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3분 철학 1 : 서양 고대 철학편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1
김재훈.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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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0 김재훈, 서정욱.


한 철학자 이야기마다 3분, 쉽고 간단하게 철학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는 작가가 만화와 요약된 설명으로 철학자들의 사상을 찍먹하게 해주는 만화책이었다. 11명의 이야기를 하루에 다 봤으니 33분 철학인가...싶다가도 사실 그보다는 더 걸려서 읽었지만, 만화라서 후루룩 읽혀서 아 이렇게 읽어도 되는 것인가 했다.

고등학교 때 윤리 시간에 이런저런 사상과 철학자들 소개 훑으면서 잠시 철학과 같은 델 갈까...생각한 적이 잠깐 있다. 잠깐만 생각해서 다행이다. 대학가서 교양이며 전공에서 이런저런 철학과 사상에 대해 배워도, 내 머리로는 체계적으로 정리가 안 된다 싶었으니. 그냥 오 멋있는 생각하네, 말 잘 하네, 얜 말은 잘하는데 내 마음엔 안 드네, 그 정도였다.

어쩌다보니 최근에 읽는 철학 쪽은 고대, 중세, 근대, 현대철학보다 죄 과학철학, 과학윤리 이런 데 조금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런데 읽긴 읽었냐. 아 성소수자 관련 책들 읽다보면 그들 주장과 존재론에 맞는 이런저런 철학, 사상가들이 소환되었던 것도 같다. 그놈의 안 다루는 게 없는 수능 국어 지문에서도 철학이니 논리학이니 이런 거 나오면 좀 힘들었던 것도 같고…

철학과 먼 삶을 살면서도 뻔뻔하게 사회계약론이니, 계몽사상이니 하는 걸 가르치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공동체에 피해를 주지 않고 기여하는 삶, 그런 걸 계속 일깨워야 한다. 얕게 두루 이것저것 주워먹는 수험생활이긴 했지만, 또 많은 것을 잊었다. 그렇다고 막 빡세게 사상가들의 원저를 주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으니까, 뭘 읽어야 할지 모를 땐 저런 귀여운 만화책이나 어린이용 책이라도 주섬주섬 둘러봐야겠다. 굶는 것보다는 암죽이라도 맛보는 게 죽지 않는 방법이겠지…

누구 이야기가 가장 잘 들렸나 돌아보니까… 물질 세계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 책들을 자꾸 봐서 그런가 영혼도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아저씨가 기억에 남았는데 우습게도 그게 누가 주장한 건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책의 처음부터 뒤까지 막 훑어도 못 찾겠어...누구였어 너… 검색해가지고 데모크리토스인 걸 겨우 찾았네… 그나마 한 챕터도 차지 못하고 잠시 나왔나 본데 그럼 다음 볼 책은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 같은 책일까… 영혼을 만든다고 지르고 있진 않구나… 원제 What‘s gotten into you가 어째서 원자의 역사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을 잘 못해서 문돌이도 못되고 수학 과학을 못해서 이과돌이도 못된 나는 그냥 못된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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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20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만화여도 어렵다!!!

반유행열반인 2025-11-20 21:53   좋아요 0 | URL
대체 어렵지 않은 것이 없다!!!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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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8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2019년에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먼저 읽고 그때도 전원일기 같다고 생각했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괄괄하면서도 시원한 츤데레 성격은 뭔가 일용엄마를 떠오르게 했다…
좋다는 사람이 꽤 많은 소설이라, 그러면 꼭 엇나가서 아주 나아아아중에 가장 마지막에 읽을 거야...하면서도 언제인지 모르게 이 책을 사 뒀다. 올리브라고 겉지 올리브색 뭐냐...하고 다 읽은 방금 껍질 까 보니까 속살 앞표지 뽀얘...섬세하게 레이스 무늬같은 것도 있어...츤츤데레 올리브 씨를 형상화한 것인가… 모르겠다. 다들 예쁜 구석 있는, 매력 넘치는 영웅이나, 고뇌에 빠진 햄릿 같은 사람은 아니다. 그냥 어디나 있는 평범하고 남 뒷담까고 술주정하고 만났다 헤어졌다 몰래 만났다 하는 사람들이다. 그걸 연작소설로 엮으니 제법 절창이었다. 재미있었다. 마을 하나를 인물 하나 구심점으로 해서 그려가는 것도 제법 스케일이 크구나 싶었다. 나는 인맥도 관계도 경험도 쥐톨만해서 그렇게 내 세상은, 상상은 넓게 멀리 뻗어가지 못했다. 그냥 실존 인물 이야기는 쓰기 싫고, 새로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기도 귀찮구만…
한 마을에서 오래 수학 선생 노릇하던 올리브, 아들과 사이 엉망이 된 올리브, 너그럽게 다 받아주던 남편이 쓰러지고 결국 죽어버려 혼자가 된 올리브, 그러다가 역시나 사별한 잭 할배랑 우연히 말 섞고 동무 내지 아마도 연인으로 발전할 올리브. 할머니 할아버지도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 이 불효자식놈들아!!! 내내 그런 외침을 듣는 것도 같았다. 올리브가 던킨 도너츠를 너무 자주 가고 도넛을 많이 먹고 살이 오르는 게 좀 걱정이었다. 그나마 산책은 열심히 하셔서 다행… 오래 안 앓고 빨리 죽으려면, 아니 건강하게 계속 살아남아 사랑하려면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식단조절도 하고 하여간에 건강해야 해요. 건강하려고요. 최대한 오래 사랑 받고 싶네요. 그래서 내 곁의 사람들도 다들 운동도 좀 하고 아이스크림 같은 거 덜 먹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말을 안 들어서 슬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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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사람들이 혼자 있는 걸 원치 않았다. (53)
-“당신, 날 떠나지 않을 거지, 그렇지?”
“아, 또 무슨 소리야, 헨리.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 있다니까.”(56, 올리브 말을 참 안 예쁘게 하는데 쿨내 진동. 개시크)

-때때로, 지금 같은 때, 올리브는 세상 모든 이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한 그것은 점점 더 무서워지는 삶의 바다에서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이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담배 피우는 앤을 바라보며 생각하건대, 그런 안정감을 갖는 데 아버지가 각기 다른 세 아이가 필요했다면 사랑으로는 불충분했던 게 아닐까? (378)

-매일 아침 강변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 다시 봄이 왔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봄이, 조그만 새순을 싹틔우면서,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봄이 오면 기쁘다는 점이었다. 물리적인 세상의 아름다움에 언젠가는 면역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사실이 그랬다. 떠오르는 태양에 강물이 너무 반짝여서 올리브는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 (461, 이제 막 겨울 앞에 서니 봄이 왔다는 게 부럽다. 흥 나한테도 온다. 언제든 온다는 변함 없는 약속이 계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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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 자체 - 현대 과학에 숨어 있는, 실재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울프 다니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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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5 울프 다니엘손.

 아침부터 단풍 구경을 가겠다고 홀로 고개 넘어 산을 질러 현충원에 갔다. 지난 달 말에 돌아가신 큰외삼촌이 제2충혼당에 모셔진 걸 본다는 건 핑계고,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 실컷 보고 싶었는데 실컷 봤다. 그러고나서 다시 지름길을 되돌아 숭실대쪽으로 나왔는데, 젊은이들이 너무너무 많았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서 집에 돌아가는 게 목표였는데 키오스크마다 줄이 엄청나서 포기했다. 서울대입구까지 한참 더 걸어가서 버거킹 주니어와퍼를 사서 예상보다 늦게 집에 돌아갔다.
 오후에 곁의 사람이 산책을 간다기에 또 따라 나섰다. 이번에도 산길을 질러 숭실대 근처에 가 버렸다. 아까 점심께 토요일인데도 학생들이 엄청 많았다니까, 수시철이라 다들 입시 보러 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막 100대1 넘는 경쟁률도 있다는 소리에 그럼 20명 뽑는데 막 1000명 오고 그래? 라고 내가 말하자 더 와야 100대1이 되지, 했다. 그래서 스스로도 조금 부끄러워서 나 산수 진짜 못하지? 하자 딴생각하던 곁의 사람은 뭔 질문인지도 모른 채 응, 해 버려서 내가 막 웃었다.

 스웨덴 이론물리학자가 수학과 과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해서 이런저런 명제를 챕터 제목 삼아 쓴 이 책은 간결하고 명료하게 읽혔다. 이보다 더 쉽게 간단하게 설명하고 주장하는 글이 없겠다 싶게 느낌은 간명했는데, 산수를 못하는 나는 왠일인지 오,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건 없는데 왜 읽고 나서 알게 되고 남는게 없지? 했다. 2년 전에 고교 물리1을, 1년 전까지 고교 수학을 붙들고 있던 내가 결국 이과가 되는 걸 포기한 건 참 잘한 일이다. 어떤 문제들은 평생 해를 구하려 해도 사람 머리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일반 컴퓨터도 안 되고 슈퍼 컴퓨터로도 될까 말까한 풀이들… 나의 머리는 아직 윈도우95, 조금 더 써 주면 윈도우xp쯤 될 건데, 이제는 이름도 모르겠는 최신 운영체계에서 파워 짱짱 갖춘 메모리랑 그래픽카드로 쎄게 돌아가는 채굴 프로그램이나 인공지능 프로그램 같은 걸 아무리 입력해 봤자 내 메모리는 과열되서 다 타버릴 것이다. 그래도 챕터명이 곧 내용인 이 책의 선언들은 논쟁적이라고는 하지만 나한테는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물리학이다. (그래서 물리를 잘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수학을 잘 하고 싶었다. 그런데 산수부터 잘 안 됐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다. (유기체여서 행복해요) 우주는 수학이 아니다. (그렇구나 세상을 꼭 수학으로 이해할 필요 없겠구나) 모형은 실재와 같지 않다. (그러니까 수많은 모형과 이론을 이해 못한다고 주눅들지 말아야 겠다)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챗지피티 너 임마 넌 집단 환상이야)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니까 모두가 계산하는 것을 나만 할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이건 뭔가 행복해지는 주문) 자유의지는 없다.(이건 뭔가 너무 무거운 책임감이 덜어지는 주문)

 과학책을 이따위로 내 마음대로 읽고 대충 알아듣고 대부분 못 알아듣고 그래도 그냥 기분 좋으면 됐지, 난 행복한 사람, 룰루루루 했다. 에이형독감에 걸리더니 천식만 도진 게 아니라 정신도 나간 건가, 오늘 하루 이만사천걸음을 걸었다. 카페인을 조금 많이 섭취했다. 하루가 한 주 같고 한 달 같았다. 그런데 다 좋았다. 생각보다 하루에 엄청 많은 기분과 경험과 생각을 담을 수 있었다. 담을 수 있는 것만 담고 담지 못할 건 놓는 법은 배우는데 몇 년이 걸렸다. 어쨌거나 오늘 내가 눈에 담은 하늘과 구름과 시냇물과 단풍과 낙엽과 묘비와 음식물과 마실 거리들은 실재하고, 그 모든 세상의 ‘것’들을 감각하는 나도 실재한다. 아직은 그렇다. 그럼 됐다.

 이 책은 조금 더 정신이 말짱할 때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그때도 또 뭔말이여 뭔말인지 알 것 같은데 왜 모르지 할 지도 모르지만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은 당장은 말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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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세계는 삭막하고 위험한 곳이며 우리의 지식만이 이 세계를 살 만하고 안락한 곳으로 바꿀 수 있다. (9)

-우리 이론물리학자들은 온갖 황당한 주장을 하고도 손가락질받지 않는 특권을 누리는데, 그 비결은 우리만이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다는 인상을 풍기는 것이다. 때로는 그 인상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평행세계는 정신 나간 발상처럼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69-70, 노빠꾸로 평행세계 까버리는 물리학자 선생님)


-우리가 이용하는 수학은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수학은 저 너머의 플라톤적 이데아 세계에도, 우리와 독립적인 외부의 물리적 세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은 우리의 생물학적 뇌 속에 순전히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은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에 의존하는 생물학적 구성물이다. 자연법칙은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며 우리는 이를 이용하여 주변 세계의 규칙성을 이해한다. (100-101, 수학과 과학을 잘 익혀서 세상을 잘 이해해보겠다고 덤비다가 실패한 미수이과, 골수문과에게는 이 부분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세상을 수학으로 이해해야 정답인 것은 아니라고.)

-메를로퐁티의 요점은 당신에게 몸이 있다기보다 당신이 몸이라는 것이다. 철학적 좀비가 당신을 말썽에 빠뜨리는 근심거리가 되는 것은 오직 당신이 기만적인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빠져 있을 때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당신이 기계에 속아 넘어가 기계에도 의식이 있다고 믿을 리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계산주의 마음 이론의 지지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니까. (165, 데카르트 두개골의 수난사까지 소개하며 스웨덴의 업적으로 데카르트 제거를 꼽는 물리학자 아저씨… 내세를 믿는 사람들은 이 학자님을 아주 싫어할 수도 있겠다. 죽으면 끝. 당신이라는 물질계는 또다른 물질계로 돌아갑니다. 부서진 석고상이 흙먼지가 되듯이요. 이건 그냥 내 말입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재앙으로 이끄는 것이 풍부한 지능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이다. 초고속 컴퓨터가 세계를 장악하는 종말론적 시나리오보다는 오히려 다소 따분하지만 안전망이 미흡한 기술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176, 모든 재앙은 대체로 멍청함에서 비롯된다는 똑똑한 자의 주장...반박하기 어렵네…)

-하지만 로봇이 우리처럼 행동하고 우리와 상호작용 하면서 우리를 더 닮아가면, 우리가 그 모습에 속아 넘어가 우리 자신과 비슷한 내적 삶을 그들에게 투사할 가능성도 커진다. 이미 우리는 생명이 없는 물건들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대하고 있다.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후려치기까지 한다. 어린아이는 곰 인형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로봇이 우리를 닮기 시작하면, 로봇에게 사람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고 경제적 가치를 넘어서는 자유와 보호를 보장하라는 정치적 운동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179, 그러니까 우선 나와 성의 있고 끈질기게 대화를 나눠주는 AI부터 의식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곤란할 듯하다. 내 생각의 데이터베이스랑 외부 정보 모은 것들을 바탕으로 적당히 거울처럼 비춰서 맞아맞아 해주는 메아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덜 몰입되어 속편하다. 인공지능에(-과 라고 안 했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도 물론 어디 있을 것이다. 물에 비친 자기에게 반해 죽어버린 나르시소스처럼 말야…)

-나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가 환각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주관성과 의식의 존재가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181, 매트릭스는 영화일 뿐이고...좀비도 가상의 존재일 뿐이고…)

-모든 것을 일반 컴퓨터에서 계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무리수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공포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들은 분수로 나타낼 수 없는 원주율 같은 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리학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수학이 조만간 물리학에 적용되리라는 것이다. (204-205)

-전반적으로 보자면 무질서는 언제나 증가하지만 작은 오아시스에서는 질서가 일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다른 곳에서 더 많은 무질서가 생긴다. 지구는 그런 오아시스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질서는 고에너지 광자가 거의 없는 고품질의 가지런한 햇빛을 통해 증가하며 무질서는 저에너지 광자들로 가득한 열복사에 의해 우주로 방출된다. 광합성 식물도 자기 할 일을 하며 지구상에서 생명이 번성하게 한다. 완전한 닫힌계에서는 생명이 살아남을 수 없다. 태양이 빛나기를 멈추면 우리는 설령 몸을 데울 방법을 찾더라도 죽을 것이다. 시간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르며 이런 식으로 시간의 방향이 생겨난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예측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열역학 제2법칙이 어떻게 원자의 세계에서 유도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이 법칙은 특별한 지위를 간직하고 있다. 앞으로 물리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제2법칙은 꿋꿋이 결정적 역할을 맡을 것이다. (208-209,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엔트로피 증가를 진리라 단호하게 쾅 찍는, 그 방정식으로 사인해주는 물리학자 뭔가 멋있지 않나. 이상한 데서 끌림…)

-닫힌계는 바깥에 있는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도 바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런 계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적 계의 규모가 작고 결부된 시간이 짧을수록 그 계를 고립시키기가 쉬워진다. 반면 세계를 관찰할 경우에는 그 즉시 주변 우주와 걷잡을 수 없는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213, 모든 조건이 일정할 때- 같은 건 실제 세계에 대한 이해와는 무관할 수도 있겠구만… 동태 한 토막 들고 명태라는 물고기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가 무슨 얘기 하는지 모르겠다.)

-열역학은 내가 좋아하는 분야다. 나는 열역학을 통해 다수의 입자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온전히 이해한다. 더 높은 수준의 차원으로 올라가서 일상생활을 하며 먹고 자고 걷고 자녀와 놀아줄 때는 그보다 더 투박한 모형을 이용한다. 썩 과학적이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개나 다른 인간 같은 살아 있는 유기체는 수많은 입자들이 모인 중요한 복합체이며 나는 그들을 개체로 개념화한다. 생각과 욕망으로 가득한 나의 의식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214, 작은 닫힌 계 하나라도 온전히 믿고 좋아할 수 있고, 나머지 세계는 거기 갇히지 않고 또 다른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부럽고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생활 완전가능)

-나는 ‘홍합이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라고 묻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그 답을 검증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물음을 시도하면서 뿌옇고 흐릿한 존재를 상상한다. 잠에서 깼는데 눈 뜬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기분이 떠오른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홍합은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며 그들로부터 우리까지의 격차는 작지 않다. (223-224, 세상을 이해하길 멈추지 않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 덕에 나같은 평범한 사람도 아주 작은 앎이나마 맛을 볼 수 있다.)

-실재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객관적인지에 대한 개념들을 체계화하고 형성하는 방식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225, 너무 문돌이 빡대가리라고 자학하지 말아야겠다.)

-그림 속의 손은 자기 자신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물리적 존재를 만들어 낸다. 살아 있는 물질을 정의하는 것 또한 스스로를 떠받치는 바로 이러한 자기 지시 능력이다. (232)

-우리가 ‘이론상’을 거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입증 불가능한 것이 참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는 종교적 믿음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접근법과 양립할 수 없다. (244)

-자유의지가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또는 결정론이 완전히 결정적이고 자유롭지 않으려면 보편적 타당성이 필요하다. 내가 주장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똑같이 어수룩하고 불가능하다. 둘 다 달성 불가능한 전지적 시점과 한물간 이원론을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245, 패기롭게 둘다 패기, 폐기)

-우리(여기에는 우리의 의식도 포함된다)는 세계 자체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자연법칙의 노예가 아니다. 자연법칙은 우리 자신을 비롯해 자연이 하는 일을 기술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자연주의자는 세계 한가운데에, 우주 한가운데에 서 있으며 필멸하는 몸에 갇혔지만 불완전한 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관찰을 표현하고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모든 모형에는 한계가 있고, 한계에 다다르면 새로운 물음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246, 필멸, 불완전하지만 중요한 부분이자 최선을 다하는 노예가 아닌 존재. 멋있게 말하는 물리학자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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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베로니크 올미 지음, 최정수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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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2 베로니크 올미.

두꺼운 책 봤으니 좀 얇은 거 볼까 하다가 아무거나 집었다. 이 책은 어쩌다가 산 거야...절판 도서인데 굳이 찾다가 알라딘 우주점에서 가짜뉴스에 대한 책 사면서 아니 균일가 800원...배송료를 없애자...하면서 함께 담았던 기억은 있다.

구매 내역 뒤져 나의 ‘욕망’컬렉션들 뭐가 있나 찾아보니 이 책 말고도 이런 친구들이 있었다.
-몸, 욕망을 말하다 (읽었는데 망한 책)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욕망수업(종교인이 쓴 것 같은데 기왕 망한 거 뭐 나중에 읽어보자…)
-욕망의 진화(진화심리학 같은 거 은근 재미있게 읽었는데 욕하는 사람도 많던데 제가 한 번 보고 판단해 보겠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희곡이었나? 이건 읽긴 읽어야 겠다 얇잖아…)
-욕망(옐리네크. 내가 산 거 아니고 엄마가 오프라인 알라딘 가서 탐욕과 함께 구매하신 듯)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엄마랑 애기랑 여행기인데 이걸 제일 먼저 읽고도 멈추지 못하고 끝없이 책을 사려는 나의 욕망…라오스에 안 가서 그런 걸까...)

감독 갈 학교 예비 소집 회의에 다녀왔다. 어느 학교에 가는지 전날 자기 SNS에 인증샷 올려버린 어느 교사는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허허허… 나는 3년 전에 여기서 수능 봤었다는 것만 말하겠다. 작년에 수능 보고, 올해는 감독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했다. 없진 않겠지만 손에 꼽힐 것 같다.
아, A형 독감 앓고 이주가 지났는데도 비염 천식 이런 게 그 여파로 재발해서 기침 콧물이 엄청 심하다. 월요일날 내과에 다시 방문해 특단의 조치를 요청했더니, 좀 세다는 진해거담제, 항히스타민제도 주고, 집에 남은 흡입형 천식약도 밤마다 쓰라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자고 했다. 따듯한 물 마시고 사탕도 좀 빨아먹으라고… 약 열심히 먹어도 아직도 기침 나...시험장 가던 버스 중간에 서울대학생들이 우루루 몰려 탔는데, 갑자기 그동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기침이 발작적으로 폭발했다. 마스크 위에다 손수건 틀어막고 우웩거리면서 한참 기침하다가 창문 열고 숨 몰아쉬고 겨우 가라앉을 무렵 서울대학교 정문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서울대학교 알레르기가 생긴 모양이다… 아니 저 어디 감독가는지 말 안 했음...관악산 단풍이 예쁘게 드는 중이다. 저녁 되고 좀 나아지는 느낌적 느낌인데, 부디 기침 발작 안 터지길!!! 이런 몸으로도 노역 가야 하는 운명의 데스티니!!!!

아마도 몇 년은 이렇게 더, 가을마다 수능 가까이에 갔다 오고, 한해 살이도 대강 어떻게 굴러갈지 감지하며(사소한 폭탄들은 미리 감지하지 못하지만 막연하고 불안하게 예감하며) 살 것이다. 3킬로 남짓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이제는 딱히 이루길 바라는 뭔가가 없어서 괴롭지도 기대되지도 않는 나날이라고. 대부분을 가졌으니 뭘 더 가지지 않아도 되겠다. (예를 들면 책!) 사는 곳도 관계도 모두 안정적이고 뭐 다들 내 주변은 착하고 그럼 내가 빌런일지도 모르는데 하여간에 그런 빌런이라도 다들 잘 챙겨주고 사이좋게 살고 있다.

얄팍한 소설은 다짜고짜 비를 맞으며 여자와 남자가 걷고, 공원에 앉아 있다가, 호텔에 들어간다. 둘의 관계는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둘이 눈먼 섹스를 하는 동안 잠깐씩 비친다. 둘은 5년 전 헤어진 이후 처음 만났고, 이전에는 부부였고, 아이도 둘이나 있다.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미쳐버렸고, 여자는 아이 둘을 데리고 떠났다. 지금 아이 둘은 여자가 재혼한 다른 남자가 데리고 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둘다 삶에 굴곡이 많다.
여자와 남자의 입맞춤을 첫키스라고 표현하고, 여자는 처음 대하는 남자를 보듯 새삼 새롭게 섹스를 한다. 거식증에 걸렸는지 음식을 거의 못 먹고, 구토를 하고, 그간 12킬로그램 정도가 빠졌다고 한다. 남자는 다리를 전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여자와 헤어진 후 그렇게 됐는지 나오지는 않는다.
식당에 가긴 했는데 뭘 하나도 안 먹고, 비 맞고 걷다가 공원에 앉고 입을 맞춘 뒤, 호텔에 가서 섹스를 하고, 잠시 나가서 스시집에 가서 스시를 먹고, 다시 호텔에 돌아와서 또 섹스를 하고 둘이 끌어안고 창문 열고 비가 왔다 말았다 하는 걸 보며, 바람 부는 걸 느끼며 그렇게 있다가 여자가 방을 벗어난다. 몇 줄이면 될 서사인데 이렇게 저렇게 야한 장면 묘사를 열심히 해 한 권을 만들어 놓았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세상엔 재회한 옛 인연들이 갑자기 다시 튄 불꽃으로 섹스를 하는 관계도 있겠다. 다만 나는 그렇게 다시 뭐가 튈 만큼 깊게 좋아하다가 오래도록 못 만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저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더구나 부모의 이혼을 생각하면… 엄마에게 혹시 아빠를 다시 만났을 때 같이 잘 일이 있을까? 묻기만 해도 엄청 무례한 느낌이 든다. 정신병자에게 달달 시달리다가 정신병자가 알콜중독자로 변신해서 또 달달 시달리고 폭력을 겪고 충격 받은 사람이 겨우 5년 세월이 지났다고 그런 장면들을 잊고, 새 사람 만나듯 욕망에 겨워 품에 안기는 건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성과학 마스터 클래스’ 책이었나, 거기서 맥락이 중요하다고 했다… 위험 신호가 켜지면 즐길 수 없는 여자 사람이 대부분… 남자는 어째서 헤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무해함을 풀풀 풍기며 여자가 혹하게 매력을 풍기게 되었을까...심지어 더 늙었는데…

이 모든 불만은 800원에 이 소설을 사서 고이 모셨다가 하필이면 지금 펼친 내 탓이며, 감독 쉬는 시간에 볼 책은 과학과 철학이 간결하게 정리된 물리학자가 쓴 ‘세계 그 자체’(노승영 선생님 번역)를 가져갈 예정이다. 맵고 쓴 것도 읽고, 욕지기 나오는 것도 읽고, 재미있는 것도 지루한 것도 읽고, 지적인 것도 감성적인 것도 다 읽고, 그게 아마도 남은 내 삶이다.

번역자 선생님이 ‘단순한 열정’이랑 ‘연금술사’ 옮기신 분이고, 이 작가 프랑스에선 나름 유명하다고 소개해놨지만, 프랑스는 그냥 뜬금없이 섹스하고 뜬금없이 죽이고 죽고 뭐 그런 영화나 책이 뜬금없이 인기가 있어서 아 그냥 그렇구나… 우리나라 야한 소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장르물로만 남았나… 세기말 언저리 소설들에서 찾아야 하나… 아니 뭣하러 찾냐 막상 읽으니 아 야하구나 하고 딱히 재미는 없는데… 하면서 안구 정화용으로 ‘올리브 키터리지’를 꺼내다 읽고 있다.

+밑줄 긋기
-그는 길을 잃고 헤맸고, 그녀는 그의 상냥함을 향유했다. 그 상냥함 때문에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모든 여자들이 주지 않은 것을 이 남자에게 준다는 그 비길 데 없는 오만함. (130)

-최초의 정신착란 발작 때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나를 독살하라고 시켰어. 당신은 나를 죽이고 싶어해. 당신은 내가 내 아이들 손에 죽기를 원해. 당신은 내 죽음을, 내 죽음을, 내 죽음을 원해. 당신은 내 죽음을 원한다고!(132, 아빠한테 두부에 독 타냐고 의심 당해 봐서 알 거 같은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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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모의 강림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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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9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노벨상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책들에게 주는 상이라고 까불고 다녔는데. 미처 그 상을 이 작가가 탈 줄 몰랐기 때문이지, 그래서 세 권이나 모아두고 나머지도 마저 모으려다가 그만 노벨의 하수인 놈들이 이 작가에게 상을 줘버려서 난 이 년 쯤 기다리면 차마 읽으려다 못 읽고 새 책이나 다름 없는 중고로 팔려버린 작가의 책을 마저 모을 수 있을 거란 말이지. 그래서 읽기를 최대한 미루려고 했는데, 노승영 번역가의 콜렉션을 모아두려다가 이 책을 빼먹은 걸 알아차렸고, 그 뿐 아니라 ‘말레이제도’랑, ‘향모를 땋으며’도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꽂혀 대체 좋아하는 번역가의 번역작품을 읽지는 않고 모으기만 하는 게으름은 뭐냐, 하고서 일부러 제일 이름이 많이 들리는 ‘사탄탱고’랑 ‘저항의 멜랑콜리’는 나중에, ‘서왕모의 강림’을 먼저 읽기로 했다.

해제랑 해설 같은 건 안 보지롱, 하고 까불던 평소와 달리 661쪽에 덧붙은 옮긴이의 말을 먼저 경건하게 읽었다. 먼저 읽으신 선생님이 작가 선생님께 이메일로 이거저거 여쭙고 본인이 읽으신 바대로 너가 못 알아 들을까 봐 간단하게 써 봤어, 친절을 베풀어주신 덕에 읽을 용기가 났다. 읽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만연체가 의식의 흐름체 같은 것도 아니고, 번역가 선생님이 그렇게 많이 쉼표를 지우셨다는데도 이 정도면 적절하게 쉴 자리도 만들어 주셨다. 챕터의 숫자가 1씩 늘지 않는 것도, 각 챕터의 숫자가 피보나치 수열이란 얘기를 해 주셨는데, 에이 그럼 챕터 1이 두 개여야지, 이건 뭔가 수학 잘 모르는 문돌이 작가가 적당히 가져다 썼구만……하면 노벨상 메달로 머리통 한 대 쥐어 박힐 것도 같고….
그래도 베네치아 뒷골목이나 미술관이나, 아테네 어느 거리나 아크로폴리스나, 페르시아 왕궁이나, 젠겐지의 불상 앞이나, 백로가 고기 잡는 가모가와나 (아직 여기까지만 읽음) 온갖 곳을 데려가 썰을 풀어주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200페이지를 후딱 넘겼다. 계속 봐야지. 그러고서 또 400여페이지를 종일 넘겨 이제 끝이 보이는 구나...

시흥 갯골에, 도림천 가에, 보라매공원 연못 위에 새들이 머무르는 걸 종종 본 적이 있다. ‘가모가와의 사냥꾼’을 읽으며 작가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거기 있는 백로에 대해 내내 말하는데, 적어도 내가 사는 도시 속 새는 제법 주목 받는다. 산책자들은 저 하얀 새, 뭐지? 한다. 어려서 백과사전을 열심히 읽은 덕인가 무심결에 백로, 왜가리, 해오라기, 청둥오리, 가마우지, 흑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적당히 이름을 가져다 붙여 댄다. 곁의 사람 중에 나보다 새이름 잘 아는 이는 없어서 그냥 내가 부르면 그 이름의 새가 된다.

가을 연휴에 미리 계획하지 않던 송도 여행을 갑자기 갔을 때, 마지막 날 비가 내렸고, 그 빗속에서도 공원 정자에서 맥스봉 떡밥과 옷핀으로 만든 바늘을 꺾은 나뭇가지에 실로 매어 낚시질 하던 초등학교 3, 5학년 두 남자아이를 만났다. 공원 큰 호수로 이어지는 냇물에는 손바닥만한 잉어새끼들이 정말이지 바글거렸고, 아이들은 입질 올리는 재미에 신나서 양동이 한가득 고기를 낚고 있었다. 당장 풀어줘라 하고 싶지만 애들이 너무 천진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얘네 아빠랑 우리 아빠랑 직장동료라서 어려서부터 친해요) 고기가 산소가 부족해 팔딱거린다니까 당장 웅덩이로 달려가서 물을 새걸로 갈아오기까지 해서 그래라, 맘대로 해라, 하고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비까지 맞으며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어로 체험하는 것도 정성이지. 저게 도시 어부지. 어디가서 굶어죽진 않을 애들이다.

그러고나서 몇 걸음 지나지 않은 곳에는 커다란 왜가리 한 마리가 같은 냇물의 상류 쯤에서 땅을 파서 지렁이를 낚아채고 그걸 씻어 먹는 건지, 그걸로 미끼 삼아 물고기를 낚는 건지, 하여간에 부지런히 땅에 주둥이 처박다, 물에 처박다 하는 걸 신기롭게 바라봤다. 같이 있던 아이들도 신이 나서 왜가리다, 하고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걸 그냥 여기서 보자 하고 물 건너에서 한참 같이 봤다. 가만보면 물고기 낚는 건 애나 새나 똑같은데 새는 혼나지 않는다. 인간은 평생 괜한 걸로 많이 혼난다.

와스디와 에스더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성경책을 제대로 안 읽어봐서 ’추방당한 왕후‘를 읽으면서 검색으로 알았다. 왕명에 불복종한 왕후 와스디는 그간 사랑받아왔음에도 추방 당한다. 읽다보니 고디바 부인이랑 생각이 겹치기도 했는데, 초콜릿 상표의 여인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면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 봐, 하는 영주의 말대로 정말 해냈고, 와스디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알몸으로 왕후관만 쓰고 뭇 신하들 사이로 걸어 봐, 하는 왕의 말에 끝내 거부하다가 쫓겨나고 에스더에게 왕후를 물려주게 된다. 옛 사람들은 사형보다 추방을 더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결국 둘다 죽음에 이르는데, 사형은 그래도 나의 죽음을 많은 이가 알고 내가 어디서 어느날어떻게 죽는지 알리고 알면서 죽지만, 추방은 내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시신도 못 추리는 불안감에 더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모든 이야기 끝에서 누군가는 죽는다. 이제 막 단편 두 권 읽었는데 벌써 죽으라, 죽음의 무도를 그치면, 하고 낮게 땅에 가깝게 엎어진 형체들이 그려진다. 한때는 아름다웠던 것들이 그렇게 철푸덕. 아이참 더 읽다보니 아름답지 않지만 고생깨나 한 가엾은 여행객도 객사. 내심 젠겐지 불상 보전(복원)할 때도 누구 하나 불상에 깔려 죽거나 불상 머리가 잘리거나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거기에선 다들 불심으로 대동단결만하고 안 죽는다. 휴.

일본의 연극 노, 불상 보전 의식, 신궁 새로 짓는 나무 자르는 의식 등 일본의 이야기가 집요하고 잔잔하게 이어지는데, 이거 일본 아저씨 아니고 헝가리 아저씨가 쓴 거라고? 왜 우리 조선엔 관심 일도 없고 중간에 뭔 사기꾼 같은 20만엔짜리 물 팔아먹는 조선인 한의사만 나오냐… 한 가지 집요하게 파고들기로는 작가 아저씨 만큼이나 일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많긴 한가 보다. 그래서 예술도 학문도 이런저런 성취를 이루고 상도 타고 서양애들마저 박수 짝짝 해주는 거겠지. 나는 한우물만 파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었는데, 한가지만 완벽을 향해 반복반복반복하는 사람들 보면, 존경스럽고 신기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안 산다, 못 산다, 난 얕고 넓게 호기심이 너무 많다, 뭐 그렇다. 그러니까 이 책도 만난 거겠죠.

마침표의 끝에는 대부분 누군가의 죽음이 있어서,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서도 얼른 마침표의 순간이 오길 바라는 건 쉽지 않았고, 삶이든 이야기든 사실 그렇게 길게 쉼없이, 아니면 잠시만 쉬고 또 이어지는 게 삶이고 이야기여서, 걱정했던 것보다 라슬로 선생님의 소설집은 계속 읽게 밀고 나가는 힘이 있었다. 글자들을 꾸역꾸역 따라갈 필요는 없었고, 오히려 등떠밀리듯 쓸려나가며 강제로 읽고 있는 것…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도 있는 것… 그래서 아직 다른 작품들은 안 읽어봤지만 노벨상 수상작가 읽어 보겠어! 하는 각오를 다지시는 분들에게 ‘서왕모의 강림’이 시작하는 책이 되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이건 내가 번역자의 문장을 편애하는 입장이라 공정하지는 못한 추천이고, 노벨상은 다 재미없다고 까불던 것도 사실 취소해야 할 것 같다. ‘백년의 고독’이랑 ‘파리대왕’이나 ‘양철북’ 같은 건 소설이랑 영화랑 같이 보면 무척 재미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선생의 영화화된 작품들도 같이 보면 재미있으려나...그치만 ‘사탄탱고’는 사탄도 탱고도 그닥 당기지 않아 한참 미뤄두려구요...

+밑줄 긋기
-(…), 그의- 머리가, 등이, 팔이, 다리가, 온몸이 달아오른 것은 대수롭지 않아서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으나, 그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 것은-그 중대한 의미를 그는 전혀 자각하지 못했는데-햇빛이 석회암에 닿았을 때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가였으니, 그가 이 강렬하고 섬뜩한 광채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던 것은, 왜, 어떤 안내 책자가, 어떤 종류의 미술사 논문이, 주의하십시오, 아크로폴리스는 햇빛이 무척 강해서 눈이 남달리 예민한 여행객은 반드시 사전에 대비해야 합니다, 같은 정보를 알려준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는, 눈이 남달리 예민한 여행객 범주에 속하는 그는 어떤 종류의 사전 대비책도 취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이제 어떤 예방 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되었거니와, 어떻게 해야 하나-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여행 가방 하나가 전부였는데, (…)-이것만 봐도 그가 피로, 열기, 눈부심 때문에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는지가 이미 명백했던바, 여행 가방이 자신의 수중에 있지 않고 저 아래 시내에 마니오풀로스라는 청년에게 맡겨놓았음을 떠올린 것은, 어행 가방을 열어 옷가지 하나를 꺼내려고 신전 벽으로 물러났을 때였으니, 이 순간 태양은 그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고, 더위를 식힐 모퉁이도 틈새도 지붕도 구석도 어디에서고 찾을 수 없어, 바로 여기에도 없고 더 가도 없었던바, 빛은 방해받지 않고 화살처럼 곧장 수직으로 그에게 내리꽂혀, 아크로폴리스를 통틀어 그늘은 하나도 없었으나, 이 시점에 그는 그것을 알지도 못했기에, (199-200, ‘아크로폴리스’ 중. 아테네에 미리 가본 것 같은 작가님은 선바이저와 선글라스와 미네랄워터를 -가능하면 인공눈물도 꼭-준비하라고 이 대목에서 예민한 여행객을 불태워죽이면서 알려주는데, 택시 기사의 바가지와 내리쬐는 아폴론의 (무)자비를 떠올리면 아무래도 저긴 안 갈 것 같고, 라슬로 선생의 글에 밑줄을 치려면 결국 어느 마침표가 아닌 쉼표에서 잘려나갈 각오를 해야 하는 걸 함께 알았다. 친절한 동시에 불친절한 선생님)

-그런데, 울 수밖에 없다고 그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서도 전혀 이곳에 있지 않았기 떄문이요, 그가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이 꿈꾼 것을 이루었으면서도 전혀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204, 아크로폴리스에 갔지만 간 게 아니었다. 엉엉엉엉 그냥 높은 언덕이 아니라 황량한 높은 언덕이라고 꼭 좀 알려주자. 그리고 마저 읽고나면 아휴 진짜 자비 없기론 아테네 여름 햇볕 뺨치는 라슬로 선생)

-(…), 이미 나는 올라가고 있어서, 마을과 도시, 땅과 바다, 골짜기와 봉우리의 근심스러운 혼돈과, 나를 그토록 감싼 찰나가 끝나는 것을 여전히 보고 있으며, 내가 올라가면서 모든 것이 나와 함께 올라가니, 장엄함이 저곳에서 올라가 천상의 순수로, 가늠할 수 없는 영역으로 돌아가며, 그 자체의 형상으로 눈부시고 앞으로 흐르고 부풀어 오르는 저 장엄함은, 무가 있는 그 장소로, 찬란한 빛의 제국으로, 천상의 한없는 들판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즉, 저곳은 내가, 나로서가 아닐지언정 존재하는 장소인바, 이곳에서 나는 왕관을 머리에 쓰며, 스스로 생각하길, 서왕모가 저 아래에 갔었다. (309, ‘이노우에 가즈유키 명인의 삶과 일’ 중)

-(…), 그건 제가 오늘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게 내일은 없으니까요, 제게 미래는 없으니까요, 그것은 모든 날이 마지막 날이요, 모든 날이 온전하고 충만하며, 제가 어느 날에든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그가 방 끝에서 맞은편에 앉은 손님을 바라보며-그 의미는 하나의 전체가 끝나고, 머나먼 곳에서 또 다른 전체가 시작되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한결같은 미소를 띠며 말하길,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죽음은 언제나 제 곁에 있고, 저는 죽어도 잃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제겐 현재만이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날, 이 시간, 이 순간-제가 죽어가는 이 순간 말입니다. (322, 뭔가 이 부분은 마침표 쓸 부분에 어거지로 쉼표를 넣은 기분이다. 이노우에 선생은 문장 끝마다 왠지 쉼표를 세 개씩은 넣어서 마침표나 비슷한 여백이 있을 것 같거든.)

-(…), 여러분이 제게서 날짜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으로, 대체로 저는 날짜를 믿지 않습니다, 만물은 서로에게 흘러들고 서로에게서 흘러나오며 모든 것이 마치 촉수처럼 뻗어 나가기에, 어떤 분명한 시대라든가 그런 터무니없는 것은 결코 없으니, 그러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은 생각만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 생각해보세요, 뻔하잖습니까, 날짜나 시대 구분을 들여다보는 것은 소용이 없으므로, (…) (504, ’사적인 열정‘ 중. 시간을 구획화한 건 인간의 커다란 발명품인데 뭐 안 믿을 수도 있는 거지 실재가 아니라 숫자이고 이름 뿐인 것들도 있겠지 숫자와 이름 덕에 있는 것처럼 된 것도 있겠지. 그래도 이놈의 바로크 광신자의 분노는 못 봐주겠다.)

-(…)오귀스틴과 발랑틴-그 생각이 뇌에서 고동쳐, 그는 이미 그들이 보이는데, 두 사람이 죽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길게 늘어진 채, 그의 캔버스 위 띠들처럼, 우주적 전체 속 존재의 시작과 끝처럼 두 몸뚱이는 눈이 움푹해지고 코가 뾰족해진 채 해골로 말라비틀어져, 물이 땅 위에 있고 드넓은 하늘이 물 위에 있듯 서로의 위로 누운 채 뻗어, 죽음의 푸르름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537, ’푸르름 속 메마른 띠 하나뿐‘ 중. 풍경화가가 떠올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풍경)

-(…), 이것에는 신성함이 전혀 없다느니 과거의 신성함을 짓밟는 짓이 단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느니 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도 가식적이었고 무엇 하나 믿을 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동작 하나에서조차, 다이구지의, 또는 그의 뒤에서 무릎 꿇는 신관들의 몸짓 하나에서조차, 모든 것이 잘 될 것인지 반신반의하는 긴장된 조마조마함 말고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실수가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니, 순전한 안간힘, 이것이 모든 동작과 제의적 몸짓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었고 의식 자체는 어디에도 없어서, 구경꾼들을, 내빈들을, 틀림없이 두둑한 후원 약정과 함께 왔을 저 후원자들을 특징지은 이 분위기 또한 긴장된 조마조마함이었던바, 따라서 동작과 몸짓들은 믿음과 헌신이 아니라 두려움의 동작과 몸짓이었으니, 이 두려움은 이곳에서 무엇 하나 참되지 않음을, 참되지 않고 진실하지 않고 개방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음을 드러내는 두려움으로, 여기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신도의 본질 바로 그것이었으며, (579, ‘이세신궁 식년천궁’ 중. 의식의 허위, 허상에 대한 건 ‘불상의 보전’에서 내부자 관점으로 그린다면 이 소설에서는 의식 참관 온 외부자의 눈으로 드러나는데, 그렇게 벌거벗은 임금님 행차를 외부에 공개하면 분명 놀리고 쑥덕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므로 그렇게나 비공개로, 암암리에, 의식을 진행하려는 건 그리 자주 하지 않는-무려 20년 만에- 의식의 수행자들은 아무래도 떨릴 수 밖에 없고, 반대로 노의 가면을 만들거나 노에서 연기를 하는 장인들은 그보다는 훨씬 높은 빈도로 반복, 반복, 또 반복하며 집요하게 완벽을 향해가기 때문에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걸 그림, 가면, 연극, 조각상, 불상이나 궁의 보전 또는 신축 같은 예술의 온갖 분야와 온갖 나라를 넘나들며 라슬로 선생님이 보여주신다. 마침표는 아끼면서…이 소설도 이 의심의 순간이 지나면 오래된 예술이 드러나는 독특한 나무 자르기 의식을 그려준다.)

-(…), 아키오 상, 당신은 교토를 정말로 사랑하는군, 그렇지, 그러자 한순간에 가와모토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짙은 어둠 속으로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고작 이만큼, 돌아와, 쉰 목소리로 간신히 이렇게만 말하길, 아니, 조금도, 난 이 도시가 혐오스러워. (616)

-(…), 그 공포는 어떤 싸구려 두려움의 한낱 잔재가 아니어서, 그곳에는 어떤 영토가, 죽음의 영토가 있는데, 사방에서 짓누르는 흙의 무지막지한 무게는, 그들을 매장했듯 시간이 지나면 우리 또한 집어삼키고, 가두고, 묻고, 우리의 기억마저도, 영원의 모든 시간 너머로 소멸케 할 것이다. (659, ‘땅밑에서 들려오는 비명’중. 그러니까 난 액화장 시켜서 하수구에 흘려보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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