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무의식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5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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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 9조에는 전쟁을 회피하려는 강력한 윤리적 의미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이거나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9조는 명확히 점령국의 강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후에 자주적인 헌법을 제대로 다시 만들자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왔고 지금 역시도 있습니다(p30)... 프로이트의 관점은 헌법 9조가 외부의 힘, 즉 점령군의 지령에 의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무의식에 깊숙이 정착한 과정을 훌륭히 설명해줍니다. 먼저 외부의 힘에 의한 전쟁(공격성)의 단념이 있고, 그것이 양심(초자아)을 낳고, 다시 그것이 전쟁의 단념을 더욱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31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1941 ~ )의 <헌법의 무의식 憲法の無意識>의 주제는 '평화헌법'의 상징적인 조문이라 할 수 있는 일본헌법 9조다. 전쟁, 무력행사 그리고 군대 보유를 영원히 포기한다는 9조는 일본과 일본인에게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전후헌법의 9조란 원래 1조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이차적인 것이었다고 서술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9조만이 문제가 되었고,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경위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간과되어 온 것은 원래는 1조가 중요했다는 사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1조와 9조의 지위가 역전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1조(상징천황제)가 정착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47


  고진은 <헌법의 무의식>에서 헌법 9조와 함께 헌법 1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고진의 관점에 따르면 신(神)으로 받아들여졌던 일왕의 존재를 인간으로 재위치시키면서, 연쇄적으로 제정된 것이 헌법 9조다. 일왕의 존재가 갖는 종교적 의미와 군국주의 일본의 군사력의 분리는 미군정에게 첫째 과제였고, 그 기원은 멀리 고대국가의 성립으로까지, 가깝게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그런 면에서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 1964)의 전후 처리는 일본정치의 전통과 연결점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고대국가가 형성되었을 때, 외부와의 관계가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수장(首長)=사제를 장(長)으로 삼는 씨족사회가 그대로 국가로 발전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역시 외부에서 온 군사적 정복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군사력만으로 지배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기존의 수장=사제를 편입시키거나 추대함으로써 지반을 단단히 다졌고, 바로 그것에 의해 천황제국가와 같은 것이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고대국가는 권력과 권위, 실력과 주술력이라는 이원성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이후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71


 고진은 <헌법의 무의식>을 통해 미군정에 의한 새로운 헌법 9조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단절을 넘어 도쿠가와 막부의 평화시대 전통과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여기에 담긴 사상이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의 '영원한 평화'와 연결된다는 점을 말한다. 고진은 전후 패전이라는 좌절된 죽음의 충동이 낳은 결실을 평화헌법으로 규정하고, 이로부터 세계평화를 향한 교두보를 발견한다. 일본인인 저자는 이러한 구도로부터 세계평화에 앞서는 선도국가 일본을 위치시키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그의 관점에 동의하기 어렵다.


 도쿠가와 체제란 '전후(戰後)'의 '국제(國制, constitution)'인 것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삼은 것은 다양한 금지를 통해 공격충동의 발생을 억누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의해 도쿠가와 체제에서 '무기질'적인 상태가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쿠가와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메이지 이후에는 개국(開國)을 하고 외부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공격충동의 발생입니다. 그것이 패전과 함께 자신의 내부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헌법 9조인데, 이는 동시에 '도쿠가와의 평화'에 있었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법 9조가 함의하고 있는 것은 칸트가 명확히 한 보편적 이념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87


 그의 말대로 평화헌법 9조는 일본인들의 무의식에 자리잡았을 수 있겠지만, 그와 쌍이 되는 헌법 1조는 어디에 자리하는가. 고진의 도식에 따르면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복종을 끌어내기 위한 미군정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평화헌법 1조는 다분히 미군정의 자유의지에 의해 일본인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왕제가 의식에 자리잡아 일본의 '와(和) 문화'의 구심점으로 자리하는 한 외부로 향한 죽음의 충동은 문화로 변화하지 않고 휴화산처럼 또다른 분출점을 노린다고 보는 편이 보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닐까. 그리고, 일본을 영원한 평화의 선도국이 아닌 반성하지 않는 전범국으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자아는 죽음충동이 공격성으로서 바깥으로 향한 후에 다시 안으로 향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현실원칙이나 사회적 규범으로 공격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공격충동은 어떻게 억제되는 것일까요. 프로이트는 이때 공격충동(자연)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격충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즉 공격충동은 안으로 향한 후 초자아=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28


 혼네(本音)으로 1조를, 다테마에(建前)으로 9조를 내세우며 진심없는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영원한 평화를 발견하기란 영구히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지고, 이것이 고진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그럼에도 <헌법의 무의식>이 갖는 의미를 <트랜스크리틱>의 model을 가능태가 아닌 현실태로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헌법 1조와 9조는 왜 이처럼 결부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이미 서술한 것처럼 연합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일본을 점령통치하기 위해 먼저 천황제 유지를 시도하고 그것과 관련하여 연합군에 속한 여러 나라의 반대를 설득하기 위해 9조를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는 그때까지 맹위를 떨치던 천황제파시즘을 근절하려고 했지만 천황제 자체는 남겨놓으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점령에 대항하는 자는 그것을 천황의 이름으로 행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판단은 일본에서 정치적 실권을 가진 자가 역사적으로 되풀이해온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53


PS. 본문 중 고대국가의 형성과 관련해서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설명하는 권력에 저항하는 원시사회의 내용을 연결시켜본다면, 성(聖)과 속(俗)의 결탁, 국가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쇼군이 아니라 천황이 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사고는 흑선(黑船)의 도래와 존황양이운동과 더불어 확산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황은 메이지유신까지 ‘상징천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헌법 1조의 규정은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점령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메이지 시대, 그리고 그 이전의 형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 P55

일본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위기가 생겼을 때, 바꿔 말해 초월적인 것이 외부로부터 도래했을 때, 내부에서 천황을 초월화시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가 ‘다이카(大化)의 개신(改新)‘(645년) 입니다. 일본에서 천황이 초월적인 존재로서 실권을 잡은 시기는 내외적으로 위기상태, 전란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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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3-05-08 0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주권국가가 확립되기 이전인 칸트의 사상을 일본 헌법과 연결지은 고진의 해석은 시대착오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군요

겨울호랑이 2023-05-08 07:31   좋아요 0 | URL
김민우님의 말씀처럼 일본 헌법의 기원을 서구 계몽사상과 연결짓는 부분은 다소 비약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진은 평화헌법 9조가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외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이상을 패전국에서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본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외세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헌법 9조와 칸트의 사상이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만, 이러한 9조가 일본인의 무의식에 자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갖게 됩니다... 김민우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허약한 윤석열 체제가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더욱 부추기는 모양새가됐다. 윤석열 정부에 실망한 이들에게 기대는 민주당과 그러한 민주당의 잘못에편승하는 국민의힘이라는 악순환 속에서 ‘무당층‘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정치권 전체가 반사이익 그 이상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불거진다. - P12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일은 대통령의 최우선 책무다.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국제정세 흐름에서적과 친구라는 이분법으로만 상대를 인식할 경우 치르게 될 비용은 명확하다. 익명을 전제로 한 정치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백번 양보해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내정치 행보에 대한 비용은 자기 지지율을 깎아먹는 것이라고 치자. 외교무대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차원이 다르다. 국가전체의 코스트(비용)로 돌아온다. 너무 위험하다." 나라 안팎으로 ‘윤석열 비용‘
의 청구서가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 P13

개방 1년, 청와대는 문만 열려 있었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활용 방안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다. 청와대를 주도적으로 관리할 주체는 개방 1년을 약 한 달 앞두고 정해졌다. 청와대가 가지고 있던권 위를 허물고 싶은 쪽과 한국 정치 심장의 역사성을 지켜내고 싶은 이들이 곳곳에서 맞붙고 있지만 뚜렷한 답은 나오지않는다.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은 돌고 돌아 다시 청와대 영빈관을 쓰기 시작했다. - P16

문제는 대통령 배우자의 일정과 메시지 등을 총괄하는 담당자가 여전히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과거 정부에서는 제2부속실장이 이 역할을 맡았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제2부속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에서 나아가 대통령 배우자 활동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대통령 배우자의 지위나 역할을 규정한 법률은 없다. - P23

이처럼 팜유 생산지에서 환경과 인권이슈가 계속 불거지자 팜유 업체는 ‘팜유 인증제‘를 들고나왔다. 지속가능한 팜유를 생산하고 사용하겠다는 약속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속가능한 팜유생산 협의회(RSPO)‘의 인증제다. 산림청 등 국내정부 부처에서 RSPO 설명서를 제작해배포하고, 포스코인터내셔널 등 팜유 사업에 투자하는 국내 기업이 RSPO 인증을 받았다며 홍보할 만큼 국제적으로 공신력이 높은 제도다. 그러나 최근 이런 팜유인증제도가 실은 ‘그린워싱(친환경인 척 가장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국내에서도 제기됐다. - P28

하지만 토론과합의의 과정이란 언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제학은 당연히 ‘정치경제학‘일 수밖에 없다. 만일 이 과정을 몇몇 똑똑한 경제학자가 수학적 방정식을풀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합리적인 경제학이 아닌 지적 사기일 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경제학은 대학연구실이라는 폐쇄적 공간에 갇힌, 박사학위 면허를 가진 소수 전문가들의 지적전유물이 아닌 대중이 공유할 수 있는 상식이 되어야 한다.  - P33

 녹색당은 1983년 5.6%를 득표해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했고, 점차 독일 탈핵의 역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다. 1981년 10월10일 본에서 벌어진 시위는 당시 반핵운동이 단순히 발전소 건설 반대를 넘어 시대적 위기와 결합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날시위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핵무경가기가 독일에 배치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함이었다.  - P37

하지만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과 자민당으로 구성된 메르켈 2기 정부는 2010년 원전 폐쇄 정책을 철회했다. 당시정부가 발표한 ‘에너지 구상‘에는 온실가스 감축 달성과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를 위한 원전 사용기한 연장이 강조되어 있었다.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를 줄이는대신 원전의 사용을 연장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전국적인 반핵 시위를 촉발했다. 그리고 2011년 3월11일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자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기민당 지지율은 떨어졌고 탈핵을 지지해온 녹색당의 지지율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 - P38

미얀마는 중국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유일한 육로에 놓여 있다. 라카인주 차우퓨 지역에서 경제특구 개발과 심해 항구 건설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이 프로젝트에 대한 보호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중국이 군부뿐 아니라 군부와 내전 상태에 있는 라카인주 주류 종족인 라카인족 반군단체 아라칸군(AA)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라카인주에서 세를 빠르게 확장해가는 반군을 지렛대 삼아 이 지역에 대한전략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게 중국의계산법이다.  - P41

2014년, 아베 정부는 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었다며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호소문을 삭제했다. 2023년 4월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은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역사적 책임에 대한 오랜고민들이 깃털처럼 가벼운 말 속에서 증발했다.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어질 수없는 상처"라는 최소한의 인식마저 사라졌다. 아베를 향해 사죄를 촉구하던 사카모토 류이치도 떠났다. 역사의 전진이나후퇴 같은 거친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한다. 이번에는 쓴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P47

지원금을 주는 제도라 일시적으로 살아남는 데에는 도움이되었지만 결국 산업으로 바꿔나간 쪽이살아남는게 아닌가 싶다. 영화가 그걸 해냈다. 개방이라는 힘든 조건 속에서 산업으로 만들어 살아남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외국 영화와 한국 영화의 체급 차이가 말도 안 되게 컸다. 스크린쿼터 논의가 있을 때 시장을여느냐 마느냐로 굉장히 치열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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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고고학- 정치 인류학 연구, 개정판
삐에르 끌라스트르 지음, 변지현.이종영 옮김 / 울력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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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리커버)- 정치인류학 논고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 / 이학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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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리커버) - 정치인류학 논고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 / 이학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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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사회의 성격은 불완전함, 불충분함, 결여 등으로 규정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적극적인 것으로서, 자연환경과 사회적 계획의 지배로서, 스스로의 사회 존재를 변질시키고 부패시키며 해체시킬 수 있는 것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는 의지로서 규정되어야 한다(p246)... 원시사회의 경제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원시사회에서 경제가 자율적인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이다. _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p247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민족학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원시 문화들을 서구 문명을 중심으로 이른바 구심운동을 하는 대상으로 간주해왔다. 진정으로 고대적 사회에 대해 우리가 사회가 아닌 고대적 사회의 실재에 맞는 담론을 만들기 원한다면 시각의 완전한 전복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정치인류학이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_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p34


 피에르 클라스트르 (Pierre Clastres, 1934 ~ 1977)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La Socie'te' Contre l'Etat de Pierre Clastres>에서 원시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서구중심주의에서 분명 벗어난다. 원시사회-> 노예제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라는 단선적 발전론적 입장에서 원시사회는 다음 단계로 이행을 위한 초기 단계이며, 내부모순에 의해 붕괴될 수 없는 사회다. 이러한 초기예비단계라는 기존 시각에 대해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 자체에서 완전성을 발견한다. 그러한 완전성은 원시사회에서경제면에서 이미 잉여 생산물을,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방지하는 일종의 장치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종종 공동체의 연간 필요 소비량에 맞먹는 잉여 식량을 생산했다는 것, 즉 연간 필요 소비량의 두 배를 충족시키거나 혹은 두 배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식량을 생산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p18) 이 지적은 단순히 고대적 사회가 고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계경제라는 개념이 실제 원시사회가 처했던 경제적인 현실보다 오히려 원시사회에 대한 서구 관찰자들의 태도와 습관을 반영하고 있는 "과학적"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_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p19 


 인디언 문화는 자신들을 현혹시키는 권력을 거부하기 위해 고뇌하는 문화이다. 거기에서는 풍족한 추장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역설적인 성격을 띤 권력이 그 무력함으로 인해 숭배된다는 것은 문화의 스스로에 대한 고뇌와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꿈을 표현하는 것이다. 신화의 이마고 imago이자 부족에 대한 은유, 이것이 인디언 추장이다. _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p61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속의 추장의 모습은 권력을 통해 지배하는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다. 끊임없이 주변에 의해 흔들리는 추장의 모습. 이러한 추장의 모습은 J. G. 프레이저 (James George Frazer, 1854 ~ 1941)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 A Study in Magic and Religion>에서 보여지는 '신의 살해'를 떠올리게 한다. 절대적인 존재인 신을 대리하는 대리자에 대한 살해. 이 같은 의례 또한 절대권력에 대한 또다른 견제장치는 아니었을까.


 추장의 역할은, 비록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여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지도자는 집단의 경제활동, 의례활동을 계획하고 이끌지만 의사 결정권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이 집행될 것이라고 확실할 수 없다. 끊임없이 도전받는 권력의 이러한 본질적 취약함으로 인해 권력 행사는 독특한 성격 tonalite을 지니게 된다. 즉 추장의 권력은 그 집단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_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p49


 다른 사람들과 다른 추장에게만 요구되는 능력 - 말하기와 같은 - 마저도, 그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 아닌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추장 스스로가 입증해야 하는 사회 공동체의 요구는 독재에 대한 견제장치로 작동한다. 또한, 권력사회에서 발화(發話)는 그 자체로 명시적 의미를 갖지만, 원시사회에서 발화는 모호하고 중의적인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저자는 이 같은 원시사회의 견제와 모호함을 통해 권력사회의 첫 번째 계단이 아닌, 반(反)권력사회로서 원시사회를 조명한다.


 언어가 곧 폭력의 반대라면, 말하기는 추장의 특권 이상의 것으로서, 그것은 권력이 강제적 폭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집단이 가지는 수단이자 폭력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나타내는 매일 반복되는 보증으로 해석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말에는 언어에 내재하는 소통의 기능에서 벗어난 애매모호함이 숨겨져 있다. _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p60


  발화된 말은 교환되는 메시지인 동시에 모든 메시지의 부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호로서도 기호의 반대물로서도 발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아야키족의 노래는 우리들에게 열려진 소통의 기능으로서도, 또한 자아 구성의 닫혀진 기능으로서도 전개될 수 있는 언어활동의 이중적이고 본질적인 성질을 가리킨다. 이러한 반대되는 기능을 실행할 수 있는 언어활동의 역량은 기호와 가치로 나누어질 수 있는 언어활동이 지닌 가능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_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p156


  오랫동안 인류의 정치사는 중앙집권화 여부에 따라, 경제사는 어느 에너지를 활용했는가에 따라 우열을 판단해왔다. 그렇지만, 역사속에서 우리 인류는 과연 끊임없이 진보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정치적으로 권력에 대한 견제가 무너지면서 부족제사회에서 왕정으로 넘어가고, 경제적으로 삼림이 황폐화되면서 나무 대신 석탄을 활용하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변화, 인류 사회 전체적으로는 거대한 퇴보는 아니었을까. 이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학기술문명 대신 인간의 행복지수가  반비례하여 낮아지는 이유도 설명되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원시사회에 대한 현대인들의 편견을 깨뜨리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라 여겨진다..


 분리의 본원적 징표이자 분리가 확대되어나가는 특권적인 장은 권력의 생성이라는 환원 불가능하고 확고하며 아마도 불가역적인 총체적 사실 그 자체이다. 일부의 구성원만이 소유하며 전체 사회로부터 분리된 권력, 즉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사회를 향하여 또는 필요하다면 사회에 반하여 행사되는 권력이 생성되는 것이다. 국가를 형성한 모든 사회들을 이러한 시각으로 설명할 수 있다. _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p191


 부족사회에는 왕이 없고 단지 국가의 추장이 아닌 추장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추장이 일체의 권위와 강제력,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추장은 명령을 내리는 자가 아니며 부족민들은 복종해야 할 어떤 의무도 갖고 있지 않다. 추장제의 공간은 권력의 장이 아니며 원시사회의 "추장"은 앞으로 나타날 전제군주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국가 장치가 원시사회의 추장제로부터 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_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p254

권력과 교환 사이의 관계는 부정적인 것이지만, 거기에서 권력이 지닌 문제 틀이 등장하고 구체화되는 사회구조의 가장 심오한 층위, 즉 사회의 여러 무의식적 구성의 장이 드러나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이러한 권력에 대한 거부에 자신의 전부를 거는 것은 자연에 대한 주요한 차이로서의 문화 자체이다... 문화는 권력과 자연 모두에 대한 부정이다. 그것은 자연과 권력이 문화라는 제3항에 대해 동일한 - 부정적인 - 관계만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위험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화가 권력을 자연의 재출현으로 파악한다는 의미에서의 부정인 것이다. - P57

말하기와 권력의 결합 속에서 매우 명료한 동시에 매우 심오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국가를 형성한 사회에서는 말하기가 권력이 지닌 권력인 데 반해 국가 없는 사회에서는 거꾸로 말하기는 권력의 의무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디언 사회는 추장에게 그가 추장이기 때문에 말하기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추장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말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요구한다. - P192

인간을 괴롭히는, 그리고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이 불완전함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서 하나"라는 사실로부터 온다... 이 불완전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사물은 하나이기 때문에 불행은 그 불완전함으로부터 생긴다. 그것은 세상 만물의 특성이다. 그것은 세상 만물의 특성이다. 하나란 불완전함의 이름이다. 과라니족의 사고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란 악 그 자체라는 것이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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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5-06 11: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두기만 했는데 이제 정말 읽어볼 타이밍인 듯 싶네요. 끊임없이 발전지향으로 나아가서 문제가 되는 현대사회에 대한 경고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5-06 13:49   좋아요 4 | URL
이제는 언론에서 진부하게 사용하는 ‘단군 이래 최대 ~‘ 등의 표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현대 사회가 예전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되네요. 거리의화가님 좋은 독서 되세요! ^^:)

얄라알라 2023-06-08 12:53   좋아요 1 | URL
이 오래 전 나온 전문서가 요새 알라딘 서재에 가끔 올라오는 걸 보면, 겨울호랑이님의 이 리뷰가 쏘아올린 신호탄이 된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화가님, 타이밍 바로 지켜 실행하신거네요. 두 분의 글을 읽게 되어 넘 좋습니다

초원 2023-05-06 15: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빗소리가 약해지고 있네요. 겨울호랑이님, 잘 지내시죠?

왕이 없는 추장제 사회는, 클라스뜨르의 논의에서 보면, 무척 매력적이네요. 저도 오랜만에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읽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국가에 대항하는‘이라는 책제목은 뭔가 비껴나가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겨울호랑이 2023-05-06 19:47   좋아요 1 | URL
비가 오는 연휴네요. 덕분에 꽃가루도 먼지도 많이 씻겨 내려가 시원해졌구요. 본문의 내용을 읽으며 헤시오도스가 노래한 <일과 나날> 속의 다섯 시대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황금, 은, 청동, 영웅, 철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의 삶은 점차 퇴보한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저 또한 초원님 말씀처럼 ‘국가에 대항하는 ~‘ 대신 다른 표현 - ‘권력을 거부하는‘ -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네요. 그럼에도 ‘국가‘를 제목에 붙인 것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민족국가에서의 국가권력이고, 중앙집권의 종착점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의도가 담긴 것은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구요. 초원님 평안한 주말 되세요! ^^:)

얄라알라 2023-06-08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 책 읽고 입사식의 고문에 가까운 신체화된 주민등록증이 가장 인상깊었었어요.

contre는 ‘against‘의 의미여서 ‘대항하는‘이라고 번역했을까요?^^ 초원님 말씀을 들으니, 대안어가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23-06-08 15:31   좋아요 0 | URL
얄라얄라님 감사합니다. 주민등록증은 국가의 영토 내에 구속된 개인의 처지를 잘 드러내는 도구라 여겨집니다. 저도 무심코 넘어갔었는데, 초원님 덕분에 좋은 생각할 거리를 얻었습니다. 좋은 이웃분들 덕분에 더 풍성하게 얻어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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