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숭도가 왕종필을 죽여서 스스로를 밝히려고 하여, 기사일(10일)에 이계급에게 아뢰어 왕종필과 왕종훈(王宗勳)·왕종악(王宗渥)을 체포하여 모두에게 그들의 충성하지 않은 죄를 헤아리고 그들을 족주(族誅)하고 그들의 집안을 적몰(籍沒)하였다. 촉인들이 왕종필의 살점을 다투어 먹었다.
이부상서 이기(李琪)가 상소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하였고 농사의 상황을 헤아려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니, 그러므로 비록 수해와 한재의 재앙이 있었으나 부족하게 될 걱정은 없었습니다. 근대에는 농민에게 세금을 거두어 군사를 양성하니, 농민이 부유하게 공급하는데 군사들이 사용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였거나 농민이 빈궁하면서 군사가 풍족하고 배불리 먹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 설령 조세를 감면해 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절납(折納)과 뉴배(紐配)의 법을 제거하게 된다면 농민도 역시 조금이라도 쉴 수 있습니다."
거란주가 여진(女眞)과 발해(勃海)를 공격하면서 당이 빈틈을 이용하여 그를 기습할까 두려워하여, 무인일(21일)에 매노혜리(梅老鞋里)를 파견하여 와서 우호관계를 맺게 하였다.
재상이 두려워하여 백관들을 인솔하고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지금 조용(租庸)은 이미 고갈되었으나 내고(內庫)에는 여유가 있는데, 여러 군대의 가족들은 지킬 수 없으니, 만약 진휼하지 않으면 마음을 흐트러지게 할까 두렵습니다. 흉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재산을 다시 모으십시오."
황상이 즉시 이를 좇으려고 하자, 유후(劉后)가 말하였다. "우리 부부가 군주로 만국(萬國)에 다가간 것은 비록 무공(武功)을 빌렸다고 하지만 역시 천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운명은 이미 하늘에 달려 있으니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찌 하겠습니까?"
석경당(石敬塘)이 말하였다. "무릇 일이란 과감한 결단에서 성공하고, 미적미적하는 데에서 실패하는 것인데, 어찌 상장(上將)께서는 배반한 사졸들과 더불어 도적의 성에 들어가서 훗날에 걱정 없이 지킬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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