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와 조조의 중요한 차이는, 원소는 모사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던 데 반해 조조는 귀 기울여 들었다는 데 있었다. 게다가 원소는 모사들을 제대로 지켜주지도 못했다.
가족 사이의 불화도 패인의 하나이다. 군웅할거시대에 유독 원씨 가문만 두 사람의 야심가를 배출했다. 바로 원소와 원술이다. 두 사람은 원래 배다른 형제였으나 원소가 양자로 입적되며 사촌지간이 되었다. 이 둘이 힘을 합쳤다면 원소가 더 빨리 화북을 통일할 수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반목했다. 오히려 서로의 적과 동맹을 맺어 형제끼리 싸웠다. 원술은 원소의 적인 공손찬과 힘을 합쳐 원소에 반항했고, 원소는 조조, 유표와 동맹을 맺어 원술을 견제했다. 결국 원소와 원술의 경쟁은 원술이 조조에게 패해 남양군에서 회남으로 쫓겨남으로써 원소의 승리로 끝났다.
10번 이상 전투에 참여하고 승률 80% 이상인 장수는 장요, 악진, 우금, 장합, 서황, 하후연, 조인 등이다. 이 가운데 조조의 친인척인 하후연과 조인을 제외한 5인은 공교롭게도 『삼국지』 권17에 배치되었고, 다섯 장수를 모두 명장이라고 못 박았다.
유비는 지역 기반을 잃고 새로운 곳을 차지하기 위해 유랑하느라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던 데 반해 조조는 정복을 위해 여러 지역으로 진격했다. 조조는 유비보다도 더 긴 거리를 행군했고, 더 많은 그리고 더 넓은 지역으로 진격했다.
조조는 오환교위 염유閻柔가 거느린 오환 1만여 락을 중국 내지로 옮기고, 항복한 삼군오환은 군대에 편입시켰다. 삼군오환은 ‘명기名騎’로 이름을 떨쳤다. 오환의 기병들은 ‘돌기突騎’ 혹은 ‘오환돌기烏丸突騎’라고 불렸으며, 용맹함과 막강한 전투력으로 유명했다. 후한시대에도 굴복시키지 못한 오환을 정복한 조조는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세웠다.
손권은 통치 기간 동안 적어도 9회나 근거지를 옮겼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손권은 형주, 즉 장강 중류에서 발생한 군사적 대립과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장강 중류의 시상, 무창, 육구, 공안에 잠깐씩 주둔한 것이다.
손권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강남 개발이다. 현재의 ‘개발’은 콘크리트 건물들을 잔뜩 세우는 것을 뜻하지만 당시에는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하는 것을 뜻했다. 조조가 둔전제를 실시한 것처럼 손권도 둔전을 실시했다. 손권이 언제 둔전을 실시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어떤 학자는 203년 혹은 204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조조의 둔전이 민둔의 비중이 큰 반면 오나라의 둔전은 군둔이 많았다.
한마디로 손권 정권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아 부족해진 인구, 세원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사람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조조가 농민을 상대로 둔전제를 실시하고 세습 군호를 두어 군사 수를 유지했던 조치와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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