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놓고 말해서 당신이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리고 잠재적인 적이 이처럼 많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어떠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선거운동을 최대한 사려 깊고 성실하게,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전개해야 합니다.

공직에 입후보하면 친구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일반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당신은 친절과 호의, 오랜 친분, 이용가치, 타고난 매력으로 친구들의 호감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거에서는 우정을 일상생활에서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보자에게는 호의를 보이거나 동료를 만들어주는 사람은 모두가 친구입니다.

사람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친구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지지할 거라고 생각하는 후보가 있다면, 그보다 바보 같은 생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유권자에게 시간과 공을 들이지 않고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기적적인 능력과 명성, 업적이 있어야 합니다.

직접 하든 아니면 친구들의 힘을 빌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이 당신의 대의에 동참하도록 힘쓰십시오. 그들과 대화하고 지지자를 보내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리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광장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가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을 따르는 무리의 규모가 커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라 광장으로 향하는 모습은 모든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유권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아봐주고, 인간적이고 관대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또 시간을 내서 유권자를 만나고 자신을 알려 나가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만큼 그들을 기쁘게 하는 데 필요하다면 무슨 말이든 해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열심히 하다보면 당신의 좋은 점들이 친구들을 통해 퍼져나가 그저 건너들을 때보다 더 많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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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31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로마의 공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정말 공동체에
도움이 되고 헌신하는 마음에
출마했다지요.

그 시절의 대의는 사라져 버
리고 오로지 당선을 노리는
모리배들의 경연장이 된 현
실이 참 비루해 보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31 23:35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오늘날 정치현실이 적지않게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공화정 시기의 정치는 달랐을까 하는 의문도 던져 봅니다. 우리가 접하는 많은 기록에서는 공화정 시기의 로마를 황금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남은 많은 이들도 자신보다 공동체를 위하는 모습 속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사의 대부분이 제정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공화정을 미화하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선거에 이기는 법>에도 오늘날의 혼탁함에 못지 않은 권모술수가 적지 않게 서술되어 사람 사는 곳은 비슷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개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실감하게 됩니다...

바람돌이 2022-06-01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투표하고 왔는데요. 오늘 같은 날 의미심장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일듯 싶네요. ^^

겨울호랑이 2022-06-01 21:33   좋아요 0 | URL
오늘 투표율은 역대 최저인듯 하네요... 이것 또한 의미가 있겠지요.... 바람돌이님 오늘 애쓰셨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에 국제 무역의 거대한 발전은 레알 은화가 세계 각지로 대량으로 확산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국제 무역이 도달한 수준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대량의 레알로 대표되는 유동성이 시장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만일 레알이 거부되어 유통량이 감소한다면, 국제 무역은 급격한 쇠퇴를 감수해야 했다. 이와 같은 점은 당시 외관상모순적인 공고문들이 오락가락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각국은 처음에는 스페인 악화가 시장에서 국내 양화를 구축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레알을  금지했다가도, 나중에는 특히 동양 국가들과의 무역 활동이 빈사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면서도 국내 화폐를 보호하기 위해 국내 화폐와 레알의 교환 비율을 조정해가며 결국 레알을, 적어도 특정한 레알을 슬며시 다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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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대중의 취미에 아부하지 않거나 익숙한 상투어를 쓰지 않아서 조금만 대담한 문체를 사용해도 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독창적인 작가들이 있는데, 스완이 베르뒤랭 씨의 노여움을 산 것도 같은 이치였다. 이들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스완에게서도, 그를 뱃속 검은 사람으로 믿게 한 것은 바로 그가 쓰는 언어의 새로움이었다.

오데트의 존재로 인한 동요와 얼마 전부터 그를 떠나지 않는 그 열기 어린 거북함은, 자연 감상에 필수 배경인 고요와 안락을 빼앗고 있었다.

오데트가 많은 남자들 눈에 매력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들이 그녀 육체에 느끼는 매력 탓에 그 역시 그녀 마음 구석구석까지도 완전히 지배하고 싶다는 고통스러운 욕구를 느꼈다.

그녀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의 크기를 알리고자 애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은 그의 사랑이 지속되는 한 상처 받기 쉬운 그를, 질투의 발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었다.

스완은 갑자기 심한 아픔을 느꼈다. 마치 육체의 아픔이기라도 한 것처럼 스완의 생각은 그 아픔을 줄일 수 없었다. 아니, 차라리 단순한 육체의 아픔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의 생각과는 무관해서 생각을 아픔에 고정하고 아픔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아픔이 일시적으로 멈추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 아픔은 생각 자체였으므로 단지 기억만 떠올려도 되살아났다.

그녀는 창문 두드리는 소리를 분명 들었던 것이다. 스완은 이 말에 한 조각 정확한 사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불시에 기습당한 거짓말쟁이가 꾸며 내야 하는 거짓말에 어떤 사실을 집어넣고 거짓말과 함께 어우러지게 하면, 아마도 ‘진실’인 듯 보일 거라고 생각하며 안심하는 그런 것이다.

오데트가 흔히 하던 거짓말은 그렇게 결백하지 않았고, 만일 탄로나면 이런저런 친구와의 관계에서 엄청난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을 숨기는 데 활용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거짓말을 할 때면, 겁에 질려 자신을 방어할 만큼 충분히 무장되지 않았다고 느꼈고, 또 성공을 확신할 수도 없었으므로 잠을 자지 못한 몇몇 어린애들처럼 피로해져서는 그만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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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에서 권력 과시의 핵심은 도시 건설이었다. 왕조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의 멤피스 건설부터 오늘날 카이로의 전신인 푸스타트(Fustat) 건설까지, 그리고 기원후 640~642년 무슬림의 정복 이후에도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도시 건설을 통해 자신의 시대와 변화의 시작을 알리고 권력을 과시했다.  그들이 건설한 수도는 다른 많은 문명의 도시들과 같은 양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신왕국 이후로 이집트 도시의형태는 외형상 다른 지역의 도시와 더욱 비슷해졌다. - P112

동남아에서 도시화는 깊은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 도시의 등장은 동남아 국가의 운영과 궤를 같이했으며, 권력과 의례와 행사의 혼합으로 도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혼합적 성격은 비록 일회적 성격의 행사는 끝나면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기어츠가 소개한 발리의 경우와는 달리) 실질적 권력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세대와 세기를 거듭하는 동안 동남아 국가를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다. 크메르의 고대 국가에서 도시화는 보다 분명한 관계를 드러내었다.  - P191

도시에서 권력 표현의 핵심은 기념비적 건축물과 그를 둘러싼 공간이었다. 기념비적 건축물 위주로 도시 설계가 이루어졌고, 의례 행사가 건축물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의례 행사는 영원한 동시에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정해진 형식에 따른 종교문화와 통치자의 생애주기에 따른 의례 행사는 정기적으로 꾸준히 이어졌고,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로  거대한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전자의 범주에 속하는 행사는 대개  제한된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행사는사람들의 눈에 띄기보다는  배제를 통해 권력을 과시하는 방식이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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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제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듣고 흘려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겁쟁이의 이 한탄이 어째서 예리한 바늘이 되어 제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인지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57/206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침묵 沈默>에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의 길이 진리의 길이라면, 이 길을 따르는 이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왜 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최소한 두 인물이 떠올랐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의인 욥과 <신약성경>의 의인 예수. 


 <구약성경>에서 자신에게 닥친 이유없는 불행에 대해 욥은 계속적으로 탄원을 하며, 이러한 불행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던진다. 이에 대해 <욥기>에서는 다행히도(?) 응답받는다. 그가 의롭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의로움이 드러나기 위해 의인에게 시련이 닥쳤기 때문임을 교부(敎父)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 349~407)는 저서에서 밝힌다.


 

 그러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사내답게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 (욥 40 : 6 - 8)


 그분은 당신의 개입이 '너를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의롭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거나, 당신께서 승인하신 개입을 함으로써 욥의 시련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내가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네가 의롭게 되도록'이라고 하지 않고, 그가 실제로도 그랬고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네가 의롭게 보이도록"이라고 하셨습니다. _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욥기 주해> 中


 <구약성경>에서 욥은 응답을 받지만,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는 죽음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아니, 그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다.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다윗-솔로몬의 영광이 재림한다는 대중의 열망에 부합하지 못하고, 실망감이 미움으로, 미움이 증오로 바뀌며 제자들에게마저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 예수.


 예수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의 오해에 둘러싸여 살아야 했다. 짧은 생애 동안 민중도, 적대자도, 그리고 제자들마저도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예수에게 걸려고 했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중大衆의 기대 속에서 고독했다. 서민들은 그에게서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효과를 추구했고, 대중은 로마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유다를 '하느님 나라'로 회복시킬 지상적인 메시아로 그를 내세우려 했다. 이러한 기대와 흥분은 한때 갈릴래아의 봄이라는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지만, 예수에게 지상적인 메시아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예수로부터 떠나갔다. 예수의 비극적인 십자가상의 죽음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상이 내가 쓴 <예수의 생애>의 줄거리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7


  대사제 안나스는 예수의 죽음을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의 전승과 같이 말하지만, 예수 자신은 <루카 복음>의 내용으로 자신의 죽음을 말한다. 같은 공관 복음에서도 엇갈리는 최후의 순간에 대한 증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상반된 역사적 기록들 위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까. 앞의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기록이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최후의 질문이라면, 이어지는 <루카 복음> 기록은 예수가 겟세마니에서 이미 응답을 받았음을 함축하기에 이들 증언 사이의 차이는 크다. 슈사쿠는 아마 이 점을 <사해 부근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서로 다른 전승 속에 바오로에 의해 세워진 교리는 불완전하다는 점을.


 그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완강한 그 침묵은 나(대사제 안나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 침묵은 처음부터 나의 호기심과 수다스러운 말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p174)...  "그대는... 마지막에 저 비탄의 시편 구절을 외치게 될 거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네." "아닙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겨드립니다.' 라고. 이 모든 걸 곧 알게 될 것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175


 <침묵>에서 로드리고는 <성경>의 의인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응답받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함께 침묵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이 욥의 경우에서처럼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 자신은 의로운가. 알지 못한다면 스승 예수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에 예수의 길(道)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 선택을 한다. 


 라삐들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는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 율법을 날마다 엄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도, 율법을 날마다 외워야 한다는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느님은 외로우시므로 당신을 사랑하고 찬미해 주기를 기다리신다고 했다. 하느님은 보호자가 필요 없는 훌륭한 학자나 제사장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선인善人이 아니라 아이를 잃은 어머니처럼 울면서 외롭게 걷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다고 했다(p253)... 라삐은 황당무계한 꿈같은 예수의 이야기가 머지 않아 본색이 드러나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예수는 오직 사랑만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는 실현 불가능한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사랑이 이 현실 세계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종교 지도자인 라삐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예수에 대한 환멸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255


 로드리고의 선택은 <침묵>에서 생각이 오래 머무르는 지점이다. 그 어떤 선택도 독자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침묵>에서 로드리고는 예수의 침묵에 고민하지만, 독자들은 그의 선택으로 인해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선택의 의미를 찾는다. 왜 그는 이런 선택을 했을까.


 개인적으로 로드리고 선택은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 예수' 또는 '역사적 예수'에 근거했으리라 여겨진다. 바오로(Paulus, ACE 5 ~ 64(?))에 의해 규정된 그리스도가 아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예수의 모습을 로드리고는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을까. 불완전함을 걷어낸 믿음의 근원의 차원에서. 이와 같은 길은  슈사쿠의 다른 저서 <사해 부근에서> <예수의 생애>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본질적 일은 자기 주위에 한 무리의 제자를 만들고 이들에게 무한한 애착심을 불어넣고, 또 이들의 한복판에 자신의 교리의 새싹을 심어 놓은 것이었다. <죽은 후에도 그를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한 것이야말로 예수의 가장 큰 업적이요, 또 동시대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이었다. 예수는 교리를 세우지 않았고, 신조를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예수를 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교도라 불리는 까닭이었다. _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생애> , p396


 바오로는 우리 인간이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것과 인간 행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자신의 독선이며, 그것이 상대를 상처 입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p152)... 바오로의 그리스도론論이 전개된다. 율법은 인간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다.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계율과 율법을 지키지만, 돌을 던진 수면에 물결이 일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죄에 휘말린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행위의 비애, 그리고 원죄의 고통이 있다.. 그런 인간을 원죄에서 해방시키는 존재, 그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은 자신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속죄물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53


 생명을 살리는 것과 믿음을 저버리는 양 갈래 길은 로드리고에게 '예수'와 '그리스도' 중 어느 길을 택하는가와 마찬가지의 질문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로드리고의 고민이 생각보다 가볍게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끝이 아니다. 선택을 위해 이번에는 로드리고 개인의 문제로 내려와야 한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다. 한 사람의 일생과 순간의 다툼.


 성직자로서 일생을 한 길만 걸어온 한 사람의 신념과 찰나와도 같은 배교의 순간. 어쩌면 평생에 비하면 보잘 것없는 박해시기만 참고 버틸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을 영육(靈肉)간에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순간을 버티지 못한다면 그는 남은 삶을 비참하게 살아야 할 것이리라. 예수와 그리스도의 선택과 이어지는 영원과 찰나의 선택. 영원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의)의 선택. 이것이 <침묵>에서 로드리고가 처한 절망적 상황이 아니었을까.


 바오로와 제자 그룹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믿는다는 점에서는 일치되었다. 그러나 신격화한 예수를 어떤 형태로 믿는가 하는 점에서는 견해를 달리했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는 머지않아 재림할 그리스도, 곧 머지않아 세상 종말에 재림하여 이스라엘과 자신들을 구해 줄 그리스도였다. 이에 반해, 바오로의 그리스도는 율법이라는 자력自力 구원의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선사하는 존재로, 하느님의 자신과 인간과의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한 희생 제물인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 두 개의 그리스도관觀은 서로 얽히고설켜 그리스도교 안에서 뿌리를 내려간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90


 한 인간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이기에, 어떤 선택을 했든 로드리고 신부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비록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내용일지라도...  <침묵>을 읽은 후 로드리고의 선택에 대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로드리고의 선택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는 왕'으로 권위를 부여 받은 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슈사쿠의 다른 저서들과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의 저서 <예수의 생애>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블로크의 <기적을 행하는 왕>에서 드러나듯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기적을 통해 부여받은 권위를 걷어냈을 때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야 비로소 로드리고 선택의 의미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침묵>은 독립적으로 읽기보다 <사해부근에서>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사람마다 같은 해석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침묵>의 의미를 정리하는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는 본의 아니게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귀신을 쫓는 사람이 되었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위대한 신적 생애에 있어서는 언제나 그렇듯 그는 기적은 행했다기보다는 여론이 요구한 기적들을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적은 보통 군중이 만들어낸 것이지, 그것을 행했다고 말하는 사람의 소행은 아니다. 예수는 군중이 자신을 위하여 지어낸 기이한 일을 행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역사와 민중 심리의 법칙이 이처럼 큰 저촉을 입은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_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생애>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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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5-29 13: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태<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수의 생애>와 동일한 내용,다른 제목인 줄 알았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여러 책들이 이렇듯 연결되는걸 보면
평생에 걸쳐 신앙에 관한 고민이 작가에게 있었나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9 17:42   좋아요 1 | URL
미미님 말씀처럼 슈사쿠에게 신앙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문제는 인생에 걸쳐 천착한 주제로 보입니다. 그만큼의 깊이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