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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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9 저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내 사람은 아픈 걸 싫어한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도 질색한다. 그게 인간의 디폴트 값인가? 폭력이 대물림된 가정에서 자라나면 그런 것마저 헷갈린다.
나는 일부러 아프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다른 감각에서는 극도로 예민한데, 고통에는 둔감한 편이다. 몸의 이상은 감지했는데 덤덤한 태도를 보여서 진단이 늦어진 적도 있다. 배가 아픈데 참을만 하다고 했더니 의원에서 장염약을 지어주었다. 그날 저녁 응급실에서 CT를 찍어보니 충수돌기염이었다. 발목 인대가 파열된 걸 모르고 참고 걸어간 의원에서는 몇 번 눌러보고는 발목 염좌로 가볍게 진단했다. 두 달 후에 조금 더 큰 병원에서 MRI찍어보고나서야 인대가 끊어진 것을 알았다.

폭력과 학대를 겪은 사람 중 많은 수는 사랑, 지배, 굴종이 뒤섞여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랑의 범위를 넓히고 넓히다보면, 모두가 사랑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소설 속 두 인물은 각자 사랑이라 이름 붙인 게 너무도 어긋나서 마음이든 몸이든 좀 많이 망가진다.

심한 압력, 구속, 집착, 폭력으로 자신을 양육(사육)한 어머니에 대해, 에리카는 분리되고 싶은 욕구와 얼른 다시 함께 하고픈 마음이 혼란스럽게 교차한다. 그런 성향은 겨우 상호작용을 하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도 상대가 고통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하고 싶은 욕망과,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에리카의 이중적 심정으로 이어진다.

에리카가 긴 편지에 목록처럼 열거한 행위들에 충격을 받은 클레머의 전환은 조금 과장되었다 싶었다. 너무 자신만만한 나르시시스트였던 클레머는 에리카를 가벼운 연애 상대로 삼고자 했다. 원체 여성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긴 했지만,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자신에게 요구한 것들이 터무니없어서 분노로 반쯤 미쳐 공격적이 되고 결국 에리카에게 해를 입힌다. 여자를 패고 강간하고 그 이전에도 자신이 지은 틀 속에 여자를 우겨넣으려 했던 클래머가 엄청 나쁜 놈은 맞는데, 후반부의 폭력성을 드러내려고 너무 순식간에 인물 하나를 망쳐 놓았다 싶었다. 원래 좀 그런 놈인데 백지 같은 놈이 그런 거에도 영향을 받았다, 하기엔 인간이 그렇게 얄팍하진 않은 것 같다.
1983년도에 이 책이 나올 무렵 사회가 지금보다는 더 보수적이었다면 그런 특수한(?) 성애표현에 대해 논란이 있었을 법하다. 그렇지만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 온갖 괴상한 성벽을 맞춰주는 음란물들이 검색어나 해쉬태그로 간단하게 접속된다. 그래서 현대의 독자들은 그 부분에서 저 정도로 왜? 하고 무감해질 것 같다. 그게 아니라 하면 나란 인간이 사드를 너무 읽었나 보다. 사드는 타격도 주고 단련도 주었음이 입증되었다.

아주 어릴 때, 유대인이 나오는 ‘피아니스트’와 헷갈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를 봤다. 그때는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액이 묻은 휴지를 집어 올려 냄새를 맡고, 자기 몸을 면도날로 상처 내거나 칼로 찌르는 장면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소설과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 다시 확인해보고 싶긴 하지만, 또 확인하기 싫기도 하다. 더럽게 지루하고 재미없었다는 기억이 슬쩍 올라왔기 때문이다. 나마저 이중적이 되게 하는 이 서사...

장황하고 반복적인 서술, 심리와 장면에 대한 비유, 그런게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장식인가 싶다. 한 상황에 대한 표현의 밀도가 제법 높고 집요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제목에 피아노 들어가고 레슨 받거나 연주회 연습하는 장면도 제법 등장하는데 쓰다보니 피아노 얘기는 하나도 안했다. 피아노는 두 사람이 이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가르침과 배움, 위계관계, 이런 것들이 연애 감정과 뒤얽히게 되니 비극이 되었다. 나는 비극과 고통 받는 인물이 나오는 서사를 선호하긴 하는데 남들은 충격받는다는, 뒤표지와 띠지의 호들갑에 비해 소설을 너무 덤덤하게 읽어버려서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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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가정에서 만장일치로 공인된 이 어머니라는 지위는 종교재판장의 심문권과 총살집행자의 명령권을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6, 처음부터 세다. 패드립의 기미가 느껴진다. 기대대로 에리카는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뭉텅이로 머리카락을 뽑아 놓는다.)

-에리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한 번도 무엇인가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비에 젖은 마분지 조각처럼 무감각하다. (96, 슬픈 세 문장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늙어가는 육체의 감옥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녀는 이 쇠창살들을 줄칼로 잘라내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99, 휘어지는 창살이면 좋을 텐데.)

-그녀의 취미는 자신의 몸을 자르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스스로를 자신에게 완전히 내맡기고 있는 셈인데, 다른 사람에게 내맡겨진 것보다는 어쨌든 이편이 훨씬 나은 법이다. 자신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자기 손의 감각에 따르면 되니까 말이다. (110, 자르지 마…)

-죽는 건 돈은 안 들지만, 삶을 지불해야 되고, 모든 것은 하나의 끝이 있지만 소시지만은 양쪽 끝이 있다고 말하면서 남을 잘 돕는 이 도축업자는 요란하게 웃는다. (122, 아버지이자 남편을 요양원에 데려다 놓고 온 모녀에게조차 유쾌한 푸줏간 주인)

-세련하다:서투르거나 어색한 데가 없이 능숙하고 미끈하게 갈고닦다. (124, ‘세련시키고’란 표현이 있어 찾아보니 동사도 있긴 했다.)

-그러나 더이상 매를 들기를 꺼리기는 하지만 에리카의 어머니는 거머리처럼 균을 감염시키면서 우엉뿌리처럼 에리카에게 달라붙어 있다. 어머니는 에리카의 골수를 빨아들인다. (125, 악!)

-그렇지만 그가 남자라는 점은 에리카가 그보다 십 년 연상이라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든다. 게다가 여성의 가치는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지적 능력이 뛰어날수록 떨어진다. (203,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데서 초점 화자가 장면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듯도 하고, 전지적시점인 것도 같은데 이게 발터 클레머의 생각(아마도 이게 맞음)인지 작가의 생각인지 구분 안 되게 쓴 부분이 생각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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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삶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3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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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7 저자: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이제 영화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똥 먹은 입술로 이마에 키스를 하자 입술 자국이 남았던 것만 자국처럼 남았다. ‘소돔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를 두 번 읽고, 악명 높은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까지 보고, 이제 파솔리니의 ’폭력적인 삶‘까지 읽었으니 이런 완전체가 어디 있나, 있으면 나랑 친구하자.

거의 500쪽 가까이 되는 소설에는 빈민가 사람들의 지긋지긋한 생활과 비행과 죽음이 반복된다. 중심 화자인 톰마소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친구들이 노는 데에 잘 끼지도 못하고, 돈 벌려고 동성애자들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친구들과 차량 강도짓을 하고, 싸우던 사람 배에 칼침을 놓고 감옥에서 2년 살고 나오고, 창녀를 깨물고 핸드백을 빼앗아 돈을 챙기고, 여자친구 이레네를 교제 강간 시도하다 잘 안 되니까 여자 탓을 하며 뺨을 때리기도 한다. 일말의 연민을 품기에도 글러먹은 놈이었다.

결핵에 걸려 요양병원에 수용되었다가 간호사와 환자들의 파업, 단체 행동에 휘말려 병원을 나온 뒤 공산당에 가입하고, 수재로 판자집이 모두 물과 진창에 휩쓸리는 상황에서 소방 대원들을 대신해 고립된 여자를 구한 정도가 그나마 톰마소가 공동체에 공헌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여마저 자신의 어떤 신념에서 나온 게 아니라 누가 부탁하는 데에 떠밀려서, 어쩌다보니, 가오잡다가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남의 생명을 구한 대가로 톰마소는 폐결핵이 악화되어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잘 가, 톰마소.‘(494) 하는 마무리는 작가가 톰마소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는 건지, 인사하는 게 본인인지 주변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다.

우중충한 책을 꾸역꾸역 읽었다. 진흙 구정물 같은 로마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1959년에 발표한 이 소설이 별 감흥도 없고, 소재만큼 지겹고, 공감하거나 애착이 가는 인간이 하나도 안 나온다고 하면 나는 인민의 적인가. 젊을 때까지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말 밑바닥 가난함과 희망 없음을 겪거나 직접 마주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저, ’살로, 소돔의 120일’ 감독이 소설도 썼대, 하는 이야기를 안 들었다면 이 책을 안 봤을 것이다.

감독의 죽음도 톰마소처럼 어처구니 없고 급작스러웠다. 책에서는 그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지만, 영화를 찍고 얼마 되지 않아 그와 관계 깊던 소년들 중 하나가 작가를 죽였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다.(이 구절에 대해 AI는 사실 관계가 정확하지 않으므로 논란이 있다, 정도로 고치라고 한다. 어쩌냐 이미 죽어서 상황을 말해 줄 수 없는 걸.) 어떻게 살았냐가 더 중하겠지만 어떻게 죽었냐가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억하고 판단하는데 영향을 많이 주는 것 같다. 모든 이야기의 끝은 누구든 하나 이상 죽음, 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의 마지막이 어떨지 조금 궁금하지만 내가 내 끝을 알고 적어둘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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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두 형편없는 족속들이었다. 누가 그에게 좌파가 돼라 우파가 돼라, 이쪽이다 저쪽이다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유 시민이고 무정부주의자다. 그것으로 됐다. (222, 톰마소가 그런 사람이라는데. 나도 저렇게 찌질해보이면 안 되는데,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기웃대는 저 인간을 보면서 문득 걱정이 되는 것이다. 저런 톰마소도 이레네랑 성당에서 결혼하려고 자유기독당에 가입하려다가 병원 투쟁에 얽힌 뒤 공산당에 가입한다.)

-톰마소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그는 쓰레기와 진창과 배설물 들이 주변에 널려 있고 양철과 방수포로 지붕을 덮은 판잣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드디어 지금 벽이 아름답게 칠해져 있고 계단에는 완벽하게 마무리된 난간이 쳐져 있는 호화롭기까지 한 건물에 살게 된 것이다. (272, 나는 벽지에 곰팡이 안 피는 집 살게 된 때가 좋았다.)

-그들은 담배 연기에 찌든 더러운 옷가지에서 풍기는 악취 때문에 모두 총 맞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410, 알고 싶지 않은 냄새)

-전에도 별거 없었다. 오막살이 몇 채, 녹슨 지붕 몇 개, 누더기 조금이 다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마저도 부서지고 흙탕물에 휩쓸려 강으로 떠내려갔다. (481, 돌아가신 할머니댁도 내가 어릴 때 수해로 침수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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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이 떠난 거리 - 코로나 시대의 뉴욕 풍경
빌 헤이스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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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1 저자: 빌 헤이스.


스스럼없이 모여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걸 한다. 치킨과 함께 술을 마시든, 음악을 틀어놓고 땀에 푹 절어 운동을 하든, 원탁에 둘러앉아 회의를 하든.
아픈 사람의 동선이 낱낱이 밝혀지는 일은 없다. 집에서 나왔다고 경찰에 잡혀가지 않는다. 감히 코인노래방이나 헬스장에 갔다고, 정말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미어터지는 지하철,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다들 휴대전화를 들고 각자의 세상에 빠져 있다. 아직도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대부분의 얼굴을 구경할 수 있다.
마스크를 사려고 줄을 설 필요가 없다. 이미 평생 쓰고도 남을 양이 집안 곳곳에 처박혀 있다. 초기에 나온 줄서서 사던 마스크들은 이걸 결국 쓰게 될까 싶게 모양도 안 예쁘고 숨도 더 답답하고 너무 커서 효과가 있을까 싶은데도 못 버리고 가지고 있다.
다들 손을 덜 씻는 것 같다. 손세정제를 일부러 쓰는 사람도 잘 없다. 문고리나 난간을 매일 소독제 묻은 직물로 문지르는 사람도 아마도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을 받은 아이들은 하루 이틀 정도 쉬고 열이 떨어지면 다음 날 조금 안 좋은 컨디션으로 등교를 한다. 마스크를 쓰는 아이도 있고 안 쓰고서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이도 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축구와 농구를 하고, 서로 들러붙어 장난을 친다.

대부분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없었던 날들을 잊은 것 같다.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일상을 누리고 살아간다. 불안과 공포는 모두 휘발되었다. 어떤 것들은 잊어야 살아진다. 바이러스는 도처에 가지가지가 있다. 무뎌지고 무던해진다. 코로나19 감염으로 가까운 사람을 잃었거나 일자리를 잃었거나 건강을 해친 사람들은 남들보다는 더 그때를 떠올릴 수는 있겠다.

그때의 나는. 불안과 무력감, 때론 공포. 그렇지만 인구밀도가 순식간에 낮아진 도시를 거니는 편안함이 공존했다. 가족 중 한 명이 확진이라는 연락을 받는 순간, 부랴부랴 짐을 싸서 독서실을 나오던 생각이 난다. 나중에 걸린 독감이 더 아팠던 것 같긴 하지만, 코로나19도 지독하게 아팠다. 왜인지 골반과 엉치뼈가 제일 아팠다. 냄새를 덜 맡게 된 건 예민한 나에게는 오히려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걸렸구나, 마침내. 이미 대유행 3년차에 접어들던 때라 백신도 마스크도 큰 소용 없이 한 번쯤은 걸리고야 마는 병이려니 했다.

십수년 전 이야기 떠올리듯 꺼낸 기억들이지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읽는 빌 헤이스의 책은 6년 전 코로나19 시대의 뉴욕을 기록한 책이다. 빌은 사람과 차로 붐비던 뉴욕의 거리가 몇 달 만에 텅 빈 모습을 전후 사진으로 대조하듯 찍어 놓았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걸 글로 쓰던 빌은 처음에는 답답했을 것 같다. 그러나 텅 빈 도시를 돌며 아직 있던 자리에 남아 나름대로 고안한 방식으로 책과 음식을 파는 사람들, 운동하는 군인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과 멀찍이나마 만나고, 문 닫은 곳곳을 사진과 글로 남겨 놓았다.

비슷한 일이 생기면 다들 조금은 더 침착할 수 있을까. 같은 방식으로 대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도 혐오와 탓하기는 남아 있겠다. 걸린 그들과 걸리지 않은 우리, 말 안 듣는 그들과 규칙을 준수하는 우리로 사람 사이를 긋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모두에게 같은 펜데믹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폭락했던 주식을 주워 담아 늘어난 유동성과 함께 부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굴뚝의 연기로 사라졌다. 빌은 최대한 다정한 도시 사람들을 추려 담아 놓았지만, 나는 겁에 질려 아무나 미워하던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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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쓰는 거야-지적으로, 창조적으로, 비판적으로, 생각을 불러일으키도록-지금 이 시대에 사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서. (31, 빌에게 올리버가 건넨 말.)

-우울증에 대해서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사항은 우울증을 ‘하나의 우울함’으로, 마치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인 것으로 다루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어쩌면 평생-에 걸쳐 형성된 많은 부분들-비탄, 트라우마, 학대, 고립, 거부, 억울함, 돈 걱정, 경력 후퇴 등등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두드러지는 단 한 부분에라도 초점을 맞출 수 있고 그걸 분리해낼 수 있다면-그래서 그 안에 들어 있던 진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그동안 지고 있던 짐은 현저히 가벼워진다. (54, 이 년 반 째 한 주에 한 번 상담을 받다가 코로나로 인해 줌 상담을 받게 된 빌의 말.)

-그리고 이 강요된 고독과 고요 속에서, 너는 때때로 네 생애의 어떤 순간들을 돌이켜보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말해진 것들과 말하지 않은 것들, 행해진 것들과 행하지 않은 것들, 표현된 사랑과 표현되지 않은 사랑, 네가 받은 그 모든 감사한 일들, 네가 느낀 그 모든 감사함. (88, 외로움과 고요가 공존하던 시절. 불안과 두려움도.)

-“안녕.”
“안녕.”
“당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인 것 같아.”
“아냐, 안 잃어버렸어. 난 여기 있어.” 내가 말한다. (118)

-이 도시는 너무나 밀도가 높고, 너무나 긴장되어 있고, 너무나 촘촘하고, 너무나 스트레스가 심하고, 너무나 더럽고, 너무나 다양하고, 외부와의 접촉면이 너무나 거칠고, 다들 자신의 감정을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내서, 이따금씩 낯선 사람의 도움을 얻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154, 내가 사는 곳이 뉴욕인 줄 몰랐다.)

-“해봐. 내 나이가 되면 내가 한 일 때문에 후회하진 않아. 안 한 것들 때문에 하게 되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범죄자야.”
나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 말 기억할게요. 늙은 범죄자.” (200-201, 나이 차 많은 게이 커플의 다정한 대화.)

-이 망할 놈의 산 너머에는 과연 뭐가 있는지 보고 싶다. (204, 이 독후감의 전반부를 참조하세요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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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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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6 저자:박완서.


박완서 단편소설집 3권은 1979년부터 1983년까지의 발표작을 모아 놓았다.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의 작가가 그린 소묘에는 그보다 젊은 30대 언저리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가 읽기에 퍽 재미있었다. 경제 성장기의 부유층들의 속물성이 자주 나오고, 일하는 여성은 자립에 대한 자부심을, 대부분 가정에 종속된 여성들은 공허와 지겨움과 알 수 없는 불안과 바깥 세상에 대한 끌림을 보여준다. 중년의 글이다 보니 늙음도 화두가 되었는지, 불쌍하거나 지독스러운 할머니들도 많이 나온다. 남자 화자가 나오는 소설도 제법 있었는데, 과거에 스쳐간 인물의 죽음 근처를 지켜보는 이야기가 여럿이었다.

에스엔에스에는 그 사람의 가장 즐거운 순간, 이색적인 먹거리, 차려입고 한껏 꾸민 모습이 양지에 드러난다. 반대로 온갖 시궁창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음지 방송이라고 망가진 자신의 삶과 밑바닥까지 떨어진 존엄성을 보여주며 관심과 돈을 받는다. 지금 삶들을 바라볼 구멍은 그렇게 극단적인 것들이 많다. 이 소설집의 소설들처럼 그 중간 어딘가에서 행복을 의심하고 번민하는 이야기는 역시 문학뿐일까, 그런데 최근 한국 문학을 잘 안 보게 되어서 나는 이 시대도 잘 못 알아보겠다. 그냥 어딜가도 들리고 보이는 건 에이아이요. 이야이야오.

에이아이 역량 강화 연수라는 걸 필수 참여라고 해서 참석했다. 젊고 부지런한 강사 선생님은 게으르고, 새로운게 벌써부터 두렵고, 귀찮은 나같은 인간한테 세상에는 당신이 모르는 이런 도구들로 성능 좋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고 알려주었다. 신기한 것도 있고, 벌써 써먹고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만 잘 모르던 게 대부분이었다. 도구는 알았으니 써 먹기는 내 몫일텐데, 누구 말대로 나이 들면 머리가 굳고 유연성이 떨어지고 그야말로 꼰대가 되어서 새로운 게 어렵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이제 더는 어리지가 않다.

뜬금없는 여러 어린 아이들이 사탕, 볼펜, 키링과 위로 편지 겸 반성문 같은 걸 줄줄이 들고 와서 당황했다. 아이들은 고맙고 착한 말을 꾹꾹 눌러 담아 주었지만, 선생님이 최근에 당한 일을 알아요, 하고 언뜻 비치는 편지글을 읽고는 섬뜩했다. 소문이야 날 수 있는 거지만 상황과 순서가 다르게, 또 사안을 다룬 이들 외에는 자세히 알 수 없을 일들을 아이들이 꺼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수업을 들어간 반 아이들이 뭔가 나를 측은하게 보고 원래는 까불던 애들도 행동을 삼가고 시험이 막 끝났는데도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누구냐. 누가 동네 사람들-하고 다니냐...
당혹감과 불편함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바깥의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 짐작만 할 뿐, 그들의 프레임도 음모도 나는 알 수 없다. 그냥 어쩌다보니 일이 일어나고 그래도 그 공간에서 적당히 버티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소설은 아니지만 적당히 나 사는 꼴을 독후감에도 묻혀 놓고, 책 안 본 날은 잡잡글도 쓰고, 그렇게 남기는 것 말고는 더 할 바를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그게 그런게 아니었다, 할 수도 있고, 그런 일이 있었지 할 수도 있겠다. 저런 걸 썼구나, 하고 흐뭇할 때도 있는데 저게 뭐야 왜 저랬대 이러고 으으으 하면서 덮어버리는 글도 있다. 나의 나중 독자인 나에게 오늘은 이 정도만 남긴다. 기분이 좋은 하루는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시간은 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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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기운만 있어 봬도, 노인네가 옷을 얇게 입으시니까 그렇죠. 화장실만 자주 들락거려도, 노인네가 과식을 하시니까 그렇죠. 질긴 거나 단단한 걸 먹으려 해도, 노인네가 그걸 어떻게 잡수시려고 그래요. 이런 식으로 그 여자는 모든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나하나 간섭받으면서 늙은 여자로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젊은 여자는 아이를 낳았다. 늙은 여자에게 손자가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젊은 여자는 늙은 여자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32, ‘황혼’ 중. 아 이거 불효새끼 나인데, 거울 치료인가…)

-먹는 것이라면 쓴맛이라도 맛이 있어야 하고 썩는 내라도 냄새가 나야 한다. 그러니까 무미무취한 것은 먹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맛은 먹는 게 아닌 걸 먹는 맛이다. (40)

-고려장 이야기는 곧 그 시대의 늙은이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 같은 거였다. (49)

-그러나 늙은 여자는 지금 정말 불쌍한 건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임을 깨닫는다.(51)

-혼자 살 수 있는데도 같이 살고 싶은 남자를 만남으로써 결혼은 비로소 아름다운 선택이 되는 것이지 혼자 살 수가 없어 먹여살려줄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결혼이란 여자에게 있어서 막다른 골목밖에 더 되겠느냐는 게 후남이의 생각이었다. (96,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3’ 중. 3대에 걸친 연작소설의 마지막이었다.)

-후남이는 거듭한 고배로 의식은 더욱 명료해져 눈 아래 거대한 도시, 그 갈피갈피에 여자 길들이기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가 공룡처럼 징그럽게 도사리고 있음까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99, 직장 내 커플의 혼인 후 여성의 퇴사를 종용하며 부부를 진주, 속초로 찢어 발령낸 나쁜 회사가 있었다. 저렇게 지켜내려는 일자리를 나는 왜 온마음으로 밀어내고 있나…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는 예측할 수 없는 변덕으로 개인을 씹었다 삼켰다 뱉었다 하는 집단의 폭력과 개인의 무력에 대해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 어떤 좋은 한때가 전 생애를 덮을 만큼 부풀어오르고, 재차 그것들끼리 결합해서 더 큰 간판이 되고 싶어하는 그 끈덕진 힘은 무엇일까. 배우성씨는 사람들마다의 좋은 한때에 대한 더러운 집착과 집단이란 것의 터무니없는 허구에 대해 이를 갈아붙이고 싶은 건 시늉뿐 어쩔 수 없다는 엄살쪽으로 편안히 기울고 있었다.
(157-158, ‘천변풍경’ 중. 왕년에 잘나갔다는 노인들이 모인 백수회란 단체에 뜬금 없이 가입된 배교수의 생각이다. 나이듦은 못마땅하던 것들에 하나씩 체념하는 건가 싶다.)

-남을 감쪽같이 속이려다가 탄로가 나면 무안하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려다가 탄로가 났을 때처럼 구원의 여지가 전혀 없이 무안하진 않을 것 같았다. (178, ‘천변풍경’ 중. ‘천’의 한자가 내(개울)가 아닌 샘(약수터)이었다는 걸 다 읽고서 알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 새로운 발견에 철저하게 무관심하려 들었다. 관심이 미구에 사랑이나 미움, 동정, 실망, 분노 등 불필요한 정서를 유발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387, ‘무서운 아이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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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웃음소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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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4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서사는 뻔하다. 한 부유한 남자가 어린 여자에 미쳐 부인과 딸을 버려두고 떠났다가 시각을 잃고 목숨까지 잃는다. 한 문장으로 스포일러 끝.

주요 인물
여자에 미친 남자: 알비누스
어린 여자: 마르고트
어린 여자의 전/현 애인 겸 알비누스 친구인 화가: 렉스
여자에 미친 남자의 가족들: 부인 엘리자베스, 가엾은 딸 이르마, 처남 파울

그렇지만 나보코프 선생에게 중요한 건 디테일이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문장을 차곡차곡 쌓고, 나중에 쓸 복선 거리도 던져 놓고, 잠시 등장하는 인물이라도 캐릭터를 갖춰 준다. 끝은 대부분 비극이지만, 그 순간조차 읽는 사람을 웃게 만들려고(해학이든 조소든 냉소든) 밑밥을 열심히 깔아놓는다.

나보코프의 소설 속 인물은 대부분 어리석어서 죽거나 망한다. 그리고 렉스나 마르고트처럼 더 사악한 인간들은 유유히 장면을 빠져나간다. 그래도 이 소설에서 모두 나쁜 인간만 나오는 건 아니다. 눈먼 매형을 구렁텅이에서 끄집어 내는 파울과 패가망신에 눈까지 잃은 전남편을 집에 들여주는 엘리자베스가 있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수도 있었던 알비누스는 너무도 어리석었다. 눈이 안 보이는데도 마르고트를 처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알비누스는 자기 죽을 곳으로, 원래 집으로 제 발로 찾아간다.

어떻게 줄여도 이야기가 후져진다. 나보코프 소설들은 소재만 들으면 그게 뭐야, 하지만 읽어봐야 작가가 열심히 가꾼 구조물을, 길을, 미로를 겪을 수 있다. 최초 발표 당시 제목은 카메라 옵스쿠라, 바늘구멍 사진기였다. 조그만 구멍을 뚫어주고 어둠 상자를 거쳐 거꾸로 된 장면을 보여준다. 뜻을 알고 보면(안 찾아보면 몰라서 탈이지) 이전 제목이 어둠 속의 웃음소리 보다는 나은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네 사람 분의 이불을 빨고 말렸다. 먼지망에 걸린 이부자리 먼지는 평소(회색)와 달리 하얬다. 이불 위로 침구 노즐로 청소기를 돌리면 다른 떄보다 훨씬 곱고 입자가 미세한 먼지가 먼지통에 쌓인다. 아마도 사람과 이불의 구성 물질이던 애들이 서로 비비대다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나는 그걸 그냥 쓰레기봉투에 쏟아 버린다. 어디엔가 그런 먼지들을 모아서 소조를 빚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소설쓰기도 비슷한 것 같다. 먼지야, 하고 망각으로 떨어버리든가, 미친놈처럼 조물딱대다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 모양을 갖춰놓든가. 오늘의 나는 쓰레기봉투 쪽이다.

+밑줄 긋기
-마지막으로 결혼 직전에 베를린에서 못생긴 얼굴에 여위고 따분한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토요일 밤이면 찾아와 자신의 과거를 자세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늘 염병할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 뒤 그의 품에서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자신이 아는 유일한 프랑스어 구절, “그게 인생이죠C‘est la vie˝로 마무리를 하곤 했다. (15, 여기서 긁혀서 알비누스-안 좋은 연애운 열거 중- 개새끼네 하면 내가 진 거야?)

-그녀는 손이 빠른 편이라 두 달이 지나자 열두 개의 방에서 그의 과거의 삶은 완전히 죽었다. (115, 화장실3개라 치고, 주방, 식사실, 거실, 응접실, 이렇게 쳐도 방이 다섯 개는 되는 구나...알비누스 엄청 부자였군.)

-어쩌면 그에게서 유일하게 진짜인 것은 예술, 과학, 정서의 영역에서 창조된 모든 것은 대체로 영리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타고난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74, 그 영역만일까요. 나는 사회 자체가 속임수 같다.)

-그녀를 죽일 수는 있지만, 그녀와 헤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21, 아이고…알비누스야 넌 엘리자베스한테 총 맞아도 할 말 없다.)

-어둠 속에는 빛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꾸불꾸불한 길은 기어다니는 더러운 생물이 사람 피부에 남기는 자취처럼 그의 안에 타올랐다.(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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