을 언급함으로서 이를 예시했다. 세 번째는 자유주의 이념의 반명이자 지배 집단들이 피지배층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서 역사적 사회과학들의 출현이었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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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숭도가 왕종필을 죽여서 스스로를 밝히려고 하여, 기사일(10일)에 이계급에게 아뢰어 왕종필과 왕종훈(王宗勳)·왕종악(王宗渥)을 체포하여 모두에게 그들의 충성하지 않은 죄를 헤아리고 그들을 족주(族誅)하고 그들의 집안을 적몰(籍沒)하였다. 촉인들이 왕종필의 살점을 다투어 먹었다.

이부상서 이기(李琪)가 상소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하였고 농사의 상황을 헤아려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니, 그러므로 비록 수해와 한재의 재앙이 있었으나 부족하게 될 걱정은 없었습니다. 근대에는 농민에게 세금을 거두어 군사를 양성하니, 농민이 부유하게 공급하는데 군사들이 사용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였거나 농민이 빈궁하면서 군사가 풍족하고 배불리 먹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 설령 조세를 감면해 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절납(折納)과 뉴배(紐配)의 법을 제거하게 된다면 농민도 역시 조금이라도 쉴 수 있습니다."

거란주가 여진(女眞)과 발해(勃海)를 공격하면서 당이 빈틈을 이용하여 그를 기습할까 두려워하여, 무인일(21일)에 매노혜리(梅老鞋里)를 파견하여 와서 우호관계를 맺게 하였다.

재상이 두려워하여 백관들을 인솔하고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지금 조용(租庸)은 이미 고갈되었으나 내고(內庫)에는 여유가 있는데, 여러 군대의 가족들은 지킬 수 없으니, 만약 진휼하지 않으면 마음을 흐트러지게 할까 두렵습니다. 흉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재산을 다시 모으십시오."

황상이 즉시 이를 좇으려고 하자, 유후(劉后)가 말하였다. "우리 부부가 군주로 만국(萬國)에 다가간 것은 비록 무공(武功)을 빌렸다고 하지만 역시 천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운명은 이미 하늘에 달려 있으니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찌 하겠습니까?"

석경당(石敬塘)이 말하였다.
"무릇 일이란 과감한 결단에서 성공하고, 미적미적하는 데에서 실패하는 것인데, 어찌 상장(上將)께서는 배반한 사졸들과 더불어 도적의 성에 들어가서 훗날에 걱정 없이 지킬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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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체제 3 -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의 두 번째 시대 1730-1840년대, 제2판 근대세계체제 3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인중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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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저술 작업 전체는 "장기의 16세기"를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서 "근대세계체제"가 형성된 시점으로 보는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1730년부터 1840년대까지의 시기를 전환점으로 간주하지 않는 논의를 주로 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를 규정하는 핵심요소는 그것이 끝없는 자본 축적의 추진력에 의거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문화적 가치가 아니라 일종의  구조적 필요조건이다. 이 말은, 그 논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이들에게는 중기적 차원에서  보상을 해주지만 그것과는 다른 논리들에 따라서 움직이기를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징벌을 가하는 메커니즘들이 체제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서문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3 The Modern World-system>의 시대적 배경은 1730-1840년대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두번 째 팽창기다. 이 시기의 특징은 네덜란드에 뒤이어 헤게모니를 장악한 영국과 이에 도전하는 프랑스로 요약될 수 있겠지만, 최종적으로 프랑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월러스틴에 따르면 영국의 헤게모니는 '7년 전쟁' 직후인 1770년대 확정되지만, 영국의 승리는 이미 17세기 네덜란드 금융의 이전으로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이전 단계들과는 달랐던 프랑스와 영국 간의 이 경쟁단계에서의 핵심적인 정책요인은 그 시기에 발생했던 모든 "혁명적" 투쟁에 대하여 서로 반대편에선 양국의 사실상의 자동적인 개입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이러한 양국의 싸움은 1789년에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라 구체제하인 1770년대에 시작되었다... 농업, 공업, 무역 그리고 재정에서의 경제적인 격차를 결정적으로 증대시켰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군사적 승리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73


 월러스틴은 '혁명 革命 recolution'을 '산업화 産業化 Industrialization)'의 전제조건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1770년대 제국의 중심부(영국 본토)와 주변부(인도, 중국)과 면직물, 아편, 은 등으로 삼각무역체제를 확정시킨 영국의 헤게모니에 1789년 혁명을 이룬 프랑스가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프랑스 혁명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혁명이 미래를 예고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최초의 반체제혁명 - 부분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던 - 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만들어낸 "신화"는 부르주아 신화가 아니라 반부르주아 신화이다...프랑스는 영국보다 한 세기 이상 뒤에 "부르주아 혁명"을 겪었으며, "부르주아 혁명"은 "산업혁명"의 선결조건이라고 상정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84


 7년전쟁 이후의 시기는 세계무역의 전반적인 침체기로, 일종의 콘트라티에프-B 시기였으며,  세계경제는 1792년경에 가서야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경제의 호전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프랑스라기보다는 영국이었고, 이러한 사실은 1780년대에 이르러서는 분명해졌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12


 프랑스 혁명은 무엇인가? 프랑스 혁명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모두가 깊게 맞물려 있는 세 개의 것이었다. 첫째로, 그것은 다양한 자본주의적 지배계층 그룹이 영국이 세계경제에서 헤게모니적 지위로 올라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절실하게 요구되는 프랑스 국가의 개혁을 강행하려는 비교적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둘째로, 프랑스 혁명은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에서 최초로 의미 있는 반체제(즉 반자본주의적) 운동, 즉 프랑스 "민중"의 운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공공질서가 붕괴되는 상황을 창출했다(p170)... 셋째로, 프랑스 혁명은 근대 세계체제 전반에 걸쳐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영역이 마침내 경제적, 정치적 현실과 합치되게끔 하는 데에 필요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71


 <근대세계체제> 전반에 걸쳐 큰 흐름이 만들어지는 시기는 16세기와 17세기다. 이때 만들어진 자본주의 체계가 50-60년 주기의 콘트라티에프 파동(Kondratiev wave)에 따라 팽창과 수축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고증하는 것이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관점이라 하겠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이후 시기의 변화는 일종의 변주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후 기계화로 인한 대량생산이 가져온 변화보다 농업혁명을 통한 시초자본의 형성과 이의 증폭이 월러스틴의 주요 관점이다. 이 점에서 19세기 이후 영국의 헤게모니는 주변부의 확장을 통해 체제를 공고화한다.


 산업혁명 및 인구혁명에 덧붙여서 우리는 이제 농업혁명을 설명하고 그것의 위치를 찾아내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것은 이제 큰 주제가 되었다. 먼저 우리는 영국에서조차 그리고 심지어 19세기 전반기 내내 "농업이 제1의...... 산업"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혁명이 일어났다는 관념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리고 특히 농업혁명이 있었다는 관념이 의미를 가지려면 어느 곳에선가 그리고 어떤 경제단위 전체에서 생산량의 증가가 있었어야만 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25 


 이 책의 중심 테제는 예컨대 축적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라는 형태의 점증적이고 연쇄적인 변화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탄생한 16세기 이후로 줄곧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심 모티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17세기의 장기적 침체가 이러한 점증적 과정의 중단이기는 커녕 그것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해왔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40


 결국, 근대세계체제의 핵심 요인은 분업(分業)과 독점(獨占)이다. 시장지배력이 없는 완전경쟁시장은 구조적으로 이윤을 발생시키지 않기에 축적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없이는 팽창을 위한 동력을 획득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의 차액지대(差額地代)론에서 표현되듯 한계지를 찾아 끊임없이 주변부로 확장해가는 시스템의 재배치는 19세기에 더 많은 세계를 주변부로 편입시켰다.


 우리는 그와 같은 체제가 유지되려면 몇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기축적 노동 분업이 존재해야 한다. 즉 이윤은 낮은데 경쟁은 매우 치열한 (즉 주변부의) 필수품들과 이윤이 높고 준독점화된 (즉 중심부의) 상품들 간의 지속적인 교환 같은 것이다. 기업가들로 하여금 그 체제 내에서 성공적으로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효력(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의사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국가간체제가 추가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준독점적 이윤 창출 기업들의 항구적인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주기적 메커니즘들이 또한 필요하다. 그 결과로 그 체제의 특권적 중심들의 매우 느리지만 끊임없는 지리적 재배치가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이  근대세계체제에서 발생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서문


 자본주의는 끝없는 자본 축적이 존재 이유인 체제이다.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생산자는 그들의 활동으로부터 이윤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진정 상당한 이윤은 생산자가 오직 생산비용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생산물을 팔 때에만 획득이 가능하다. 완전경쟁 상황에서 상당한 이윤을 만드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상당한 이윤을 획득하려면 세계경제 권력의 독점 또는 적어도 유사 독점이 필요하다. 독점이 있는 곳에서 판매자는 수요로 인한 탄력성을 넘어서지 않는 한 어떤 가격이든 요구할 수 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서문


 <근대세계체제 3>의 마지막은 영국의 헤게모니가 인도와 중국을 주변부로 편입시키고, 프랑스의 혁명 사상이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영향을 미치며 해당 지역이 에스파냐, 포르투갈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이루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독립이 경제적으로 '주변부'라는 역할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영국의 헤게모니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국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이제 네덜란드, 영국의 헤게모니를 이을 새로운 강국 미국이 다음 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대략) 1733-1817년 시기의 경제팽창(그리고 통화인플레이션)의 재개과정에서 유럽 세계경제는 장기 16세기에 자신이 만들어놓았던 경계들을 깨버리고 새로운 거대 지역권들을 자신이 포괄하고 있는 효율적인 노동분업 속으로 병합하기 시작했다. 이는 16세기 이래 이미 유럽세계경제의 외곽지대(external arena)에 놓여 있었던 지역권들 - 인도 아시아 대륙,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그리고 서아프리카 - 을 병합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97


  (나폴레옹) 전쟁의 종료와 함께 영국은 세계체제에서 마침내 진정한 헤게모니를 쥐었다. 그것은  일련의 해상기지를 확보함으로써 영국의 세계권력을 공고하게 만들었는데, 이 해상기지들은 영국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들과 합쳐져서 영국으로 하여금 이제 지구를 전략적으로 둘러싸게 했다... 더욱이 영국은 전쟁과정에서 네덜란드의 이전 헤게모니의 마지막 흔적인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서의 네덜란드의 역할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상업 및 금융 지배를 통해서 영국은 이제 통계에 잡히지 않는 대규모의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영국의 수출무역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존재했던 지속적이고 심지어는 팽창하는 무역적자를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국제수지 흑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187 


 세계경제로의 병합은 필연적으로 정치구조들이 국가간 체제에 삽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 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국가들"이 "국가간 체제 내의 국가들"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든가, 아니면 그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구조에 의해서 대체되든가, 아니면 이미 국가간 체제 내에 속한 다른 국가들에 흡수되든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합된 노동분업의 원만한 작동은 상품, 화폐,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정상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일정한 보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260


 신생 미국은 단지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아메리카 대륙의 새 열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주민 독립의 상징이기도 했다. 미국은 공화주의의 원칙을 지지했다.(p354)... 미국이 이주민 독립의 모델로 자신을 드러내고 또 그렇게 여겨지는 한, 장기적인 측면에서 세계체제에 더 중요했던 것은 미국이 이 시기에 자유로운 인간과 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갔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문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둘러싸고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영역 바깥에 존재했다. 이주민들은 인디언들을 그들의 땅에서 소개시키려고 했지 그들을 노동력으로 자신들의 경제활동 속으로 병합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대개가 노예였던 흑인들은 그 영역 바깥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생산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실상의 중심 부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 p355

자본주의 세계에서 귀족의 자리를 차지한 대(大)부르주아지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한 것이 아니라 이윤을 신봉했다. 재능 있는 자에게 열려 있는 성공의 기회, 보편적인 진리, 도덕적인 지상 명령은 무엇보다도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테마들이다. 그것들은 자본의 최대한의 축적과 상충될 경우에는 언제나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고 포기되는, 도구적이며 주의를 딴 데로 쏠리게 만드는 신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또한 자본주의적 과정의 구조적인 종착점, 즉 모든 이익이 과거의 지위에서보다는 경제구조 안에서의 현재의 지위에서 도출될, 상층계급들의 최종적인 부르주아화를 반영한다. - P84

핵심부 국가들의 견지에서 볼 때, 장기 17세기의 주요 성취는 이러한 국가들의 자본가들이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이윤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요 장애물은 전반적인 수요의 제한이었으며, 그 징후의 하나가 인구 증가의 정체였다. 세계경제 전역에 걸친 주변 생산자들의 제거와 (일차적으로 핵심부에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소득의 재분배는 새로운 팽창기의 토대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18세기 전반기의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어 순이익을 남긴 혼란의 시기인 1792-1815년의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기에 절정에 달했다. - P93

영국의 이점은 1763년에 획득된 지위로부터 나온 셈이었다. 우리가 "[프랑스와 영국 간의 재개된] 전쟁 직전인 1792년의 실질적인 붐"에서 절정에 달한 1780년대 영국의 공업발전의 행복한 10년을 프랑스의 불행한 "혁명 전"과 비교할 때, 우리는 이것을 매우 달랐던 국가재정 상황이라는 맥락 안에 넣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재정적, 회계적 차이가 폭발을 초래하고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 간의 차이의 결과적인 엄청난 증폭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러한 차이는 단지 "일시적인 골칫거리"였을지도 모른다. - P131

프랑스 혁명의 중심성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간 투쟁의 중심성의 한 결과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투쟁에서 프랑스의 임박한 패배감에 뒤이어 그리고 그것의 한 결과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 나라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쳤던 바와 같은 영향을 세계체제에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승리의 물결을 뒤집어 엎으리라고 기대했던 프랑스 혁명은 반대로 지속적인 영국의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데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지경학적(地經學的) 패배 때문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실제로 그들의 장기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을 달성했다. - P146

좀더 강력한 국가의 생존이란, 무역망을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p204)... 무역 과정 자체가 각각의 국가기구들을 강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 결과 세계경제의 외곽지대에서 몇몇 국가들의 힘이 커지자 유럽 세계경제의 권력담지자들은 병합에 대한 이러한 "독점적" 장벽을 깨기 위해서 외곽지대와의 관계에 더 많은 무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세계경제의 외곽지대에 있는 국가들은 일단 힘이 계속 강력해지다가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어갔다. - P205

18세기 말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전지구적 팽창기였다. 특정 지역에서 나오는 각 생산은 단지 전체 중 작은 비율일 뿐이었다. 전체 경제는 두드러지게 높은 수익을 보였으며 실제로 상당한 자본 축적에 이르게 되었다. 그 자본 축적은 우리가 이미 논의한 이유들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프랑스나 서유럽의 다른 지역들보다 영국에서 더 집중되었다. - P221

18세기 말의 대혁명들 - 이른바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아메리카 대륙의 이주민 독립 - 중 어느 것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들은 그 체제의 계속적인 공고화와 견고화를 보여주었다. 민중세력은 억압당했고 그들의 잠재력은 사실상 정치적 변화들에 의해서 억제되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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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에는 서리가 내려서 농사를 해쳐 견사(繭絲)가 심히 적은데 단지 정세(正稅)를 내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흘러서 옮겨 다닐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 위에 빌려준 것을 거론하니 사람들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애초에, 황제는 이엄을 통하여 촉에 들어가게 하여 말을 가지고 궁중의 진귀한 물건을 사오게 하였는데, 촉의 법에는 비단이나 진기한 보물은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고 그 거칠거나 질 나쁜 것은 중국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를 ‘입초물(入草物)’이라고 하였다.

거란이 그들의 강성함을 믿고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와서 유주를 요구하고서 노문진(盧文進)을 두겠다고 하였다. 당시에 동북의 여러 야만인들이 모두 거란에게 복속되었는데 오직 발해75만이 복속되지 않았으며, 거란주(契丹主)는 침구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발해가 그의 후방을 잡아당길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요동(遼東, 요녕성)을 공격하고, 그들의 장수인 독뇌(禿?)와 노문진(盧文進)을 파견하여 영(營, 요녕성 조양시)과 평(平, 하북성 노룡현) 등의 주를 점거하게 하여서 연(燕)의 땅을 소란스럽게 하였다.


신은 한마(汗馬)의 수고로움을 겪은 일이 없이 다만 좌우에서 시종(侍從)하였기 때문에 때로 성스러운 계획에 찬성하여 지위가 여기에 이르러서 항상 스스로 편안하지 아니하였으며, 지금 공훈을 세운 현명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기회를 이용하여 신으로 하여금 정절(旌節)을 풀어 놓게 될 수 있다면 이는 크게 원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오대산(五臺山, 산서성 동북부)의 승려인 성혜(誠惠)는 요망함을 가지고 사람을 현혹시켰는데, 스스로 천룡(天龍)을 항복시키며 바람에게 명령하여 비를 불러 올 수 있다고 말하니, 황제는 이를 높여서 믿고 친히 후비(后妃)와 황제의 동생·황제의 아들들을 인솔하고 그에게 절을 하였으며, 성혜는 편안히 앉아서 일어나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도 감히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큰 가뭄이 들자 황제는 업도에서부터 성혜를 영접하고 낙양에 가서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고, 사민(士民)들은 아침저녁으로 쳐다보았지만 수십 일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성혜에게 말하였다.

"관(官)은 사(師)에게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였으나 효험이 없으니 장차 불에 태워질 것이오."

성혜는 도주하여 달아나서는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다가 죽었다.

계미일(15일)에 위국(魏國)부인인 유씨를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가난하고 미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귀하게 되고 나서도 오로지 재산을 축적하는 데에만 힘써서, 그가 위주(魏州, 하북성 대명현)에 있으면서 땔나무, 채소, 과일 같은 것들도 모두 팔았다.

황후가 되자 사방에서 공헌(貢獻)하는 것은 모두 나누어 둘로 하여 하나는 천자에게 올리고 다른 하나는 중궁(中宮, 황후)에 올렸다. 이로써 보화(寶貨)는 산 같이 쌓였고 오직 불경(佛經)을 베껴 쓰는데 사용하였고, 니사(尼師)에게 나누어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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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성가 161번. 성체를 찬송하세.


   1) 하늘에 별들을 누가 셀 수 있는가

   2) 강변에 모래알 헤아릴 수 있는가

   3) 바다에 물방울 누가 셀 수 있는가

   4) 논밭에 이삭 수 누가 알 수 있는가

   5) 나무에 잎사귀 헤아릴 수 있는가

   6) 영원과 무궁을 깨달을 수 있는가


   후렴 : 이만큼 무수히 성체(聖體)를 찬송하세 


 성가듣기 : https://maria.catholic.or.kr/musicfiles/mp3/2004090161.mp3


 얼마 전 주일학교 개학을 맞아 딸아이와 함께 참여한 어린이 미사 중 들었던 성체성가 <성체를 찬송하세>. 성인 성가로 듣던 음색, 빠르기와는 다르게 경쾌하게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다소 엉뚱하게도 <금강경 金剛經>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진리(眞理) 앞에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을 성가와 금강경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수선했던 2022년의 3월도 다 지나갔지만, 모르는 사이 봄은 우리 곁에 와있었다. 들판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작은 꽃을 보며, 영원(永遠)의 시간 앞에 필멸(必滅)의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無爲福勝分 第十一 제11분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11-1.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스강들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11-2. 須菩提言 : "甚多, 世尊!  但諸恒河尙多無數 何況其沙?" 수보리가 사뢰었다 :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모든 갠지스강만이라도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11-3.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 多不?" "수보리야! 내 지금 너에게 진실한 말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여기 있어, 칠보로써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한다고 한다면,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11-4. 須菩提言 : "甚多, 世尊!" 수보리가 사뢰었다 :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11-5. 佛告須菩提 :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게 되어, 그것을 딴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은 앞서 칠보의 복덕보다 더 크리라." _ 김용옥,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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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2-03-30 0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글을 읽으며 저도 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평화를 빕니다 🙏

겨울호랑이 2022-03-30 00:0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라파엘님께서도 평안한 밤 되세요! ^^:)

페넬로페 2022-03-30 0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에 성가를 듣습니다^^
성가의 가사를 금강경에 비유하시다니👍👍

겨울호랑이 2022-03-30 00:09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은 아니고, 그냥 성가를 듣다보니 떠오르더군요... 아무래도 제가 분심(分心)이 많은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