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폰을 쥔 여자의 목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선주 언니는 아니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대한 풍선 같은 침묵이 병실의 모서리들을 향해 부풀어오르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트럭이 병원 앞길을 지나가며 목소리가 크고 선명해졌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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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에 공직 사회에서 반지성주의는 주로 기업인들이 줄곧 품어온, 과학 연구소나 대학, 외교 집단 등 자신들의 세력 범위 바깥에서 활약하는 전문가들에 대한 의구심으로서 표출되었다. 극우파가 지식인들에게 드러낸 적대감은 훨씬 더 극렬하고 무차별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교육 수준이 높은 식자층이나 가문, 지위, 교양 등 모든 것에 대한 일반인들의 전형적인 혐오였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26/504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단어는 단연 '반(反)지성주의'였다. 취임사는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 것은 '반지성주의'이며 이로 인해 집단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뒤이어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로 '자유(自由)'가 35차례 강조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결국, 취임사를 거칠게 요약하면 비과학적인 반지성주의로부터 자유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면에서 '반지성주의'는 취임사에서 빌런(villain)의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하다. 자유를 위해 사라져야 할 반지성주의. 이 구도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된다. 다음은 취임사 중 일부다.


 "또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국내적으로 초저성장과 대규모 실업, 양극화의 심화와 다양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공동체의 결속력이 흔들리고 와해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입니다.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처해있는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中


 반지성주의와 관련하여 리처드 호프스태터 (Richard Hofstadter, 1916~1970)의 <미국의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떠올리게 된다. 반지성주의에 대해 저자는 무엇이라 정의했는가.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는 하나의 관념으로서는 단일한 명제 내용이 아니라 관련된 여러 명제가 중첩된 상태를 가리키며, 하나의 태도로 볼 때는 흔히 양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_ 지성이나 지식인에 대한 순수한 혐오는 보기 드물다. 그리고 역사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면, 반지성주의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한 가닥의 실이 아니라 때에 따라 강도가 변하는 다양한 원인에서 힘을 끌어내는 하나의 세력이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21/504


 저자는 반지성주의를 단일한 흐름으로 규정하기보다 '지성에 대한 다양한 양태'로 해석한다. 취임사에서 언급하듯 특정한 상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흐름으로 바라보기에 정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때문에, 저자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용어의 남용을 경계하고 있다. 다음 구절을 쉽게 정리하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에 대해 '반지성적'으로 매도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라 생각된다.


 1950년대의 정치적 혼란과 교육 논쟁을 거치면서 반지성적 anti-intellectual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자기평가에서 가장 중심적인 표현으로 부각되었다. 이 용어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우리의 일상어로 들어왔고, 지금은 못마땅한 여러 현상을 서술하는 데 흔히 사용된다. 갑자기 이 말을 의식하게 된 이들은 대개 반지성주의가 생활의 어떤 영역에서 설득력을 지닌 표현으로 여기거나, 최근의 상황에서 생겨난 말이기 때문에 조만간 압도적인 비중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20/504


  쉽게 규정하기 힘든 '반지성주의'지만,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전체 흐름에서 이는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반감'으로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이로부터 저자는 미국 사회 지식인들의 소외 문제와 사회 참여 문제를 지적한다. 대중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지식인들은 권력과 결탁하거나 권력과 비판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며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때문에, 이들 사이에 격렬한 내분과 분화가 일어날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권력과의 결합을 완전히 포기한 지식인은 자신의 무력한 입장이 모종의 계몽에 유용했음을 충분히 - 지나치게 충분할 정도로 - 이해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이 권력에 접근하고 권력과 관계되는 문제에 관여하다보면 다른 형태의 계몽이 가져다 줄 가능성을 놓칠 경우가 많다.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여론을 움직여서 사회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반면에 권력에 결합된 지식인은 직접적으로 지식인 공동체의 사고에 따르는 형태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역할은 반드시 서로 배척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다. 양측 모두 모종의 개인적/도덕적 위험이 걸려 있다. 또한 양측 모두 운을 하늘에 맡긴 개인적 선택을 보편적 규범으로 삼을 수는 없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434/504


 그렇지만, 호프스태터에 의하면 지식인들의 분화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다원성과 받아들이는 관용에 의해 파국적인 결과를 막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과 관대함이며, 이를 위해 개인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전체 결론이다. 결국, 호프스태터에 의하면 지식인 내부의 갈등과 외부(대중)과의 불화를 봉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솔직함과 열린 태도에 기초한 논쟁과 토론이며 이를 위해 자유가 기초되어야 한다. 이제 다시 취임사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취임사에서 이러한 구도의 앞뒤가 바뀌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비판자들 중에서도 정신적으로 자신들의 사회 바깥에서 그런 상황을 엄격하게 직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있으며, 그들은 인원수나 자유로운 정도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세력이 될 것이다. 양측 간에 논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향후에도 있을 것이며, 또 지식인 공동체 내부에서는 권력과 비판의 양 세계를 아우를 만한 능력을 갖춘 지성이 탄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식인 사회는 서로 반감과 위화감을 지닌 세력으로 분열되는 위기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병을 앓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의 건전함은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다원성과 이 요소들이 서로 관여할 수 있는 자유에 있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435/504


 과거의 자유로운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스타일의 지적인 삶을 인정한 점이다. 그 덕분에 다양한 유형의 지식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열정과 반항심에 의해 이름을 얻은 지식인도 있지만, 우아하고 화려한 지식인도, 검소하고 엄격한 지식인도 있다. 현명하고 복잡한 지식인도, 인내심 강하고 총명한 지식인도, 특별한 관찰력과 인내력을 지닌 지식인도 있다. 어쨌든 다양한 장점을 이해하려면 솔직함과 관대한 정신이 필요하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437/504


 취임사에서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자유가 보장되어 지식인 내부와 외부가 솔직하게 공론의 장에서 토론을 한다면 집단지성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도출되지 않을까. 오히려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규정하고 배격하는 태도야말로 반지성적인 행태는 아닐런지. 호프스태터가 지적한 미국사회의 반지성주의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던 시점이 바로 극우사상인 '매카시즘McCarthyism)'이 바로 활개를 치던 시점임을 생각해 본다면 누가 '반지성주의' 집단이며, 반지성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모두가 본래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된 듯하다. 아마, 이 점 때문에 취임사 해독이 어려웠던 것 같다...


 미국에서 비판적 지성이 처참할 정도로 경시되고 있다는 우려를 일깨운 것은 무엇보다도 매카시즘이었다. 물론 매카시가 끊임없이 비난을 퍼부은 대상은 지식인만이 아니었지만 지식인은 늘 표적이 되었고, 지식인을 사냥할 때 그의 추종자들은 특히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17/504


PS. 이제 겨우 취임 2일 째인데 그 사이 참 많은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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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5-11 22: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지성주의 주장은 지성주의를 지상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 오히려 더 불편합니다. ㅠㅠ
지성주의보다 감성주의 혹은 감각주의를 전 더 선호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11 22:41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반지성주의‘는 ‘지성주의‘에 기반한 것으로, ‘지성‘을 중심에 둔 ‘지성주의‘는 지성과 과학에 근거한 ‘자유지선주의‘와도 연계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또한 경계해야할 점이 있어 보입니다. 그 점에서 다양한 가치에 대한 존중은 단순히 지성주의를 위한 기초일 뿐 아니라, 다양성을 위한 전제라 여겨집니다. 아쉽게도 취임사에서는 다양성과 통합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지성, 과학, 자유 등만 언급되어 18세기 계몽군주 대관식 연설문을 읽는 줄 알았습니다...

2022-05-11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1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22-05-11 2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자신과 반대되는,,,, 이 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변희재 말대로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 믿고 저러는 거라 생각해요.

겨울호랑이 2022-05-11 22:39   좋아요 2 | URL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면서 복숭아가지와 살풀이를 행사의 일부로 반영하는 행태를 보면...... 참 할 말이 없어집니다... 덕분에, 변희재, 정규재가 반대 진영으로부터 재조명되는 것을 보면 의도치 않은 통합을 이룬 측면도 있어 보이긴 합니다...

기억의집 2022-05-11 22:45   좋아요 3 | URL
전 오죽하면 변희재 책 사서 읽을까도 생각중입니다. 진보 유투버들도 시원스럽게 말 못하는데 변희재 너무 시원하게 말해서 좋아요. 진영이 다른 사람이라 생각은 많이 달라도 요즘 유튭 나와서 말하는 들어보면 제가 미디어에 갇혀 저 사람을 잘 못 판단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귀신 쫒겠다고 복숭아 가지 가져와 무당들이 든 거라면서요. 이게 대한민국의 수준이죠. 뭐.

겨울호랑이 2022-05-11 22:50   좋아요 2 | URL
모두의 생각이 다 같을 수도 없지만, 완전히 다를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른 것이겠지요. 이러한 다름이 때론 답답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새로운 길을 보여줄 수도 있기에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요즘 들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신임 대통령이 많은 깨우침을 주는 듯 합니다. 문제는 수업료가 매우 비쌀 것 같다는 점이긴 합니다만...

레삭매냐 2022-05-12 1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지성주의는 ˝무지나 무식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니˝며 ˝알기를 적극적
으로 거부하는˝ 자라고 탁월히 정의했다.

어느 기사에서 본 건데, 반지성주의에
대한 정말 탁월한 정의가 아닐까 싶습
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2 11:44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도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이 언급되는데, ‘진화론‘이라는 과학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종교계의 거부 역시 반지성주의의 일환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연장선상에서 20세기 중반 냉전체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새로운 변화를 느끼지 못하면서 반지성주의를 언급하는 제20대 대통령 취임사는 참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꿈찾는여행자 2022-05-12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쏙 드는 서평입니다...100퍼 동감합니다..ㅜ ㅠ

겨울호랑이 2022-05-12 22:46   좋아요 0 | URL
꿈찾는여행조님 감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현실이 참 서글프네요...
 

가이아나(르펜 60.7%, 마크롱 39%), 과들루프(르펜 69.6%, 마크롱 30%) 마르티닉(르펜 60.9%, 마크롱39.1%), 5년 전에는 정반대로 마크롱이 64%, 르펜이 36%이었다. 이번 선거는 금융자본가들과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마크롱에 대한 절대 저지 세력과 서민과 소외층을 타깃으로한 극우 마린 르펜에 대한 절대 지지세력 간의 대결이었다. 주류 언론과 주요 정당, 심지어 노조연맹과  연예계, 스포츠계 스타 500명이 합세해 마린 르펜을 절대악으로 지목했으나, 해외령 주민들은 그들의 주적을 마크롱으로 본 것이다. 본토에서의 선택은 조금 다를 테지만, 해외령에서 멜랑송을 찍었던 표의 대부분은 르펜에게 갔다. ‘인종주의자‘로 악명 높은 르펜에게 인종차별의  주 대상이던 해외령 주민들의 표가 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장 취약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극좌에서 극우로 넘어가는 의식 전환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은 한국의 대선 결과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저소득층이 난민, 외국인, 젠더, 경제정책 등에서 극우화성향을 보이는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준 것은, 어쩌면 국제정치의 흐름에 부응하는 셈이다. 프랑스에서처럼 유력한 극좌와 극우 후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외계층이 우경화하는 현상은 기존 좌파 정당이나 진보 정당, 중도정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P10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유권자의 상당수(24%)도 결국불복하는 프랑스 후보에게 투표했다. 최고 득표자 당선 투표 방식에서 삼자 구도가 연출되면 세 진영 중 한 진영은 2차 투표에 진출하지 못한다. 멜랑을 지지하는 집단은 경제와 사회 체제의 대립에서는 마크롱과 대치되고, 문화와 국가 정체의 대립에서는 르펜과 대치된다.  이런 격차 때문에 1차 투표 이후 공약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낳았고, 멜랑송을 지지했던 유권자의 상당수가 두 최종 후보 어느 쪽에도 표를 던지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당선 후보는 소수 진영 혹은 소수의  유권자 지지만을 기반으로 선출되는 셈이다.  세 개 진영으로 나뉜 프랑스의 대선 형국에서는 패자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기 때문이다. 40년 전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규합하고자 했던 ‘프랑스인 3명 중 2명‘은 요원한 일이 됐고, 이제는 프랑스인 3명 중 1명‘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이런 정치 지형에서 마크롱은 선거에서는 이길 수 있었지만, 과연 정권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 P49

혁명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바꾸었고,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다. 개인의 개념에도 변화가다. 혁명의 결과로서 민중과 박애가 생겨났다. 민중은 혁명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실 민중의 대부분은 비주류였다. 주변인, 동부, 노동자, 내의 제조업자, 방랑자 등과 같은 부류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이들이 민중으로 인정받게 됐다. 그들이 무대를 장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공화국이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아찔한 일이었다. 모든 기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만약 문맹인도 지식인과 똑같이 발언하고 전문가와 다름없이 행동할 권리가 있다면, 만약 바보도 어엿한 국가의 일원이라면, 우리는 더는 민중을 어린애, 무책임한 자, 말썽꾼으로 여기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정의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의 위계질서까지도, 즉, 봉건제도의 종말이다. 이제 이성은 왕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두운 세계, 꿈틀대는 욕망,  환상 세계의 탈주자에게는 더이상 민중을 억누를 수 있는 동물적인 힘이 없다. 해방이든 또는 내밀한 야만성의 수용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사육제의  승리는 오래기억될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곧 시민이다. 실패한 인간의 내면과 외면, 여성, 광인,  통제할 수 없는 자부질서한 영역의 그림자까지도. - P88

선거결과에 따라 20대 여성과 남성 둘 중 한 진영이 승리하고, 다른 한 쪽은 씁쓸하게 질 수 밖에 없었다. 인구의 약 절반을 패배자로 만드는 이 구도 자체가 위험했다.  이는 어느 진영이 더 정의로운지와  별개로 사회분열과  갈등의 문제다. 이 갈등은 여진이 되어, 우리 사회는  계속 남아있는갈등에 소모될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이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 격인 윤석열 당시 후보가 새 정권의 수장이 됐으니, 여진이 제대로 수습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대통령이시니, 손수 격화된 갈등을 봉합해주십사‘라고 요구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그에게 선거운동당시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가련하게도 말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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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12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다른 곳들도 아니고,
프랑스 해외령에서 르펜이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너무나 충격
적이네요.

기아나-과들루프-마르티니크...
프랑스 사람들 중에 소수 중의 소수
자인 이들이 자신을 대표할 사람으로
르펜에게 표를 던졌군요. 그야말로
하이퍼 리얼리스틱한 상황이네요.

필리핀에서도 독재자의 아들이 대통
으로 당선되었다는 뉴스를 듣고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시간이 너무 흘러 젊은이들이 당시
돈으로 10조원이나 해먹은 최악의
독재자의 아들을...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기괴한
정치적 현상을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2 11:48   좋아요 1 | URL
프랑스 대선에서는 마크롱이 당선되었지만, 5년 전보다는 표 차이가 많은 줄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극우세력이 신장되었다는 반증이겠지요. 경제가 어렵고 힘들어졌을 때, 가지지 못한 자들이 그나마 가진 것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극우세력에 동조하는 흐름은 코로나19를 통해 더 가속화된 듯 합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금리인상, 러-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세계경제의 위축 현상은 여기에 기름을 붓겠지요...
 
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 서정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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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눙력주의 meritocracy는 고유한 언어를 형성할 정도로 일관된 용어와 무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 언어는 여러 맥락에 걸쳐 되풀이되어 이 시대 모든 시민에게 친숙한 삶의 형태가 되었다. 그 결과 엄청나게 강력한 마력을 얻었다. 그 광채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시선을 잡아끌어 비판적 판단을 잠재우고 개혁을 억누른다. 능력주의는 그 자체를 기본 상식으로 내세우며 일상 경험의 바탕에 파고 들어감으로써 현재 그 논리에 직면한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해악을 은폐한다. 실제로 능력주의 때문에 혜택을 분배하는 그 외 방식은 부당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_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 1969 ~ )의 <엘리트 세습 The Meritocracy Trap: How America's Foundational Myth Feeds Inequality, Dismantles the Middle Class, and Devours the Elite>은 전통적인 귀족정 aristocracy을 대신한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기존의 귀족정이 피지배계급의 수탈과 착취에 기반한 정체(政體)라면, 능력주의는 엘리트 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에 근거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동시간과 희생을 감내하기에, 이러한 수고에 대한 대가는 정당한 것으로 일반에게 받아들여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능력주의를 과연 공정하고 효율적인 제도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엘리트와 중산층을 갈라놓고 있다. 중산층은 기득권에 원한을 품고 엘리트는 특권 계층의 부정한 특혜에 집착한다. 중산층과 엘리트가 공유해야 하는 사회는 쌍방 비난, 무배려, 기능 장애의 소용돌이에 말려들도록 있다. 이런 모든 해악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능력주의의 마력 때문이다. _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좋은 스펙을 바탕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더 많은 소득을 가져가는 것. 크게 평등(平等)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능력주의는 결과적으로 능력의 세습을 통해 새로운 계급을 양산하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전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력주의가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배경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마코비츠의 분석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크게 노동시장과 교육시장에서 나타난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많은 부문에서 경영진의 직접 통제 및 역할 수행이 가능해지면서 중간관리층의 일자리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으로 중산층을 형성하던 이들의 감소는 중산층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고, 중산층과 엘리트 층사이에는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신분상의 틈이 생겼다. 점차 공고화되는 이러한 노동시장과 교육시장의 순환관계 속에서 틈은 점차 깊어졌다. 한편 이러한 현 세대의 틈은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의 틈으로 전이된다.


 신기술이 중간 숙련도를 갖춘 인간 근로자를 대체하고 20세기 중반의 경제를 이끌었던 중산층 일자리를 없앤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기술이 미숙련 근로자와 특히 초숙련 근로자 모두를 보완하고, 숙련도가 가장 낮은 근로자와 특히 가장 높은 근로자의 수요를 증대함으로써, 오늘날의 생산을 지배하는 다수의 암담한 일자리와 극소수의 번지르르한 일자리를 창출한다. 그와 동시에 혁신이 엘리트 근로자와 나머지 근로자를 갈라놓는 기술 경계선을 숙련도 분포의 윗부분으로 끌어올리는 경향이 심화된다.  _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기술 변화가 가져온 사회 구조의 변화에서 학위(學位 degree)는 하나의 '신호'로 작동한다. 자동화가 가져온 일자리 감소와 소수의 경영진에게 집중화된 업무는 선택된 이들에게 돌아가야 했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능력을 객관적으로 보증할 수 있는 학위라는 보증서다. 차별화된 능력을 키우기 위한 투자가 비과세 되는 재테크 방식이 되면서 경제적 불평등은 상속되었고, 자연스럽게 사회 전반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능력주의는 경제 불평등을 변화시켰듯이 정치도 변화시켰다. 평등주의자들은 그 변화를 뒤늦게야 인식했으며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정치에 공백이 생겨났고, 그 공백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감지하고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러 나선 기회주의자로 메워졌다. 선동가들은 부패한 세력을 비난하고 취약한 외부인을 공격함으로써 중산층의 분노를 부추긴다. 그들은 이런 공격을 통해 신화에나 나올 법한 황금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_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이처럼 능력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폐해는 명백하다. 사회의 두터운 허리를 형성하는 중산층 뿐 아니라 엘리트 계층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엘리트 계층에 집중된 과도한 업무와 책임은 그들에게도 '인간소외'라는 부작용을 가져오기에 결국 능력주의는 사회의 전반적으로 불행으로 작동한다. 저자는 본문에서 이에 대한 해결방안도 제안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각자 읽는 것으로 넘기도록 하자...


 <엘리트 세습>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과적인 평등에 앞서, '왜 소수의 사람들에게 많은 일이 몰리는가?' 라는 기회균등의 원칙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실업의 문제를 자발적인 요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통해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독자들의 관점을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능력주의는 경제 불평등을 변화시켰듯이 정치도 변화시켰다. 평등주의자들은 그 변화를 뒤늦게야 인식했으며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정치에 공백이 생겨났고, 그 공백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감지하고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러 나선 기회주의자로 메워졌다. 선동가들은 부패한 세력을 비난하고 취약한 외부인을 공격함으로써 중산층의 분노를 부추긴다. 그들은 이런 공격을 통해 신화에나 나올 법한 황금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정치와 정책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에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 능력주의의 덫은 중산층의 좌절과 엘리트의 소외를 돕는 선동가들, 인생 상담 코치들보다 훨씬 더 설득력있게 설명한다. 능력주의의 덫이 그려낸 그림을 보면 능력주의가 불평등뿐만 아니라 재분배까지 변화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결과 불평등과 재분배는 더 이상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중산층을 다시 세우는 일에 엘리트의 자원을 빼올 필요가 없으며 구멍 뚤린 통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능력의 상속은 현재 일반적인 유산에 적용되는 재산세에서 완전히 면제된다. 부유한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쏟아붓는 막대한 투자는 재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사립학교와 대학은 공익 자선단체와 마찬가지로 세금 혜택을 누린다. 이런 관행은 능력주의 교육을 사실상 엘리트들만 이용할 수 있는 조세 회피처로 만든다.

노동시장은 ‘암담한 직업‘과 ‘유망한 직업‘으로 양분되었다. 즉각적인 보상도, 승진에 대한 희망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암담하며, 드러난 광채가 숨겨진 고통을 가린다는점에서 번지르르한 것이다. 기술의 그림자는 오늘날 중간 숙련도 직업과 암담한 직업을 뒤덮은 어둠의 원인이다. 기술의 번쩍이는 빛은 번지르르한 직업에 얄팍한 광채를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기술이 진보할수록 기술 진보에 따른 임금 둔화의 영향을 받는 직업이 증가하는 한편, 기술 진보에 따른 임금 팽창의 영향을 받는 직업은 점점 더 줄어 들고 있다.

훈련과 교육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부유한 어린이들은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어린이들을 교육 단계마다 체계적으로 앞서나간다. 아동기 전반에 걸쳐 부유한 어린이의 인적자본에 대한 막대한 투자는 이들의 걸출한 성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그런 투자는 아동기 이후 청년기와 성년기까지 능력주의적인 선별 기준과 맞물려 과도한 투자와 뛰어난 성과를 한층 더 강화하고 연장한다. 이런 메커니즘은 그 끝에 다다르면 차세대 사위 근로자 절대다수가 현 세대 상위 근로자의 자녀로 채워지는 결과를 낳는다. 오늘날의 왕조는 능력 상속을 토대로 구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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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12 1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라는 사람이
부에 따른 교육의 세습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장관이 자식의 진학을 위해 다
양한 방식의 편법을 자행해 왔으면
서도 뭐가 문제냐고 하는 장면도
어이가 없었구요.
수오지심이 없는 사람들이구나
싶더군요. 그들의 선민의식에 정말...

아주 대놓고 계급제 사회로 가자고
외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2 11:40   좋아요 2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권모씨의 발언은 대중의 공분을 충분히 살 만한 내용입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 이미 ‘계급제 사회‘는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여론 악화의 이유라 생각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교육이 ‘훌륭한 톱니바퀴의 부속‘이 아닌 각자가 가치있는 존재로 서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이와 달라 씁쓸하게 여겨집니다...

Redman 2022-05-12 19: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능력주의를 다루는 책들이 요새는 많다는 정도를 넘어서 쏟아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 책들을 다 읽어야 하나 싶습니다.전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었습니다. 샌델의 책 같은 이론적 웅장함이나 능력주의에 대한 이 책만의 특별한 분석이나 관점이 있을까요?

겨울호랑이 2022-05-12 19:51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엘리트 세습>은 이론보다 르포 형식으로 구성되어 미국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 ^^:)
 

이 책의 두번째 권인 교환의 세계(Les Jeux de l‘Echange)를 끝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자본주의의 과정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오직 일정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들은 자본주의의 과정을 준비해준 것이거나 적어도 용이하게 만들어준 것들이었다. - P861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예들에서 보았듯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인이 되는 가문의  영속성과  연속적인 축적이 확보될 수있을 만큼 계서화된 사회는 자본주의의 전(前)단계를 밟아가는 것이다. 유산이 상속되고 가산이 불어나며 가문 사이에 유리한 연결이 맺어진다는 것, 동시에 사회가 여러 집단으로 분화하고 그중 어떤 집단이 지배적이거나 잠재적으로 지배적이며 또 계단식이든 사다리식이든 사회적 상승이 — 쉽지는 않더라도 — 어쨌든 가능하다는 것 등, 이 모든 것은긴, 아주 긴 사전 준비를 의미한다. 사실 여기에는 정치적이고 소위 "역사적인" 그리고 특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들이 개입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수세기에 걸친 사회 전체의 움직임이 작용하는 것이다.  - P862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점은 세계시장이라는 특별한 해방세력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원거리 무역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도의 이익을 누리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다.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권인 제III권에서 세계 - 경제(économie-monde)의 역할을 다시 볼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특별한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지구상의 자립적인 각 지역으로 구성된 닫힌 공간이다. 세계 - 경제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 - 경제의 변경이 변화하며, 유럽이 세계 정복을  시도하는 것과 동시에 세계 경제는 커진다. 세계경제와 함께 우리는 또 다른 수준의 경쟁, 또 다른 차원의 지배를 보게된다. 우리는 유럽과 세계의 시간상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다름 아닌자본주의 전체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는 세계체제의 연쇄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한 바 있는 법칙을 추적해갈 수 있다.  - P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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