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군주 -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이산의 책 26
다카시 후지타니 지음, 한석정 옮김 / 이산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에서 나는 내가 '기억의 장(mnemonic sites)'이라고 부를 두 가지 유형에 주목할 생각이다. 그 두 가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기억을 구성하는 데 기여했거나, 또는 현재의 국가적 성취와 미래의 가능성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표지(標識)로 기능했던 물질적인 의미의 수단이다. 첫번째 유형은 의례(儀禮)의 장이다.(p33)... 근대 일본의 국가의례 중에서 가장 장관이었던 것은 천황과 그 가족, 그리고 천황정권의 문무관들을 대중 앞에 직접 보이는 대규모 황실 패전트(pageant)였다. 이것이 이 책의 주요 관심사이다.(p36)... 이 책에서 확인하고 분석하려는 기억의 장 가운데 두번째 유형은 물리적 풍경 위에 자리잡은 물질적 기호들이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41


 다카시 후지타니(Takashi Fujitani, 1953 ~ )는 <화려한 군주 :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Splendid Monarchy: Power and Pageantry in Modern Japan>는 근대 이전에는 형식적 존재였던 천황(天皇)의 존재가 근대 이후 어떻게 재창조되었는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근대 이전 막부시대에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보다도 일반에 인식되지 못했던 존재는 어떻게 근대일본제국의 중심이 되었는가.


 근대 천황의 이원성은 통치와 군사계획에 깊숙이 관여하는 동시에 이를 초월하는 듯한 이미지를 구성하는 작업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구성되었던 만큼, 근대 일본의 '왕위'는 적어도 두 개의 '신체', 즉 국민공동체의 세속적이고 가변적인 번영을 나타내는 부분과 그것을 초월하는 영속성을 나타내는 부분을 가졌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p204)... 지배엘리트는 메이지 천황의 인간적 차원도 만들어냈다. 공식석상에 나타날 때마다 천황은 선조들이 입었던 사회, 정치, 전쟁의 세속성을 초월해 보이는 치렁치렁한 궁정복이 아니라 국민공동체의 삶을 규정하는 현안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을 표상하기 위해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근대식 군복을 입었다... 메이지 천황은 천황이자 천황위(emperorship)였으며, 신비하면서도 가시적이고, 초월적이면서도 관여하고,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이며, 모든 인간사에서 면제되면서도 국가의 모든 성취에 책임을 지는 이원적 존재였다. 논리적으로 지탱하기 힘든 이 천황의 이원성은 극적인 패전트를 통해 현실화되었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205


 저자는 메이지(明治)시대의 천황의 이미지가 지배층에 의해 의도된 변용(變容)이라고 해석한다. 천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유일한 후손이라는 영속성은 그의 피(血)에 흐르되, 대중 앞에 선 서구화된 의복/제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신생제국 일본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청일전쟁(淸日戰爭), 러일전쟁(露日戰爭)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 앞을 사열하며 지나가는 행렬은 의례로서 현재의 일본을 대중에게 기억을 주입하고, 그의 거처를 따라 새로 계획된 도시는 새로운 번영을 약속하며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군주(君主). 이로부터 소수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유신(維新)은 대중을 변화시키며, 일본인들의 소속의식을 번(藩)이 아닌 국(國)으로 전환시키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1889년 무렵 도쿄를 상징적, 의례적 중심으로 보는 새로운 사고가 싹트면서 수도의 중심부는 크게 변모했다. 정부 지도자들은 도쿄의 중심에 웅장하고 화려한 황거를 짓고, 그것을 통해 국가의 과거가 갖는 독자성과 숭고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도쿄의 상징성과 공적 패전트를 통해 국가가 문명의 최전선에 서 있음을 과시하고자 했다. 그들은 또한 공적 의례에 이용할 목적으로 황거 앞의 넓은 공간을 정비했다. 이렇게 생겨난 황거 앞 광장과 더불어 의례적 목적에 사용된 또 하나의 공간이 황거 앞 광장에 인접한 하비야 공원이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118


 근대화(近代化)의 과정에서 후진(後進) 제국주의 국가 일본이 선택한 길은 프로이센과 같은 국가 주도의 중앙집권화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여기에 전통적인 요소를 정신적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그것은 과거와의 절연을 통해 새롭게 일본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던 지배층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아직 봉건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일반 대중의 인식때문이 아니었을까. 서구의 근대화가 인간 이성(理性)을 중심으로 신(神)으로부터의 단절로 나아갔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신 중심으로 행해졌고, 신의 현현(顯現)인 천황을 중심으로 전쟁으로 나아갔기에 군국화(軍國化)는 되었을 지언정, 근대화에는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은 지역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국가적 유대보다는 지역적 유대로 사람들이 똘똘 뭉쳐 살아가고 있었다. 수평적인 사회적 단층도 각 사회계층을 서로 구별지음으로써 강력한 공통의 문화적 정체성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했다. 게다가 일본 국민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천황에 관한 지식은, 일반 민중에게는 전무하다시피 했고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애매모호한 것이었으며, 국가와는 전혀 무관한 기본적인 민간신앙의 신(神)과 혼동되고 있었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과, 애매하고 통합되지 않은 국민적 정체성 의식을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방향으로 전환시킬 새롭고도 강력한 수단이 필요했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31


 이러한 지배층의 의도에 의해 대중들은 천황을 충(忠)의 대상을 넘어서 신앙(信仰)의 대상으로 여겼고고, 이러한 신앙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꺼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萬歲)'를 외치며 카미카제(神風)이 되기를 강요받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본다면, 일본 천황제는 하나의 프로파간다에서 출발하여 커다란 비극을 잉태했음을 <화려한 군주>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이후 역사에서 천황의 뒤에서 벌이는 일본정치인들과 일본 군부의 암투에 대해서는 다른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국민 대다수가 헌법의 내용이나 그와 관련된 정치적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서민의 의식을 조롱하는 당시 엘리트의 생각만 좇는다면, 우리는 대중이 사상 최초로 국민적 성찬식에 참가한 사실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일반 민중이 새 헌법에 대해 무지했다는 별반 놀랍지도 않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친숙한 공동체의 갖가지 축제가 새롭게 출현한 국민공동체의 축전에 대중의 참가를 용이하게 했음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국가적 상징들 - 국기, 천황 일가의 초상화, 기미가요, 히노마루 제등 - 은 전통적 축제용품이나 음악과 결합되기 시작했다. _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p277


거의 대부분 천황은 권력 밖에 있었고 군주가 아니었다, 물리적인 힘을 말하는 거지요. 그러면 천황은 무엇이냐, 정신적인 힘, 여기 와서 애매해지거든요. 당신들 공격의 대상이 되며 조선의 식자들은 대개 이 문제를 거론하는데 현인신, 그 현인신으로 얽어두지만 사실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아니거든요. 그 세 가지를 때에 따라서 조금씩 필요한 만큼 치장을 해주지만요. 현재도 그렇지요. 국민들을 모조리,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천황에게 붙들어 매놨다가 물리적인 힘이 그것을 필요한 만큼 갖다 쓰고 있는 형편이 아닙니까. 대단히 불경스런 얘기지만 국민정신의 저장고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그 어느 것이라 할 수 없는 애매한, 해서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맹목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자기 기만을 할 수밖에 없고 긴 역사 속에 국민들은 자기 기만도 깨닫지 못하게 길들여졌습니다. _ 박경리, <토지 14> , p598/708



일본의 두 수도 - 도쿄와 교토 - 는 러시아의 두 도시 -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 가 서로 갈등관계였던 것과 달리 상호보완적이었다. 도쿄가 대다수의 공적 국가의례의 무대로서 현재와 미래의 상징이 될 때, 교토는 성공적으로 황실의 과거 - 나아가 국가의 과거-를 표상하는 곳이 되었다. - P122

칸토로비치는 엘리자베스 시대 법률가들의 입을 빌려 재차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정치적 신체에 관한 국왕은 결코 죽지 않으므로 그의 자연사는 우리 법률상(Harper) 국왕의 사망이라 부르지 않고 국왕의 Demise라고 부른다. 국왕의 정치적 신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두 신체가 분리된다는 것, 즉 정치적 신체가 이제 죽은 자연적 신체로부터 또는 국왕으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자연적 신체로 전해진다는 것이 그 말(Demise)의 함의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왕국의 군주의 정치적 신체가 자연적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다른 자연적 신체로 전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 P202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엘리트가 황실과 민중 사이의 친근감을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공적 의례의 관행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군주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만세‘(萬歲) 역시 황실의 각종 패전트와 함께 개발되었다(p212)... 근대 천황제를 만든 사람들은 정치적 주체로서 남성화되고 군인화되고 역동적인 천황상을 발명하는 한편 황실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이상적인 현모양처의 표상으로서 봉사와 양육 같은 새로운 공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 P227

이 새로운 국가의례에 대중이 참가한 것을 두고 단순히 자연발생적인 애국적 열정의 결과라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대중 동원은 위로부터 공식, 비공식 경로를 통해 시작되었다.... 일본국민이 되어 가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근대적이고 대중적인 국가의례에의 참가는 국민공동체의식을 습득하는 과정의 일부이지 그 결과가 아닌 것이다. 대중의 참가는 거대한 행정조직망의 작동에 의해서 그리고 지역엘리트를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가능했다. _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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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27 0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일본의 굴레에서도 천황제의 부각을 2가지 점에서 얘기하고 있는데요. 위에 말씀하신 대로 일본인들의 번 중심을 국중심체제로 바꾸고자하는 계획이 1가지고, 다른 하나는 정통성이 없었던 쿠데타세력이 막부에 대항한 자신들의 정통성을 천황에게서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고 있어요. 이 경우 근대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존왕양이가 갑자기 살아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1-27 08:49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쓰마, 조슈 번은 다이묘 모리 가문 이전부터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도 중앙정치에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력한 에도 막부 체제 아래에서 숨죽이던 이들이 미 페리제독의 개항요구로 흔들리던 에도 막부의 지배를 끝내고자 시도한 것이 메이지 유신의 대강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메이지 유신의 성격은 지도층의 교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면에서 자신의 집권을 위한 명분으로 봉건요소를 끌어들인 부분, 현재까지 남아있는 천황제는 일본 근대화의 한계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