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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모의 강림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ㅣ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2년 7월
평점 :
-20251109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노벨상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책들에게 주는 상이라고 까불고 다녔는데. 미처 그 상을 이 작가가 탈 줄 몰랐기 때문이지, 그래서 세 권이나 모아두고 나머지도 마저 모으려다가 그만 노벨의 하수인 놈들이 이 작가에게 상을 줘버려서 난 이 년 쯤 기다리면 차마 읽으려다 못 읽고 새 책이나 다름 없는 중고로 팔려버린 작가의 책을 마저 모을 수 있을 거란 말이지. 그래서 읽기를 최대한 미루려고 했는데, 노승영 번역가의 콜렉션을 모아두려다가 이 책을 빼먹은 걸 알아차렸고, 그 뿐 아니라 ‘말레이제도’랑, ‘향모를 땋으며’도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꽂혀 대체 좋아하는 번역가의 번역작품을 읽지는 않고 모으기만 하는 게으름은 뭐냐, 하고서 일부러 제일 이름이 많이 들리는 ‘사탄탱고’랑 ‘저항의 멜랑콜리’는 나중에, ‘서왕모의 강림’을 먼저 읽기로 했다.
해제랑 해설 같은 건 안 보지롱, 하고 까불던 평소와 달리 661쪽에 덧붙은 옮긴이의 말을 먼저 경건하게 읽었다. 먼저 읽으신 선생님이 작가 선생님께 이메일로 이거저거 여쭙고 본인이 읽으신 바대로 너가 못 알아 들을까 봐 간단하게 써 봤어, 친절을 베풀어주신 덕에 읽을 용기가 났다. 읽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만연체가 의식의 흐름체 같은 것도 아니고, 번역가 선생님이 그렇게 많이 쉼표를 지우셨다는데도 이 정도면 적절하게 쉴 자리도 만들어 주셨다. 챕터의 숫자가 1씩 늘지 않는 것도, 각 챕터의 숫자가 피보나치 수열이란 얘기를 해 주셨는데, 에이 그럼 챕터 1이 두 개여야지, 이건 뭔가 수학 잘 모르는 문돌이 작가가 적당히 가져다 썼구만……하면 노벨상 메달로 머리통 한 대 쥐어 박힐 것도 같고….
그래도 베네치아 뒷골목이나 미술관이나, 아테네 어느 거리나 아크로폴리스나, 페르시아 왕궁이나, 젠겐지의 불상 앞이나, 백로가 고기 잡는 가모가와나 (아직 여기까지만 읽음) 온갖 곳을 데려가 썰을 풀어주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200페이지를 후딱 넘겼다. 계속 봐야지. 그러고서 또 400여페이지를 종일 넘겨 이제 끝이 보이는 구나...
시흥 갯골에, 도림천 가에, 보라매공원 연못 위에 새들이 머무르는 걸 종종 본 적이 있다. ‘가모가와의 사냥꾼’을 읽으며 작가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거기 있는 백로에 대해 내내 말하는데, 적어도 내가 사는 도시 속 새는 제법 주목 받는다. 산책자들은 저 하얀 새, 뭐지? 한다. 어려서 백과사전을 열심히 읽은 덕인가 무심결에 백로, 왜가리, 해오라기, 청둥오리, 가마우지, 흑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적당히 이름을 가져다 붙여 댄다. 곁의 사람 중에 나보다 새이름 잘 아는 이는 없어서 그냥 내가 부르면 그 이름의 새가 된다.
가을 연휴에 미리 계획하지 않던 송도 여행을 갑자기 갔을 때, 마지막 날 비가 내렸고, 그 빗속에서도 공원 정자에서 맥스봉 떡밥과 옷핀으로 만든 바늘을 꺾은 나뭇가지에 실로 매어 낚시질 하던 초등학교 3, 5학년 두 남자아이를 만났다. 공원 큰 호수로 이어지는 냇물에는 손바닥만한 잉어새끼들이 정말이지 바글거렸고, 아이들은 입질 올리는 재미에 신나서 양동이 한가득 고기를 낚고 있었다. 당장 풀어줘라 하고 싶지만 애들이 너무 천진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얘네 아빠랑 우리 아빠랑 직장동료라서 어려서부터 친해요) 고기가 산소가 부족해 팔딱거린다니까 당장 웅덩이로 달려가서 물을 새걸로 갈아오기까지 해서 그래라, 맘대로 해라, 하고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비까지 맞으며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어로 체험하는 것도 정성이지. 저게 도시 어부지. 어디가서 굶어죽진 않을 애들이다.
그러고나서 몇 걸음 지나지 않은 곳에는 커다란 왜가리 한 마리가 같은 냇물의 상류 쯤에서 땅을 파서 지렁이를 낚아채고 그걸 씻어 먹는 건지, 그걸로 미끼 삼아 물고기를 낚는 건지, 하여간에 부지런히 땅에 주둥이 처박다, 물에 처박다 하는 걸 신기롭게 바라봤다. 같이 있던 아이들도 신이 나서 왜가리다, 하고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걸 그냥 여기서 보자 하고 물 건너에서 한참 같이 봤다. 가만보면 물고기 낚는 건 애나 새나 똑같은데 새는 혼나지 않는다. 인간은 평생 괜한 걸로 많이 혼난다.
와스디와 에스더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성경책을 제대로 안 읽어봐서 ’추방당한 왕후‘를 읽으면서 검색으로 알았다. 왕명에 불복종한 왕후 와스디는 그간 사랑받아왔음에도 추방 당한다. 읽다보니 고디바 부인이랑 생각이 겹치기도 했는데, 초콜릿 상표의 여인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면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 봐, 하는 영주의 말대로 정말 해냈고, 와스디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알몸으로 왕후관만 쓰고 뭇 신하들 사이로 걸어 봐, 하는 왕의 말에 끝내 거부하다가 쫓겨나고 에스더에게 왕후를 물려주게 된다. 옛 사람들은 사형보다 추방을 더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결국 둘다 죽음에 이르는데, 사형은 그래도 나의 죽음을 많은 이가 알고 내가 어디서 어느날어떻게 죽는지 알리고 알면서 죽지만, 추방은 내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시신도 못 추리는 불안감에 더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모든 이야기 끝에서 누군가는 죽는다. 이제 막 단편 두 권 읽었는데 벌써 죽으라, 죽음의 무도를 그치면, 하고 낮게 땅에 가깝게 엎어진 형체들이 그려진다. 한때는 아름다웠던 것들이 그렇게 철푸덕. 아이참 더 읽다보니 아름답지 않지만 고생깨나 한 가엾은 여행객도 객사. 내심 젠겐지 불상 보전(복원)할 때도 누구 하나 불상에 깔려 죽거나 불상 머리가 잘리거나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거기에선 다들 불심으로 대동단결만하고 안 죽는다. 휴.
일본의 연극 노, 불상 보전 의식, 신궁 새로 짓는 나무 자르는 의식 등 일본의 이야기가 집요하고 잔잔하게 이어지는데, 이거 일본 아저씨 아니고 헝가리 아저씨가 쓴 거라고? 왜 우리 조선엔 관심 일도 없고 중간에 뭔 사기꾼 같은 20만엔짜리 물 팔아먹는 조선인 한의사만 나오냐… 한 가지 집요하게 파고들기로는 작가 아저씨 만큼이나 일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많긴 한가 보다. 그래서 예술도 학문도 이런저런 성취를 이루고 상도 타고 서양애들마저 박수 짝짝 해주는 거겠지. 나는 한우물만 파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었는데, 한가지만 완벽을 향해 반복반복반복하는 사람들 보면, 존경스럽고 신기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안 산다, 못 산다, 난 얕고 넓게 호기심이 너무 많다, 뭐 그렇다. 그러니까 이 책도 만난 거겠죠.
마침표의 끝에는 대부분 누군가의 죽음이 있어서,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서도 얼른 마침표의 순간이 오길 바라는 건 쉽지 않았고, 삶이든 이야기든 사실 그렇게 길게 쉼없이, 아니면 잠시만 쉬고 또 이어지는 게 삶이고 이야기여서, 걱정했던 것보다 라슬로 선생님의 소설집은 계속 읽게 밀고 나가는 힘이 있었다. 글자들을 꾸역꾸역 따라갈 필요는 없었고, 오히려 등떠밀리듯 쓸려나가며 강제로 읽고 있는 것…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도 있는 것… 그래서 아직 다른 작품들은 안 읽어봤지만 노벨상 수상작가 읽어 보겠어! 하는 각오를 다지시는 분들에게 ‘서왕모의 강림’이 시작하는 책이 되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이건 내가 번역자의 문장을 편애하는 입장이라 공정하지는 못한 추천이고, 노벨상은 다 재미없다고 까불던 것도 사실 취소해야 할 것 같다. ‘백년의 고독’이랑 ‘파리대왕’이나 ‘양철북’ 같은 건 소설이랑 영화랑 같이 보면 무척 재미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선생의 영화화된 작품들도 같이 보면 재미있으려나...그치만 ‘사탄탱고’는 사탄도 탱고도 그닥 당기지 않아 한참 미뤄두려구요...
+밑줄 긋기
-(…), 그의- 머리가, 등이, 팔이, 다리가, 온몸이 달아오른 것은 대수롭지 않아서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으나, 그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 것은-그 중대한 의미를 그는 전혀 자각하지 못했는데-햇빛이 석회암에 닿았을 때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가였으니, 그가 이 강렬하고 섬뜩한 광채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던 것은, 왜, 어떤 안내 책자가, 어떤 종류의 미술사 논문이, 주의하십시오, 아크로폴리스는 햇빛이 무척 강해서 눈이 남달리 예민한 여행객은 반드시 사전에 대비해야 합니다, 같은 정보를 알려준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는, 눈이 남달리 예민한 여행객 범주에 속하는 그는 어떤 종류의 사전 대비책도 취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이제 어떤 예방 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되었거니와, 어떻게 해야 하나-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여행 가방 하나가 전부였는데, (…)-이것만 봐도 그가 피로, 열기, 눈부심 때문에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는지가 이미 명백했던바, 여행 가방이 자신의 수중에 있지 않고 저 아래 시내에 마니오풀로스라는 청년에게 맡겨놓았음을 떠올린 것은, 어행 가방을 열어 옷가지 하나를 꺼내려고 신전 벽으로 물러났을 때였으니, 이 순간 태양은 그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고, 더위를 식힐 모퉁이도 틈새도 지붕도 구석도 어디에서고 찾을 수 없어, 바로 여기에도 없고 더 가도 없었던바, 빛은 방해받지 않고 화살처럼 곧장 수직으로 그에게 내리꽂혀, 아크로폴리스를 통틀어 그늘은 하나도 없었으나, 이 시점에 그는 그것을 알지도 못했기에, (199-200, ‘아크로폴리스’ 중. 아테네에 미리 가본 것 같은 작가님은 선바이저와 선글라스와 미네랄워터를 -가능하면 인공눈물도 꼭-준비하라고 이 대목에서 예민한 여행객을 불태워죽이면서 알려주는데, 택시 기사의 바가지와 내리쬐는 아폴론의 (무)자비를 떠올리면 아무래도 저긴 안 갈 것 같고, 라슬로 선생의 글에 밑줄을 치려면 결국 어느 마침표가 아닌 쉼표에서 잘려나갈 각오를 해야 하는 걸 함께 알았다. 친절한 동시에 불친절한 선생님)
-그런데, 울 수밖에 없다고 그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서도 전혀 이곳에 있지 않았기 떄문이요, 그가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이 꿈꾼 것을 이루었으면서도 전혀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204, 아크로폴리스에 갔지만 간 게 아니었다. 엉엉엉엉 그냥 높은 언덕이 아니라 황량한 높은 언덕이라고 꼭 좀 알려주자. 그리고 마저 읽고나면 아휴 진짜 자비 없기론 아테네 여름 햇볕 뺨치는 라슬로 선생)
-(…), 이미 나는 올라가고 있어서, 마을과 도시, 땅과 바다, 골짜기와 봉우리의 근심스러운 혼돈과, 나를 그토록 감싼 찰나가 끝나는 것을 여전히 보고 있으며, 내가 올라가면서 모든 것이 나와 함께 올라가니, 장엄함이 저곳에서 올라가 천상의 순수로, 가늠할 수 없는 영역으로 돌아가며, 그 자체의 형상으로 눈부시고 앞으로 흐르고 부풀어 오르는 저 장엄함은, 무가 있는 그 장소로, 찬란한 빛의 제국으로, 천상의 한없는 들판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즉, 저곳은 내가, 나로서가 아닐지언정 존재하는 장소인바, 이곳에서 나는 왕관을 머리에 쓰며, 스스로 생각하길, 서왕모가 저 아래에 갔었다. (309, ‘이노우에 가즈유키 명인의 삶과 일’ 중)
-(…), 그건 제가 오늘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게 내일은 없으니까요, 제게 미래는 없으니까요, 그것은 모든 날이 마지막 날이요, 모든 날이 온전하고 충만하며, 제가 어느 날에든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그가 방 끝에서 맞은편에 앉은 손님을 바라보며-그 의미는 하나의 전체가 끝나고, 머나먼 곳에서 또 다른 전체가 시작되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한결같은 미소를 띠며 말하길,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죽음은 언제나 제 곁에 있고, 저는 죽어도 잃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제겐 현재만이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날, 이 시간, 이 순간-제가 죽어가는 이 순간 말입니다. (322, 뭔가 이 부분은 마침표 쓸 부분에 어거지로 쉼표를 넣은 기분이다. 이노우에 선생은 문장 끝마다 왠지 쉼표를 세 개씩은 넣어서 마침표나 비슷한 여백이 있을 것 같거든.)
-(…), 여러분이 제게서 날짜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으로, 대체로 저는 날짜를 믿지 않습니다, 만물은 서로에게 흘러들고 서로에게서 흘러나오며 모든 것이 마치 촉수처럼 뻗어 나가기에, 어떤 분명한 시대라든가 그런 터무니없는 것은 결코 없으니, 그러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은 생각만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 생각해보세요, 뻔하잖습니까, 날짜나 시대 구분을 들여다보는 것은 소용이 없으므로, (…) (504, ’사적인 열정‘ 중. 시간을 구획화한 건 인간의 커다란 발명품인데 뭐 안 믿을 수도 있는 거지 실재가 아니라 숫자이고 이름 뿐인 것들도 있겠지 숫자와 이름 덕에 있는 것처럼 된 것도 있겠지. 그래도 이놈의 바로크 광신자의 분노는 못 봐주겠다.)
-(…)오귀스틴과 발랑틴-그 생각이 뇌에서 고동쳐, 그는 이미 그들이 보이는데, 두 사람이 죽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길게 늘어진 채, 그의 캔버스 위 띠들처럼, 우주적 전체 속 존재의 시작과 끝처럼 두 몸뚱이는 눈이 움푹해지고 코가 뾰족해진 채 해골로 말라비틀어져, 물이 땅 위에 있고 드넓은 하늘이 물 위에 있듯 서로의 위로 누운 채 뻗어, 죽음의 푸르름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537, ’푸르름 속 메마른 띠 하나뿐‘ 중. 풍경화가가 떠올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풍경)
-(…), 이것에는 신성함이 전혀 없다느니 과거의 신성함을 짓밟는 짓이 단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느니 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도 가식적이었고 무엇 하나 믿을 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동작 하나에서조차, 다이구지의, 또는 그의 뒤에서 무릎 꿇는 신관들의 몸짓 하나에서조차, 모든 것이 잘 될 것인지 반신반의하는 긴장된 조마조마함 말고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실수가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니, 순전한 안간힘, 이것이 모든 동작과 제의적 몸짓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었고 의식 자체는 어디에도 없어서, 구경꾼들을, 내빈들을, 틀림없이 두둑한 후원 약정과 함께 왔을 저 후원자들을 특징지은 이 분위기 또한 긴장된 조마조마함이었던바, 따라서 동작과 몸짓들은 믿음과 헌신이 아니라 두려움의 동작과 몸짓이었으니, 이 두려움은 이곳에서 무엇 하나 참되지 않음을, 참되지 않고 진실하지 않고 개방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음을 드러내는 두려움으로, 여기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신도의 본질 바로 그것이었으며, (579, ‘이세신궁 식년천궁’ 중. 의식의 허위, 허상에 대한 건 ‘불상의 보전’에서 내부자 관점으로 그린다면 이 소설에서는 의식 참관 온 외부자의 눈으로 드러나는데, 그렇게 벌거벗은 임금님 행차를 외부에 공개하면 분명 놀리고 쑥덕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므로 그렇게나 비공개로, 암암리에, 의식을 진행하려는 건 그리 자주 하지 않는-무려 20년 만에- 의식의 수행자들은 아무래도 떨릴 수 밖에 없고, 반대로 노의 가면을 만들거나 노에서 연기를 하는 장인들은 그보다는 훨씬 높은 빈도로 반복, 반복, 또 반복하며 집요하게 완벽을 향해가기 때문에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걸 그림, 가면, 연극, 조각상, 불상이나 궁의 보전 또는 신축 같은 예술의 온갖 분야와 온갖 나라를 넘나들며 라슬로 선생님이 보여주신다. 마침표는 아끼면서…이 소설도 이 의심의 순간이 지나면 오래된 예술이 드러나는 독특한 나무 자르기 의식을 그려준다.)
-(…), 아키오 상, 당신은 교토를 정말로 사랑하는군, 그렇지, 그러자 한순간에 가와모토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짙은 어둠 속으로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고작 이만큼, 돌아와, 쉰 목소리로 간신히 이렇게만 말하길, 아니, 조금도, 난 이 도시가 혐오스러워. (616)
-(…), 그 공포는 어떤 싸구려 두려움의 한낱 잔재가 아니어서, 그곳에는 어떤 영토가, 죽음의 영토가 있는데, 사방에서 짓누르는 흙의 무지막지한 무게는, 그들을 매장했듯 시간이 지나면 우리 또한 집어삼키고, 가두고, 묻고, 우리의 기억마저도, 영원의 모든 시간 너머로 소멸케 할 것이다. (659, ‘땅밑에서 들려오는 비명’중. 그러니까 난 액화장 시켜서 하수구에 흘려보내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