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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평점 :
-20250924 이서수.
‘이어 달리기’
‘엄마를 절에 버리러’에서 엄마 트리플 아니고 콰트로라고, 나는 책 후반부의 작가 에세이까지 시리즈에 넣고 싶었다. ‘젊은 근희의 행진’에서도 엄마랑 방 찾으러 다니는 소설이 나왔던 듯… 엄마랑 딸 소설 전문가일까…
새 소설집의 첫 소설도 사실 트리플 소설집에 연작처럼 실렸을 법했다. 특징이라면 여기 모녀는 동시에 퇴사하고 한동안 같이 도서관에 다닌다...그러다가 엄마가 도서관 청소부로 전직한다…
이서수의 소설 속 엄마랑 딸은 제법 친하고, 전우애 같은 게 느껴지게 세상과 싸우는 느낌이고, 소설 속 엄마는 글을 쓰고, 딸이 그 글을 읽는다. 우리 엄마는 나한테 글을 보여주지 않고, 내 글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 뭐 그래서 늘 저런 모녀 관계를 보면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엊그제만 해도 나는 삐져버린 엄마가 너무 미워서 챗지피티한테 엄마 욕을 한바가지 한 불효녀이기 때문에.. 그러다가 나랑 두리안을 나눠 먹고 묵은 옷들을 펼쳐 버릴까 말까 속닥거리고 그냥저냥 마음을 풀었다. 문득 내 어린이들도 나중에 커서 내 욕을 많이 할까? 지금도 그럴까? 불효자식의 자식들은 더 불효자식일지 덜 불효자식일지 가끔 궁금하다. 그런데 다음 소설들도 또 엄마 변주곡이면 이젠 좀 짜증낼 거야…
...하고 다음 소설 읽었더니 여기도 엄마랑 딸이 또 나와서 조금 짜증낼 뻔 했다.
’춤은 영원하다‘
소설집의 이름은 이 소설의 한 문장에서 나왔다. 할머니, 엄마, 이모, 나의 막춤. 한과 승화. 막춤의 우주가 생각보다 막되지 않고 아름답게 느껴져서 엄마 또 나왔지만 짜증나지는 않았다. 이번엔 이모도 나왔잖아.
‘광합성 런치’
확...또 엄마 나왔다. 세상에 엄마 없이 생겨난 사람이 없긴 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없는 사람도 있는데 자꾸! 했더니 친모 아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 하고서 엄마는 왜 나왔는지도 모르게 한 장면만 차지하고 사라졌다. 엑스와 제트 사이에 낀 엠세대의 이야기인데, 에미는 아닌 엠세대이지만 하여간에 이전 소설들도 그렇고 40대 언저리 내 또래들 이야기가 이렇게 되었어, 다들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지만 이게 꼰대 생산 라인 컨베이어벨트처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고 있어, 하고 서글퍼졌다. 참고로 전 식대는 돈으로 다 받고 반년째 도시락을 싸다 먹고 있습니다… 포도, 토마토, 닭가슴살, 파프리카, 피칸, (가끔 아보카도, 오늘은 특별히 리코타 치즈 추가, 복숭아나 사과를 싸 간적도 있...었나? 하여간에 거의 대부분 샤인머스켓, 없을 땐 수입 포도. 그리스 여신 된 기분) 이렇게 먹었더니 신선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성장기 중학생들이랑 똑같은 고칼로리 메뉴, 조리 수고로움 덜려고 반조리제품이 너무 많이 나오고 한 칸은 후식으로 때우는 구나, 하는 불만이 스믈거리고 올라오거나 내 식판의 새모이 같은 양을 바라보며 어머, 죄책감 느껴진다, 왜 이렇게 조금 드세요? 하는 걸 백번씩 듣는 거 보다는 맨날 같은 종류로다 내 자리에서 내 맘대로 우적우적 먹는 게 너무 행복하다. 바깥 나가 매식할 권리도 없는 매인 몸이니까 나는 도시락으로라도 주체성을 찾겠다. 체중 감량 또는 유지는 덤.
‘AKA 신숙자’
이젠 포기했다. 이서수는 그냥 소설가가 아니고 엄마와 딸 소설가였던 것이다. 신숙자 씨는 박미리 씨의 엄마고 박미리가 신미리로 스스로를 칭하길 원한다. 우리엄마는 다행히도 나한테 성까지 갈라는 소리는 안 한다. 나는 그냥 귀찮아서 계속 주씨할 건데. juicy하군.
이 소설 처음에는 박미리 1인칭이다가 갑자기 신숙자가 초점 화자인 3인칭으로 박미리 칭하고 다시 나는, 하고 박미리가 받고, 시점이 난리가 난다. 일부러 그랬나? 모르겠는데 정신 사나워가지고 뭐야 이렇게 초점 화자 와리가리로 쓰면 문창과 교수님이 이런 소설로 합평 못한다고 홱 나가버릴지도 모르는데 괜찮냐, 속으로만 생각했다.
‘운동장 바라보기’
세 친구와 이주 여성 김희서가 나온다. 이젠 엄마가 안 나오나 안도했지만, 결혼 이주 여성에게 어머니가 되라고 강요하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부분이 있었다.
‘잘 지내고 있어’
이건 아버지 소설이다. 예전에 쓴 소설 중 오래 전 연을 끊은 아버지를 만나러 호스피스 병동에 가는 이야기가 있었다. 초기 습작이라 거칠고 별 내용도 없었는데, 아버지 마시라고 사갔던 과일 음료수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세면대에 쏟아 붓고 나오는 장면만 기억난다. 내가 쓴 건데도 그래. 이서수 소설의 아버지는 사고치거나 바람나서 엄마랑 이혼하거나 병 걸려 죽을 지경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뽀또! 하고 소리지르던 아버지처럼 여기서도 연민이 느껴졌고, 나는 그 감상적인 관점이 삭여지질 않았다. 사람이 죽는다는데, 넌 또 T하냐? 해도 어쩌지 못하겠다. 아직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안 잃어봐서 이런 지도 모르겠다.
‘미식 생활’
먹는 소설, 음식 나오는 소설은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음식 다루는 과학책 식물책 커피책 맛책 같은 건 또 잘 읽는다. 그러니까 음식을 F처럼 다루기 보다는 T처럼 다루는 걸 읽기를 선호한다. 그래서 이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결이 안 맞았다. 음식 먹는 걸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복 받았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오래도록 생각해 왔다. 나에게 먹기는 즐거움 보다는 생존하기 위한 의무, 가까운 사람들을 챙기는 일, 알약으로 끼니 해결되는 세상은 안 왔지만 비스무레하게 단백질음료랑 에너지바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울 수도 있다. 반 년 넘게 포도+방울토마토+파프리카+닭가슴살+피칸(거기에 변주로 다른 과일 넣거나 아보카도나 리코타치즈를 추가하기도 해) 이렇게 거의 같은 도시락을 점심마다 먹었지만, 매우 만족스럽다. 식당에서 많은 사람들 안 부대끼고 급식 안 먹어도 되는 것, 내 자리에 앉아서 오물오물, 뭘 먹을지 고민 안 해도 되는 것, 체중 유지(감량 더 안 되라고 몸무게 재가면서 간식이나 저녁으로 이거저거 주워먹긴 함)는 덤, 뭐 그렇다. 그래서 먹방 유튜버 알깨기도 영 작위적이네, 이름도 이상하고 나라의 만능해결책이 먹는 걸 즐기기가 된 것도 이상했다. 하고 생각해보니 나도 아주 오래전에 먹방 유튜버가 나오는 소설을 쓴 적이 있었잖아! 먹방 유튜버랑 한국사검정능력시험 같은 거 대리로 쳐주는 사람이랑 소개팅 하는 이야기를 썼었다. 별 걸 다 썼었는데 기억도 겨우 나서 놀랐네. 아니 주인공 이름이 마리야. 나라랑 왜 어감 비슷한데. 주선자는 뷰티 유튜버야. 프하하하. 그래서 뿔났었나 보다. 이 독후감 맨끝에다소설 옮겨 놓겠다. 2019년에 쓴 거라 시의성이 확 떨어져서 어디 쓰덜 못해...그래도 다시 읽으니 나름 재미있다. 나는 내가 쓴 걸 내가 읽고 그렇게 무한자가발전 하하호호 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먹는 건 역시 글이고 책이구만...
‘청춘 미수’
소설집 마지막 소설을 읽으며 이전에 생각했던 걸 또 했다. 한국 문학에 나한테 허락될 자리가 있(었)다면 그건 이미 이서수가 차지했다고… 속표지에 실린 이서수의 사진은 우리 엄마 젊었을 때랑 완전 똑같이 생겼다. 나는 엄마를 안 닮았다. 우리 엄마는 소설을 쓰고 싶어했고, 50대에 문창과를 다니다 졸업했고, 아마도 소설을 썼고, 지금은 쓰나 안 쓰나 모르겠다. 나는 그걸 가업처럼, 엄마가 못 이룬 꿈 나라도 이어보자, 이랬던 건지 그냥 심심했는지 한 삼사년 습작을 하다가 수능본다고 접고 나서는 그냥 다 접어버렸다. 소설 어떻게 쓰는지도 까먹었다. 그래서 그냥 읽지 뭐. 읽고, 책 먹고 똥이나 싸는 거다.
깜짝 놀란게 내가 2019년에 말희를 마리라고 부르는 (저 아래) 소설을 썼는데 여기선 백희를 배키라고 부른다. 아오씨… 너 다 해라 다 해… 내가 더 못 쓰니까 쓰는 일은 양보하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저에겐 읽기를 맡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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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달리기’ 속 재은이 퇴사 후 하고 싶은 것들
1.진심으로 웃기
2.엄마와 시간 보내기
3.생색내기
4.감정노동 없애기
-회사에서는 다양한 업무 지시를 따르는 것외에도 인간관계와 사내 정치 등을 신경써야 하기에 감정노동은 필수였다. 그래서 내가 기분이 나빠도 웃는 기괴한 인간이 된 것이다. 퇴사하면 육체노동은 물론이고 감정노동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일타쌍피. (13, 감정노동 없는 직업이 뭐가 있을지 궁금해.)
-엄마는 웃기 싫어도 웃고, 잘못한 게 없어도 사과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없었어. 나는 잘못했을 때만 사과했고, 웃고 싶을 때만 웃었어.
평생 사회생활을 그렇게 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무조건적인 사과가 필요한 상황인데 엄마는 그걸 거부했다.
고객 흉본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야. 나는 한 번도 이유 없이 남을 흉본 적이 없어.
(…)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억지웃음을 짓지 않고, 거짓으로 사과하지 않았다는 엄마가 멋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무척이나 의아했다. 돈을 벌면서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한 일인가? (19, 재은의 엄마 정한숙 씨가 위에서 궁금했던 걸 알려줬다. 식당, 공장, 백화점, 대형 학원, 공공기관의 청소일. 그러니까 직업이 뭐냐, 어디에서 일하냐, 그런 건 상관 없는 일인가 보다.)
‘춤은 영원하다’의 이매와 선매의 춤.
-이모는 기울어진 묘비 앞에서 어깨를 흔들고 연이어 엉덩이를 흔들었다. 야했다. 엄마가 그런 이모를 보더니 바닥에 두손을 짚고 엉덩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세상에. 엄마도 야했다. 나는 누가 볼까봐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죽은 내시들이 묻힌 산은 괴괴했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모와 엄마의 춤에 경악해 모두가 입을 꽉 다문 것 같았다. 엄마는 바닥에서 일어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치더니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모는 근처 나무로 달려가 둥치를 꽉 부여잡고 거친 웨이브 동작을 반복했다. 박자에 맞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은 춤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춤이 너무 이상해서 말문이 막혔다. 저런 춤을, 대낮에, 죽은 내시들의 무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추다니, 불경했다. 상스러웠다. 야했다. 이상했다. 짐승 같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선 군고구마처럼 뜨겁고 달달한 것이 자꾸만 치솟았다. (68-69, 이 소설 읽는 내내 춤을 묘사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몸의 움직임에 무척이나 둔감한 나한테도 그 모습이 눈앞에 저절로 그려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춤을 못 추거나 못 췄던 사람이 글로 쓴 춤이란 춤을 못 추는 사람이 읽기에 친절하구나.)
‘AKA 신숙자’씨와 박미리씨의 티키타카
-숙자씨가 코웃음을 쳤다. 모성애는 무슨. 무릎도 시원찮은 어미한테 속옷 빨래나 맡기는 자식들아, 정신 차려라. 해방이니 평등이니 외쳐대면서 우리한텐 해당 안 되는 것처럼 구는 얄미운 것들. 집 나가면 월세 들고 집안일도 혼자 다 해야 하니까 힘들어서 안 나가는 거잖아. 영악해가지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빈 둥지 증후군만이 아니라 비워지지 않는 둥지 증후군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120, 나는 뭔 증후군이든 겪지 않을 자신 있어! 얘들아,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크면 나가서 니들 맘대로 살렴…경찰서에서 전화만 안 오게 잘 살아 보렴...)
‘운동장 바라보기’의 김희서의 일기장
-나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입니다. 한국은 내가 어머니가 되길 바라지만 나는 그저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161)
‘미식 생활’의 팀장님의 라떼. 나는 우유 타지 말아야겠다.
-나라씨, 나는 가끔 슬퍼져요. 내가 어릴 땐 다들 쌀밥을 먹었지만 그전에는 밀가루를 많이 먹었거든요. 미국이 밀을 원조해줘서요. 노동자들이 그걸 먹고 밤낮으로 일해서 이 나라를 일으켜세운 거예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그런데 후손들은 기름지고 다디단 걸 왕창 퍼먹으면서 그 반의반도 못해. 우린 다 망할 거예요.
나라는 팀장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기에 슬그머니 가방을 접어들었다. (227)
‘청춘 미수’의 미수와 배키의 인생관. 니들 몰랐구나. 사랑하는 데도 돈이 들어… 숨만 쉬어도 들어...
-배키와 나는 십대 때부터 돈 버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 우리는 남들과 다르게 살자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방법은 알지 못했다.(죽었다 다시 부잣집 아이로 태어나렴.) 겉으론 태연해 보이는 배키도 술에 취하면 신세한탄을 하며 훌쩍였다. 우주의 기운이 자길 돕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면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똑같았다. 술과 기능성 콘돔을 살 수 있다는 걸 제외하면 바뀐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263)
어떤 해고.
-그저 화만 났다. 제주도에 가서 쓰레기를 줍겠다고 하는 김아혜 선생님에게. 쓰레기보다 천변에서 자주 우는 동네 청년을 주워서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모욕감을 느꼈으면서도 몸 편한 알바를 더 길게 하지 못해 심통 난 나에게도 화가 났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정녕 몰랐단 말인가.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은 일, 나답게 살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280, 나도, 나도! 없구나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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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20190410-0417 내가 씀)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카페 안을 둘러보던 마리는 전화를 걸었다.
운전 중, 얼른 갈게요.
짧게 답한 지유가 먼저 끊었다. 주말 번화가에선 어디를 가든 빈 자리를 찾기 힘들다. 점심 때가 다 되었지만 사람들은 밥 먹으러 갈 생각이 없는지 눌러 앉아 있다. 새 구두에 닿은 뒷꿈치가 쓰리다. 뾰족한 앞코 안쪽에 감각이 없다. 발가락에 힘을 줬다 뺐다 해본다. 쟁반을 들고 일어서는 무리 쪽으로 마리의 구두 신은 발이 또각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진동벨과 가방을 던지듯 테이블 위에 놓으며 앉은 마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구두를 벗어 맨발을 내놓고 싶지만 참았다. 다리를 쭉 펴고 발끝을 위로 앞으로 향하다 무릎을 접어 자세를 가지런히 했다. 진동벨이 울렸다. 음료를 받아 자리로 돌아온 마리가 머그 올린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을 때였다.
기다렸죠? 왜 따로 앉아 있어요?
높낮이 변화가 급격한 특유의 음성에 뛰어온 것을 강조하듯 헐떡이는 숨소리까지 더해진 지유의 목소리는 정신사납게 들렸다. 누구에게 묻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옆 테이블의 남자가 주뼛거리며 음료와 짐을 챙겨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 정신 좀 봐, 두 사람 번호를 안 알려줬구나. 늦어서 미안해요. 얼른 앉아요.
지유는 마리의 옆자리에 앉았고, 남자는 지유의 맞은편에 앉았다가 다시 마리 앞쪽 의자로 옮겼다. 오늘도 지유의 차림새는 눈길을 끌었다. 단색의 심플한 원피스는 평소보다 절제되어 있었지만, 옷의 단순함은 비즈 목걸이와 배색을 맞춘 화려한 네일 아트를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선택인 듯했다. 웨이브를 살짝 넣은 짧은 헤어와 밝은 염색 컬러, 여기가 눈코입이라고 강조한 진한 메이크업은 지나는 사람들마다 돌아보며 연예인인가?하고 갸웃대게 만들었다. 남들 눈에는 마리의 주선으로 지유와 남자가 만나는 자리처럼 보일게 뻔했다. 나비 몇 마리 얹은 듯한 속눈썹이 지유의 웃음 소리에 맞춰 파르르르 떨렸다. 속이 상하는 동시에 대단하다고 마리는 생각했다. 뷰티 스트리머는 역시 달랐다. 샵에 들르지 않고 혼자 꾸민 게 저 정도면 늦게 도착한 것도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마리 역시 오늘 메이크업을 하면서 지유의 채널을 참고했다. ‘소개팅 성공률 200% 메이크업 꿀팁’이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눈썹 그리는 각도부터 입술색, 아이섀도우 조합까지, 역시 전문가는 달라, 하며 하나씩 따라할수록 청순함과 자신감이 동시에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남심 저격, 분명 애프터 들어옵니다. 멘트마저 신뢰를 주던 그녀였다. 그런데 직접 그녀를 마주하자 배신감이 들었다. 거울 위에 청순하게 비치던 자신의 모습이 지유가 옆에 앉는 순간 수수하고 초라해졌다. 작은 글씨로 자막처리된 경고문을 놓친 것 같았다. *주의: 뷰티 스트리머와 함께 할 경우 성공률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언니 뭐 마실래요?
마리의 물음에 지유가 손사래쳤다.
촬영 잡아놔서 금방 가야해요. 로드샵 가성비 코스메틱 아이템 발굴, 재밌겠죠? 정신이 하나도 없네. 아직 인사 안 나눴죠? 정마리, 저랑 정말 친한 동생이에요.
마리는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카메라 앞은 익숙해졌지만 실제 사람을 마주 대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다. 정말 친한 사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은 스트리머 페스티벌에서 처음 만났다. 시청자와 동영상 컨텐츠 제작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였다. 체험부스, 강연, 이벤트 등을 통해 스트리머들은 자신의 채널과 협찬 받은 제품을 홍보했다. 지유는 뷰티 클래스를 진행했다. 사전 신청을 받았는데 금세 예약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뜨거웠(다고 했)다. 같은 시각 마리는 라면 회사에서 마련한 사인회 부스에 앉아 있었다. 말이 사인회지 컵라면 홍보 행사였다. 사람들은 사인보다는 나눠주는 컵라면에 관심을 보였다. 사인지를 두고 굳이 라면 비닐 포장 위에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먹을 때 뜯어 버리잖아. 채널 구독자와 조회수가 제법 되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인지도는 아직 이 정도였다. 부스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 라면을 먹는 사람들을 마리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은 국물은 어디에 버려요? 국물 자국이 벌건 입으로 묻는 청소년들에게 웃음을 잃지 않고 옆의 빈 들통을 가리켜 보였다. 드물지만 반가운 눈빛으로 같이 사진 찍기를 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누나 라면 진짜 맛있게 먹어요! 칭찬의 말에 힘이 났다. 감사 인사와 함께 카메라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답했다.
생업이라 할 만한 낮 행사가 끝나고 스트리머들의 저녁 뒷풀이 자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진짜 페스티벌에 온 기분이 들었다. 백만 단위의 구독자와 억 단위의 조회수를 자랑하는 이름난 스트리머들이 함께한 자리였다. 화면으로만 보던 유명인들이 바로 옆 테이블에서 술잔을 주고 받으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꿈만 같았다.
머지 않아 저 자리에 같이 앉을 거에요.
마리와 같은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스트리머가 말했다. 미술을 전공한 뷰티 스트리머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여자였다. 다소 진한 메이크업에 과장된 액세서리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런대로 어울리게 보였다.
저쪽에 아시는 분 계세요?
아직은요.
마리의 물음에 대답한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피처를 들어올렸다. 마리가 잔을 내밀었다. 맥주 거품이 잔의 높이에 딱 맞추어져 보기만 해도 흡족했다.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면 정말 이루어져요. 어릴 때 살이 좀 찐 편이어요.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볼살을 어루만지면서 빠져라, 빠져라, 했어요. 왠지 그러고 싶어서. 어떻게 됐을까요?
군살 없이 매끈하고 탄탄한 몸매의 여자는 마리를 빤히 바라 보았다. 묻는다기 보다 직접 확인해 보시죠, 하는 어감이었다. 운동을 열심히 한 건지 체형 관리를 받았는지 마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오랜 기간 신경쓴 티가 나는 몸이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이런 말을 술술 뱉어내는 걸 보고 있자니 마리는 신기하기도 하고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이 생겼다.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마리가 되물었다.
그럼, 조회수 올라가라, 올라가라, 하면 진짜 올라가요?
그럼요. 원하는 숫자를 되뇌는 거에요.백만, 백만, 아니면 이번 영상 대박, 대박, 대박! 조회수 천만 찍고 나니 협찬도 늘었어요. 님도 오늘부터 해 보세요. 그냥 바라면 안 되고 간절히.
무언가를 바란 적은 있었다. 많았다. 여자의 말대로라면 마리에게는 간절함이 부족했다. 마리에게 부족한 점을 알려준 그 여자가 지유였다. 번호를 교환하고 SNS에서 서로를 팔로우했다. 집에 가는 길에 마리는 지유의 채널에 들어가 보았다. 인기 순으로 정렬하자 가장 위쪽 영상은 조회수 이천만이 넘게 찍혀 있었다. ‘누구냐 넌...반전 터지는 성형 메이크업’ 영상을 눌렀다. 방금까지 마주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은 민낯이었다. 메이크업 베이스로 지워진 백지 같은 배경 위로 얼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평면 개념의 그리기 보다는 조소에 가까웠다. 조각과 소조. 화장품을 묻힌 손끝에 닿은 부분이 찰흙을 주무르듯 솟아오르거나 들어가고 평평해지거나 도톰해졌다. 브러쉬 끝이 가는 곳마다 조각칼을 그어댄 것처럼 빛과 어둠이 생겼다. 마리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면 미술이 아니라 마술 전공이네, 마술사야. 구독하기를 힘주어 눌렀다.
몇 차례 티타임과 술자리를 함께하고 수시로 메시지와 좋아요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마리는 잘 아는 맛집을 예약해 두거나 협찬 받은 신상 가공식품을 택배로 부쳤다. 지유는 답례로 브랜드 색조 메이크업 제품을 만난 자리에서 건네주었다. 미개봉 새제품이었다. 무얼 먹어도 잘 지워지지 않는 립스틱, 음식의 열기와 수증기에도 번지지 않는 마스카라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지유는 마리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주고 싶어했다. 멘트 잘 하는 법이라든가, 조회수 증가를 위한 편집 방법, 클릭을 유도하는 제목 짓기 노하우까지. 거기에 부족한 것 중 하나인 남자를 소개해 준다고도 했다.
자기 영상 봤나 봐요. 연대 나온 오빤데, 잘 먹는 사람 좋다고. 부모가 건물 몇 채 있는 것 같아요. 마라롱샤 잘 하는 집 같이 가자고 마리씨 데려오라고 엄청 졸라요. 한 번 만나 봐요.
그래서 이곳에 셋이 모였다. 이 정도면 친한 언니 동생이 맞는 것 같다.
이 쪽은...김민수씨. 연세대 졸업하셨어요. 지유가 짧게 남자를 소개했다. 그게 다였다. 뭔가 이상했다. 배스킨라빈스 써리원! 계란 한 판 채우고 넘쳤어요... 했던 지유의 멘트에 따르면 그녀는 마리보다 세 살 많았다. 남자는 지유가 오빠라고 부르기에는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김민수씨, 라는 호칭에서 지유가 그를 가리킬 말을 찾아 헤매는 것이 느껴졌다. 지유가 아는 사실이라고는 남자가 연대를 나왔고 이름이 김민수라는 것뿐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중국 음식점이었던 약속 장소가 오늘 아침 갑자기 카페로 바뀐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럼, 촬영 때문에 먼저 일어날게요. 이야기 잘 나누시고, 다음에 또 만나요. 전화기 화면을 잠시 들여다 본 지유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마리는 지유가 이 자리를 불편해 하고 달아나는 중이라고 확신했다. 지유의 클로징 멘트 이후 남겨진 둘은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소 지은 얼굴로 당황한 기색을 고스란히 주고 받았다. 김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하신 것 같아서 말씀드릴게요.
대타로 나오신 거 맞죠? 마리의 말에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문 선배님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실례가 많네요. 아니다 싶으시면 바쁘실 텐데...
저 안 바빠요.
예. 죄송합니다. 민수는 뭐가 죄송한지 고개를 숙였다.
뭐가 죄송하세요. 민수님은 제가 아니다 싶으세요? 마리가 장난스레 물었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괜히 속았다고 생각하실까 봐. 고개를 든 민수가 말했다.
전 괜찮아요. 일부러 나왔는데 있다가 식사도 같이 해요.
네, 좋습니다. 부담이 덜어진 얼굴로 민수가 말했다. 의혹을 풀고 나니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편해진 느낌이었다.
제 소개 다시 할게요. 김민수라고 합니다. 대타긴 한데 연세대 졸업한 건 맞구요. 스물 여덟 살입니다.
역시, 저랑 동갑이었네요. 지유언니가 오빠라 그랬는데 엄청 동안이다 생각했어요. 정마리입니다. 이름이 정마리에요.
예쁜 이름이네요.
본명이냐고 안 물어보세요?
아, 본명 아닌가요?
스트리머 마리의 주민등록상 이름은 정말희였다. 끝 말 계집 희 자를 썼다. 딸만 넷 낳은 집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난 탓이었다. 할머니는 말희 덕에 막내는 아들로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하며 대견한 눈길로 말희의 엉덩이를 두드리곤 했다. 끝숙이, 말숙이, 말녀보다는 예쁜 이름이라고도 했다.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동생 성별은 순전히 운이었고 자신의 이름은 늘 놀림거리가 되었다. 네가 정말 희냐. 그게 정말이냐. 네 피부 정말 희다. 정말 희귀하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정 마리... 짓궂은 남자애들은 물론이고 선생들까지 마리의 이름으로 유치한 말장난을 해댔다. 그럴 때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잠시 우는 것 말고는 마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네 이름은 프랑스 왕비 이름이야. 영어로 Marie 이렇게 써.
넷째 언니 경숙이 건넨 말이 위안이 되었다. 확실히 경숙이보다는 세련된 이름 같았다. 영숙, 진숙, 혜숙, 경숙 다음 말숙이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십 대 내내 개명을 고민하던 마리는 성인이 된 후로 이름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발음이 중요했다. 한자 뜻까지 밝힐 일은 살면서 거의 없었다. 부끄러웠던 자신의 이름을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다.
본명 맞아요. 나이도 같은데 편하게 말해도 될까요? 마리가 물었다.
네. 그래요. 아, 그럴까. 마리씨는 무슨 일 하는지 여쭤봐도 돼? 민수가 말했다.
여쭤봐도 돼가 뭐야. 마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어색해서...주선하신 분은 존대말 하시던데.
그거, 지유언니 컨셉이야. 존대말로 하면 무심코 욕 나올 일이 없다고 서로 존대말 주고 받자고 하더라.
그런 효과가 있구나.
이런 미친 새끼를 보셨나요. 이러면 이상하잖아.
하하, 정말 이상하다.
난 스트리머로 활동 중이야. 마리가 제 소개를 했다.
뭐? 민수가 깜짝 놀란 듯 큰 소리로 되물었다.
스트리퍼 아니고. 유튜버라고 하면 알래나?
아, 미안해. 게임하면서 설명하는 영상 본 적 있어.
비슷해. 게임은 아니고. 유튜브 많이 안 보나 봐?
응, 거의 안 봐.
신기하네.
내가 더 신기해. 게임 말고 어떤 쪽이야?
먹방.
히야. 민수가 다시 한 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는 민수가 너무 잘 놀란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놀라는 것이 아니라면 과한 리액션이었다.
먹방은 알아?
제대로 본 적은 없는데, 텔레비전에도 나오잖아. 잘 먹는 연예인들 아래 자막으로 먹방 중-
맞아. 그런 거야.
의외인데.
뭐가?
많이 못 먹게 생겼는데. 이런 말 실례지만 몸도 마른 편이고 먹는 거랑 거리가 멀어 보여.
꼭 많이 먹어야 먹방인 건 아니야.
그럼 조금 먹나?
많이 먹을 때도 있고.
어떤 걸 먹어?
이것 저것.
상상이 잘 안 돼. 최근에는 뭘 먹었어?
음. 요즘에는 ASMR이라고.
오토너무스 센서리 메리디언 리스폰스. 자율 감각 쾌감 반응.
연대 나온 남자로군.
전에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찾아 봤어. 그런 음식도 있어?
먹는 소리로 만족을 주는 영상이 인기야. 요즘에는 특이한 소리가 나는 걸 먹어. 소리를 리얼하게 잡으려고 마이킹에 좀 더 신경 쓰고.
예를 들면.
층층이 쌓여 있는 파이를 클로즈업 했다가 파사사삭 하고 부숴서 먹기도 하고.
파사사삭.
남들 다 먹는 거라 안 하려 했는데 구독자들이 자꾸 요청해서 벌집 꿀도 먹었어.
오 벌집까지. 어떤 소리가 나?
글쎄. 찔꺽 파사삭 쯔업쯔업 이러나.
맛있겠다.
목 막히게 달아. 입이랑 손도 죄다 끈적끈적해지고.
왜 보는지 왠지 알 것 같다. 듣기만 해도 흥미롭네.
이런 영상은 얼마 안 돼. 주력 종목은 따로 있어.
뭔데?
라면.
라면?
고작 라면이냐는 듯한 반응에 마리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 검색창에 ‘라면’을 치면 수 백만 건의 동영상 목록이 뜬다. 그 첫 페이지에 마리가 라면을 먹는 영상이 있다. 사백 만이 넘는 조회수. 광고 수익을 통한 경제적 이익과 약간의 유명세를 마리에게 가져다 준 영상이었다. 오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고 그 대다수는 당장 라면 사러 간다, 벌써 물 올렸다 처럼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라르가즘 느껴진다-는 댓글은 가장 많은 공감을 얻었다. 그걸 본 마리 역시 빵 터지며 웃었다. 그러다 그 댓글의 댓글에 달린 푸드 포르노를 소비하는 우매한 대중 어쩌고 하는 긴 글을 보자 금세 식는 기분이 들었다. 뻘뻘 땀을 흘리며 후르륵 쩝쩝 소리를 내고, 입술 사이로 면발을 빨아들인 뒤 연신 입과 양볼을 우물거리다, 때때로 흘긋대며 카메라로 치켜 뜬 시선, 마지막으로 그릇을 쳐 들고 국물을 꿀꺽거리고 마시면서 목 울대가 꿀렁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엄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스윽 문지른 뒤 혀로 입술을 핥는 동작까지, 훌륭한 연기력의 에로배우 주연, 철저하게 연출된 한 편의 포르노를 보는 것 같다, 고 영상 속 마리의 모습을 묘사 및 품평한 댓글이었다. 역겨운 새끼 혼자 라면 끓여 먹으면서 자위할 놈이네, 거울 보세요 진짜 변태는 그 안에 있습니다, 님이야 말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등의 비난 댓글이 달렸고 비공감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도 마리는 생각날 때마다 이 댓글을 다시 읽고 영상을 보는 일을 (누군가의 신고로 댓글이 사라지기 전까지) 멈출 수 없었다. 그저 잘 먹는다, 맛있겠다, 하는 말로 표현되던 장면이 그 묘사 이후 정말 섹시하게 보였다. 뻘뻘 후르륵 쩝쩝 우물 흘긋 꿀꺽 꿀렁 스윽 같은 진부한 의성어 의태어들을 자막 처리해 화면 곳곳에 붙이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먹는 모습만으로도 에로틱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면 내 먹방도 어떤 경지를 넘어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과연 이 영상 이후 구독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식품 회사로부터 홍보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터넷 용어 사전에 라르가즘이라는 단어가 실리고 주석에 채널 마리의 라면 먹방 영상이 링크되기도 했다.
영상 찾아봐도 되나? 실례인가? 민수가 휴대전화를 꺼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세 번째 실례라는 단어를 들은 마리의 입에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얘는 왜 이렇게 실례라는 말을 많이 쓸까. 이것도 혹시 컨셉일까.
실례는 아닌데, 실물 놔두고 뭐 하러.
어?
영상은 나중에 찾아 보시고, 점심은 라면 먹자.
괜찮겠어? 민수가 당황한 듯 물었다.
괜찮냐니? 나 라면 좋아해.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마리가 답했다.
그게 아니라. 소개팅날 분식점에서 돈가스 먹었다고 욕 먹는 인터넷 글을 본 기억이 나서.
나도 봤는데 욕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소개팅날 먹는 음식이 따로 있나.
마리씨가 좋으면 나도 상관 없어. 라면 먹자.
그래. 너무 내 얘기만 했다. 민수씨 얘기도 좀 해 봐.
머그를 들어 올리며 마리가 말했다. 아메리카노가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 봐 줘. 민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연대 나왔으면 공부 되게 잘했겠다.
수능 시험까지는 잘 봤던 게 맞고, 대학 가서는 형편 없었어. 학사 경고도 한 번 받았으니까.
나도 그거 받아봤어. 전공은 뭐였어?
사학과.
우아, 역사 공부하는 덴가? 대단하다.
대단하기는. 난 내가 학문 쪽에 재능이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역사 소설 좋아하는 거랑 역사학 공부는 별 상관 없더라고. 학과 공부가 너무 지루했어.
공부는 지루하지...사학과 졸업하면 주로 뭘 해? 마리는 에둘러 물었다. 사학과 나와서 놀고 있는 사촌 신세를 한탄하는 고모의 말을 언뜻 들은 기억이 나서 조심스러워졌다.
동기들 대부분 대학원 진학해서 연구를 계속했어. 근데 대학원 졸업하고 학위 생겨도 별로 갈 데가 없어. 그렇다고 학부만 졸업하면 갈 데가 더 없어.
그래서, 갈 데는 찾았어? 지금은 무슨 일해?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해 답답해진 마리가 대놓고 물었다.
학부 졸업하고 일 년 정도 취업 준비하다 잘 안 됐어. 대학원 진학해서 이제 석사 이 년차야.
대학원생이구나. 전공은? 한국사? 세계사?
그게, 국문과로 갔어. 시 전공.
마리는 귀를 의심했다. 시? 요즘 세상에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시 전공이면 시인이 되는건가? 마리가 다시 물었다.
국문과 대학원에서는 시를 연구하지 시 쓰는 법을 가르치지는 않아. 창작은 문예창작학과가 따로 있긴 한데. 어쨌든 시를 쓰고 싶은 건 맞아. 민수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시인이라니 뭔가 멋지다.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잖아. 기억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반같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맞아 그거. 돌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연과 행 구분 없이 기계적으로 읊는 시 구절들이 마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중학교 때 수행평가 때문에 외운 시였다. 국어 선생은 새대가리라도 여덟 줄짜리 시는 외울 수 있다고 했다. 반 전체가 이 시를 외울 때까지 수차례 암송 시험을 보았다. 교탁 앞에 한 명씩 서서 시를 읊다 머뭇대거나 틀리면 선생에게 야구 배트로 엉덩이를 맞았다. 맞은 아이들은 다음 시간에 또다시 교탁 앞에 서야 했다. 마리는 세 번째 도전에서 성공한 뒤에야 겨우 매타작을 피할 수 있었다. 암송 시험은 그 뒤로도 세 번 더 이어졌다. 얌마 새대가리들아, 다섯 번 빠따친 건 신기록이다. 여섯 번 쳐야 되냐, 진도 좀 나가자. 선생의 협박이 통했는지 남은 두 아이가 완벽하게 시를 낭송했다. 반 아이들이 우뢰 같은 박수를 쳤다. 이후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마주할 때마다 마리의 머리 속에는 야구 배트에 엉덩이를 맞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햇살 비추는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 때 빠따. 봄 하늘을 바라보며 빠따. 햇반을 따끈히 데워 놓아도 빠따.
그걸 다 외우네. 대단하다. 이번에도 민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빠따지 뭐. 마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공교육의 폐단이라고. 이거 말고 아는 시 없어.
김영랑 시 좋지.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이라니. 생각에 잠긴 민수의 얼굴 위로 미소가 물결처럼 번졌다. 그걸 본 마리는 뜻없이 외우던 구절에서 처음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다.
그 어려운 시들을 맨날 읽고 연구하는 거잖아. 그게 더 대단해.
시를 연구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 정말 어려운 건 쓰는 것 같아.
넌 잘 쓸 것 같아.
고마운 말인데 그렇지 않아. 못 써.
왠지 시인 같이 생겨겼는데.
푸하, 시인 같이 생긴 건 뭐야?
그냥, 늘 고민할 것 같은 얼굴이야. 동영상도 안 보고 글자만 보고.
...유튜브만 안 보는 거야. 그래도 네 영상은 볼게.
고마워. 좋아요랑 구독하기도 눌러 줘. 말하고 나니 마리는 왠지 부끄러웠다.
당연하지. 민수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좋아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덕에 마리의 부끄러움이 조금 가셨다.
너도 네가 쓴 시 보여줄 수 있어? 마리가 물었다.
언젠가는. 아직은 쓴 게 없어. 민수가 약간 시무룩하게 답했다.
잘 쓴 거 아니라도, 그냥 궁금해서 그래.
진짜로 쓴 게 없어. 매일 쓰려고 시도는 해. 연필을 뾰족하게 깎고, 노트를 펼치고. 머리 속 단어들을 종이 위에 옮기려고 해. 그런데 이게 맞나, 이 단어로 시작하는 게 맞나, 자꾸 돌아보게 돼. 결국 한 글자도 못 쓴 채로 노트를 덮어. 그게 몇 년 째야. 보여줄까.
민수가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표지에 아무 무늬도 없는 회색 노트였다. 오래 들고 다닌 듯 표지가 약간 구겨지고 낡아 보였다. 마리가 노트를 받아 표지를 넘겼다. 첫 줄에 연필에 눌린 점 하나만 허공에 뜬 것처럼 찍혀 있었다. 맨 끝장까지 페이지를 넘겨 보았지만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약간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마리는 노트를 돌려주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다시 카페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리와 민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전화를 챙겨 넣던 민수의 주머니에서 얇은 종이 조각이 팔랑거리며 떨어져 마리의 뾰족한 구두 코를 덮었다. 마리는 살짝 허리를 굽혀 종이를 집어들었다. 수험표라고 적힌 종이에 흑백으로 인쇄된 사진은 틀림없이 민수의 얼굴이었다. 그 옆에 적힌 이름은 이주찬이었다. 마리가 민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마워, 라고 말하며 손을 내민 민수의 표정이 애처로웠다. 마리가 건넨 수험표를 서둘러 주머니에 구겨 넣는 민수는 당황스러워 보였다.
걸으면서 얘기해 줄게. 민수가 억지로 지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아직 바람이 찼다. 비슷비슷한 디자인에 색상만 다른 트렌치 코트를 걸친 젊은 여자 한무리가 웃으면서 지나갔다. 건물 옆 그늘진 곳에 남녀 몇이 서서 담배 연기를 뿜었다. 길 한 켠을 차지한 노점에서 휴대전화 케이스와 셀카봉을 팔았다. 쉴 새 없이 중국어로 말하며 셀카봉 하나를 집어 들어 폈다 접었다 하는 사람들이 노점 앞에 서 있었다. 민수와 마리는 사람들의 무리로 좁아진 길을 빠져 나가듯 지나며 대로변을 걸었다. 검색을 해 볼 수도 있었지만 걷다보면 라면을 파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교적 한산한 길목을 지날 때 민수가 입을 열었다.
처음 사학과 간다 할 때도 집에서 반대가 심했어. 그래도 학비랑 기숙사비는 대 주셨거든. 부족한 생활비는 과외로 충당하고. 그런데 또 국문과 대학원에 왔으니 집에선 더는 못한다고 지원을 끊으셨어.
갑자기 센 바람이 불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걷던 마리와 민수는 똑같이 인상을 찡그리며 겉옷 앞섶을 여몄다. 바람이 파고들지 않게 두 팔로 몸통을 감싸듯 움츠린 채 둘은 계속 걸었다. 라면을 파는 곳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예전에 이 거리 어딘가에서 분식점을 본 것도 같은데, 김밥이나 라면 따위를 팔아서 세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긴 했다. 둘은 대로변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뒷골목이 식당가인 듯 싶었다.
여전히 과외로 생활비를 벌어. 그거 만큼 돈을 벌만한 일이 잘 없으니까. 그런데 내 전공이 애매하잖아. 학부가 국문과가 아니니 언어영역이나 논술 과외는 구하기 어렵고. 문과인데 외국어 전공도 아니니 수학도 영어도 가르칠 수 없고. 가르치긴 해도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까지고 고등학생 학부모들은 꺼리더라. 한국사 과외 같은 건 구하는 사람도 없어. 대부분 인터넷 강의 듣지.
처음 보는 사이에 자신의 경제적 곤궁함을 드러내는 것이 마리에게는 어색했다. 더구나 소개팅 상대였다. 부모가 가진 건물 몇 채나 마라롱샤를 사 줄 재력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대놓고 벌이가 어려운 처지를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불편했다. 마리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서 있거나 몸을 움직여 일해도 생활비와 집세를 대기에 빠듯했던 날들. 물욕을 못 참고 필수품 외의 지출을 한 뒤에는 며칠 간 부실한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거나 종일 굶고 집에 와서 밥을 몰아 먹었다. 처음 업로드한 영상은 편의점 신제품 도시락 메뉴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혼자 꾸역꾸역 식은 도시락을 퍼먹는 일은 괴로웠다. 그런데 가상의 상대와 대화하듯 반찬의 맛과 양을 품평하며 먹으니 재미도 있고 왠지 먹을만 해졌다. 이것 밖에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라 소개를 위해 일부러 찾아 먹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영상은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연예인 이름이 붙은 이런저런 도시락을 먹어달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도시락 살 돈이 없는 날에는 밥을 지어 고봉으로 퍼 놓고 김에 싸 먹거나 케찹을 뿌려 비비거나 참치 캔을 까서 먹었다. 허기진 마리에게는 다 맛있었다. 그 많은 밥을 한 번에 먹으면서도 살이 찌지 않은 마리가 신기하다는 채팅창 글이 보였다.
신기하기는. 이게 오늘 첫 끼야. 니들도 맨날 이렇게 먹으면 말라 죽어.
마리의 멘트에 수없이 많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 대화창을 덮었다. 조회수와 구독자 수가 어느 정도 늘자 영상에 광고를 붙일 수 있었다. 먹는 영상을 올려달라며 이곳 저곳에서 식료품을 보내왔다. 이제 마리에게 먹을 걱정은 없어졌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돈을 주며 홍보를 요청하는 회사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맛있게 먹기만 하면 돈이 생겼다. 하루 한 번 뭔가를 먹는 영상을 찍어 편집해서 올렸다. 남은 시간에는 다음 영상에 먹을 음식을 고민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촬영 때 입을 옷과 화장법을 궁리하면 되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어도 되나 잠시 고민했고 그런 고민은 금세 사라졌다. 사람들은 마리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마리가 먹고 있으면 자신들도 뭔가가 먹고 싶어진다고 했다. 뭔가를 먹고 싶게 만드는 것을 회사들은 좋아한다. 사람은 뭔가를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니 마리는 계속 먹고 사람들은 계속 그것을 보고 또 뭔가를 먹고 뭔가가 잘 팔리고 회사와 마리는 돈을 벌고 사람들은 계속 살아간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민수야, 그러니까 너도 스트리머가 되지 그래. 역사를 가르치거나 시를 낭송하거나. 그런데 사람들은 역사도 시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게 없어도 살아갈 수 있으니 돈을 벌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마리는 생각했다.
번화가의 뒷골목은 세계를 축소해 놓은 듯했다. 일본 경양식, 시카고 피자, 멕시코 타코, 브라질 스테이크, 베트남 반미, 인도 정통 카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그런데도 한국 라면을 파는 음식점은 보이지 않았다. 민수가 가리키는 곳에 일본 라멘집이 있었다. 마리는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피크 타임은 지났을 시간인데도 라멘집 앞에는 입장을 대기 중인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마리와 민수도 그 줄 끝에 섰다. 그들의 뒤로 또다른 커플이 섰다.
요즘 공무원 시험을 보려면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을 먼저 통과해야 한대. 중고등학생들도 입시 때문인지 준비하는 애들이 많고. 민수가 말했다.
시험을 보려고 시험을 보는 거네. 마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거렸다.
그치. 공부할 과목도 많은데 시간은 부족하지. 그런데 다른 시험에 비해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은 응시자 확인이 허술해.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말고도 허용된 신분증이 다양하고. 허점이 있지.
허점을 말하는 민수의 입에서 범죄의 냄새가 언뜻 풍겼다. 줄 맨 앞에 서 있던 그들에게 미닫이 문이 드디어 열렸다. 가게 안은 일본 간장 특유의 짭짤한 냄새와 훈훈한 국물에서 피어오른 수증기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둘은 이인용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바 자리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마리는 생각했다. 자신이 먹는 모습을 민수가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민수는 미소라멘을, 마리는 카라이돈코츠라멘을 시켰다. 메뉴 이름 옆에 작은 고추가 세 개 그려져 있어 그나마 한국 라면에 비슷할 것 같았다.
연간 네 번, 수능처럼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도 적당한 빈도야. 민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가게 안은 일본음식점 답지 않게 영어로 된 노래가 흘러나왔고 그 소리를 이기기 위해 크기를 높인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운 편이었다. 누가 들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이긴 했다. 마리는 말없이 민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점수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합격선만 넘겨서 급수를 받는 절대평가야. 누가 붙는다고 누가 떨어지고 이런게 아니고. 마리의 침묵에 민수가 덧붙였다. 누가 붙든 떨어지든 마리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세상에 돈 버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돈은, 합격 확인되면 받는 건가? 마리가 물었다.
응. 합격자 발표날 계좌로 돈이 들어와.
많이 받나?
두 시간 남짓인 걸 생각하면. 높은 시급이지.
민수가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왔다. 부연 회갈색 국물 위에 숙주와 파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먼저 먹어. 전공을 잘 살렸네. 마리는 최대한 좋은 말을 골랐다. 창조 경제, 란 말이 먼저 떠올랐지만 입에 담았다가는 비꼬는 것으로 들릴 법했다. 민수가 라멘을 좀 덜어주려 했지만 마리가 사양했다. 젓가락으로 면을 뒤적이며 민수가 계속 말했다.
전공이니까 그냥 보면 될 거 같지? 안 그래. 시험 한 달 전부터 공부해야 돼. 그러고도 조마조마해. 한 문제라도 놓치면 세 달 공치는 거니까. 아니 아예 일 자체가 끊길 수도 있지. 불합격하면 의뢰자도 피해가 커서 위약금을 물어줘야 할 수도 있다고 했어. 아직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지만.
마리의 라멘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둥둥 뜬 동그란 기름 방울이 유독 붉게 번뜩였다. 숙주를 얹은 모양새는 민수의 라면과 비슷했지만 파 사이로 푸른 고추가 드문드문 보였다. 매운내가 코끝으로 올라왔다. 마리는 젓가락으로 딱딱 집게 흉내를 내고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영상에서 음식을 먹기 전 늘 취하는 동작과 멘트였다. 마리는 익숙하게 면발을 집어 올렸다. 푸짐해 보이지만 무리 없이 입에 들어갈 만큼이었다. 입 속으로 적당히 밀어 넣고 면발의 나머지 부분을 입술의 움직임과 흡입력으로 빨아들였다. 우물우물 입 안에 들어온 음식을 씹어 삼키고 수저로 국물을 떠서 후루룩 마셨다. 먹는 것을 잊은 듯 민수는 마리의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 보았다.
라면 식는다. 얼른 먹어. 한 젓가락을 더 씹어 삼킨 마리가 민수에게 말했다.
진짜 맛있게 먹네. 네 라면이 더 맛있나 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민수가 젓가락을 뜨며 말했다.
나는 그냥 먹는데 다들 잘 먹는다고 하더라.
정말이야. 특기를 잘 살린 것 같아. 민수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마리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오늘도 시험이 있던 거야? 마리가 물었다.
응. 오전에 다녀왔어.
잘 봤어?
쉽게 나왔어. 무난히 1급 나올 것 같아. 말하는 민수의 얼굴이 환해 보였다. 월급날 직장인의 얼굴빛이 저 정도일까. 통장에 광고 수익이 입금되었을 때 마리가 지은 표정도 저만큼 밝았을 것이다.
열심히 사는구나. 마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열심히 사는 건가.
그럼. 역사 공부도 해야 하고, 전공 공부도 해야 하고, 시도 써야 하고.
꼭 뭘 해야 하는 건 아닌데, 내가 그렇게 만든 거지.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좋잖아.
마리는 하고 싶은 거 없어?
대답을 하기 위해 마리는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먹고 살 걱정하지 않는 것. 이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지유언니가 들고 나온 보스턴 백, 디자인 같고 색만 다른 걸로. 이건 갖고 싶은 것이다. 그 가방을 사고 싶다, 라고 하면 하고 싶은게 되는 걸까. 유명해지고 싶다. 이건 하고 싶은 걸까 되고 싶은 걸까. 왜 유명해지고 싶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지. 높은 조회수, 알아보는 사람들, 쇄도하는 광고 협찬, 높은 수익, 그러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마리는 그냥 잘 살고 싶었다.
그냥...열심히 살고 싶어. 잘 살고 싶다는 말에서 한마디만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리의 처음 생각과는 사뭇 다른 말이 되었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랴 싶었다.
열심히,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잖아.
내가?
응. 영상 올리는 거 부지런하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아.
그냥 먹는건데. 누구나 매일 먹는 걸.
누구나 매일 먹지만, 그걸 남들에게 보여주는 건 또 다른 일 같아. 뭘 먹어야 좋아할지 궁리하고, 화면에 잘 비춰지게 세팅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해야 되고, 반응도 살펴야 되고. 남들에겐 당연하고 개인적인 일을 사회적인 일로 만드는 거잖아. 쉬운게 아니지.
민수의 말은 그럴 듯하게 들렸다. 먹는 모습으로 남들의 호감을 얻기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좋은 반응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돼지, 하마, 창녀, 돈벌레, 성괴, 온갖 비유의 대상이 되었다. 바나나, 오이, 아이스바, 생크림, 요거트, 목적이 분명한 먹거리들을 요청하는 도배글을 신고한 적도 있었다. 남성 스트리머의 먹방 채널에서는 볼 수 없는 댓글이었다. 그럼에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했다. 다른 일보다는 쉽게 버니까, 그만두고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민수의 말처럼 자신이 노력하는 부분들이 분명 있었다.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주고, 나도 이 일을 좋아하고, 더 잘 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있다.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열심히 산다. 마리에게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좋게 봐주니 고맙네. 라멘은 내가 산다. 마리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기는, 내가 사야지. 시험 잘 봤다니까. 민수가 대꾸했다.
다음에, 합격자 발표나면 네가 쏘는 걸로 하자. 은근한 목소리로 마리가 말했다.
그래. 그 땐 좀 더 근사한데로 모실게. 민수가 못 이긴 척 말했다. 그러고는 마리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둘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라멘집이 있는 골목을 빠져 나오자 대로 옆의 대형서점이 보였다. 민수는 밥도 얻어 먹었으니 책을 한 권 사주겠다고 했다. 마리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민수를 따라 서점으로 들어섰다. 잡지 코너에서 부록으로 주는 화장품을 구경하는 마리 옆으로 민수가 다가왔다. 벌써 계산을 마쳤는지 테이프로 봉한 종이 봉투를 건네 주었다.
이번엔 남의 책이지만 언젠가는 내 책을 선물할게. 민수가 말했다.
그래. 꼭 사인해 줘야 돼. 책 선물 처음 받아 봐.
정말이야?
정말이야.
돌아가는 지하철에 앉아 마리는 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있다가 연락할게요. 지유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직 촬영중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정말 친한 사이인 걸까. 마리는 생각했다. 잘 가고 있냐는 민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소 지으며 마리는 오늘 재미있었고 시집 고맙다는 답장을 보냈다. 민수는 라멘 맛있었고 다음에는 자기가 꼭 사겠다고 답을 해 왔다. 전화기를 가방에 넣으며 마리는 민수에게 받은 종이 봉투를 꺼냈다. 테이프를 떼어 내자 얇은 시집 한 권이 보였다. 책의 중간을 펼쳐 보았다. 계시라도 받은 듯 한참 책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눈으로 읽던 마리는 흡족한 표정으로 책표지의 접힌 부분을 펼쳐 읽던 페이지 사이에 끼워 두었다.
집에 돌아온 마리는 바깥옷만 벗어 걸어 놓고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이 약간 망가지긴 했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여전히 마음에 들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공들여 꾸민 걸 지우자니 아까웠다. 마리는 화장을 지우는 대신 고치기 시작했다. 눈 밑 번진 자국은 면봉으로 훑어내고 퍼프로 조심스레 얼굴을 두드렸다. 마스카라와 립스틱을 덧바르니 다시 생기가 돌았다. 고데기를 꺼내 머리 끝 몇 군데를 살짝 집어주니 금세 컬이 살아났다. 마리는 활짝 웃은 뒤 셀카를 찍었다.
책상 앞에 앉은 마리가 시집을 펼쳤다. 오면서 읽은 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시집을 책상 위에 엎어둔 마리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카메라와 촬영용 조명의 각도를 바로 잡았다. 녹화 시작 버튼을 누른 마리는 시집을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마리입니다. 오늘은 마음의 양식, 책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가끔 색다른 게 먹고 싶은 날이 있잖아요. 오늘 저녁은 밥 대신 밥에 대한 시 한 편 읽어드리겠습니다.
밥 생각
김기택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듯하게 데워줄 밥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릿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영상을 업로드하고 잠시 후 새로고침을 눌렀다. 첫 댓글이 달렸다.
그냥 먹기나 하지. 뭔 시 낭송이야.
이 날 채널 마리의 구독자 수는 소폭 감소하였다.
