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빨갱이 중대장이 있다˝하는 누군가의 말에 남편은 빨갱이가 되어 버렸고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남편이 빨갱이가 되어버려 우리집의 젊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신하여야 했다... 4.3 이 지난 후 습격이 끊이지 않았다. 산으로 피신했다 해서 산사람이 되어야 했고 마을에 남았다 해서 군인이나 경찰 가족들처럼 죽임을 당해야 했다. 4.3 이후 죽는 것은 마을 사람들뿐이었다.(p293) 「해방전후사의 인식4」중
제주 4.3 사건을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세력 350여명이 제주도 경찰 지서를 습격하면서 발생한 이 사건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4.3 사건 이전의 태평양전쟁 시기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로부터 시작해서, 해방 직후 많은 재일 동포의 귀환, 인민위원회조직, 1946년 제주도(섬)의 도(행정구역)승격, 1947년 3.1운동, 1948년 남한 단독선거 반대까지의 사건과 함께, 4.3 이후에는 1948년 11월 계엄령 선포 및 초토화 작전 이후 대대적인 진압작전 그리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의 개방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사건을 알아야 하고, 이와 더불어 4.3사건과 밀접한 관련있는 1948년 여순 사건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처가 압축되어 있기에 해방 전후사의 제주도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일부 미국 소식통들은 이 투쟁에서 15,000 ~20,000 명의 섬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대한민국 통신사는 27,719명이라는 공식적인 숫자를 인용했다. 북한측의 수치는 3만명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지사는 비공식적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6만 명이 사망했으며, 4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일본으로 달아났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39,285채의 가옥이 파괴되었으나 지사는 ˝중산간지대의 가옥들 대다수˝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400개의 마을 중 170개만 남았다. 바꿔 말하자면 섬사람들은 대여섯 명 중 한명 꼴로 죽었고, 절반 이상의 마을이 파괴되었다.(p31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중
아직 4.3사건에 대한 연구가 채 끝나지 않았기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으로 4.3의 역사적 평가를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겠지만, 1950년대 인구 30여만명의 섬에서 일어난 가슴 아픈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미 지금도 상당히 늦은 일이리라. 4.3사건의 모든 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며, 2016년 8월 제주 4.3 평화공원 사진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