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 상 중국공산당역사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지음, 홍순도 외 옮김 / 서교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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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은 실천에서 생겨나고 실천의 주체는 대중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유물주의 사상노선을 지지하는 것과, 대중에 의지하는 사업노선을 지지하는 것이 일치한 것이다. 마우쩌둥은 "공산당의 투쟁 책략은 결코 집안에 앉아서 소수의 사람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중의 투쟁 과정을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천 경험 중에서만 비로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592/914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의 <중국공산당역사>는 청조 말 1840년과 1856년 2차례에 걸쳐 일어난 아편전쟁(鴉片戰爭) 이후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 비참했던 근대 중국역사와  그 안에서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사명이 잘 드러난 역사책이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은 중국 공산당에 앞선 혁명과 배경으로부터 시작한다.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의 亂, 1850 ~ 1864)과 의화단운동(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1899 ~ 1901)을 통해 농민의 중요성이 드러났고,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을 통해 청나라가 멸망하는 등 이전 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한계점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점을 넘어서는 것은 결국 공산당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이 제1권 상의 소결론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건대,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점차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와 민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중국 인민들은 간고한 투쟁을 벌였다. 중국의 선각자들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구국구민의 진리를 모색하며 중국 사회를 변혁하는 여러 가지 방안을 시도했다. 이러한 모색과 투쟁은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중국 역사의 진보를 어느 정도 이끌었다. 그렇지만 중국의 반식민지 반봉건의 사회 성격과 중국인민의 비참한 운명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91/914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은 시대적으로 1936년 시안 사건(西安事變)을 통해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 동안 초기 소수 지식인 중심으로 형성된 중국공산당은 청나라 이후 주도권을 잡기에 미약했으므로, 국민당과의 협력(국공합작)을 통해 군벌세력들을 소탕하면서 점차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가는 큰 흐름을 본문에서 확인하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정치, 경제 상황과 경한철도 노동자 대파업이 우페이푸의 탄압을 받았던 교훈에 근거하여,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의 통치를 무너뜨리려면 노동계급만을 의지하는 것은 역부족임을 인식했다. 따라서 쑨중산(쑨원)이 영도하는 국민당과 적극 연대하여 노동계급과 민주세력의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한층 깊이 깨닫게 되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254/914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에서는 시대적 상황안에서 중국공산당의 혁명사상이 무엇의 영향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가 잘 서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중국사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보다 중국공산당의 관점에서 해석된 역사이며, 당(黨)의 역사이기에 다소 지루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중국공산당역사>에서 중국공산당이 바라보는 중국현대사는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고 읽으면서, '대중'을 바라보는 중국공산당의 시각이 이중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반제국주의 혁명의 주체로서 대중을 긍정하면서도, 1920년대 대중의 현실은 계몽 이전의 무지한 상태로 공산당에 의한 깨우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혁명이 될 수 없으며, 이들을 혁명 대열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토지개혁'이라는 유인을 사용하는 방식이 상호 충돌되는 듯하다. 물론, 경제적 유인이 강력한 참여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대중을 바라보는 공산당의 시선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적어도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가능성을 긍정하기보다는 보편적인 욕망에 소구하는 접근법에서 일종의 엘리트 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유물론(唯物論)에 의한 물질적인 동기만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겠지만, 결코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만약 진정으로 대중을 혁명주체로 바라본다면 그들 안에 잠재된 역량을 긍정하고 중국공산당의 역할을 과거 소크라테스(Socrates, BCE 470 ~ BCE 399)가 그러했듯 자신들의 역할을 '산파'역할 정도로 한정시켜야 하지 않았을까. 대중을 혁명 주체로 보기에 <중국공산당역사> 속의 공산당의 역할은 너무도 크게 보여진다. 


 그런 면에서 중국공산혁명에서 진정한 혁명의 주체를 중국공산당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무지한 대중을 계몽하여 새로운 공산주의 유토피아로 이끈다는 중국공산당의 이론 안에서 대중의 구원은 공산당의 사상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과 공통점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무리라고 할 수 있을까. 기독교를 배척하지만, 기독교 사상과 닮아 있는 공산주의 사상 속에서 유물론을 말하지만, 종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일종의 모순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태평천국과 의화단의 역사적 비극은 반식민지 반봉건의 중국에서 농민들이 반제 반봉건의 강대한 주력군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선진 계급의 지도 없이 반제 반봉건의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크게 증명했다. 근대 중국에는 두 개의 새로운 계급인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이 나타났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48/914


 대다수의 대중은 무지했고, 봉건적인 가정 조직과 미신 풍속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일부 지역에는 산림 속에 패거리로 모여 살며 방랑 도적 사상과 유민 습성을 지닌 녹림무장이 존재했다. 이와 같은 특수한 지리 환경과 사회 조건은 혁명세력의 존재와 발전에 유리했지만 극복하기 힘든 문제들도 많았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563/914


 중국의 실정에 맞는 토지혁명의 노선과 정책은 토지제도 변혁을 실천하는 도중 형성되어 발전했다. 당의 8.7회의는 혁명 투쟁 시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토지혁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토지혁명의 방법과 실행에 관해서는 확실한 대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p570)... 농민문제는 주로 토지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중국 사회 각 계급 및 그 정치대표들의 태도와 해결 방법은 서로 달랐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576/914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역사>는 하나의 물음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중국공산당은 중국공산혁명을 세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의 과정으로 보았을까, 아니면 그 자체를 완성으로 보았을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유명한 말처럼, 중소 분쟁(中蘇 紛爭)이후 쓰여진 <중국공산당역사> 안에서 당시의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생각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국제공산당은 국제관계가 자본주의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의 대립이라는 공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련과 중국 혁명을 일제히 반대하는 것에 대한 일치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반면 중일 민족간의 갈등, 제국주의 국가 간의 갈등이 심화된 것은 소홀히 했다. 그러므로 일본이 중국 둥베이를 침략해 점령한 것은 중국의 근로대중과 중국 혁명을 반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반러전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에 일본 제국주의를 포함한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할 것을 요구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681/914


 중화민족의 생사존망이 갈릴지도 모르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이 당면한 가장 긴박한 과제는, 바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 내며 가급적 많은 세력과 연합하여 항일민족전쟁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여 제때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국제공산당의 전략 전술 전환점과 직결된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803/914


 그렇지만,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이름으로 만주와 내몽골 일대에서 일본과 치열하게 싸우던 다른 민족의 공산주의자들 모두가 <중국공산당역사>에 강조되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에 동의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자들, 또 다른 정도의 세계공산주의자들이 당시 공산당이라는 집단 안에 공존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들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같은 시대 안에서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정확한 실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의 역사 서술은 후대의 승자인 마오쩌둥(毛澤東, 1893 ~ 1976)의 사상 중심으로 기술되는 결정론적인 역사 흐름을 보인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부분은 한계점이라 생각한다.


 조선의 공산주의자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建), 김책(金策) 등은 '9.18'사변이 일어난 후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 항일구국투쟁에 참가했다. 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동지들과 함께 항일무장을 조직하고 영도했으며 중국의 둥베이와 조선 경내에서 처절한 투쟁을 했다. 그들은 중국의 동지들과 일치단결하여 같이 싸우면서 중국 인민과 조선 인민의 해방을 위해 중차대한 기여를 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843/914


 아직 <중국공산당역사>를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제1권 상을 통해 중국공산당이 바라보는 관점을 짐작하게 된다. 후대의 결과로부터 이전의 원인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역사관에 대해 다소 불편함을 갖게 되지만, 이러한 불편함 안에서 오늘날 중국의 중화주의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함께 갖게 된다.. 제1권 하로 넘어가기 전에 <실천론>과 <모순론>은 미리 점검하고 넘어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실천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에 치중하여 당내에 장기간 존재해 온 주관주의, 특히 교조주의를 철저히 비판했다. 더불어 중국 혁명사업에 끼친 해악을 폭로했다. <실천론>은 인류의 생산 실천, 계급투쟁 실천, 특히 중국 혁명투쟁의 구체적 실천에 근거한다. 그리하여 사회적 실천에 대한 인식의 의존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은 "실천을 첫 자리에 놓았다"고 지적했다. _ p882/914

<모순론>은 유물 변증법의 가장 근본적 법칙인 대립통일의 법칙을 전면적으로 논술했다. 마오쩌둥은 자연계와 인류사회의 모든 사물이 운동 발전하는 내재적 법칙에 근거를 두었다. 그리고 북벌전쟁과 토지혁명 전쟁에서의 두 차례의 승리, 두 차례의 실패 경험과 교훈을 결부시켰다. 그리하여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 주요한 모순과 모순의 주요한 측면, 모순의 여러 측면의 동일성과 투쟁성, 모순에서 저항이 차지하는 지위 등 문제들을 일일이 논술했다._ p883/914

<실천론>과 <모순론> , 이 두 편의 저작은 변증법적 인식론과 유물 변증법의 핵심으로 하는 대립통일법칙에 대해 체계적이고 철저한 탐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무산계급의 세계관, 인식론과 방법론을 괗가적으로 논술한 것이다. 이 두 편의 저작은 더없이 험난한 중국 혁명투쟁의 실천 경험에 대한 철학적인 개괄이다._ p88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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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문예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은 영감과 지침을 얻고자 고대 로마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황제가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위계질서를 둘러싼 믿음을 고대 로마의 유산으로부터 차용했다. 그들이 보기에 황제의 임무는 여러 통치자들을 중재하고 평화의 치세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는 그 터무니없는 학술적 행위에 가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왕들과 바보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평하며 보편 군주는 보편 폭군일 것이라고 예견했다. "만인의 적이고, 만인이 그의 적들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에라스뮈스가 두려워한 "세계 군주국"을 실현할 뻔했다.

그럼에도 항목별로 배열되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19세기와 20세기까지 지속된 합스부르크 가문 치세의 특징이 엿보인다. 제국의 각 부분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정부, 법률, 귀족, 명문가,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 부분은 통치자 개인에 의해서만 한데 모인, 거의 독립적인 나라들이었다. 각 부분 간의 거리를 감안하면 이러한 부조화 현상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었지만, 서로 큰 차이점이 있는 여러 민족들이 부재하는 주권자에 의한 지배를 감수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적 정책의 소산이기도 했다.

몇 개의 왕국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들조차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구성 요소들의 특이성이 차츰 희박해져 원래의 독자적 성격과 제도가 사라지면서 지방보다 중앙으로 저울추가 기울기 마련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 목표를 결코 이루지 못했다. 사실, 짧은 막간을 제외하면,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18세기와 19세기에 행정 및 법률 기관을 일부 통합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는 주권자가 무한한 권력을 지닌 초超군주가 아니라 각 영토의 영주에 불과한 듯이 통치되었다.

문제는 신성 로마 제국에 각 영토 및 도시의 권리와 자유를 지켜줄 정부가 없다는 점이었다. 제국에는 중앙 행정 기관이 없었고, 정기적인 세입도 없었으며, 수도도, 통치자가 위임한 법을 집행하는 법원의 위계 구조도 없었다. 권력의 향방은 대영주들과 대제후들에게 달려 있었는데, "로마인의 왕"을 군주로 선출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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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생각보다 우리 자신이나 외부 영향으로 쉽게 조작되고 왜곡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잘못된 정보, 상상, 반복의 적절한 조합으로 피험자의 70퍼센트에게 가짜 기억, 심지어 범죄에 대한 기억도 심어줄 수 있다. 이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결과는 과거에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기억을 조작하는 게 생각만큼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기억의 기능이란 미래에 비슷한 상황을 예측함으로써 그런 상황이 왔을 때 빠르고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는 적당히 비슷한 정보를 더 유사한 패턴으로 만들어 종합하고(패턴 완성pattern completion), 일부 정보만으로도 기억 전체를 인출할 수 있게 되어 있다.8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기억 메커니즘이 많은 양의 정보를 정리해주어 개념들 간의 인지적 매핑cognitive mapping까지 가능하게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오류가 일어날 수 있다. 점차 기억이 선명해지기 때문에 기억의 정확성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을 때와 달리 계속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기억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장면이 2년 전 상상의 산물인 줄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말이다. 우리는 매일 이런 오류를 저지르며 살고 있다.

점사와 해설의 문장은 그 같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사용하는 용어들의 성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점사의 용어(울고, 웃고, 이기고)가 구체적이라면, 해설의 용어(중도로써, 말이)는 추상적이다. 점사는 그야말로 점占의 기록이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 사고를 묘사한다.

하물며 주역이랴. ‘변화의 책’을 변화로서 대하는 세태를 소망할 뿐이다. 주역의 마인드로 주역을 대하는 것, 그게 굴리우지 않고, 굴리는 방법이다. 구태의연의 늪에 빠진 고래古來의 텍스트를 되살리는 길이다

누구에게 명성, 돈, 지위가 배분되어야 할까? 이는 곧 사회정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 과학자가 직장을 구하고 연구비를 따고 승진을 하는 데 논문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부당한 방법으로 저자의 지위를 얻는 것은 사회 질서와 공정의 문제를 크게 훼손시키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이 문제는 곧 과학의 의미나 과학과 사회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로도 확장될 수 있다.

두 의식 이론이 어떻게 경쟁할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두 이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들이 예측하는 의식적 경험이 만들어지는 위치다. GWT는 의식적 경험을 만드는 작업공간이 뇌의 앞부분인 전두엽이라고 예측한다. 반면 IIT는 감각 정보가 입력될 때 인지네트워크에서 형성되는 통합 정보가 곧 의식적 경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뇌의 연결 구조로 볼 때 정보의 흐름과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후두부에서 의식적 경험이 만들어진다고 예측한다.

또 하나의 큰 차이점은 인공적으로 의식적 경험을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다. GWT는 의식적 경험을 야기하는 동일한 형태의 계산 과정을 정확히 구현하면 컴퓨터나 인공지능도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예상한다. 반면 IIT는 아무리 정교하게 계산 과정을 재구성한다고 해도 현재의 반도체칩과 회로에 기반한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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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11-25 1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짓말도 자꾸 하다 보면 거짓말이 아니고 참말로 안다잖아요.
실제로 기억은 많이 왜곡되기 일쑤인데 조작하는 것도 가능해지겠죠.
안 좋은 기억을 지워 주는 기계?의 출연도 가능할 듯요. 벌써 있는지도...
과학이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다줄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11-25 13:22   좋아요 1 | URL
페크님 말씀처럼 과학이 발전하면서 놀라움과 함께 경계심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과학의 발전이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닌 윤리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페크님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
 
황금의 샘 1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1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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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에 관한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전략상의 우위를 지키려면 석유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었다(p237)... "석유는 석탄과 달리 품질이 저하되는 일이 없습니다. 막대한 양을 지하 창고에 저장할 수 있어 화재, 폭격, 방화로 인한파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또한 수에즈 동부의 석유는 석탄보다 저렴합니다... 화물 증기선은 내연 추진 방식에 의해 연료를 78% 절감할 수 있고 화물 적재공간을 30% 늘릴 수 있소. 또한 화부 火夫와 기술자를 줄일 수 있소. 석유를 이용하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 분명하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238


 대니얼 예긴(Daniel Yergin, 1947 ~ )의 <황금의 샘 The Prize>은 19세기 말 영국, 석탄,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패권이 20세기 미국, 석유, 에너지 혁명으로 대체되는 역사를 다룬다. 그 중에서도 1권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시기를 다루면서 대체에너지로서의 석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석유와 등유 램프는 미국인의 생활양식을 바꿔놓았다. 동부의 도시에 살든, 중서부의 농촌에 살든 사람들은 잡화상이나 약국에서 등유를 구입했다. 도매업자들은 소매상에 등유를 공급했고, 대부분의 도매업자들은 스탠더드오일에서 등유를 공급받았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74


 <황금의 샘>의 시작은 오늘날 대표적인 유종인 휘발유(揮發油)가 아닌 등유(燈油)이며, 슈퍼메이저(Supermajor)라 불리우는 대기업 대신 이들의 부모에 해당하는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로 시작된다.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용도로 활용된 석유(등유)는 전기에 밀려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지만, 진정으로 석유를 20세기의 상품으로 만든 것은 휘발유였다. 새로운 운송수단으로서 자동차의 등장은 휘발유의 수요를 촉진시키면서 정유산업의 판도는 완전히 새롭게 바뀌게 된다.


 사람들에게 전기는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력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석유산업을 위협했고 특히 '올드 하우스'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조명 시장이 석유 수요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해갈 무렵, 서유의 새로운 시장이 나타났다. 일명 '말 없이 달리는 마차'라 불린 자동차의 출현이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120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기 전, 휘발유는 석유제품 중 가장 변변치 못한 것이었다. 용제와 난로의 연료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1892년 석유산업계는 휘발유를 갤런당 2센트에라도 팔 수 있는 것을 자축할 정도였다. 휘발유 가격을 이 정도 받게 된 것도 자동차의 출현 덕분이었다. 석유산업은 휘발유 시장뿐 아니라 공장, 기차, 선박 등에서 사용되는 보일러용 연료 소비 증가로 또 하나의 시장을 갖게 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121


 이와 함께, <황금의 샘1>에서는 정유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다툼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한다. 존 D.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가 설립한 스탠더드 오일은 반트러스트법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석유 메이저의 상당수가 스탠더드 오일의 후신임을 확인하게 된다. 지난 1999년 이루어진 엑슨-모빌의 합병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스탠더드 오일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일환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과거 스탠더드 오일을 해체할 정도로 강력했던 미국의 반트러스트법(반독점법)이 현재의 마이크로소프트사, 구글 등 이른바 빅테크 기업의 정보독점에 대해 유달리 관대해진 부분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봄직하다.


 1911년 7월 말, 드디어 스탠더드오일은 회사 해체를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스탠더드오일은 몇 개의 사업 주체로 분할되었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지주회사였던 뉴저지 스탠더드오일로, 총 순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이것은 나중에 엑슨 Exxon이 되어 계속 주도권을 행사했다. 두 번째로 큰 것이 순자산의 9%를 보유한 뉴욕 스탠더드오일로, 나중에 모빌 Mobile이 되었다. 캘리프니아 스탠더드올인은 쉐브론 Chevron이 되었고, 오하이오 스탠더드오일은 소하이오 Sohio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영국 석유 British Petroleum,BP의 미국 판매회사가 되었다. 또한 인디애나 스탠더드는 아모코 Amoco가 되었고, 콘티넨털오일은 코노코 Conoco가 되었으며, 애틀랜틱은 아르코 ARCO의 일부가 되었다가 훗날 선 Sun사에 흡수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167


 마지막으로 우리는 <황금의 샘 1>을 통해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우는 중동문제를 기원을 찾을 수 있다. 20세기 초반 영국-독일 간 군함 건조 경쟁이 단순한 대형함 건조가 아닌 석유를 원료로 하는 함정 건조에 있었고, 때문에 석유 산지를 점령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세계 도처에서 이뤄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철도에 의한 전장으로의 병력운송이 승패의 관건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전차, 항공기, 군함 등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거점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자원 거점 확보를 위한 지정학적인 다툼이 그레이트 게임으로부터 시작된  오늘날 중동 문제 임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남방지대에 풍부한 석유, 기타 천연자원, 식료품들로 본토의 자원 부족을 해결하고 경제발전에 활용함으로써 '태평양의 벽'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미국과 영국의 단호한 의지를 꺾고, 전쟁에 지친 그들과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대일본 제국의 수중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전략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563


 영국의 입장에서 전쟁에 필요한 석유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전쟁의 발발은 필요한 석유의 양이 비약적으로 증가함을 의미했다. 이제 의지할 곳이라고는 세계 석유 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미국뿐이었다. 영국 정부와 쉘-멕스 하우스에 있는 석유 관계자들에게는 두 개의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외환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영국에 지불 능력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은 워싱턴에 있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583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석유사를 다룬 <황금의 샘 1>에서는 이처럼 주력 석유제품의 변천, 메이저의 역사, 지정학적 문제 등이 눈에 띈다. 이러한 문제들이 <황금의 샘 2>에서는 보다 강력한 상품으로서의 석유의 위상과 함께 보다 복잡하게 얽혀나갈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수개월 전에 영국 외무부의 지도를 가지고 경계를 확정지었던 것이다. 누가 경계를 결정했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석유 협상의 타결은 이후 '적선협정 赤線協定'이라 불리게 되었다. 페르시아와 쿠웨이트를 제외하면, 중동의 모든 주요 유전이 이 적선 안에 있었다. 합의에 따라, 터키 석유회사의 동업자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서는 이 방대한 지역 내에서 어떤 석유사업도 할 수 없었다. 1914년 외무부 협정에서 만들어진 '자제 조항'이 14년 후 적선 협정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는 미래의 중동 지역 석유 개발을 위한 틀이 되었고, 동시에 향후 수십 년 동안 격심한 갈등의 초점이 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316

스탠더드오일은 소비자를 확보하기 위해 마케팅 분야의 지배를 강화했다. 1880년 중반, 마케팅 분야의 점유율은 정유 부문에 대한 점유율과 거의 일치하는 80%수준이었다... 스탠더드오일은 마케팅의 효율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일련의 혁신을 거듭했다. 부피가 크고, 기름이 잘 샐뿐만 아니라, 다루기 힘들고 비싼 석유통(배럴)을 없애려 노력한 것이다. - P75

베랑제 상원의원은 더욱 달변이었다. 그는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석유는 ‘대지의 피‘이며 결국 ‘승리의 피‘가 되어주었습니다. 독일은 철강과 석탄에 대한 우월성을 과신했고, 상대가 석유에 대해 가진 우월성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석유는 피와 같았으며, 평화를 위해서도 이런 역할을 할 것입니다. - P281

자동차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미국 사회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석유산업의 기본체제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1919년 하루 103만 배럴이었던 미국의 석유 수요는 1929년 258만 배럴로 2.5배 증가했고, 총에너지 소비 중 석유의 비중은 같은 기간 10%에서 25%로 늘어났다. 석유 소비 중에서도 휘발유의 소비 증가가 가장 컸고, 1929년 휘발유와 연료유의 소비는 전체 석유 소비의 85%를 차지했다. 등유의 소비나 생산량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새로운 불빛‘에서 ‘새로운 연료‘로 주용도가 바뀐 것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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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머에 따르면 세이건의 주장은 반증할 수 없는 대상을 지식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반증될 수 있기에 ‘반증 가능성’이 자연의 경험적 대상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반증 가능성은 모순이 있거나 내적 일관성이 부족한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인가? 셔머는 감응적 존재sentient being에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악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악이란 말은 더 깊은 철학적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을 이야기할 수 있다. 전자는 자연재해나 질병 같은 것이며, 후자는 누군가의 나쁜 행동이 초래한 고통 또는 피해와 관련된다. 셔머와 나는 토네이도 같은 대상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재해에 따른 파괴와 죽음은 악이다(비록 셔머는 도덕의 문제를 위하여 ‘악’이라는 용어를 아껴두었지만 말이다.).

내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만약 신이 우주의 창조자라면, 그는 창조의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도덕성은 창조의 속성이므로, 신은 도덕적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즉, 그는 도덕적 존재가 아니다. 내 말의 정확한 의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신이 악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바는 그가 도덕적 유형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나는 신이 선하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신의 선함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이 특정한 행동의 결과라는 점을 거부한다.

물리학자에게 우주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고 여기서 철학적 논쟁을 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관측된다면 존재하는 것이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정의하지 않았다. 그냥 자명하게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철학자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내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했다. 즉, 시공간은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좌표계에 상관없이 같다면(맥스웰 방정식이 옳다면), 뉴턴의 운동법칙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특수상대성이론이 탄생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한 정지 좌표계에서 측정된 시간과 길이가 움직이는 좌표계에서 측정된 시간과 길이와 같지 않다. 이래야 전자기학의 법칙이 좌표계와 상관없이 성립한다

시공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리학은 답할 수 없다. 물리학이 답할 수 있는 것은 측정된 시간과 측정된 거리뿐이고,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시공간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과 거리가 변한다는 말 대신 시공간이 변형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좌표계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속도가 변하는 모든 좌표계를 대상으로 한다. 이런 좌표계를 가속 좌표계accelerating coordinate system라고 한다.

지능의 잃어버린 유전율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효과가 작거나 빈도가 낮은 지능과 연관된 변이들을 찾아낼 수 있는 통계적인 힘이 필요했다. 그 힘은 지능을 계측한 수십 만명의 유전체 정보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다

지능에 대한 유전학의 새로운 발견은 우리에게 불편하면서도 복잡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지능은 ‘어느 정도’ 유전이 된다. 하지만 지능에 연관된 변이는 매우 많으며 각각의 효과는 대부분 아주 작다. 즉, 물려 받으면 무조건 높은 지능을 부여받는 그런 ‘천재 유전 변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우선 지능의 유전율은 100%가 아니라 절반 정도이다. 즉, 지능 차이의 상당 부분은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더 중요한 점은 유전율과 유전 변이의 효과 또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현재 아는 생명체 탄생의 핵심 조건은 액체 상태인 물의 존재 여부다. 그 결과 물이 있는 행성이 얼마나 있느냐를 가늠하는 것이 n
e
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렇듯 n
e
에서 말하는 별, 행성, 생명체 등의 의미가 계속 변하고 있다.

서양 학문의 전통에서 감각 경험은 이성에 비해 상당히 오랫동안 외면되어 왔는데, 감각 중에서도 미각은 가장 원초적이고 저속한 것으로 여겼다. 특히 일반 원리를 찾기에 맛은 너무나도 주관적이어서 도저히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질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미각은 과학의 영역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지난 50년 동안 액상 과당high-fructose corn syrup은 전례 없을 정도로 음식에 스며들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옥수수 재배가 크게 늘어나는 농업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시기부터 미국인의 비만 및 대사 질환도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역학적 변화에는 액상 과당의 소비량 증가가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52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 몸이 다량의 과당에 노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과당을 처리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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