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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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110/178

한강(韓江, 1970 ~ )은 <소년이 온다>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인간이 존엄한 존재인가, 아니면 추악한 존재인지 묻는 소설 속의 질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5.18 민주화운동의 모순에서 비롯된다. 국가폭력에 맞서 공동체를 지켜야 하는 상황. 공동체를 지키는 행위는 숭고한 시민의식의 발현이었지만, 이러한 발현이 국가 공동체에 의해 강제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죽음과 삶의 선택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8/178

우리 군대가 총을 쐈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너를 힘껏 끌고 나아가며 난 노래했는데. 목이 터져라고 애국가를 따라 불렀는데. 그들이 내 옆구리에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탄환을 박아넣기 전에. 저 얼굴들을 하얀 페인트로 지워버리기 전에.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40/178

이러한 상황에 더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문집단인 군대(軍隊)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맞서다 죽거나, 도망치고 모른 척하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모두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죽은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부여받은 비참한 상황. 1980년 5월의 광주에 있던 이들 중 이를 피할 수 있었던 이들은 없었다.

이상하고 격렬한 힘이 생겨나 있었는데, 그건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오직 멈추지 않는 생각들 때문에 생겨난 거였어.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누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생각할수록 그 낯선 힘은 단단해졌어. 눈도 뺨도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를 진하고 끈적끈적하게 만들었어.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8/178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95/178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삽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도청 앞 스피커에서 연주곡으로 흘러나온 애국가에 맞춰 군인들이 발포한 건 오후 한 시경이었습니다. 시위 대열 중간에 서 있던 나는 달아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습니다.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95/178

거대한 상실감 속에 그나마 한줄기 빛으로 비춰지는 것은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빠져나간 5월 22일부터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된 5월27일까지 광주 시민에 의해 자치 질서를 회복하던 시기의 모습이었다. 짧은 시기 동안 광주에서 보여준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과 양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임이 분명했지만, 이러한 인간의 숭고함이 인간의 야만에 의해 드러나야 했던 것이라는 점에서 아픔이 더해진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가전에서 희생되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96/178

<소년이 온다>에서 그려지는 권력을 향한 야만과 이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 발현된 숭고함. 이것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전부를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참혹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제42주년 5.18 민주화 운동을 맞아 염원한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_ 한 강, <소년이 온다> , p8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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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2-05-16 2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516에 518이 다가오네요.

겨울호랑이 2022-05-16 21:44   좋아요 2 | URL
네... 올해도 어김없이 시간이 가네요 길게 느껴지는 하루하루지만요...

거리의화가 2022-05-16 2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항상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시의적절한 글을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푸른눈의증인을 읽어보려구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7 05: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 역시 거리의화가님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