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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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110/178

한강(韓江, 1970 ~ )은 <소년이 온다>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인간이 존엄한 존재인가, 아니면 추악한 존재인지 묻는 소설 속의 질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5.18 민주화운동의 모순에서 비롯된다. 국가폭력에 맞서 공동체를 지켜야 하는 상황. 공동체를 지키는 행위는 숭고한 시민의식의 발현이었지만, 이러한 발현이 국가 공동체에 의해 강제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죽음과 삶의 선택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8/178

우리 군대가 총을 쐈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너를 힘껏 끌고 나아가며 난 노래했는데. 목이 터져라고 애국가를 따라 불렀는데. 그들이 내 옆구리에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탄환을 박아넣기 전에. 저 얼굴들을 하얀 페인트로 지워버리기 전에.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40/178

이러한 상황에 더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문집단인 군대(軍隊)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맞서다 죽거나, 도망치고 모른 척하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모두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죽은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부여받은 비참한 상황. 1980년 5월의 광주에 있던 이들 중 이를 피할 수 있었던 이들은 없었다.

이상하고 격렬한 힘이 생겨나 있었는데, 그건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오직 멈추지 않는 생각들 때문에 생겨난 거였어.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누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생각할수록 그 낯선 힘은 단단해졌어. 눈도 뺨도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를 진하고 끈적끈적하게 만들었어.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8/178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95/178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삽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도청 앞 스피커에서 연주곡으로 흘러나온 애국가에 맞춰 군인들이 발포한 건 오후 한 시경이었습니다. 시위 대열 중간에 서 있던 나는 달아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습니다.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95/178

거대한 상실감 속에 그나마 한줄기 빛으로 비춰지는 것은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빠져나간 5월 22일부터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된 5월27일까지 광주 시민에 의해 자치 질서를 회복하던 시기의 모습이었다. 짧은 시기 동안 광주에서 보여준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과 양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임이 분명했지만, 이러한 인간의 숭고함이 인간의 야만에 의해 드러나야 했던 것이라는 점에서 아픔이 더해진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가전에서 희생되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96/178

<소년이 온다>에서 그려지는 권력을 향한 야만과 이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 발현된 숭고함. 이것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전부를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참혹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제42주년 5.18 민주화 운동을 맞아 염원한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8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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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2-05-16 2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516에 518이 다가오네요.

겨울호랑이 2022-05-16 21:44   좋아요 2 | URL
네... 올해도 어김없이 시간이 가네요 길게 느껴지는 하루하루지만요...

거리의화가 2022-05-16 2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항상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시의적절한 글을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푸른눈의증인을 읽어보려구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7 05: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 역시 거리의화가님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게 보내세요!
 

노동계급의 악마화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형성한 1980년대 대처리즘의 실험을 뒤돌아보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그 핵심에는 노동계급 사회와 산업, 가치와 기구에 대한 공격이 자리잡고 있다. 더이상 노동계급은 자랑할 만한 무엇이 아닌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전망은 다른 데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2세기 동안 보수당에 의해 행해진 계급전쟁의 정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유주의자 그 다음에는 노동당에 의해 제안된 개혁들을 열렬히 가로막았다. 채찍만으로는 노동계급을 민주주의 체제 안에 가둬놓을 수 없었다. 때로는 당근도 필요했던 것이다.?

대처에게 하나의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계급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계급은 공산주의의 개념이다"라고 나중에 그녀는 썼다. "그것은 사람들을 다발로 묶어서 서로 적대하게 만든다." 대처는 사람들이 각각의 자기계발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함께 행동할 때 삶을 더 풍요롭게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대처는 사회계급을 없앨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단지 모두가 사회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감추고 싶어 했던 것이다. 1976년 보수당의 공식문건에는 "국가의 연합을 위협하는 것은 계급이 아니라 계급감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같은 순간 대처리즘은 영국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계급전쟁을 수행했다.

2009년 폭발한 금융위기에 대응했던 방식을 한번 되돌아보자. 1980년 대처리즘이 제조업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도록 내버려둔 반면, 신노동당 정부는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파국의 경각에 매달린 은행에 세금 수백만 파운드를 쏟아부었다.

어떻게 정부가 부자들의 뒤를 밀어주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었을까? 대처주의자들은 낙수효과 즉, 최고위층에 쌓인 부가 점점 아래로 떨어진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현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처리즘은 실패한 경제정책 대신 희생자들을 공격했다. 희생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건 희생당한 개인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처 철학의 핵심에는 가난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누군가 가난하다면, 그건 그들의 개인적인 실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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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6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크라이나 엘리트층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러시아 국가의 일원으로서 러시아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추종했다. 러시아 정부의 관제민족주의를 실리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루스인의 통합이라는 과제에 대러시아인 못지않게 진심으로 열중하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는 사실 상당히 모호했고 우크라이나 지식인 가운데 일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리주의‘를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비판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재통일을 가능케 했으니 이를 기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의 동상 건립을 주도했던 유제포비치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P26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 루스의 역사》7권은  ‘코자크의 시대‘ 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 후  10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내용이 코자크 지도자들과 코자크 집단의 활동에 대한 서술로 채워지고 있다. 흐루셰브스키는 코자크를 우크라이나 민족성의 근간으로까지 여긴다. 1991년 독립 후부터 우크라이나 정부와 역사학계는 코자크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여기에는 흐루셰브스키의 역사 해석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된다.  - P64

흐루셰브스키의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 동서 우크라이나의 연결성, 단일성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옛 키예프 루스의 동북부지방과 서부지방을 구분하여 서부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구성 부분으로 확신하는 반면 동북부지방은 이 구성에서 제외해 버린다. 동북지역이외부자로 여겨지는 반면 서부지역은 키예프 루스의 적통을 공유하는 우크라이나 공들의 통치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 P68

같은 동슬라브 민족이라 할지라도 벨라루스인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상반되게, 흐루셰브스키는 러시아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다.
그는 키예프 루스 시기에 키예프 공령과 마찬가지로 류리코비치들이 통치하고 있던 수즈달 공령을 비롯한 동북부 지역을 키예프 루스에서 제외하고 이를 외부자로 부르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그는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체에는 루스 혹은 그 변형인 러시아 (루스의 땅)라는 나라 이름을 좀처럼 인정해 주고자 하지 않는다. 루스의 형용사이자 러시아의 형용사이기도 한 ‘루스키‘라는 말을 그는 오로지 우크라이나-루스를 위한 형용사로만 사용하고자 한다.  - P71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성이 러시아와는 다르며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보다는 서방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는 할리치나에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드니프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통치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비판적인 서술이 없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도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제국 지배자의 사정을이해해 가면서 온건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한 흐루셰브스키인지라 그가 이끄는 중앙 라다 정부가 러시아 혁명 이후  불확실성이 가득한 상황에서 독일 군을 불러들인 것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독일 세력의 지원을 받자는 의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가 기본적으로 독일을 서방의 일원으로 보았고 러시아보다는 독일과의 정치적 동맹을 선호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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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툼한 교양서에 따르면 ‘차브’란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한다. 그들이 서점에서 그 책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차브는 슈퍼마켓 계산대의 계산원이나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또는 청소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 모두 ‘차브’란 특별히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언사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정하든 안하든, 자신들의 성공에는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안정적인 중간계급 가정에서, 흔히 말하듯 나무가 우거진 교외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를 나왔고 대부분은 옥스퍼드나 런던정치경제대학(LSE), 또는 브리스톨대학 출신이었다. 노동계급 출신이 그들처럼 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조롱하는 그 수백년 묵은 현상을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최근 거론되는 ‘차브’라는 단어는 폭력, 게으름, 청소년 임신, 인종주의, 주정 같은 노동계급의 부정적인 특징과 연결된다. 『가디언』의 조 윌리엄스(Zoe Williams) 기자가 쓴 대로 "차브라는 말이 원래 뭔가 정통적인 것?그냥 쓰레기나 친구가 아니라 버버리 차림의 쓰레기!?을 전달하면서 대중적인 상상력을 사로잡았다면 현재 그 말은 ‘프롤레타리아’ 또는 ‘가난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인간’ 같은 폭넓은 의미를 가진다

노동계급이 악마화된 뿌리에는 영국 계급전쟁의 유산이 있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정권을 인수한 1979년은 영국 노동계급을 향한 전면공격이 개시된 해로 기록된다. 노동계급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이나 공영주택은 붕괴되었고 노동계급의 일터는 제조업에서 광산업까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그들의 공동체는 산산조각났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또한 연대와 집단적 열망 같은 노동계급의 가치는 단호한 개인주의에 밀려 휩쓸려갔다. 힘을 빼앗겨 더이상 당당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점점 더 조롱거리가 되었고 하찮은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또한 노동계급이 미디어나 정치의 세계에서 축출당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생각은 퍼져나가지 못했다.?

노동계급이 처한 곤경은 보통 ‘열망의 부족’으로 치부돼버린다. 그들의 곤경은 책임이 있는 특권층들에 의해 조작된 불평등한 사회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특성 때문이라고 왜곡된다.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공영주택에 몰림으로써 이 단지들은 이른바 ‘차브’라는 집단과 연결되었다. 영국의 빈곤층 중 반 이상이 집을 소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너무나 한곳에 밀집돼버린 것이다. 공영주택 단지가 싸구려 단지로 변모함에 따라 영국이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차브?스스로 짊어진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는?로 이분화되었다는 논리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정부의 주택정책은 노동계급 영역에 사회적 손실을 끼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처리즘은 듀스베리 모어 같은 사회를 질식시킴으로써 탈산업화의 쓰나미를 불러일으켰다. 제조업 일자리는 지난 30년간 완전히 붕괴되었다.

"보수당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은 그 당이 특권층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겁니다. 당의 주목적이 특권층 보호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들이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은 딱 필요한 만큼을 딱 그만큼의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죠."

가히 『사회주의 노동자』(Socialist Worker, 영국의 좌파 사회주의 신문?옮긴이) 지면에나 나올 법한 분석이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보수당의 일인자가 자기 당이 영향력 있고 부자인 사람들의 정치적 오른팔임을 고백한 것이다. 최상층 사람들의 편에서 싸우는 정당이 바로 보수당이었다. 이것은 계급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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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세계사 2 - 대륙별 구석기 문화 케임브리지 세계사 4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엮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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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가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친 지점은 인간이 서로를, 그리고 주변 환경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석기란 경제적 변혁을 일컫는 말이기는 해도 사육과 재배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식량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이용하는지, 그 관점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기술적 및 사회적 혁신도 함께 요구되었다.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신석기 패키지"라고 한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8


 초기 농업과 관련된 인간의 반응 양상들을 살펴보면. 선호하는 식물의 야생 서식지를 유지하는 활동을 했고,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곳을 중심으로 머무르며 생활의 이동성이 감소했으며, 이용 가능한 식량 자원의 변화에 따라 식생활 패턴을 바꾸었고, 작물재배 혹은 야생 작물 관리를 통해 원하는 동식물의 밀도를 높여 나갔다... 식량 생산이 지속되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서 농업에 의존하는 사회가 더욱 많아졌고, 그들이 농업에 적합하도록 주변 환경을 바꾸게 되었다... 농업은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능한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90


 그레이엄 바커(Graeme Barker, 1946 ~ )와 캔디스 가우처(Candice Goucher, 1953~ )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4 Cambridge World History Vol. 2 Ch.8-23 : 농업과 세계사 2 : 지역별 농업의 기원 >에서는 '신석기 혁명'의 모습을 지역별로 세부적으로 살펴본다. 자연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던 시기, 홀로세를 살아가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농사를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주(定住.)생활의 형태가 등장하고, 창고 등 건물들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신분제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했다.


 재배 및 사육, 그리고 마을의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사회적 관계도 새롭게 바뀌었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몇몇 사회적 관념의 변화는 이후 시기의 변화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즉 의례, 가족 및 공동체 구조, 횡적/종적 사회관계, 축제 등의 행위가 이때 모두 고도화되었다. 이러한 행위의 대부분은 신석기 시대 물질문화의 풍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76


 남아시아의 신석기 발전은 크게 보아서 기본적으로는 "신석기 혁명"의 가장 고전적인 패턴을 그대로 따랐다. 먼저 영구 정착지가 등장했고, 이후 농업이 개발 혹은 유입되었으며, 그다음으로 토기가 제작되었다. 남아시아에서 신석기의 대표적인 특징, 즉 토기와 정주 생활과 가축과 작물 등은 모두 신석기 시대 말기에 등장했다. 남아시아의 신석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변종들이 연속된 장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67


 특정 유형의 건축 재료, 즉 나뭇가지를 엮어 벽체를 만들고 초가지붕을 씌운 오두막 건물의 흔적이었다. 토크와 유적의 발굴 사례에서 보듯이 이러한 구조물을 대개 원형이었고, 안에는 화덕 자리가 있었으며, 대개는 가운데 기둥 자리 구멍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러한 건물화 함께 발견되는 이모작의 흔적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건물의 흔적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이모작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한 장소에서 머물러 살아야만, 또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갠지스강의 주기적 범람과 갠지스 평원에서 자라는 벼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49


 자원 증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농업으로 변화한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첫째, 사람들은 식량 자원을 생산할 수 있는 특정 식물에 집중하여 갈수록 관리를 강화하면서 그 식물을 의도적으로 심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둘째, 사람들은 숲속에서 원하는 식물을 심기 위하여 새로운 환경, 즉 농지를 조성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53


 이와 함께 차이점도 발견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축의 활용, 관개시설의 운용 등이다. 이들의 사용은 해당지역의 기후와 재배하기 적합한 작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졌지만, 결과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토양의 비옥도와 재배작물의 특성, 관개시설의 유무는 투입 노동력의 비율과 가축사육의 필요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단기적으로는 계급제, 장기적으로는 문명의 성격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게 된다. 


 동양에서 곡물의 중요성은 서양에 비교하자면 가축의 중요성에 맞먹는다. 유럽에서 농업은 복합 영농으로, 곡물 생산은 언제나 동물 사육과 함께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농업은 언제나 곡물 생산에 집중했으며, 선사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 음식은 대체로 채식 위주였다. 다만 최근에 그 경향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45


 동물 사육은 일본의 초기 농업 사회에서 그 역할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야요이 시대부터 말과 소는 주로 농사일에 사용되었고, 인간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운송 수단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사육의 목적이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고기나 우유를 비롯한 축산물을 활용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집돼지도 야요이 시대부터 사육되지 시작했으나, 야요이 시대의 식생활에서 돼지고기가 차지한 비중은 미미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28


  "농업"에서 식량 생산 활동을 총칭하는 의미를 포함한다. 곡물 재배 위주(원경 園耕, farming), 가축 사육 위주(유목 herding 혹은 목축 pastoralism), 혹은 농경과 유목을 함께 병행하는 경우(농목업 agropastoralism)를 모두 농업의 개념에 포함된다... 다양한 식량 생산 시스템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식량 수급의 안전성을 높이고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복잡한 사회관계와 교환 체계가 마련되어야 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78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시기에 지역별로 생산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농업의 전파 방향이 일방적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신석기 혁명의 초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수렵채집, 목축, 농경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안정적인 식량 확보'라는 농업만의 장점은 전반적인 생활 수준의 악화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주된 생활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앞선 시대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렌시스와 공존하다가 이들을 대체한 것처럼.


 인도아대륙 전체적으로 볼 때 농업의 확산 방향은 완전히 다르고 서로 상충되기도 했다. 갠지스 평원에서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보자면 대체로 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전파되었고, 서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이처럼 상충되는 패턴은 농업과 인구 확산 모델 연구를 촉진했고, 이로써 상호 작용과 다양한 흐름들이 밝혀졌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33


 초기 목축민과 달리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초기 농경 공동체들(EFC)은 동부 및 남동부 습윤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우기가 남반구 여름철로 국한되는 지역이었다.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으므로 그중 일부 지역의 생태 환경은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들 지역 가운데 대부분에는 이미 후기 석기 시대(LSA) 문화를 보유한 수렵채집인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예전처럼 천연자원을 계속 이용했고, 농업 공동체와는 이웃에서 공존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13


 <농업과 세계사 2>에서는 구체적으로 여러 지역의 농경문화가 소개된다. 이들 중 일부는 청동기 문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느 문명은 소멸되기도 하지만, 세계 전역에 자리 잡은 문명을 보노라면 문화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든 문명은 저마다의 환경에서 각자 최선의 길을 선택해 발전했던 것이 아닐까. 이들 문명에 대해 현대의 관점에서 우월과 열등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잔혹하다고 알려진 아즈텍(Aztec)문명을 생각해보자. 포로들을 인신공양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잔혹한 제국의 문화에 대해 야만적이라고 평가를 내리지만, 이들 문화권에서는 포로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토지가 제한적이었고, 지력(地力)도 떨어지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의 인신공양의 풍속을 단순히 잔혹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고대 왕이나 귀족 등이 죽었을 때 가까운 이들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의 경우에도 죽은 이(死者)를 위한 강제적인 풍습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지도자에 의한 정치 보복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개인의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증이 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이유로 생겨났을 수 있는 문화의 성격을 규정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통(傳統 tradition)이라 알려진 많은 것들이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다른 나라의 문화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전통, 문화의 많은 부분이 신석기 시대 농경 생활로부터 유래된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서로 다른 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임을 신석기 혁명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당시 농업인은 기존에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확장을 시도하기보다는 새로운 지역으로 찾아 들어가 원하는 생태 환경의 니치(niche)였다. 그러나 규모가 제한적이고 수용 한계가 뚜렷했기에, 각각의 충적선상지에서 부양할 수 있는 인구 규모는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00


 벼농사는 대규모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 또한 논농사는 고도의 사회적 협력과 공동체의 단결 및 상호 의존을 필요로 했다. 이는 사회 내부적으로 발달하던 위계질서와 상충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갈등은 야요이 시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p318)... 벼농사는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차별의 세습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분화가 최초로 나타났는데, 이를 촉진한 것이 벼농사였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19


요약하자면 갠지스 강 중류 지역에서는 먼저 야생종 벼를 관리하기 시작했고(BCE 7000 이후),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기원전 2000년 경에 이르러 농업-목축 기반의 정착 마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농업 마을 주변으로는 수렵-채집-어로 문화 공동체가 곳곳에 산재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제2천년기에 집약적 벼농사의 관행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뒤로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사회가 복잡성을 더해서 마침내 철기 시대의 도시가 등장했다. 그때가 기원전 제1천년기 중엽이었다. - P150

일본 고고학은 대개 야요이 시대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기존에는 야요이 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300년경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기원전 제1천년기로 수정되었다. 이 무렵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신토(神道)라고 불리게 될 문화 및 신앙이 구체화되었으며, 고문헌에서 일본이라는 명칭도 최초로 등장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새로운 도래인(渡來人)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존의 조몬인과 뒤섞였으며, 오늘날 대부분 일본인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일본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 벼농사에 기반을 둔 야요이 문화는 기존의 수렵채집문화, 원주민 문화, 조몬 시대의 문화를 대체했다. 전통적으로 야요이 이전의 문화는 오늘날 일본인의 직접적 조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 P291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 태국에서 신석기 유적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제3천년기 중엽이었다. 당시 정주 생활이 강화되었고, 문양을 새긴 토기, 간석기 자귀, 사육종 돼지와 닭, 재배종 벼가 등장했다. 홀로세 중기가 끝나갈 무렵, 즉 기원전 제3천년기 말 대륙동남아 몇몇 지역에서 매장지와 주거지가 혼재된 장소가 등장했다. 그곳에서는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했다. 기원전 제2천년기 말기에 이르러 태국 남부 해안 혹은 그에 가까운 곳에서 해양 생활에 적응한 뚜렷한 정주 생활 장소가 등장했다. 여기서도 농업의 흔적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 P393

화전을 했던 장소에서는 식량, 약품, 공예품을 만들 재료, 천이나 밧줄을 만들 섬유, 지붕이나 벽의 재료 혹은 바구니를 만드는 데 사용할 나무껍질, 고무, 불 피울 때 사용할 송진, 유향목,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코킹, 향료, 나무 기름, 염료, 사냥을 위한 독성 물질, 지붕에 덮을 나뭇잎, 지붕 조각, 건축 자재, 도구나 배나 무기를 만들 원재료 등을 구했다. 이런 시스템에서 농부는 숲속의 특정 구역을 개간하고 관리하는데, 이는 한 구역을 완전히 갈아엎어서 농지를 만드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오히려 숲의 구조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개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해리스(Harris)에 따르면 "화전과 원경(園耕)은... 다른 농업 시스템과 달리 자연환경의 구조, 기능적 역학, 균형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 - P423

바닥면을 인공적으로 높이면 배수가 원활하고 습지에서도 농사가 가능했다. 이런 식의 밭을 치남파스(chinampas)라 했는데, 멕시코 분지의 호숫가 지역에서 농업의 중요한 요소였다. 치남파스는 호수의 진흙과 수생 식물, 그리고 가정 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등으로 만들었다. 치남파스는 대개 좁게 만들었지만 상당히 길게 늘일 수 있었고, 가장자리를 따라 나무를 심기도 했다. 약 1만 2000헥타르의 치남파스가 아즈텍 제국 수도의 인구를 먹여 살렸다. - P587

초기 농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유용한 통로는 바로 그들의 시간 관념이다. 숲을 제거하고, 소규모 농지를 조성하고, 가축을 기르는 등의 일은 분명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토지와 공간을 소유하는 것 또한 연속성이라는 농업 이데올로기의 일부였다(p669)... 현재의 시간 속에서도 삶은 굴러간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 역시 복잡한 관계 가운데 할 일이 많았고, 그날그날 해야 할 일뿐만 아니라 특별한 일도 있었다(p670)...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은 신석기 시대 유럽 농업인의 특징이기도 했다. 과거에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것은 곧 현재의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 P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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