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봄에는 서리가 내려서 농사를 해쳐 견사(繭絲)가 심히 적은데 단지 정세(正稅)를 내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흘러서 옮겨 다닐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 위에 빌려준 것을 거론하니 사람들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애초에, 황제는 이엄을 통하여 촉에 들어가게 하여 말을 가지고 궁중의 진귀한 물건을 사오게 하였는데, 촉의 법에는 비단이나 진기한 보물은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고 그 거칠거나 질 나쁜 것은 중국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를 ‘입초물(入草物)’이라고 하였다.

거란이 그들의 강성함을 믿고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와서 유주를 요구하고서 노문진(盧文進)을 두겠다고 하였다. 당시에 동북의 여러 야만인들이 모두 거란에게 복속되었는데 오직 발해75만이 복속되지 않았으며, 거란주(契丹主)는 침구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발해가 그의 후방을 잡아당길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요동(遼東, 요녕성)을 공격하고, 그들의 장수인 독뇌(禿?)와 노문진(盧文進)을 파견하여 영(營, 요녕성 조양시)과 평(平, 하북성 노룡현) 등의 주를 점거하게 하여서 연(燕)의 땅을 소란스럽게 하였다.


신은 한마(汗馬)의 수고로움을 겪은 일이 없이 다만 좌우에서 시종(侍從)하였기 때문에 때로 성스러운 계획에 찬성하여 지위가 여기에 이르러서 항상 스스로 편안하지 아니하였으며, 지금 공훈을 세운 현명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기회를 이용하여 신으로 하여금 정절(旌節)을 풀어 놓게 될 수 있다면 이는 크게 원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오대산(五臺山, 산서성 동북부)의 승려인 성혜(誠惠)는 요망함을 가지고 사람을 현혹시켰는데, 스스로 천룡(天龍)을 항복시키며 바람에게 명령하여 비를 불러 올 수 있다고 말하니, 황제는 이를 높여서 믿고 친히 후비(后妃)와 황제의 동생·황제의 아들들을 인솔하고 그에게 절을 하였으며, 성혜는 편안히 앉아서 일어나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도 감히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큰 가뭄이 들자 황제는 업도에서부터 성혜를 영접하고 낙양에 가서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고, 사민(士民)들은 아침저녁으로 쳐다보았지만 수십 일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성혜에게 말하였다.

"관(官)은 사(師)에게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였으나 효험이 없으니 장차 불에 태워질 것이오."

성혜는 도주하여 달아나서는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다가 죽었다.

계미일(15일)에 위국(魏國)부인인 유씨를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가난하고 미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귀하게 되고 나서도 오로지 재산을 축적하는 데에만 힘써서, 그가 위주(魏州, 하북성 대명현)에 있으면서 땔나무, 채소, 과일 같은 것들도 모두 팔았다.

황후가 되자 사방에서 공헌(貢獻)하는 것은 모두 나누어 둘로 하여 하나는 천자에게 올리고 다른 하나는 중궁(中宮, 황후)에 올렸다. 이로써 보화(寶貨)는 산 같이 쌓였고 오직 불경(佛經)을 베껴 쓰는데 사용하였고, 니사(尼師)에게 나누어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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