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2 - 끝나지 않는 전쟁 리비우스 로마사 2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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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하여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추구하는 세 가지 대상 곧 토지, 돈, 출세가 동시에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90/634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2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6~10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BCE 389 ~ 293에 해당하는 이 시기 로마 역사는 일정한 공식 안에서 움직인다.


 집정관 선출을 둘러싼 귀족과 평민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분열 상태, 이러한 분열을 틈타 침략하는 외적들 또는 원로원의 전쟁 결의, 전쟁 수행을 위한 독재관 선출과 인테르레그눔(Interregnum)이라는 권력 공백기, 전쟁 이후 내전에 준하는 귀족과 평민의 갈등... <리비우스 로마사 2>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시기는 이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로 급격하게 팽창하면서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로마 공화정의 해묵은 과제가 되버렸음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민과 귀족들은 무엇 때문에 대립했을까?


 처음에 도시는 그것을 일으켜 세운 똑같은 기둥 되는 인물에 의존했다. 즉 도시의 지도자급 시민인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에게 의존했던 것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한 해가 끝나는 때에 독재관 직에서 사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관직에 있었던 집정관급 정무관들은 다음 해의 선거를 주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그리하여 국가는 인테르레그눔(집정관 궐위 기간) 체제로 돌아갔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9/634


 평민들의 요구사항은 BCE 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leges Liciniae Sextiae)에 잘 표현된다. 법안의 내용인 부채 상환과 공유지 면적 제한, 집정관 선출 등에 대한 평민들의 요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귀족들은 평민들의 통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법안을 잘 지키지 않는다. 또한, 실제 전장에서 평민 출신 집정관들이 연이어 패전하면서 귀족들에게 리키니우스 법안을 따르지 않을 좋은 명분을 얻었고, 내분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대해 매번 로마는  독재관 선출이라는 임기응변을 통해 극복한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3가지 법안을 주장하고 나섰다. 세 법안 모두 귀족들의 힘을 억제하고 평민들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 법안은 부채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었는데, 빌려온 원금에서 지금껏 지불한 이자의 액수를 공제하고 그 나머지 금액을 3년에 걸쳐 3회에 균등 상환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법안은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부과하여 개인이 5백 유게룸 이상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세 번째 법안은 집정관급 정무관 제도를 철폐하고 예전처럼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하되 그 중 한 명은 평민 출신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아주 중요한 법안으로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지 않는 한 성취하기 어려웠다. 이것을 가리켜 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안이라고 한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89/634


 귀족들은 그 참담한 실패에 경악하기보다는 평민에게 군대 지휘권을 부여하여 불행한 결과가 발생했다고 분노했고, 온 도시에는 그들의 성난 고함소리가 가득했다: "봐라, 평민들 중에서 집정관을 뽑아서, 그런 권리를 누릴 자격도 없는 자에게 군대 지휘권을 주었더니 이런 참담한 결과가 빚어지지 않았느냐! 평민들은 민회의 투표로 귀족들을 관직에서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정당하지 못한 법률은 영원불멸의 신들을 설득하지는 못하지 않았느냐. 신들은 그들의 신성과 조점권에 대한 모욕을 그런 식으로 복수한 것이다. 인간이든 신이든 법률에 의해 이런 것들을 관장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자가 감히 조점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에, 로마 군과 그 사령관이 몰살당한 것이다. 앞으로는 귀족 가문의 권리를 짓밟는 선거를 절대로 개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인 것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29/634


 로마 지도부는 1세기 동안 분열을 위한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전쟁을 택한다. 그들은 때마침(?) 3차례에 걸친 삼니움 전쟁(Samnite Wars, BCE 343 ~ 290)과 라티움 전쟁(Latin Wars, BCE 340 ~ 338)을 통해 내부의 불만을 일단 잠재우고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었다. 로마인으로서 평민과 귀족들로 갈라져 싸우던 이들은, 로마군(軍)이라는 하나의 조직아래에서는 '지휘관-병사'로 일체가 되어 국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수많은 역사가와 작가들이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진정한 로마인과 로마 공화정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우선시 한 로마인 정신이 위기 극복의 동력이라고 하지만, 과연 이 시대가 진정으로 위대한 로마정신이 발현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까?


 데키우스는 계속 행군해야 하는 병사들이 무거운 짐으로 고생할 것이 우려되어 그들은 불러 모아 놓고 이런 연설을 했다.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이 정도의 승리로 만족하고 이 정도의 전리품으로 흡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의 기대가 여러분의 용기에 걸맞은 그런 높은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삼니움 족의 모든 도시들과 그 안에 내버려진 모든 물건들이 여러분의 것이다... 그곳에서는 힘든 일은 별로 없고 더 많은 전리품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전리품은 매각되었고 병사들은 어서 행군하자고 사령관을 재촉하면서 로물레아로 갔다. 그곳에서도 공성 작업이나 공성기 동원은 필요가 없었다. 로마 군이 일단 성벽에 접근하자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486/634


 삼니움 전쟁에서 지휘관이 병사들을 독려하는 연설은 로마 공화국의 위기탈출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귀족(그리고 원로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체제의 약한 부분을 개혁하는 대신 거대한 외부의 적(敵)을 통해 현재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내부 단결을 도모하는 정책을 선택한다. 거대한 적은 막대한 전리품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여기에 평민들 또한 적극적으로 자신의 전쟁에 뛰어들고, 귀족들은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을 평민들에게 배분하면서 그들의 양(量)적인 불만을 채우고, 적들은 동맹으로 끌어들이면서 자신의 기득권과 로마의 몸집을 불리는 정책의 결과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우리는 당신의 노예가 아니라 당신의 병사 자격으로 복무합니다. 우리는 유배를 떠나온 게 아니라 전쟁을 하러 나왔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전투 신호를 내린다면 우리는 남자답게 또 로마인답게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기가 필요 없다면 우리는 군 진영이 아니라 로마로 돌아가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귀족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44/634 


 이러한 로마 귀족들의 정책에 대해 평민들은 종군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얻었으며, 삼니움과 라티움 주변 민족들 또한 동맹의 대가를 적절하게 받는 편으로 절충하는 방안을 선택한다. 전쟁을 통한 막대한 전리품이 보장된다면, 원로원 중심의 정체(政體)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동맹관계에 별다른 이의없이 수긍하는 로마의 평민들과 라티움 동맹국들의 행동에서 과연 로마의 정신이라 할 부분이 있는가. 여기에 위대한 로마인의 정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대신 계산빠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들만이 있을 뿐이라 생각된다. 그들이 로마 공화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부분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투쟁은 자신의 몫을 조금 더 받기 위한 쟁의 행위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그들은 로마 공화정의 이름 아래 정복전쟁에 함께 참여했던 것을 돌이켜 본다면, 부르투스가 지키려 했던 공화정의 가치란, 제정이라는 '독점(獨占)'에 반대하는 '과점(寡占)'주의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과점주의자들은 현실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보다 문제를 회피하고 다음 세대로 넘기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로마인의 정신에 대해 회의(懷疑)를 갖게 된다...


 <리비우스 로마사 2>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내 문제를 덮고 손잡은 평민-귀족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이어지는 시기에서 이들은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3)이라는 더 강대한 위협에 대해 하나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다음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무력으로도 라티움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으나, 그래도 로마와의 지난 관계를 생각하여 이런 양보안을 내놓으려 합니다. 우리는 양국에 똑같이 공정한 평화 조건을 내놓겠습니다. 영원불멸한 신들은 우리가 힘에서 로마와 똑같은 나라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집정관 두 명 중 한 사람은 로마에서 뽑고, 다른 한 사람은 라티움에서 뽑아야 합니다. 원로원 의원 구성도 두 민족에게서 동수로 선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민족 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일한 권위의 자리가 마련되고 모든 것이 명실상부해집니다. 한쪽이 필요한 양보를 하면 양쪽이 모두 혜택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로마를 우리의 어머니 도시로 만들고 우리 모두 로마인이 됩시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232/634


그해(기원전 352년) 말에,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 때문에 집정관 선거가 열리지 못했다. 호민관들은 선거가 리키니우스 법에 의해 거행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반면에 독재관은 집정관 자리를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공개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를 정부 제도에서 아예 제거해 버리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했다. 따라서 선거는 독재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열리지 못했고, 다시 한 번 인테르레그눔 체제가 들어섰다. 인테르렉스들은 평민들이 귀족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열한 번째 인테르렉스까지 들어섰다.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62/634

조약이나 동맹은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전에 부끄럽게 여겼던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하려 합니다. 로마는 ‘동맹군‘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우리의 군대를 로마의 군대에 추가하여 그들의 병력을 두 배로 늘리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군대가 로마의 허가 없이는 전쟁을 시작하고 끝내는 독립된 결정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공정이고 동맹입니까? 왜 모든 것이 이처럼 공정하지 못합니까? 왜 라틴 인 출신의 집정관은 없는 겁니까? 힘을 공유할 수 있어야 권위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로마는 동맹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그 반란의 진압에 조력해줄 동맹을 구하고 또 군사력 강화를 위해 도시의 인구를 계속 늘려나갔다. 그 결과 세계 최강국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로마는 자국을 위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많은 동맹국들을 만들었고, 그런 동맹국들은 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로마와 유사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제국의 권좌를 틀어쥐고 군사적 지휘권을 확보했기 때문에 동맹국들이 부지불식간에 로마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작품 해설 , p60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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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와 조조의 중요한 차이는, 원소는 모사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던 데 반해 조조는 귀 기울여 들었다는 데 있었다. 게다가 원소는 모사들을 제대로 지켜주지도 못했다.

가족 사이의 불화도 패인의 하나이다. 군웅할거시대에 유독 원씨 가문만 두 사람의 야심가를 배출했다. 바로 원소와 원술이다. 두 사람은 원래 배다른 형제였으나 원소가 양자로 입적되며 사촌지간이 되었다. 이 둘이 힘을 합쳤다면 원소가 더 빨리 화북을 통일할 수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반목했다. 오히려 서로의 적과 동맹을 맺어 형제끼리 싸웠다. 원술은 원소의 적인 공손찬과 힘을 합쳐 원소에 반항했고, 원소는 조조, 유표와 동맹을 맺어 원술을 견제했다. 결국 원소와 원술의 경쟁은 원술이 조조에게 패해 남양군에서 회남으로 쫓겨남으로써 원소의 승리로 끝났다.

10번 이상 전투에 참여하고 승률 80% 이상인 장수는 장요, 악진, 우금, 장합, 서황, 하후연, 조인 등이다. 이 가운데 조조의 친인척인 하후연과 조인을 제외한 5인은 공교롭게도 『삼국지』 권17에 배치되었고, 다섯 장수를 모두 명장이라고 못 박았다.

유비는 지역 기반을 잃고 새로운 곳을 차지하기 위해 유랑하느라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던 데 반해 조조는 정복을 위해 여러 지역으로 진격했다. 조조는 유비보다도 더 긴 거리를 행군했고, 더 많은 그리고 더 넓은 지역으로 진격했다.

조조는 오환교위 염유閻柔가 거느린 오환 1만여 락을 중국 내지로 옮기고, 항복한 삼군오환은 군대에 편입시켰다. 삼군오환은 ‘명기名騎’로 이름을 떨쳤다. 오환의 기병들은 ‘돌기突騎’ 혹은 ‘오환돌기烏丸突騎’라고 불렸으며, 용맹함과 막강한 전투력으로 유명했다.
후한시대에도 굴복시키지 못한 오환을 정복한 조조는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세웠다.

손권은 통치 기간 동안 적어도 9회나 근거지를 옮겼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손권은 형주, 즉 장강 중류에서 발생한 군사적 대립과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장강 중류의 시상, 무창, 육구, 공안에 잠깐씩 주둔한 것이다.

손권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강남 개발이다. 현재의 ‘개발’은 콘크리트 건물들을 잔뜩 세우는 것을 뜻하지만 당시에는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하는 것을 뜻했다. 조조가 둔전제를 실시한 것처럼 손권도 둔전을 실시했다. 손권이 언제 둔전을 실시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어떤 학자는 203년 혹은 204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조조의 둔전이 민둔의 비중이 큰 반면 오나라의 둔전은 군둔이 많았다.

한마디로 손권 정권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아 부족해진 인구, 세원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사람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조조가 농민을 상대로 둔전제를 실시하고 세습 군호를 두어 군사 수를 유지했던 조치와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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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ECD 최저 수준의 신뢰도를 자랑하는 국내 여론들 덕분에 외신들을 보며 영어 공부를 강제로 해야되는 상황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덕분에 '내가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기준을 세울 수 있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높아진 국가 위상 덕분에 이제는 국내 정치를 외신으로만 접해도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지장이 없는 것을 보면 수십 년간 이어져온 언론의 독점(獨占)도 머지 않은 듯하다.


 2023년 연초 The Economist에서는 전임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재임 시 근무했던 정치권인사들에 대해 "The Economist explains"에서 'Why does South Korea pardon its corrupt leaders? 한국은 왜 부패한 지도자들을 사면하는가?'라는 주제로 상세히 세계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 중 일부를 옮겨본다.


 Pardons are often motivated by power dynamics within the political elite, too. Convicted politicians often have powerful allies in parliament, who can encourage pardons. 


 때로 사면은 정치 엘리트들 간의 권력 역학에 의해 유발되기도 한다. 흔히 유죄 판결을 받은 정치인은 사면을 독려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동맹자들을 두고 있기도 하다.


 President Yoon is clearly a fan of Mr Lee, the former president he pardoned. He has stocked his team with staff from his predecessor's administration and adopted similar policies. But the president also pardoned several politicians involved in the corruption scandal that brought down Ms Park even though he had put them away when he was chief prosecutor under Mr Moon.


 윤 대통령은 자신이 사면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팬임이 분명하다. 그는 이전 행정부의 직원들로  자신의 팀을 꾸리고, 유사한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또한 문 대통령 아래에서 검찰총장 재직 당시 전임 박 대통령을 끌어내렸던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여러 정치인들도 또한 함께 사면했다.


 He may be hoping that the pardons will unify his conservative party, People Power, which is riven by infighting. Mr Lee and Ms Park still have enormous influence in conservative political circles. The president, a political neophyte and outsider, may also be hoping to smooth his entry into this elite.


 그는 이번 사면이 내부 다툼으로 분열된 보수정당인 국민의 힘이 통합되는 계기가 되길 원할 것이다. 전임 이 대통령과 박 대통령은 여전히 보수 정치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정치 초보이자 아웃사인더인 윤 대통령은 아마도 이들 정치엘리트 계층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기를 바랄 것이다.


Though no longer a prosecutor, Mr Yoon still paints himself as a crusader for justice. But his decision to free a guilty man may open old wounds. The convictions of the ex-presidents and their co-conspirators were historic moments for South Korean democracy, says Erik Mobrand of the rand Corporation, a think-tank. Far from unifying the country, upending more of these judgments could undermine faith in its institutions. 


 이제 더는 자신이 검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을 정의를 위한 십자군으로 덧칠한다. 그러나 죄인을 석방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아픈 기억을 들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싱크탱크인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에릭 모브랜드(Erik Mobrand)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들과 그들의 공모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은 한국 민주주의에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국민대통합과는 동떨어진, 잘못된 이러한 판단을 뒤집는 것은 국가 근간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관련기사] https://www.economist.com/the-economist-explains/2023/01/06/why-does-south-korea-pardon-its-corrupt-leaders 


 같은 사안에 대해 국내 언론들은 '사면의 대상이 누구인가?', '누구 측근이 어떤 조건으로 사면되었는가?'에 대해 중계방송을 하듯 취재에 열을 올렸지만, 정작 사면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 지적한 기사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미처 못 읽었을 수도 있겠지만, 새벽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경매장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단순한 사실 나열 속에서 우리가 정작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들은 슬며시 빠져나간 것은 아닐런지. 이런 어이없는 자신들의 보도보다 대중들의 무지를 지적하는 언론들에 대한 개혁과 함께, 21세기 대한민국 헌법 안에 존재하는 1789년 인권선언문 제16조를 통해 나타난 권력분립과 프랑스 대혁명 안의 법 안의 일반의지에 대한 논의를 무력화시키는 '사면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는 별도로 고민할 때가 아닐까.


 누가 법을 만들 것인가? 누가 입법자로서 공동체에 대해 결정을 내릴 것인가?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민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이익에 반대되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인(私人)이나 개인에 다시 지배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민 전체만이 자신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본질상 비개인적이어서 오직 모든 사람의 이익에 일치하는 것만을 원할 수 있는 일반 의지만이 법을 제정할 수 있다(P227)... 개인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고, 그의 의지와 일반 의지는 하나의 동일한 의지가 된다. 일반 의지를 따를 때 그는 단지 자기 자신에게 따를 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동의에 따라 공동체에 구속되었고 그 구성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일반 의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따르는 법률에 참여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국가 안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문제는 해결된다. _ 베르나르 그뢰퇴유젠,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 p228


 로베스피에르는 이 원칙이 인권선언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사전에 올바른 질문부터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로데크의 주교 콜베르 드 세뉼레가 일어나 자기가 마련한 안을 내놓았다. “시민들의 권리는 오직 권력을 슬기롭게 분배해야만 보장할 수 있다.”  그 뒤 계속 원안 제24조로 돌아가 토론하고 심의한 뒤 결국 ‘선언문’의 제16조를 확정했다. 몽모랑시 백작은 제6위원회의 안을 모두 심의했지만 인권선언문에 한 가지 조항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온갖 폐단이 생기고 세대가 바뀌고 이해관계도 바뀌면서 인간이 구축한 모든 법을 수정할 필요가 생기기 때문에 한 나라의 인민은 언제나 헌법을 다시 보고 개정할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는 평화롭고 합헌적인 수단을 지정해두는 것이 옳다.” _ 주명철, <프랑스 혁명사 2 : 1789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 p285/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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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그래픽 - 마르셀 프루스트 사후 100주년 기념
니콜라 라고뉴 지음, 정재곤 옮김, 니콜라 보주앙 그래픽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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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톨라 라고뉴의 <프루스트 그래픽>은 마르셸 프루스트의 생애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시각적으로 정리한 인포그래픽이다. 너무 소소한 부분까지(심지어, 연도 별 프루스트의 콧수염, 프루스트의 연도별 주식 포트폴리오도 분석한다) 다루기에 저자의 철저함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굳이 이런 것까지...'라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프루스트 그래픽>은 다소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전체를 빅데이터를 활용한 텍스트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무의식의 의식적 결과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책으로 생각된다.

프루스트는 동시대 소설가들에 비해 많은 동사를 사용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ㅇ서는 "완료동사"라고도 불리는 과거완료시제가 많이 사용되었다. 반면 미래시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았지만 <되찾은 시간>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_ 니톨라 라고뉴, <프루스트 그래픽>, p75

이다/있다(etre), 가지다(avoir), 하다(farie)는 어느 정도의 길이를 가진 모든 프랑스어 텍스트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동사들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예외가 아니다. _ 니톨라 라고뉴, <프루스트 그래픽>, p8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각은 본연의 의미로나 비유적인 의미에서나 핵심적이다. 프루스트가 소설에서 환기하는 모든 감각 중에서 시각은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화자는 끊임없이 구경꾼이나 훔쳐보는 사람의 위치를 점하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시각적 은유와 시선이라는 단어가 넘쳐난다. _ 니톨라 라고뉴, <프루스트 그래픽>, p88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들 중에서 '처럼/같이/~하듯'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비교들로 넘쳐난다. '처럼(comme)'이란 단어는 매 부분들, 사람들, 예술 작품, 동물, 식물 또는 감정 따위를 비교하기 위해 사용된다. _ 니톨라 라고뉴, <프루스트 그래픽>, p90

전체적으로는 "완료동사"인 과거완료 시제를 사용해서, '큰'과 '작은'의 대조로 구불구불한 미로처럼 얽혀 최종적으로 미래 시간(temps)을 향해 나아가는, 세부적으로는 'etre'와 'avoir' 동사와 '처럼(comme)'이라는 비유를 통해 시각적인효과를 극대화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프루스트 무의식의 결과를 과학을 통해 정량화 시킨 <프루스트 그래픽>을 가지고 완간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는 것도 작품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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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1-11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민음사 행사때 샀는데, 처음에는 내용이 넘 간단해서 좀 실망했었어요
근데, 자꾸 넘겨보게 되더라구요.^^

겨울호랑이 2023-01-12 08:1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저도 처음에 책을 보면 큰 의미가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관련해서 끝없는 미로와 같은 이 작품을 읽을 때 나침반 같은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책이라 여겨집니다.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
 

조조는 허를 수도로 삼으면서 둔전 경작으로 물자 수송 없이 자급자족하려고 했다. 또한 운하망을 통해 허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유통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둔전은 본래 변경에 주둔한 군사들이 현지에서 농사를 지어 직접 식량을 충당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원래 중국 내지 지역의 경작 방식은 아니었다. 또한 조조는 군사들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허 일대에서 둔전 경작에 종사하게 해 곡식 100만 석을 얻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에 의존할 때 가능한 해석은 둔전(민둔) 경작이 군량 수송 비용 절감과 신속한 수송을 위해서라기보다 수도 허에 거주하는 황제와 관료, 군인들을 위한 식량 확보가 주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시대에도 대개 총사령관은 후방에서 지휘했기 때문에 장군들에게 중요한 자질은 뛰어난 무예라기보다 작전 능력과 지휘 능력, 판단력, 순발력이었을 것이다. 원술은 절충교위折衝校尉와 호분중랑장, 후장군 등 무관직을 역임했지만 무예가 뛰어나거나 큰 전공을 세운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원술이 그나마 두각을 나타낸 것은 손견, 손책 부자 덕분이었다.

조조는 막판에 서주를 쉽게 평정했지만 서주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장패 등의 도적들이 서주 북서부의 낭야국과 동쪽의 동해군에서 활개치고 다녔기 때문에 이들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조조는 장패 등을 사면하고 청주와 서주의 해안 지방을 이들에게 맡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조는 서주와 청주의 해안 지역에 해당하는 낭야와 동해, 북해를 나눠 성양城陽, 이성利城, 창려昌慮 3군을 새로 만들어 장패 등에게 맡겼다. 사실상 장패 등의 지분을 인정하고 권력을 분할해준 조치였는데, 대신 조조는 장패 등 전직 도적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삼국지/위서/종요전』에서는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종요는 폐허가 된 낙양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관중의 백성들을 낙양으로 이주시켰다. 또 도망가거나 배반한 사람들을 받아들여 낙양의 인구를 늘렸다. 이는 장안과 관중의 번영을 도모하기보다 관중의 피폐함을 의도한 정책으로 읽힌다. 당시 수도였던 허에서 먼 관중 지역의 인구를 감소시키고 가까운 낙양의 인구를 늘려 조조 정권의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결국 황하 이북과 이남은 원소와 조조의 2파전으로 좁혀진다. 조조는 여포와 원술, 유비, 장수 등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대하여 황하 이남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관중에 남아 있던 동탁 부하들도 물리쳐 영토를 넓혔다. 비록 장강 유역에 유장, 유표, 손책이 있었지만 조조에게 위협적인 세력은 아니었다. 결국 당시 상황으로는 원소와 조조 가운데 승자가 천하를 차지할 분위기였다. 원소가 이길 수밖에 없는 우세한 구도였으나 최후의 승자는 그가 아니었다.

소설 삼국지에서는 관우가 문추를 참했다고 묘사했지만(26회), 『삼국지』와 『자치통감』에서는 문추를 참한 장수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조조는 원소의 군대를 격파하고 관도로 후퇴했다.

이때 조조는 항복한 원소군 7만여 명을 땅에 파묻어 죽였다. 『자치통감고이』에서는 『후한서/원소전』을 인용해 8만 명을 죽였다고 했다. 원소가 이끌고 간 병사가 11만 명이었으니 그중 대략 7할의 병사들이 조조에 의해 생매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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