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허를 수도로 삼으면서 둔전 경작으로 물자 수송 없이 자급자족하려고 했다. 또한 운하망을 통해 허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유통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둔전은 본래 변경에 주둔한 군사들이 현지에서 농사를 지어 직접 식량을 충당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원래 중국 내지 지역의 경작 방식은 아니었다. 또한 조조는 군사들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허 일대에서 둔전 경작에 종사하게 해 곡식 100만 석을 얻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에 의존할 때 가능한 해석은 둔전(민둔) 경작이 군량 수송 비용 절감과 신속한 수송을 위해서라기보다 수도 허에 거주하는 황제와 관료, 군인들을 위한 식량 확보가 주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시대에도 대개 총사령관은 후방에서 지휘했기 때문에 장군들에게 중요한 자질은 뛰어난 무예라기보다 작전 능력과 지휘 능력, 판단력, 순발력이었을 것이다. 원술은 절충교위折衝校尉와 호분중랑장, 후장군 등 무관직을 역임했지만 무예가 뛰어나거나 큰 전공을 세운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원술이 그나마 두각을 나타낸 것은 손견, 손책 부자 덕분이었다.

조조는 막판에 서주를 쉽게 평정했지만 서주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장패 등의 도적들이 서주 북서부의 낭야국과 동쪽의 동해군에서 활개치고 다녔기 때문에 이들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조조는 장패 등을 사면하고 청주와 서주의 해안 지방을 이들에게 맡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조는 서주와 청주의 해안 지역에 해당하는 낭야와 동해, 북해를 나눠 성양城陽, 이성利城, 창려昌慮 3군을 새로 만들어 장패 등에게 맡겼다. 사실상 장패 등의 지분을 인정하고 권력을 분할해준 조치였는데, 대신 조조는 장패 등 전직 도적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삼국지/위서/종요전』에서는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종요는 폐허가 된 낙양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관중의 백성들을 낙양으로 이주시켰다. 또 도망가거나 배반한 사람들을 받아들여 낙양의 인구를 늘렸다. 이는 장안과 관중의 번영을 도모하기보다 관중의 피폐함을 의도한 정책으로 읽힌다. 당시 수도였던 허에서 먼 관중 지역의 인구를 감소시키고 가까운 낙양의 인구를 늘려 조조 정권의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결국 황하 이북과 이남은 원소와 조조의 2파전으로 좁혀진다. 조조는 여포와 원술, 유비, 장수 등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대하여 황하 이남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관중에 남아 있던 동탁 부하들도 물리쳐 영토를 넓혔다. 비록 장강 유역에 유장, 유표, 손책이 있었지만 조조에게 위협적인 세력은 아니었다. 결국 당시 상황으로는 원소와 조조 가운데 승자가 천하를 차지할 분위기였다. 원소가 이길 수밖에 없는 우세한 구도였으나 최후의 승자는 그가 아니었다.

소설 삼국지에서는 관우가 문추를 참했다고 묘사했지만(26회), 『삼국지』와 『자치통감』에서는 문추를 참한 장수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조조는 원소의 군대를 격파하고 관도로 후퇴했다.

이때 조조는 항복한 원소군 7만여 명을 땅에 파묻어 죽였다. 『자치통감고이』에서는 『후한서/원소전』을 인용해 8만 명을 죽였다고 했다. 원소가 이끌고 간 병사가 11만 명이었으니 그중 대략 7할의 병사들이 조조에 의해 생매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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