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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무의식 ㅣ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5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7년 2월
평점 :
헌법 9조에는 전쟁을 회피하려는 강력한 윤리적 의미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이거나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9조는 명확히 점령국의 강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후에 자주적인 헌법을 제대로 다시 만들자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왔고 지금 역시도 있습니다(p30)... 프로이트의 관점은 헌법 9조가 외부의 힘, 즉 점령군의 지령에 의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무의식에 깊숙이 정착한 과정을 훌륭히 설명해줍니다. 먼저 외부의 힘에 의한 전쟁(공격성)의 단념이 있고, 그것이 양심(초자아)을 낳고, 다시 그것이 전쟁의 단념을 더욱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31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1941 ~ )의 <헌법의 무의식 憲法の無意識>의 주제는 '평화헌법'의 상징적인 조문이라 할 수 있는 일본헌법 9조다. 전쟁, 무력행사 그리고 군대 보유를 영원히 포기한다는 9조는 일본과 일본인에게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전후헌법의 9조란 원래 1조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이차적인 것이었다고 서술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9조만이 문제가 되었고,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경위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간과되어 온 것은 원래는 1조가 중요했다는 사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1조와 9조의 지위가 역전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1조(상징천황제)가 정착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47
고진은 <헌법의 무의식>에서 헌법 9조와 함께 헌법 1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고진의 관점에 따르면 신(神)으로 받아들여졌던 일왕의 존재를 인간으로 재위치시키면서, 연쇄적으로 제정된 것이 헌법 9조다. 일왕의 존재가 갖는 종교적 의미와 군국주의 일본의 군사력의 분리는 미군정에게 첫째 과제였고, 그 기원은 멀리 고대국가의 성립으로까지, 가깝게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그런 면에서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 1964)의 전후 처리는 일본정치의 전통과 연결점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고대국가가 형성되었을 때, 외부와의 관계가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수장(首長)=사제를 장(長)으로 삼는 씨족사회가 그대로 국가로 발전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역시 외부에서 온 군사적 정복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군사력만으로 지배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기존의 수장=사제를 편입시키거나 추대함으로써 지반을 단단히 다졌고, 바로 그것에 의해 천황제국가와 같은 것이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고대국가는 권력과 권위, 실력과 주술력이라는 이원성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이후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71
고진은 <헌법의 무의식>을 통해 미군정에 의한 새로운 헌법 9조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단절을 넘어 도쿠가와 막부의 평화시대 전통과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여기에 담긴 사상이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의 '영원한 평화'와 연결된다는 점을 말한다. 고진은 전후 패전이라는 좌절된 죽음의 충동이 낳은 결실을 평화헌법으로 규정하고, 이로부터 세계평화를 향한 교두보를 발견한다. 일본인인 저자는 이러한 구도로부터 세계평화에 앞서는 선도국가 일본을 위치시키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그의 관점에 동의하기 어렵다.
도쿠가와 체제란 '전후(戰後)'의 '국제(國制, constitution)'인 것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삼은 것은 다양한 금지를 통해 공격충동의 발생을 억누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의해 도쿠가와 체제에서 '무기질'적인 상태가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쿠가와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메이지 이후에는 개국(開國)을 하고 외부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공격충동의 발생입니다. 그것이 패전과 함께 자신의 내부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헌법 9조인데, 이는 동시에 '도쿠가와의 평화'에 있었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법 9조가 함의하고 있는 것은 칸트가 명확히 한 보편적 이념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87
그의 말대로 평화헌법 9조는 일본인들의 무의식에 자리잡았을 수 있겠지만, 그와 쌍이 되는 헌법 1조는 어디에 자리하는가. 고진의 도식에 따르면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복종을 끌어내기 위한 미군정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평화헌법 1조는 다분히 미군정의 자유의지에 의해 일본인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왕제가 의식에 자리잡아 일본의 '와(和) 문화'의 구심점으로 자리하는 한 외부로 향한 죽음의 충동은 문화로 변화하지 않고 휴화산처럼 또다른 분출점을 노린다고 보는 편이 보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닐까. 그리고, 일본을 영원한 평화의 선도국이 아닌 반성하지 않는 전범국으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자아는 죽음충동이 공격성으로서 바깥으로 향한 후에 다시 안으로 향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현실원칙이나 사회적 규범으로 공격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공격충동은 어떻게 억제되는 것일까요. 프로이트는 이때 공격충동(자연)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격충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즉 공격충동은 안으로 향한 후 초자아=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28
혼네(本音)으로 1조를, 다테마에(建前)으로 9조를 내세우며 진심없는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영원한 평화를 발견하기란 영구히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지고, 이것이 고진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그럼에도 <헌법의 무의식>이 갖는 의미를 <트랜스크리틱>의 model을 가능태가 아닌 현실태로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헌법 1조와 9조는 왜 이처럼 결부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이미 서술한 것처럼 연합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일본을 점령통치하기 위해 먼저 천황제 유지를 시도하고 그것과 관련하여 연합군에 속한 여러 나라의 반대를 설득하기 위해 9조를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는 그때까지 맹위를 떨치던 천황제파시즘을 근절하려고 했지만 천황제 자체는 남겨놓으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점령에 대항하는 자는 그것을 천황의 이름으로 행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판단은 일본에서 정치적 실권을 가진 자가 역사적으로 되풀이해온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p53
PS. 본문 중 고대국가의 형성과 관련해서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설명하는 권력에 저항하는 원시사회의 내용을 연결시켜본다면, 성(聖)과 속(俗)의 결탁, 국가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쇼군이 아니라 천황이 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사고는 흑선(黑船)의 도래와 존황양이운동과 더불어 확산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황은 메이지유신까지 ‘상징천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헌법 1조의 규정은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점령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메이지 시대, 그리고 그 이전의 형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 P55
일본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위기가 생겼을 때, 바꿔 말해 초월적인 것이 외부로부터 도래했을 때, 내부에서 천황을 초월화시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가 ‘다이카(大化)의 개신(改新)‘(645년) 입니다. 일본에서 천황이 초월적인 존재로서 실권을 잡은 시기는 내외적으로 위기상태, 전란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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