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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260629 저자: 배수아.
쿠팡 구독 한 달 하고 해지해서 오늘이 쿠팡 플레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특별휴가(그런 걸 받았다)가 끝나가는 오후, 시즌5의 후반부와 시즌6을 아직 다 보지 못했다. 2배속으로 시즌6 초반부까지 달려왔을 때, 어후 갑자기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가 지겨워졌다.
조금 읽다 만 책을 펼쳤다. 내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배수아 작가의 책에서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면, 조금 더 옛날로 가 보면 알아들을 말이 조금 있을까 했다. 이 소설은 2000년도에 나왔다. 26년이란 시간은 어마무시하다. 영원히 삼십 대에 머물러 있지는 못하므로, 요즘의 연애 없고 혼인 안 한 젊은이들의 삶은 짐작도 못하겠다.
이 책과 보던 드라마의 시기가 크게 차이나지 않아서 그런지, 뉴욕의 네 친구들과 한국 대도시의 다섯 친구들의 모임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다만 뉴욕 친구들은 연애도, 섹스도, 직업에서의 성공도, 밤에 나가서 신나게 노는 것도 갈망한다. 한국 친구들은 함께 모이기는 하지만 다른 친구가 없을 때는 험담도 하고, 스스로 혼인하지 않음을 선택했는데 막상 먼저 결혼 발표를 한 친구 앞에서는 네가 손해 보는 거다, 말하면서 은근한 질투를 느낀다.
1인칭 화자인 유경은 자신의 원가족을 혐오한다. 그나마 사촌인 금성과 마음을 트고 지낸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 다닐 때까지 사귄 교진(오빠의 과외 선생이었음)을 우연히 마주치고는 또다시 보고 싶어 한다. 직장상사인 유부남 아저씨 길이란 인물과 술김에 자긴 했지만, 그에게 관심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막상 길이 유경에게 자신의 파트너가 되라고 강요할 때는 거절한다. 욕 박고 차단, 직장이라 그런 게 안 되나? 요즘 같으면 거절 이후에도 계속 들이대는 것은 직장내 성폭력, 괴롭힘, 스토킹 이런 게 되지 않나. 한 두 번 얽었다고 마치 자기 소유물인양 집착하고 거절당하자 얼굴에 물을 뿌려대고 화를 내는 길 아저씨 새끼가 정말 징그러웠다. 그런데 유경은 자신은 탈연애주의니까, 같이 자는데 지장 없고 연애 감정 느낄 필요도 없는 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론을 내린다.
내가 뭘 본 걸까. 주체성의 결론이 왜 그렇게 가는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작가는 그저 속물성을 가진 인간상들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사랑이란 현상도 관념도 믿지 않고, 사람에게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애초에 기대를 걸지 않고, 딜도를 선물하는 사촌에게 섹스하자는 말도 하고, 그래도 잘 남자는 필요하니까 연애 없이 끌리는 남자랑 하긴 할래, 그러는 화자의 모습이 뭐랄까...안타까웠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결정에 대해서는 그 이유든 뭐든 그럴 수 있지, 했는데 연애로 규정짓는 행위도 안 하겠어, 하는 건 뭐 본인의 선택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삶과 사람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도 수의사가 되겠다고 공부 열심히 하는 건 대단하긴 했다. 2000년도에는 회사 다니면서 야간 대학 편입해서 수의사 되는 게 가능했던 시대였던가… 암튼 모두가 좋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유경아, 사랑을 믿어봐, 라고 할 자신은 없었다.
책이 나오던 시기에는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언니 오빠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은 없다. 소설에 그런 흔적이 남아 있을까, 싶었지만 사람 사는 거 특별히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제목이 궁금하게 해서 읽게 되었는데, 그 제목이 소설 속 문장으로 놓인 부분은 감흥이 없었다. 심지어 지겹다면서 “그와 관계를 갖기로 마음을 정리했어.”하고 다짐까지 하는 걸 보면서 그냥 어질어질했다. 배수아 책은 이거 말고도 더 사 둔 게 있는 것 같은데 어쩌지.
+밑줄 긋기
-조직이란 잘 체계화된 폭력이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서 결혼을 하지 않으면 섹스를 할 수 없고 아이를 낳을 수 없고 가족수당을 타지 못하며 주변에 돌봐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 말년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채 느끼지 못하는 극심한 폭력이다.
사람들은 남자/여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먹이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서 일한다. (71,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의 결혼관은 이렇다고 한다. 이 중 첫문장만 마음에 든다.)
-그 아이는 원래 노동이란 걸 혐오했다. 노동이란 파출부나 가난한 집 딸이나 그리고 가끔은 엄마 같은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노동은 손에 굳은살이 배기게 하고 마사지를 받으러 다닐 시간이 없게 만들고 스트레스 때문에 히스테리가 되기 쉽다.(…) 미경은 내가 알기로 한 번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119, 노동 혐오는 너무 나갔지만, 노동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내 자신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지 않다. 유경, 이겨내라, 이겨내! 세상 사람들의 온갖 달콤한 혓바닥에 속아서 자신을 내주지 마라. 기억하라. 너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너뿐이다. 모든 관계는 허울이다. 기댈 생각은 하지 마라.(129,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나도 저렇게 마음 먹었을 것이다. 주체성에 대한 집착.)
-기억 아득한 젊은 날 나는 그를 사모했다. 지금껏 내가 경험한 또 다른 가장 고독한 것이었다. (131, 어제 읽은 책도 사랑하면 고독하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정형화된 역사에 익숙해져서 다른 형태의 진술을 해석하지 못한다. 아니 다른 형태의 진술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 역시 교진과 나에 대해서 지금 말하게 되었을 때 그 우화의 정형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말이란 도처에 함정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길은 단지 침묵뿐이다. (135, 나도 틀에 박힌 독후감 말고 다른 걸 써 봐야 하는 걸까.)
-지금 잘생기고 돈 많은 미혼 남자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별 볼일 없고 지지부진한 노예 상태로 사는 것이 결혼이지만, 그래도 자연도 하는데 내가 한 번의 경험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172)
-나는 앞으로의 인생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행운이나 성공도 없지만 치명적인 파국이나 불이익을 겪지 않고 진행될 것으로 믿는다. 그 대신 한 발 한 발 앞으로 가는 거다. (188, 이정도면 엄청 낙관주의 같은데)
-지금 당장 나에게도 꿈이 있다. 탈한국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프라이드도 아니다. 바로 웨이터가 서 있는 저 문으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다. 근사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는 척하는 계급의 그런 사람이. 상대편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드름과 자신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존재라는 오만한 관용으로 뭉친 사람이.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헤게모니의 승자가 된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에게 아주 쿨하게 말해 주는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하고. (207-208, 빌드업이 길었는데 한 마디 해주는 게 너무 약했다… 자본주의의 발기 부전 돼지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이 앞으로 나가지 않을 때는 무한급수와 확률 분포 같은 문제를 풀었다. 수학 문제를 풀고 있으면 인생의 추상적인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218-219, 작가의 말 중, 오우 진심이신가요? 저에게는 적어도 수학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논리적 해석이 안 되는 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