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문예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은 영감과 지침을 얻고자 고대 로마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황제가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위계질서를 둘러싼 믿음을 고대 로마의 유산으로부터 차용했다. 그들이 보기에 황제의 임무는 여러 통치자들을 중재하고 평화의 치세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는 그 터무니없는 학술적 행위에 가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왕들과 바보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평하며 보편 군주는 보편 폭군일 것이라고 예견했다. "만인의 적이고, 만인이 그의 적들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에라스뮈스가 두려워한 "세계 군주국"을 실현할 뻔했다.

그럼에도 항목별로 배열되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19세기와 20세기까지 지속된 합스부르크 가문 치세의 특징이 엿보인다. 제국의 각 부분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정부, 법률, 귀족, 명문가,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 부분은 통치자 개인에 의해서만 한데 모인, 거의 독립적인 나라들이었다. 각 부분 간의 거리를 감안하면 이러한 부조화 현상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었지만, 서로 큰 차이점이 있는 여러 민족들이 부재하는 주권자에 의한 지배를 감수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적 정책의 소산이기도 했다.

몇 개의 왕국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들조차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구성 요소들의 특이성이 차츰 희박해져 원래의 독자적 성격과 제도가 사라지면서 지방보다 중앙으로 저울추가 기울기 마련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 목표를 결코 이루지 못했다. 사실, 짧은 막간을 제외하면,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18세기와 19세기에 행정 및 법률 기관을 일부 통합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는 주권자가 무한한 권력을 지닌 초超군주가 아니라 각 영토의 영주에 불과한 듯이 통치되었다.

문제는 신성 로마 제국에 각 영토 및 도시의 권리와 자유를 지켜줄 정부가 없다는 점이었다. 제국에는 중앙 행정 기관이 없었고, 정기적인 세입도 없었으며, 수도도, 통치자가 위임한 법을 집행하는 법원의 위계 구조도 없었다. 권력의 향방은 대영주들과 대제후들에게 달려 있었는데, "로마인의 왕"을 군주로 선출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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