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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세트 - 전6권
송건호 외 / 한길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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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6- 남북한 해방전후사 연구의 성과와 입장에 대한 종합적 안내
박명림 외 지음 / 한길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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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5- 북한의 혁명전통, 인민정권의 수립과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과정
김남식 외 지음 / 한길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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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4- 민중항쟁.무장투쟁.문화예술운동.한국전쟁의 해명
정해구 외 지음 / 한길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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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빨갱이 중대장이 있다˝하는 누군가의 말에 남편은 빨갱이가 되어 버렸고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남편이 빨갱이가 되어버려 우리집의 젊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신하여야 했다... 4.3 이 지난 후 습격이 끊이지 않았다. 산으로 피신했다 해서 산사람이 되어야 했고 마을에 남았다 해서 군인이나 경찰 가족들처럼 죽임을 당해야 했다. 4.3 이후 죽는 것은 마을 사람들뿐이었다.(p293) 「해방전후사의 인식4」중

제주 4.3 사건을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세력 350여명이 제주도 경찰 지서를 습격하면서 발생한 이 사건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4.3 사건 이전의 태평양전쟁 시기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로부터 시작해서, 해방 직후 많은 재일 동포의 귀환, 인민위원회조직, 1946년 제주도(섬)의 도(행정구역)승격, 1947년 3.1운동, 1948년 남한 단독선거 반대까지의 사건과 함께, 4.3 이후에는 1948년 11월 계엄령 선포 및 초토화 작전 이후 대대적인 진압작전 그리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의 개방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사건을 알아야 하고, 이와 더불어 4.3사건과 밀접한 관련있는 1948년 여순 사건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처가 압축되어 있기에 해방 전후사의 제주도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일부 미국 소식통들은 이 투쟁에서 15,000 ~20,000 명의 섬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대한민국 통신사는 27,719명이라는 공식적인 숫자를 인용했다. 북한측의 수치는 3만명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지사는 비공식적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6만 명이 사망했으며, 4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일본으로 달아났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39,285채의 가옥이 파괴되었으나 지사는 ˝중산간지대의 가옥들 대다수˝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400개의 마을 중 170개만 남았다. 바꿔 말하자면 섬사람들은 대여섯 명 중 한명 꼴로 죽었고, 절반 이상의 마을이 파괴되었다.(p31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중

아직 4.3사건에 대한 연구가 채 끝나지 않았기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으로 4.3의 역사적 평가를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겠지만, 1950년대 인구 30여만명의 섬에서 일어난 가슴 아픈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미 지금도 상당히 늦은 일이리라. 4.3사건의 모든 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며, 2016년 8월 제주 4.3 평화공원 사진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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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4-03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올 선생님의 책으로4•3항쟁을 읽고 있습니다! 가보지 못 한 평화공원을 보니 의미가 더 깊어지는것 같아 좋습니다!
건강한 하루되십시요!ㅎ

겨울호랑이 2020-04-03 12:45   좋아요 1 | URL
막시무스님 독서에 작은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화창한 날,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302moon 2020-04-03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과 평화공원 사진을 보며 여러 감정이 생겨납니다.
고맙고, 죄송하고.

겨울호랑이 2020-04-03 12:50   좋아요 1 | URL
302moon님 말씀처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제주의 역사를 알고 나니, 저 역시 제주를 아름다운 섬으로만 바라볼 수가 없게 됩니다. 섬 곳곳의 숨겨진 아름다운 장소가 예전에 수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죽어갔음을 생각한다면, 관광의 섬 제주 이전에 제주의 아픔에 공감하는 우리가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단발머리 2020-04-03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말로는 다 담지못할 고통과 아픔이겠지요. 더 늦기 전에 진상이 밝혀져서 제주 시민들의 억울함이 천에 하나라도 풀어지기 바랄 뿐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4-03 13:09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너무도 많아, 단발머리님 말씀처럼 수사로는 부족함이 큽니다. 하루 빨리 모든 현대사의 은폐된 진실들이 다 밝혀져야 겠지요... 4.3의 진상을 알기위해서는 4.16이전에 4.15로 밝혀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jelee87 2020-04-04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찬찬히 잘 읽엇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4-04 06:41   좋아요 0 | URL
jelee87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4-04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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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텍-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다비데 도메니치 지음, 김원옥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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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프란체스카 로마나 로마니 지음, 이유경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2월
34,000원 → 30,6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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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다니엘 비탈리 지음, 김원옥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2월
34,000원 → 30,6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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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마리아 안젤릴로 지음, 이영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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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피렌(Henri Pirenne, 1862 ~ 1935)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Mahomet et Charlemagne>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게르만 민족의 로마 제국 멸망은 고대 사회의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湖水)'로 만들었던 로마에게 게르만의 침입은 제국의 성격을 바꿀 정도의 충격을 주지 못했다. 반면,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을 이끈 원동력은 이슬람(Islam)의 진출에 있음을 앙리 피렌은 강조한다.

 

고대 전통이 단절된 원인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이슬람의 진출이었다. 이 진출의 결과는 동방과 서방의 최종적 분리였고, 지중해적 통일성의 종말이었다. 이제 이슬람교도의 호수가 된 서지중해는 과거에 늘 그랬던 것 같은 상업과 사상의 교통로가 더 이상 아니었다. 서방은 봉쇄되었고, 닫힌 세계에서 자체의 자원으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로 메로빙거 왕조과 쇠퇴했고 그 대신 게르만적인 북방에 기원을 둔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가 등장했다(p334)...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이 나타났지만, 전반적으로 로마 교회와 봉건제에 의해 지배된 유럽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전통적인 용어를 빌리면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동향은 800년에 새로운 제국(서로마 제국)이 건설됨으로써 완성되었다.(p335)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저자는 이슬람의 지중해 장악이 가져온 서구 유럽의 봉쇄가 유럽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까지 팽창한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제국과 서유럽의 게르만 왕국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유럽에서 전통의 단절을 가져올 정도의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팽창하는 정책을 택했을까? 


 무아위야와 그 부족은 칼로써 칼리프 지위를 획득했다. 그것은 혈연과 수니파 교리에 의해 결합된 전사와 상인의 사회이며 동시에 신정체제였다. 그 체제는 정치에서는 실용주의를, 종교에서는 절제를 강조했다. 칼리프 보위의 찬탈자가 성공하려면 아랍의 호전성을 잘 막아서 다른 곳으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하고 또 전쟁을 통해 국가 부흥의 과정을 공고히 할 줄 알아야 했다. 따라서 팽창 정책은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둔 새로운 체제의 핵심 정책이 되었다.(p150) <신의 용광로> 中


 이슬람의 팽창정책은 무아위야(Muawiyah bin Abi-Sufyan, 602 ~ 680)가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Ali ibn Abu Talib, 601 ~ 661)를 제거하고 칼리프의 지위에 오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이 국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로 관심을 돌리듯, 무아위야 왕조는 정복전을 통해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슬람은 두 가지 선물을 받게 된다. 하나는 세계사에 유래없이 빠른 기간에 이루어진 광대한 이슬람 제국이며, 다른 하나는 이슬람 내부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과 대립이다.


[그림] 푸아티에 전투(출처 : https://www.britannica.com/event/Battle-of-Tours-732)


 732년 푸아티에(Battle of Tours-Poitiers) 전투는 이와 같이 팽창하는 이슬람의 침입을 막아낸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푸아티에 전투가 없었다면 유럽은 이슬람의 지배 하에 놓였을 것이며, '기독교의 유럽'이 아닌 '이슬람의 유럽'이 되는 위기의 상황을 극복한 성전(聖戰)이었다는 것이 유럽학자들의 인식이다. 그렇지만, <신의 용광로 God's Crucible: Islam and the Making of Europe, 570~1215>의 저자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David Levering Lewis)는 이러한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카롤링거 왕조의 유럽 사람들은 카를 '마르텔(해머)'이 거둔 푸아티에 승리 덕분에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그 반대로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패배가 더 바람직한 게 아니었을까?(p433) <신의 용광로> 中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제기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브로 강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남쪽의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 ~750)과 북쪽의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481 ~ 870)은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두 제국이었다.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들 간의 관용과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꽃을 피워낸 이슬람 문명은 개방적인 반면,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서유럽 문명은 폐쇄적이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문화는 서로 융합하여 그보다 더 오랫동안 800년도 넘게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어났다. 이슬람교는 시칠리아에서처럼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다른 문화에 대해 강력한 상징적 특성을 보여주었는데, 남부 아랍의 힘야르족, 유대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메소포타미아인, 콥트인, 베르베르족, 아프리카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터키인, 몽골족, 심지어는 중국인에게 이미 그 점을 보여 주 바 있었다. 이슬람교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도덕적 갈등 없이 결합했다. 알안달루스에서는 이베리아-라틴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다.(p210) <중세 1> 中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무엇보다도 백성의 사회생활을 코란의 원칙으로 통치해야 했다. "알라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진정으로 증명하라." 예언자는 그렇게 명령했고 아브드 알-라흐만은 그에 순응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부당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라."... 이 문명화된 정책에서 곧 저 유명한 콘비벤시아 convivencia, 즉 역사적으로 유명한 관용과 상호 의존의 기풍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이곳 알-안달루스에서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은 오랫동안 유럽 대륙에 하나의 역할 모델을 제공하는 공존의 문명을 누렸다.(p311) <신의 용광로> 中


 한 중세학자는 샤를마뉴 시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카롤링거 사회는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싸우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p434)...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남녀노소의 자유들은 처음에 서서히 그리고 나중에 가속적으로 사라졌고, 노예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농노로 전락했다. 경제와 정치의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권력을 움켜잡은 소수의 사람들은 세속과 교회의 유력자 대열에 합류했고, 그들의 많은 재산은 카롤링거 왕조의 전쟁기계와 영주들의 화려한 생활양식을 지탱했다.(p435) <신의 용광로> 中


 이러한 사회 분위기 차이는 이슬람에서 상업(商業)이 발전하게 되고, 유럽에서는 농업(農業)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방대한 제국에 거주하는 인구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우마이야 왕조에서 상업이 융성했다면, 이슬람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사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유럽은 농업사회로, 이후 중세 봉건 사회로 나아간다. 상업사회인 우마이야 왕조와 농업사회인 프랑크 왕국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재현(再現)이라고 여겨질 만큼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종교에 따라 경제적 길드로 편성된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교도는 영리하고 활발하게 경쟁하면서 물건을 사고팔고 수입하고 수출했으며 거기에서 나오는 이득을 도시에 쏟아 부었다. 아브드 알-라흐만의 은화는 국제무역 통화의 일부로 사용되었고, 아랍 공동체가 방대한 자원의 은과 구리를 통제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한 역동적 현상이었다. 대조적으로 피핀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는 정금 正金 통화가 거의 없었다.(p317) <신의 용광로> 中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던 시점에, 지중해 북쪽 해안 지대인 셉티마이아와 프로방스에 사는 갈로-로마인들은 경제적 동력이 멈춰선 상태였고 농업과 상업도 고대 로마 초창기 때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독교권의 문명과 비교해볼 때, 아랍 문명은 유기적 통합, 문화, 테크놀로지, 정치적 조직 등의 측면에서 메츠와 파리에 작용하는 원시적 힘보다 훨씬 우월했다.(p237) <신의 용광로> 中


 안-안달루스에서 중시되는 일은 비즈니스였고, 카롤링거의 유럽과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비즈니스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전쟁 준비가 곧 전사 계급의 존재 이유였다... 프랑키아에서는 모든 자유인이 마치필드(군사 소집)에 신고했야 했지만, 알-안달루스에서는 세금 거두는 사람에게 성실하게 납부액을 신고하기만 하면 되었다.(p491) <신의 용광로> 中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3차 산업 중심의 이슬람 제국으로의 편입이 1차 산업 중심의 프랑크 왕국보다 유럽에게 있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저자의 질문은 새롭지만, 의미있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질문은 마치,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면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하는 질문으로 느껴지도 한다. 


 서구 역사가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엄청나게 중요한 무슬림의 패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는 경제적으로 후퇴한, 분열된, 동포를 죽이는 퇴행적 유럽을 형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카를 이후의 유럽은 자신이 이슬람과 정반대되는 문명이라고 자처하면서 종교 박해, 문화 배타주의, 세습 귀족 정치를 미덕으로 여겼다는 설명이다.(p268) <신의 용광로>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와  <신의 용광로> 둘 다 역사의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는 점에서 각자의 의미가 있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가 게르만 민족의 침입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관점 대신 이슬람의 부상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면, <신의 용광로>는 이러한 앙리 피렌의 입장을 받아들이되, 새로운 변화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의미를 달리 갖는다. 즉, 푸아티에 전투가 유럽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과연 그 순간이 의미있는 순간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유럽이 이슬람화되었다면 더 빠른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의 변수는 워낙 많기에, 이처럼  '만약(if...)'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하듯.) 이보다는 무아위야조(朝)의 팽창정책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며,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말하는 '마호메트가 없었다면 샤를마뉴도 없었을 것이고, 샤를마뉴가 없었다면 마호메트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내용 속에서 국제관계에서 적대적 공생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한, 폐쇄사회에서의 종교(宗敎)와 권력(權力)의 결탁은 오늘날 분단체제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분명 의미있는 지점이라 여겨진다...


[사진]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나스르 왕궁(출처 : 이슬람)


[사진] 알람브라 사자들의 안뜰(Patio de los Leones)의 중앙(출처 :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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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02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길에 아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독했습니다.

역사에서 투르 푸아티에 전투를
아주 거대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
던데 무슬림 세력이 이겼다면
어땠을 지 궁금하네요.

<신의 용광로> 땡기는데 절판
책이네요...

2020-04-02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2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0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6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6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도 1947 -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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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을 계기로 한국은 독도에 대한 본격적 조사활동을 개시해 독도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일본은 독도•울릉도가 일본령이라는 허위정보를 담은 영토 관련 팸플렛을 제작했으며, 미국은 대일평화조약 초안을 작성하며 리앙쿠르암(독도)이 한국령이라고 명시했다. 이후 세 나라의 인식과 정책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도달했으며, 이후 각자의 길로 갈라졌다.(p19)

이 책은 전후 일본이 한국령인 독도를 영토분쟁 대상지역으로 주장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이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에 있었다고 본다... 이 책은 전후 독도문제가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 영향력•결정력이 초래한 지역문제였으며, 그 결정력의 그늘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전후 독도문제는 한일관계보다는 한미일관계의 성격이 강했으며, 역사적 영유권의 문제보다는 국제정치적 지역문제의 성격이 강했다는 주장을 유지하고 있다.(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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