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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기억 전쟁- 1935~1955년 2
나리타 류이치 외 지음, 정실비 외 옮김 / 소명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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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전 제국의 인종주의- 제2차 세계대전기 식민지 조선인과 일본계 미국인
다카시 후지타니 지음, 이경훈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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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군주-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다카시 후지타니 지음, 한석정 옮김 / 이산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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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군주 -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이산의 책 26
다카시 후지타니 지음, 한석정 옮김 / 이산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에서 나는 내가 '기억의 장(mnemonic sites)'이라고 부를 두 가지 유형에 주목할 생각이다. 그 두 가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기억을 구성하는 데 기여했거나, 또는 현재의 국가적 성취와 미래의 가능성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표지(標識)로 기능했던 물질적인 의미의 수단이다. 첫번째 유형은 의례(儀禮)의 장이다.(p33)... 근대 일본의 국가의례 중에서 가장 장관이었던 것은 천황과 그 가족, 그리고 천황정권의 문무관들을 대중 앞에 직접 보이는 대규모 황실 패전트(pageant)였다. 이것이 이 책의 주요 관심사이다.(p36)... 이 책에서 확인하고 분석하려는 기억의 장 가운데 두번째 유형은 물리적 풍경 위에 자리잡은 물질적 기호들이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41


 다카시 후지타니(Takashi Fujitani, 1953 ~ )는 <화려한 군주 :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Splendid Monarchy: Power and Pageantry in Modern Japan>는 근대 이전에는 형식적 존재였던 천황(天皇)의 존재가 근대 이후 어떻게 재창조되었는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근대 이전 막부시대에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보다도 일반에 인식되지 못했던 존재는 어떻게 근대일본제국의 중심이 되었는가.


 근대 천황의 이원성은 통치와 군사계획에 깊숙이 관여하는 동시에 이를 초월하는 듯한 이미지를 구성하는 작업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구성되었던 만큼, 근대 일본의 '왕위'는 적어도 두 개의 '신체', 즉 국민공동체의 세속적이고 가변적인 번영을 나타내는 부분과 그것을 초월하는 영속성을 나타내는 부분을 가졌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p204)... 지배엘리트는 메이지 천황의 인간적 차원도 만들어냈다. 공식석상에 나타날 때마다 천황은 선조들이 입었던 사회, 정치, 전쟁의 세속성을 초월해 보이는 치렁치렁한 궁정복이 아니라 국민공동체의 삶을 규정하는 현안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을 표상하기 위해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근대식 군복을 입었다... 메이지 천황은 천황이자 천황위(emperorship)였으며, 신비하면서도 가시적이고, 초월적이면서도 관여하고,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이며, 모든 인간사에서 면제되면서도 국가의 모든 성취에 책임을 지는 이원적 존재였다. 논리적으로 지탱하기 힘든 이 천황의 이원성은 극적인 패전트를 통해 현실화되었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205


 저자는 메이지(明治)시대의 천황의 이미지가 지배층에 의해 의도된 변용(變容)이라고 해석한다. 천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유일한 후손이라는 영속성은 그의 피(血)에 흐르되, 대중 앞에 선 서구화된 의복/제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신생제국 일본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청일전쟁(淸日戰爭), 러일전쟁(露日戰爭)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 앞을 사열하며 지나가는 행렬은 의례로서 현재의 일본을 대중에게 기억을 주입하고, 그의 거처를 따라 새로 계획된 도시는 새로운 번영을 약속하며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군주(君主). 이로부터 소수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유신(維新)은 대중을 변화시키며, 일본인들의 소속의식을 번(藩)이 아닌 국(國)으로 전환시키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1889년 무렵 도쿄를 상징적, 의례적 중심으로 보는 새로운 사고가 싹트면서 수도의 중심부는 크게 변모했다. 정부 지도자들은 도쿄의 중심에 웅장하고 화려한 황거를 짓고, 그것을 통해 국가의 과거가 갖는 독자성과 숭고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도쿄의 상징성과 공적 패전트를 통해 국가가 문명의 최전선에 서 있음을 과시하고자 했다. 그들은 또한 공적 의례에 이용할 목적으로 황거 앞의 넓은 공간을 정비했다. 이렇게 생겨난 황거 앞 광장과 더불어 의례적 목적에 사용된 또 하나의 공간이 황거 앞 광장에 인접한 하비야 공원이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118


 근대화(近代化)의 과정에서 후진(後進) 제국주의 국가 일본이 선택한 길은 프로이센과 같은 국가 주도의 중앙집권화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여기에 전통적인 요소를 정신적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그것은 과거와의 절연을 통해 새롭게 일본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던 지배층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아직 봉건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일반 대중의 인식때문이 아니었을까. 서구의 근대화가 인간 이성(理性)을 중심으로 신(神)으로부터의 단절로 나아갔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신 중심으로 행해졌고, 신의 현현(顯現)인 천황을 중심으로 전쟁으로 나아갔기에 군국화(軍國化)는 되었을 지언정, 근대화에는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은 지역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국가적 유대보다는 지역적 유대로 사람들이 똘똘 뭉쳐 살아가고 있었다. 수평적인 사회적 단층도 각 사회계층을 서로 구별지음으로써 강력한 공통의 문화적 정체성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했다. 게다가 일본 국민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천황에 관한 지식은, 일반 민중에게는 전무하다시피 했고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애매모호한 것이었으며, 국가와는 전혀 무관한 기본적인 민간신앙의 신(神)과 혼동되고 있었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과, 애매하고 통합되지 않은 국민적 정체성 의식을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방향으로 전환시킬 새롭고도 강력한 수단이 필요했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31


 이러한 지배층의 의도에 의해 대중들은 천황을 충(忠)의 대상을 넘어서 신앙(信仰)의 대상으로 여겼고고, 이러한 신앙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꺼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萬歲)'를 외치며 카미카제(神風)이 되기를 강요받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본다면, 일본 천황제는 하나의 프로파간다에서 출발하여 커다란 비극을 잉태했음을 <화려한 군주>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이후 역사에서 천황의 뒤에서 벌이는 일본정치인들과 일본 군부의 암투에 대해서는 다른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국민 대다수가 헌법의 내용이나 그와 관련된 정치적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서민의 의식을 조롱하는 당시 엘리트의 생각만 좇는다면, 우리는 대중이 사상 최초로 국민적 성찬식에 참가한 사실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일반 민중이 새 헌법에 대해 무지했다는 별반 놀랍지도 않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친숙한 공동체의 갖가지 축제가 새롭게 출현한 국민공동체의 축전에 대중의 참가를 용이하게 했음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국가적 상징들 - 국기, 천황 일가의 초상화, 기미가요, 히노마루 제등 - 은 전통적 축제용품이나 음악과 결합되기 시작했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277


거의 대부분 천황은 권력 밖에 있었고 군주가 아니었다, 물리적인 힘을 말하는 거지요. 그러면 천황은 무엇이냐, 정신적인 힘, 여기 와서 애매해지거든요. 당신들 공격의 대상이 되며 조선의 식자들은 대개 이 문제를 거론하는데 현인신, 그 현인신으로 얽어두지만 사실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아니거든요. 그 세 가지를 때에 따라서 조금씩 필요한 만큼 치장을 해주지만요. 현재도 그렇지요. 국민들을 모조리,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천황에게 붙들어 매놨다가 물리적인 힘이 그것을 필요한 만큼 갖다 쓰고 있는 형편이 아닙니까. 대단히 불경스런 얘기지만 국민정신의 저장고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그 어느 것이라 할 수 없는 애매한, 해서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맹목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자기 기만을 할 수밖에 없고 긴 역사 속에 국민들은 자기 기만도 깨닫지 못하게 길들여졌습니다. _ 박경리, <토지 14> , p598/708



일본의 두 수도 - 도쿄와 교토 - 는 러시아의 두 도시 -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 가 서로 갈등관계였던 것과 달리 상호보완적이었다. 도쿄가 대다수의 공적 국가의례의 무대로서 현재와 미래의 상징이 될 때, 교토는 성공적으로 황실의 과거 - 나아가 국가의 과거-를 표상하는 곳이 되었다. - P122

칸토로비치는 엘리자베스 시대 법률가들의 입을 빌려 재차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정치적 신체에 관한 국왕은 결코 죽지 않으므로 그의 자연사는 우리 법률상(Harper) 국왕의 사망이라 부르지 않고 국왕의 Demise라고 부른다. 국왕의 정치적 신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두 신체가 분리된다는 것, 즉 정치적 신체가 이제 죽은 자연적 신체로부터 또는 국왕으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자연적 신체로 전해진다는 것이 그 말(Demise)의 함의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왕국의 군주의 정치적 신체가 자연적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다른 자연적 신체로 전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 P202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엘리트가 황실과 민중 사이의 친근감을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공적 의례의 관행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군주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만세‘(萬歲) 역시 황실의 각종 패전트와 함께 개발되었다(p212)... 근대 천황제를 만든 사람들은 정치적 주체로서 남성화되고 군인화되고 역동적인 천황상을 발명하는 한편 황실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이상적인 현모양처의 표상으로서 봉사와 양육 같은 새로운 공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 P227

이 새로운 국가의례에 대중이 참가한 것을 두고 단순히 자연발생적인 애국적 열정의 결과라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대중 동원은 위로부터 공식, 비공식 경로를 통해 시작되었다.... 일본국민이 되어 가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근대적이고 대중적인 국가의례에의 참가는 국민공동체의식을 습득하는 과정의 일부이지 그 결과가 아닌 것이다. 대중의 참가는 거대한 행정조직망의 작동에 의해서 그리고 지역엘리트를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가능했다. _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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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27 0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일본의 굴레에서도 천황제의 부각을 2가지 점에서 얘기하고 있는데요. 위에 말씀하신 대로 일본인들의 번 중심을 국중심체제로 바꾸고자하는 계획이 1가지고, 다른 하나는 정통성이 없었던 쿠데타세력이 막부에 대항한 자신들의 정통성을 천황에게서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고 있어요. 이 경우 근대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존왕양이가 갑자기 살아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1-27 08:49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쓰마, 조슈 번은 다이묘 모리 가문 이전부터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도 중앙정치에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력한 에도 막부 체제 아래에서 숨죽이던 이들이 미 페리제독의 개항요구로 흔들리던 에도 막부의 지배를 끝내고자 시도한 것이 메이지 유신의 대강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메이지 유신의 성격은 지도층의 교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면에서 자신의 집권을 위한 명분으로 봉건요소를 끌어들인 부분, 현재까지 남아있는 천황제는 일본 근대화의 한계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적을 이기는 요체는 장수로 그에 알맞은 사람을 얻는데 있으며, 장수를 부리는 방법은 칼자루를 잘 부리는데 있습니다. 장수가 그에 알 맞는 사람이 아니면 군사가 비록 많아도 충분히 믿을 만하지 못하며 조종하면서 그 칼자루를 잃으면 장수가 비록 재목이라 하여도 쓰지 못합니다."

"장수가 군사를 부리지 못하고, 나라가 장수를 부리지 못하면 재물을 소비하고 탐내고 노략질하는 폐해가 있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역시 스스로 불사르는 재앙이 그치지 않게 됩니다."

"눈앞의 근심을 풀지 못하면 혹 뜻밖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사람이란 나라의 근본입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다치면 근본이 다치며 그 근본이 다치면 가지와 줄기가 넘어지고 시듭니다."

"제왕이란 위엄을 쌓아서 덕을 밝히며 편벽하게 없애버리면 위태로우며 무거운 자리에 머물면서 가벼운 것을 지휘하지만 거꾸로 잡게 되면 어그러집니다. 왕기(王畿)라는 것은 사방의 근본입니다.."

《주역》에 말하기를 ‘디딘 곳을 보고 복(福)을 살핀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길흉(吉凶)이란 득실(得失)의 형상’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마침내 천명이란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인데, 그 뜻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즉 성철(聖哲)의 뜻과 《육경(六經)》은 서로 통하는데 모두 재앙과 복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지 번성과 쇠퇴가 천명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사람이 한 일이 잘 다스려지는데 하늘이 명령하여 혼란을 내리도록 하는 일은 아직 없었으며, 사람이 한 일이 어지러운데 하늘이 평안을 내리도록 하는 일 역시 아직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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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유목제국사 - 아사나 권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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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이 강력하게 추구했던 교역 중심의 국가 체제는 자신들이 직접 물자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얻어낸 물자를 확보한 교통로를 통해 유통시킴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정주 농경 사회처럼 단순히 1, 2차 산업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통에 초점을 맞춘 3차 산업에 기반을 둔 것으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방식이었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582

투르크 계 유목제국인 돌궐(突厥)은 고구려(高句麗)와의 관계 등으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의 구체적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자치통감 資治通鑑> 등 주로 중국측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간접적으로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아무래도 중국 측의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이다보니 역사의 실체를 인식하기에 일정부분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정재훈의 <돌궐 유목제국사 552~745>는 중앙유라시아 제국 돌궐(괵튀르크)의 역사를 투르크인의 관점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책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돌궐제국의 의의를 이전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초원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서로는 비잔틴,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동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는 실크로드(silk road) 중 '초원길'을 활성화시켰다는 점과 유목민족 최초의 문자 사용에서 찾는다. 유목민족의 문자 사용으로 공동체 의식을 키우고 통합된 힘을 바탕으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동서양 농업/공업의 산지를 연결시키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업 제국. 이것이 중앙아시아 유목제국들의 진정한 모습이고, 그 토대를 만든 것이 돌궐제국이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돌궐이 중국에서 비잔티움을 바로 연결하는 동서 교류의 매개로서 그 사이의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자 이제까지 한 번도 통합된 적 없이 개별 세력들이 분절되어 갈등을 벌이던 유라시아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에는 일시적으로 '투르크가 만들어낸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것은 비록 오래가지 못하고 분열의 길을 걷지만,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킨 결과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초원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자유무역지대(FTA)'였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22

돌궐이 자신들이 만든 문자를 사용해 세 면에 걸쳐 자세하게 역사를 기록한 점은 시사를 하는 바가 컸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문자가 없어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유목민들이 문자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위구르, 키르기스 등을 거치면서 유목민들의 문자가 몇 세기 동안 더 사용되었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즉 돌궐은 자신의 문자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냄으로써 문자 자료가 부족한 북아시아 유목사에서 신기원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529

돌궐제국의 세계사적인 의의가 위와 같다면, 고구려와 연결하여 국사적인 의의도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수나라 이전 분열시대를 겪던 중국은 북방제국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열세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이들의 역학관계는 분열하던 중국이 수(隨, 581~619)가 등장하면서 급변하게 된다. 돌궐에 보내던 조공을 거부하고 이를 축적한 재화를 바탕으로 통일왕조를 만든 수나라. 그리고, 수를 대신하여 등장한 당(唐)나라는 때마침 동돌궐의 멸망으로 북서쪽 지역에서 안정을 찾게 되는데,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고구려의 명운과도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양견이 돌궐에 보내던 세공을 거부함으로써 그동안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은 단순히 돌궐을 견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향후 통일에 필요한 자원을 축적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북중국 정권과 돌궐과의 관계는 그만큼 엄청난 부담이었고, 이것은 모두 돌궐이 운영하는 제국 체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37

수 문제는 전국을 통일하고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돌궐이 비록 오랑캐지만 이들을 포섭해 장성 내에 머물게 하면서 외부 세력을 견제하는 데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양제는 이미 통일 체제가 안정된 상태에서 오랑캐인 돌궐은 외연으로 포괄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고 장성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70

수 양제가 돌궐에 배타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반면, 당 태종 이후 군주들은 동돌궐 잔여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대(對)고구려 원정에 적극 활용한다. 수나라 시대와 당나라 시대 사이에 일어난 630년 동돌궐의 멸망 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이 668년 고구려 멸망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 부분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수나라가 황하와 양자강의 이른바 중원(中原)이라 불리는 지역의 역량으로 고구려를 침입했다 실패했다면, 당나라는 여기에 초원 유목제국의 힘까지 더했기에, 고구려로서는 다소 힘든 싸움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돌궐의 역사를 통해 짐작해 본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세계제국 당. 그렇지만, 현종 이후 당 말기에는 절도사들의 세력들이 커지면서 당이 쇠락의 길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안록산(安祿山, 703~757)과 사사명(史思明, ? ~ 761) 그리고 고구려 유민 출신의 이정기(李正己, 732? ~ 781?) 등이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로 당을 위협한 이들임을 생각해본다면, 이민족 포섭 정책이 반드시 당에게 유익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630년 고비 남부에 웅거하던 동돌궐의 몰락은 결국 수말 당초에 수조에 대항한 다양한 할거 세력들을 통제하고 다시 패권을 장악한 당조를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구축하게 해 주었다.(p325)... 동돌궐의 붕괴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 상황은 태종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기존의 중원 왕조들처럼 장성 이내의 내지를 안정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이를 기반으로 유목 세력들을 통제해 대외적으로도 안정적 질서를 확보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았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330

추장들은 당조의 관직을 제수 받고 이를 세습함으로써 자신의 공식적인 위상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더욱 중요한 것은 기미부주에 편제된 추장이 이 무렵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조의 대외 확장에 중요한 행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는 점이다.(p392)... 번장은 태종이 처음에 투항한 이민족 추장들을 모두 숙위의 장군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그들을 지방 군사령관인 도독으로 임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이 무렵 당조의 대외 확장은 상당 부분이 번장이 이끄는 번부락병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393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는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초원 유목제국 돌궐의 역사와 그 의의를 알려주고, 이를 통해 '유목민족=야만인=약탈자' 로 인식하는 우리의 편견을 깨뜨리는데, 이 책과 함께 저자의 또다른 저작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을 읽는다면, 더 좋은 독서가 되리라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고 글을 마무리한다...

PS. 개인적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전쟁이 통일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실크로드의 패권을 둘러싼 세계전쟁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관련 리뷰와 페이퍼를 통해 하나하나 정리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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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1-25 1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기억창고에서 잘 꺼내지도 않았던 돌궐,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재밌게 읽고 갑니다. ˝돌궐(괵튀르크)의 역사를 투르크인의 관점에서 보여˝주었다고 하셨는데, 그럼 투르크인들의 기록을 주로 살펴 쓰신 역사책인가요?^^ 제가 이해를 못하고 여쭈어봤다면 죄송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1-25 13:18   좋아요 2 | URL
네 ^^:) 본문에는 현재 남아있는 투르크 비문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외 돌궐 유적 등에 대한 설명도 함께 있는데, 리뷰에서는 이 내용을 말하지 못했네요. 그 외에도 기본적인 중국사서에 대한 내용도 담겨있어, 여러 관점에서 바라본 중앙아시아 역사라 생각됩니다. 제가 답글을 아래에 잘 못 달아서 다시 작성했습니다.ㅋ

거리의화가 2022-01-25 13: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돌궐의 역사를 정주의 관점이 아닌 초원과 유목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궐이 중국 뿐 아니라 당시 고구려와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만큼 더 넓게 확장시켜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위구르 유목제국사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읽어봐야겠네요.ㅎㅎ 삼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기대해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작년에 삼국전쟁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실크로드 패권을 둘러싼 세계전쟁이라니 거시적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1-25 13:23   좋아요 3 | URL
거리의화가님 말씀처럼 일방의 시선이 아닌 다양한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대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반드시 역사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닌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삼국전쟁이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의 접점에서 벌어진 경제전쟁이라 생각합니다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겨울호랑이 2022-01-25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 현재 남아있는 투르크 비문 등 여러 문서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2022-01-25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25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파엘 2022-01-25 16: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PS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대가 됩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2-01-26 08:13   좋아요 3 | URL
라파엘님 감사합니다.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1-26 21:23   좋아요 2 | URL
저도 많이 기대됩니다.
넘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