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엘리트층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러시아 국가의 일원으로서 러시아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추종했다. 러시아 정부의 관제민족주의를 실리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루스인의 통합이라는 과제에 대러시아인 못지않게 진심으로 열중하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는 사실 상당히 모호했고 우크라이나 지식인 가운데 일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리주의‘를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비판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재통일을 가능케 했으니 이를 기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의 동상 건립을 주도했던 유제포비치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P26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 루스의 역사》7권은 ‘코자크의 시대‘ 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 후 10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내용이 코자크 지도자들과 코자크 집단의 활동에 대한 서술로 채워지고 있다. 흐루셰브스키는 코자크를 우크라이나 민족성의 근간으로까지 여긴다. 1991년 독립 후부터 우크라이나 정부와 역사학계는 코자크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여기에는 흐루셰브스키의 역사 해석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된다. - P64
흐루셰브스키의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 동서 우크라이나의 연결성, 단일성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옛 키예프 루스의 동북부지방과 서부지방을 구분하여 서부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구성 부분으로 확신하는 반면 동북부지방은 이 구성에서 제외해 버린다. 동북지역이외부자로 여겨지는 반면 서부지역은 키예프 루스의 적통을 공유하는 우크라이나 공들의 통치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 P68
같은 동슬라브 민족이라 할지라도 벨라루스인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상반되게, 흐루셰브스키는 러시아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다. 그는 키예프 루스 시기에 키예프 공령과 마찬가지로 류리코비치들이 통치하고 있던 수즈달 공령을 비롯한 동북부 지역을 키예프 루스에서 제외하고 이를 외부자로 부르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그는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체에는 루스 혹은 그 변형인 러시아 (루스의 땅)라는 나라 이름을 좀처럼 인정해 주고자 하지 않는다. 루스의 형용사이자 러시아의 형용사이기도 한 ‘루스키‘라는 말을 그는 오로지 우크라이나-루스를 위한 형용사로만 사용하고자 한다. - P71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성이 러시아와는 다르며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보다는 서방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는 할리치나에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드니프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통치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비판적인 서술이 없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도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제국 지배자의 사정을이해해 가면서 온건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한 흐루셰브스키인지라 그가 이끄는 중앙 라다 정부가 러시아 혁명 이후 불확실성이 가득한 상황에서 독일 군을 불러들인 것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독일 세력의 지원을 받자는 의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가 기본적으로 독일을 서방의 일원으로 보았고 러시아보다는 독일과의 정치적 동맹을 선호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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